# 37-희망을 위한 찬가 - 두려운 것은 무의미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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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아버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엄숙함이 그를 맞이했다. 아들이 들어온 것을 알고, 수행은 읽던 책을 덮었다. 표지에는 ‘화려한 약속, 우울한 성과’라는 제목이 찍혀 있다. 책을 알아본 은결의 표정이 마뜩치 않았다. 수행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니?”
“아니, 저런 책도 읽으시는구나 하고.”
수행이 읽고 있는 책은 저명한 경제학자 밀턴 프리더만이 적은 것이다. 덕분에 은결은 읽어본 적이 없음에도 그 내용이 어떤 것일지는 분명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 은결은 논리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생리적인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은결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신자유주의 비판을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는데, 시카고학파에 관해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이 책을 손에 쥐게 됐구나.”
은결이 지은 표정의 이유를 안 수행이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듯 그 책을 들어 설명했다. 이번에는 은결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아버지가 지금 맡게 된 글이라면 한길 제약의 사내 신문 사설인걸로 알고있는데, 그런 기획이 잘도 통과됐네요?”
신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흔히, 그리고 중요하게 사용되는 의미는 모든 종류의 정부 개입에 반대하는 경제 흐름이다. 그것이 정말로 정부 개입을 악으로 여기는지는 실제적으로 볼 때 논란이 많지만, 일단 그렇게 이해되고 있다.
“자본이라고 다 같은 자본은 아니란다. 가령 국내 재벌들 같은 경우, 실은 신자유주의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이들도 여럿 있지. 신자유주의는 틀림없이 자본을 위한 세계 재편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금융자본을 위한 세계재편이니까. 가령 이런 조류 가운데 미국과의 FTA로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면 국내 제약 업계는 큰 위기를 맡게 될 테고, 한길 역시 적지 않은 위협을 당할게다. 그러니 신자유주의 비판을 싫어할 이유가 없지.”
이유는 간단하다. 국내 제약 회사의 의약품은 대부분 미국의 의약품 기준에 미달인데 반해 미국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관세가 철폐되더라도 국내 제약 업계의 수출이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미국측 제약 회사들은 가격 경쟁에서 굉장한 이득을 보게 된다. 게임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서 국내 재벌은 노동자 계층과 충분한 타협의 여지가 있지. 물론 한길 제약 자체는 미국의 의약품 기준을 클리어하는 소수의 회사중 하나고, 그런 위기상황이 닥치더라도 도리어 기회로 삼아보겠다는 모양이다만, 그를 위해서라도 이런 종류의 글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높이도록 하는 것이 득이겠지.”
“흐음- 그렇군요.”
설명을 듣고 이해한 은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진경은 상당한 수완가인 모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당한 그 재수 없는 수법에서 벌써 느끼긴 했지만. 그때 수행은 쓴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뒷말을 더했다.
“-그리고, 은결아. 너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피하도록 했으면 하는구나. 일전 얘기했듯, 그 강한 벽은, 사실 너무 약하단다.”
깊은 곳에서 희미한 감정이 이글거리고 있는 목소리였다. 단지 밀턴 프리드만의 글을 읽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은결이 불편한 표정을 했다는 것이, 수행에게는 염려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은결은 ‘그렇지만-’하고 말하고 싶다는, 약한 반발심을 느꼈지만 그를 억누르고 묵묵하게 답했다.
“...예.”
수행이 쓴웃음을 지우고 평소처럼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아, 그게-”
그리고 은결은 겨우 용건을 꺼냈다. 오늘 점심 무렵에 상대한 기이한 적에 대한 것이다. 은결은 그들에 대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한, 모든 것을 상세히 수행에게 보고했다. 이야기를 끝내고 은결은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혹시, 인공 생명 같은 것일까요?”
수행은 가볍게 미소 짓고 반문했다.
“호문크루스 말이냐?”
그에 은결은 머쓱하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 말을 잘못했네요. ‘인공’이 아니라 ‘유사’ 생명요.”
연금술을 비롯한 이런 종류의 체계 가운데서 사용될 때, ‘인공’과 ‘유사’ 라는 단어 사이에 벌어진 의미의 차이는 과장을 보태지 않고 아득하다. 특히 그 말이 생명이란 단어와 연결될 때는 엄격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다. ‘유사’ 생명은 산 것 처럼 보이나 사실은 생명의 본질을 결여한 존재를 말한다. ‘인공’은 만들어졌지만 분명한 생명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말한다. 즉, 호문크루스다.
은결도 연금술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상 호문크루스의 창조가 현자의 돌의 제작에 버금간다고 일컬어지는 일이라는 정도는 잘 안다. 현자의 돌에 가장 가까웠던 인간 중 한 명인 수행은 단호하게 부정하지만, 혹자는 현자의 돌과 호문크루스는 한 가지 성취의 두 가지 모습으로, 그 본질은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연금의 비원, 궁극의 지향점이다. 만일 그런 기술로 만들어졌다면 그토록 약할 리가 없다. 지난번에 상대했던 카미를 까마득히 초월할 것이 분명하다.
“글쎄다, 나도 실물을 본 적은 없어 정확히 말은 못하겠다만, 유사 생명일 가능성은 적잖아 보이는구나. 존재 구성이 무기물이었다니 좀비나 강시는 아닐테고, 고렘이나 식신 정도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사실 고렘이나 식신이라 해도 여러 가지 종류의 것들이 있어 쉽사리 고렘이니 식신이니 말할 수는 없다만. 하여간 네 말처럼 사념체든 몬스터든 그 정도로 자의가 없다는 것은 설명하기 힘들지.”
“역시 그런가요.”
“그런데 은결아, 최악의 경우이기는 하다만, 그것들이 고렘이나 식신일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수행의 말이 어둡다. 은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렘과 식신은 사람이 부리는 존재다. 그것들이 세상에 나와 피해를 입히는 것은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판단할 수 있다. 첫째, 관리 소흘. 둘째, 자신의 힘에 취한 사역자. 첫 번째일 경우 일은 간단하다. 복잡하게 처리되는 경우도 자신의 창조물을 소흘히 관리한 술자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되는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두 번 째일 경우는 굉장한 비상사태다. 술자가 자신의 힘을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상상 가능한 최악의 범죄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잭 더 리퍼? 빌리 더 키드? 페드로 로페스 몬살베? 그들 따위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역사를 움직여 인간을 참살한 권력자들을 제외하고, 그들을 능가하는 살육이 가능한 존재는 없다. 은결만 해도 맨손으로 제 4세대 탱크를 힘들이지 않고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 다행이라면 그런 경우는 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희귀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정신력은 굳강하다. 욕망에 패배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겼으면 하는구나.”
수행의 말은 음절과 음절이 떨어져 있었다. 그 떨어짐 사이를 매개해 올바른 언어로 이어주는 것은, 그 떨어짐 자체가 표상하는 수행의 깊은 우려의 감정이었다. 그는 두 번째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경우 위험하기도 위험하지만, 은결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야 할 수도 있다. 은결은 나이답지 않은 정신력의 소유자이지만 아직 고등학생에게 사람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가능성만으로도 참혹한 일이다.
은결은 미소와 더불어 답했다.
“아직 누군가 외도로 빠졌다고 결정된 것도 아니잖습니까. 정말 고렘이나 식신인지도 밝혀진게 아니고. 또 그런 녀석들이 나온다고 결정된 것도 아닙니다. 우려를 보이시는건 너무 빠릅니다. 그리고, 설혹 그렇다고 해도, 그때에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제가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제 정체성은 ‘고등학생’ 은결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도 잘 알고 계신 사실일 것입니다.”
‘고등학생’ 따위의 명함이 붙은 것 때문에 뒤로 물러날 여유가 자신에게는 없다, 고 은결은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은결이 자신을 ‘학생’이란 범주 가운데서 판단하지 않은지는 오래 되었다. 학생으로서의 모든 것에 대해 그는 집착하지 않는다.
“그야 알고 있다만-”
“그럼 맡겨 주세요.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만, 무모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 능력에 부친다면 언제든지 물러설 겁니다.”
은결은 웃으며 말했다. 선명한 미소였다. 수행은 약한 답답함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그 편치 않은 감정 가운데서 그는 은결의 미소가 조각 같다고 느꼈다.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무기물의 미소 같이 건조한 미소였던 탓이다.
어둠 가운데 은결이 몸을 띄웠다. 그의 발끝과 손으로는 휘황한 빛이 모여 있었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파괴의 현현이다. 모여든 힘의 선명한 발광 아래에, 무너진 자세의 이질적인 존재들이 있다. 수효는 넷.
은결은 대지로 내려서며, 발뒤꿈치로 그 중 하나의 정수리를 내리 찍었다. 그것들은 피할 수 없었다. 빛이 번뜩였다. 퍼억, 소리가 났다.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것의 머리가 거북이처럼 목을 파고들었다. 어깨와 정수리가 같은 위치에 놓였다. 발목을 박살난 콘크리트 가운데 담고, 그것은 시든 갈대처럼 쓰러졌다.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사람같이 움직이는 것들이, 그 사람의 형상을 한 채 참혹하게 파괴당했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은결은 그 기괴함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런 기괴함 보다 그가 마음을 쓰는 것은, 원래 자신의 힘이라면 방금 일격으로 그것을 깨끗하게 두 동강을 낼 수 있었을 텐데 힘이 제약된 덕분에 그러지 못하고 바닥을 어느 정도 파괴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다. 초초함과 융합된 답답함이 가슴을 쓸며 뜨거운 열기로 다른 사고의 여지를 태워나갔다.
은결은 다시 발을 박찼다. 고착된 대기는 비명 없이 은결에게 압도적인 속도를 허용했다. 그는 금세 적의 앞까지 이동했다. 그것은 반사적으로 손을 놀려 은결을 공격하려 했다. 은결은 몸을 숙여 그 공격을 피하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팔꿈치가 그것의 가슴께부터 얼굴을 긁었다. 으적, 소리가 났다. 지점토 위를 긁은 듯 팔꿈치의 궤적이 선명하게 이루어졌다. 은결은 다른 쪽 손바닥으로 그것의 가슴을 쳤다.
-펑-!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것은 날았다. 희미한 기척. 은결은 몸을 돌렸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두 녀석이 은결을 향해 공격하고 있었다. 특별한 기의 운용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은결은 자신을 향하는 공격을 무시하고 돌진했다. 붉은 마법진이 펼쳐지며 은결을 향하는 공격을 막았다. 지금 방어를 위한 마법진의 반응은 반자동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자신에게 위험할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면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그렇다면 기는 운용하지 못해도 힘은 굉장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은결은 달리는 기세를 그대로 살려 오른 발을 날렸다.
-으적.
무언가 심하게 뒤틀어지는 소리가 나며 은결이 걷어찬 존재가 뒤로 날았다. 다음 순간 은결은 몸을 돌리며 수도를 펼쳤다. 손등에 순결한 힘이 모여 하얗게 잉잉 거렸다. 슥- 소리가 났다. 왼쪽 상완부에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절단되며 그것의 상반신이 흘러내리듯이 하반신에서 떨어졌다.
주변은 다시 고요했다. 은결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걸어 자신이 쓰러뜨린 것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법진을 펼치고 기를 운용해 하나하나 정리했다.
‘어제 상대했던 녀석들과 같은 종류다. 이 녀석들 뒤에 정말로 뒤에 누군가 있는 걸까?’
파란 불길에 휩싸여 매캐한 탄내를 풍기는 그것들의 모습을 보며 은결은 조용히 생각했다. 그렇지만, 정말 뒤에 누군가 있다고 해도 이런 일을 하는 목적은 전혀 읽혀지지 않았다. 정히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성질 나쁜 술자가 자신이 만든 사역물의 성능을 시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또 성능이 특별히 뛰어난 것 같지도 않았다. 1/3으로 힘이 제약된 지금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명확한 물리적 실체라서 사념체보다 상대하기 더 쉬웠다.
‘흠, 한 녀석 쓰러뜨릴 때 마다 내가 운용하던 기의 일부가 흡수되긴 했는데, 혹시 그게 특별한 거라던가...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다시 기를 운용하면 금방 회복되고, 특별한 후유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은결에게 기의 운용은 호흡 같은 일이다. 카미의 힘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서, 원한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자신의 기혈이 어떤 상태고 기의 흐름이 어떤 상태인지는 선명하게 알 고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후.”
뒷정리를 끝낸 은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밤이 깊었다. 도시의 빛은 밤하늘을 삼키고, 별빛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달빛만이 밤을 겨우 밤답게 만든다. 한동안 그 모습을 눈에 담던 은결은 발을 박차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세상의 마지막 환상같은 모습이다.
*훗- 빠른 연재를 선보이는데, 응원을 합시다.
*시카고학파에는 밀턴 프리드만 외에도 하이예크 같은 거물도 있습니다. 하이예크의 노예의 길 정도는 우리나라에도 읽어본 사람이 많지 않을까하네요. 번역된 지도 오래고. 제가 알기로 ‘천국을 지상에 실현하려 했던 모든 시도는 정확히 지옥을 구현했다.’ 라는 유명한 좌익운동 비판이 노예의 길에 출처를 둡니다. 언제 ‘노예의 길’ 정도는 시간 내서 읽어보고 싶네요. 까든 옹호하든 일단 뭘 알아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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