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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36화 (36/300)

#   36-희망을 위한 찬가 - 두려운 것은 무의미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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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발로 대지를 강하게 디뎠다. 먼저 발생한 역장이 발끝에 담긴 막대한 힘을 수용했다. 그 힘은 되튕기며 무릎과 허벅지를 따라 허리에 도달됐고, 척추는 날렵하고도 부드럽게 회전하며 은결의 주먹 끝으로 그 힘을 전달했다. 은결의 주먹이 음속을 간단히 돌파하며, 적을 분쇄하기 위해 날았다. 그 압도적인 힘에 주변의 대기가 아우성치지 않는 것은, 은결이 앞서 대기를 안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퍼억!

하늘에 구멍이 뚫리는 소리가 났다. 은결의 주먹을 맞은 인간이 뒤로 날아갔다. 종잇장으로 만든 인형처럼, 하늘을 나는 그의 모습은 무의미하게 가벼웠다. 십 미터, 이십 미터, 삼십 미터. 그리고, 쿠당탕-! 거센 대지로의 추락.

사지가 온전히 붙어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몸이 뒤로 날기 보다는 육체의 한 곳이 관통당하거나 전신이 산산조각 나야 한다. 은결은 건조한 표정으로 자신의 주먹을 맞은 인간이 대지에 널브러진 곳 까지 걸었다. 그는 쓰러진 인간의 팔을 잡고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이 정면을 향하게 했다. 은결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은 그의 가슴은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탁력 좋은 떡 위에 해머를 내리친 것 같은 모양이다. 하지만 석고로 굳힌 듯 딱딱한 그의 표정에서는 고통이 읽히지 않았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흠...’

이제까지 상대해 본 적이 없는 존재였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으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피부의 질감이며 사지의 동작 등을 볼 때 언듯 사람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눈이 죽어 있었고, 어떤 순간에도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움직였다. 신음은커녕 숨결도 흘린 적이 없다. 피도, 내장도, 뼈도 없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 모습만 사람일 뿐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모든 외적 징후들이 이 존재에게는 읽혀지지 않았다. 앞서 은결은 이와 같은 존재를 둘 정리했는데, 그것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념체... 가 이런 수준의 물질화를 구현한다면 지금 내 힘으로 이렇게 간단히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사념체는 아니겠고, 일종의 몬스터일까?’

은결은 미간을 좁히며 상념을 이었다. 만일 몬스터라고 한다면 이런 종류의 존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사념체 이외에 극도로 위험한 미확인 생명체 일반을 몬스터라고 흔히 지칭하지만 그 종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이런 종류의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몬스터라고 보기에도 이 반응은 이상해. 마치 자의(自意)를 가지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개미나 벌조차 생명으로서 그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법인데. 차라리 좀비나, 강시, 혹은 고렘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은결은 좀비도, 강시도, 고렘도 본 적이 없다. 이런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은결네는 별로 외부와 소통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다. 은결이 이제까지 상대한 적대적 존재는 대부분이 사념체였다. 몬스터에 준하는 존재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외국어로 된 책이야 많이 있지만, 이런 면에서는 전혀 세계화의 조류에 발맞추지 못하는 가족이다. 결국 은결은 한숨을 쉬고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뒀다. 생각해봐야 답이 나올 리도 없었다. 이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범주화 할 수 없는 존재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혹시 뭔가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는 뒤처리를 위해 널부러진 이 이상한 존재를 향해 손을 펼쳤다. 그이 손바닥이 빛났다. 손바닥 앞으로 마법진이 일렬로 쭉 늘어서며 발생했다. 그 진을 타고 현란한 에너지의 흐름이 이루어졌다. 그 힘이 곧장 사람 형상으로 쓰러진 존재에게로 유입됐다. 선명한 푸른 불꽃이 일더니, 그것이 타올랐다. 종이를 태우는 것 같은 매캐한 냄새가 났다. 이것을 볼 때, 그 육체의 구성 역시 유기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금세 한 줌의 검은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도로의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돌아갈까...”

은결은 대지를 박찼다. 무게가 없는 것처럼 그의 몸이 허공으로 표홀히 날았다.

은결이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5교시가 끝나 있었다. 하지만 수업 도중에 들어가면 뻘쭘하니 도리어 이 쪽이 다행이었다. 은결이 자리에 앉자 쿠로사카가 그를 맞이했다. 그녀 선명하게 드러나는 선이 보기 좋은 미소로 은결에게 물었다.

"銀ギョール, 何処にいっだんです?"

(은결, 어디 갔었어요?)

은결은 분명히 별반 의미는 없겠지만, 일본 소녀에게 이름으로 불리니 조금 창피하다고 생각하며 준비한 변명을 꺼냈다.

"あ、ちょっと昼寝をしたら遅くなっちまっだんです。"

(아, 잠깐 낮잠을 잤더니 늦어버렸네요.)

은결의 대답에 쿠로사카는 후후, 하고 청초히 웃으며 ‘조심해야죠’하고 말했다. 은결은 머쓱하니 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쿠로사카는 생각했던 것 보다 친절한 소녀인 것 같았다.

하루의 수업이 끝났다.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햇볕의 색은 이미 감미로운 주황이다. 곧 해가 저물 것이다.

"それじゃ、また あしたへ。"

(그럼 내일봐요.)

가방을 매며 쿠로사카가 은결에게 가벼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은결도 마주 인사했다. 교실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은결의 눈동자에 반투명하게 찍혔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가냘프면서도 굳건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가녀리면서도 굴강했다. 황혼이 길게 뽑아내는 그녀의 그림자가 그 분위기를 한층 강조했다. 민성이 은결과 인사하고 부리나케 그녀의 뒤를 쫒았다. 쿠로사카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하긴, 저만한 미소년데, 남자라면 누구나 혹할 것이다.

다만 민성의 특별함은 그 마음을 별 주저 없이 실천에 옮긴다는데 있다. 이 반에만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남학생이야 널렸겠지만 실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접근한 이는 몇 명 안 된다. 그걸 보면 민성은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물론 말도 안 통하면서 하교길에 같이 내려가봐야 무슨 수작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저러한 접근만으로도 민성의 마음은 어느 정도 전달 될 것이다. 실제 생활에 있어 커뮤니케이션은 그 절반정도가 언어 외적인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 마음이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지만.

‘잘 하면 국제커플이 하나 나올지도 모르겠군. 나도 응원해줄까. 민간친선교류라는 차원에서도 아주 좋을 테고말야. 아니, 쿠로사카양 정도면 일본 남자들의 원망으로 도리어 역효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랑이란 범주 앞에 국경이고 민족이고 무슨 쪽을 쓰랴.’

은결은 피식 웃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슬슬 이쪽도 말괄량이 공주님을 모시러 가야 한다. 늦으면 미래는 길길이 날뛰며 은결에게 불평할 거다. 그것도 나름대로 귀엽긴 하지만. 그는 천천히 걸음을 이었다.

황혼에 젖은 골목의 교차로에서, 쿠로사카와 민성은 헤어졌다. 민성은 더 같이 가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지만 지분거린다고 미움 받을까봐 더는 강제하지 못하고 쿠로사카와는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그와 헤어진 쿠로사카는 느린 발걸음으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걸어 들어가는 길목으로 점차 사람이 뜸해졌다. 골목의 분위기도 어두워졌다. 원래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제는 유령촌의 한 구석을 바라보는 것처럼 쓸쓸하고 황량했다. 건물이 비교적 새것이라는 점 만이, 그 황량함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문득, 그녀가 우뚝 섰다. 주황빛 골목에 묵묵하게 선 그녀의 모습은, 죽어버린 문명의 한 조각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신상의 모습 같았다. 바람이 길게 쓸어오며,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쿠로사카는 한쪽 손으로 그 머리칼을 정리하며, 다른 손을 허공에 가운데 길게 그었다. 웅 소리가 나며 공간이 열렸다. 외견상으로 아무런 변한 것이 없지만, 분명히 어떤 것이 바뀌었다. 죽은 시간 가운데 있는 것 같던 골목의 분위기가 일변해 산 사람의 생기로 가득 찼다. 공간을 잠식하던 황폐감이 한 순간에 소멸한 것이다. 그렇게 열려진 공간 가운데는, 아무것도 없었다.

"倒されだようね…"

(당한 모양이네...)

한동안 주변을 훑어보던 쿠로사카가 적막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 높이 올라간 그녀의 양 눈썹 끝머리는 지금 쿠로사카의 심경이 편안한 것이 아님을 설명했다. 오늘 은결이 점심이 지나고서도 돌아오지 않기에 혹시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당했던 모양이다. 언젠가 싸우게 할 생각이었고, 당할 것도 예상하고 있었던, 버리는 패였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それほど強く見えなかっだけど、感覚だけは大したものね。やっぱり人は見かけに拠らずーのようね。"

(그렇게 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감각만은 굉장하군. 역시 사람은 겉보기론 알 수 없다-인 모양이네.)

그녀는 품에서 부적을 몇 장 꺼내더니 던졌다. 그것들은 지능을 가진 것처럼 바닥의 곳곳에 재빠르게 붙었다. 이어 그녀는 대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웅- 소리가 나며 아스팔트 위로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은 바닥에 붙은 부적들을 꼭지점 삼아 이어지며 정묘한 도형을 이뤘다. 오망성이었다. 이어, 그 오망성의 가운데 복잡한 언어가 기술되기 시작했다. 그 역시 빛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 빛들 가운데서 다시 빛이 모이며 일직선의 빛의 기둥을 이루어 나갔다.

"でも、どのみちーあなたに勝ち目はない。"

(하지만, 어쨌든 당신에게 이길 승산은 없어.)

황혼을 몰아내고, 저녁을 몰아내지만, 어떤 사람의 눈빛도 끌어들이지 않는 휘황한 빛이 계속 이어진다.

*이로서 쿠로사카는 민성에게 넘기고... 이제 미래만 해결하면 되겠군요.

*지난화의 은결의 이야기를 두고 무의미한 설명이 아니었던가 우려를 표명하신 분이 계시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설명은 제가 ‘희망을 위한 찬가’라는 제목을 일찌감치 포기했다면 모르되, 이렇게 고수하고 있는 한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던 내용입니다. 사실 저는 그런 내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장 댓글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듯, 반응이 좋은 부분이 아닙니다. 현학 취미로 적기엔 제살 깎아먹는 짓입니다. 쓰는데 필요한 시간도 같은 분량의 평이한 글보다 많이 듭니다. 그저 엄격하게 필요한 이야기라 넣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특정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 한다던가 강조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그 내용이 작품 전체의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는데, 그런 연관관계가 전혀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타격이 큽니다... 대놓고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숨김과 드러냄 사이의 타협점을 못 찾겠군요. 이걸 어쩌면 좋을지... 휴.

*하여간 몇 가지 일이 해결된 덕에 이렇게 빨리 올립니다. 응원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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