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검황-159화 (외전) (159/164)

외전 1화

홍선(紅線).

화산파 연무장.

삼대제자들의 수련을 지켜보던 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여기서 그놈이란, 남량을 말했다.

유라는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화산파에 입문해, 오직 수련에만 몰두했다.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은 적도 없었다.

당연히 이성 관계에 대해서는 전무했다.

한번은 작정하고 마음을 전하려 시도했지만, 결국 망설이다 실패했다.

적 앞에서는 누구보다 당당한 그녀였지만, 사모하는 남자 앞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빌어먹을. 차라리 복마십군과 한 번 더 싸우는 게 낫겠어.’

그러다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 충분할 거야.

괜히 고백했다가 서로 어색해지기 싫어. 차라리 지금이 나을지도 몰라.

유라는 서글픈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수고하셨습니다!”

연무장은 나선 그녀는, 마침 걸어오던 찬야와 마주쳤다.

“온다는 소식은 들었다. 지금 도착한 거냐?”

유라는 반가운 기색으로 물었다.

찬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휘랑 위지혁도 같이 왔어. 오랜만에 다 같이 밥이나 먹자고.”

“좋아. 남 사제는 아마 연화궁에 있을 거다. 내가 데려오지.”

“응? 모르고 있었어? 남 사제는 어제 화산을 나갔다는데? 이화정 사숙……. 아니, 장문인이 알려 주더라.”

“그래? 남북 십성 회의가 열린 건가. 그럼 무림맹으로 갔겠군.”

“아니. 남궁세가로 갔다는데?”

남궁세가라는 말에, 유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궁세가라고? 거길 왜…….”

유라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린 찬야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이 녀석도 가만 보면 참 불쌍하다니까.’

찬야는 유라가 남량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무림이 평화를 되찾은 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진전이 없다는 것도.

‘끄응. 이러다 평생 편련(片戀:짝사랑)으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도와줘야겠다.’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엄청 중요한 일인 것 같더라. 무슨……. 식을 준비하러 간다고 했던 것 같아.”

유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식이라고? 설마, 혼례식은 아니겠지?’

며칠 전, 남궁월이 화산파에 방문했던 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 분명 둘이서 뭔가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그게 혼례식에 관한 거였나?’

돌이켜 보면 남궁월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 왔다.

수없이 많은 고백 기회가 있었는데도 망설이기만 했던 자신과는 다르게.

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남궁 여협은 명문가의 금지옥엽인 데다 외모도 아름답고……. 사내라면 그런 매력적인 여성의 마음을 거절할 리 없지. 이제 정말 보내 줄 때가 온 거로구나.’

그때, 찬야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남 사제가 다른 여자랑 혼인해도? 남 사제 좋아하는 거 아니야?”

“뭐? 네가 그걸 어떻게…….”

깜짝 놀란 유라가 물었다. 찬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네 표정을 보면 멍청한 운휘라도 알아차릴걸?”

“내 표정이 어떤데.”

“울기 일보 직전.”

“…….”

“검 뽑지 마. 그 검 다시 집어넣어.”

처억. 검을 집어넣은 유라가 살벌한 눈빛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잠깐 힘들겠지만 차차 나아질 거야. 이 마음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아니. 넌 분명 평생 가슴에 후회를 달고 살 거야.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때 고백할걸…….’ 하면서. 경험자로서 충고해 주는 거니까 가서 잡아. 그리고 네 마음을 똑바로 전해. 거절당해도 차라리 그게 나을 거야.”

말하는 찬야의 표정은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유라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마음을 정했어. 고맙다, 찬야.”

찬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되면 나중에 크게 갚아. 그리고 서두르는 게 좋을걸? 늦으면 고백할 기회도 없을 거야.”

“알아. 장문인께는 네가 잘 말씀드려 줘. 부탁한다.”

“걱정 말고 다녀와.”

파팟! 즉시 몸을 날려 화산을 내려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넌 나 같은 동문을 둔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해.”

피식 웃은 찬야는 운휘와 위지혁이 기다리는 객잔으로 향했다.

***

유라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남쪽으로 달렸다.

남량이 남궁세가에 도착하기 전, 그를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도중에 개방의 정보를 빌려, 그가 묵고 있는 객잔을 알아냈다.

쾅! 문을 부술 듯 박차고 객잔 안으로 들어간 유라가 주인에게 물었다.

“남량이 이곳에 묵고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 있습니까?”

유라의 박력 넘치는 모습에 압도당한 주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누, 누구요?”

“새하얀 머리카락에 매화가 그려진 도복을 입은 사내가 지금 어디에 있냐는 말이오!”

“아아. 그 사내라면 지금 객잔 뒤 언덕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아마 거기 있을 겁니다.”

파앗! 유라는 경공을 펼치며 바람처럼 그곳으로 달려갔다.

주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살기가 보통이 아니던데……. 그 사내는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

정자 아래 도착한 유라는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터억. 정자 안에 발을 들인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남량은 뒷짐을 진 채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라의 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유라. 네가 왜 여기 있어? 제자들 수련은 어떡하고?”

잠시 그를 쳐다보던 유라가 천천히 다가갔다.

“네가 남궁세가로 가는 이유, 들었어.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어.”

“무슨 기회?”

척. 남량의 앞에 선 유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널 사모해. 아주 많이.”

“…….”

“널 간절히 원한다고. 그러니까 너를……. 네가 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곁에 영원히 있어 줘. 제발 남궁월과 혼인하지 마.”

“너…….”

멍하니 고백을 듣고 있던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내가 누구랑 혼인한다고? 남궁월? 내가 남궁 소저랑 혼인한다고 누가 그래?”

유라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혼례식 때문에 남궁세가로 가는 거 아니었어?”

“무슨 말이야? 맹주의 생일 연회에 초대받아서 가는 건데.”

“생일 연회라고?”

“그래. 남북 십성은 모두 참석하는 자리라 어쩔 수 없이.”

“…….”

유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할 수만 있다면 방금 전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동안 정자에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진심이냐?”

남량은 고개를 돌린 채 물었다.

유라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래. 널 정말 많이 좋아해.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는 묻지 말아 줘. 그건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그 이후로 내 마음 속에는 오직 너밖에 없었다는 거야.”

“…….”

“물론 내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당장 대답할 거 아니면……. 먼저 갈게.”

유라는 그대로 몸을 돌려 정자를 나가려 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남량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하는 남량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덩달아 유라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잊지 못한 여자가 있어.”

유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남량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러니……. 기다려 줄 수 있겠어? 적어도 내가, 그 사람을 완전히 잊을 때까지.”

“……!”

유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남량은 머리를 묶고 있던 붉은 매듭끈을 풀며 말했다.

“스승님이 준 선물이야. 홍선(紅線)이라고, 들어 봤어? 그분이 이걸 주면서 말씀하시더군. 인연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면 절대 놓치지 말라고. 당신의 제자만큼은 외로운 인생을 보내길 원치 않으셨던 거야.”

남량은 머리끈을 유라의 손목에 채웠다.

“기다려 줘. 그 사람을 떠나보낸 뒤, 너에게 갈게.”

유라는 남량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기다릴게. 너무 늦지 않게 와.”

남량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부드럽게 안았다.

“고맙다.”

유라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객잔으로 돌아왔다.

“같이 남궁세가에 갈까?”

“아니. 나는 화산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남량이 그게 뭐냐고 묻자, 유라가 대답했다.

“찬야를 죽이는 일.”

***

그로부터 2년 뒤.

남량과 유라의 혼례식이 연화궁에서 열렸다.

식 자체는 도사라는 신분 때문에 검소히 치러졌으나, 화산의 모든 도사들이 모여 축하했다.

운휘는 한 손에 술잔을, 한 손에 고깃덩이를 든 채 껄껄 웃었다.

“설마 이 두 사람이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하하.”

찬야는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작 이 혼인의 일등 공신인 나는 유라에게 두들겨 맞아 죽을 뻔했었지…….”

위지혁은 문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유 도장님이 보셨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유우화. 구양중. 노백 등.

먼저 떠나간 그들이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혼례복을 입은 유라는, 공월 진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는 말해 줘야 할 것 같구나. 네 출신에 대해서 말이다.”

긴 한숨을 내쉰 공월 진인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구 사형이 가장 아끼는 제자가 있었다. 재능도 출중하고 의협심도 강했지. 그런데 그가 사파 조직의 거두인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사형은 당연히 분노했고, 그 제자는 파문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맹주 자리에 오른 고경홍이 전국 각지의 사파 조직들을 토벌하던 때, 사형은 그 제자를 만나게 되었단다. 결국 사형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자를 본인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지.”

가만히 듣고 있던 유라가 말했다.

“……그의 아이가 바로 저였군요.”

“그래. 사형은 자신의 제자를 빼앗아 간 너와 네 어미를 원망했다. 하지만 제자의 마지막 부탁 때문에 차마 너를 죽게 놔둘 수 없었어. 그래서 너를 입양하신 거다.”

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래서 저를 그리 차갑게 대하셨던 거군요.”

공월 진인은 유라를 응시하며 말했다.

“유라야, 이것만은 알아 다오. 사형은 너를 미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했다. 그건 분명해.”

유라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도 알아요. 그분이 저를 사랑하셨다는 것을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침 곁으로 다가온 남량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울지 마라. 이 기쁜 날에.”

“안 울어.”

“가자. 다른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래.”

유라는 환하게 웃으며 남량의 손을 잡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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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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