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북해의 암운(2)
콰앙! 지붕을 부수고 솟구친 남량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중앙전 지붕 끝에 한 사람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단정한 백의 차림에 얼굴을 붕대로 감은 장신의 사내였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은 마치 홍옥(紅玉)처럼 붉었다.
지붕에 착지한 남량이 차가운 눈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오랜만이군. 백야.’
남량은 화양검을 늘어뜨린 채 그에게 다가갔다.
남량을 지그시 바라보던 백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백매화로군. 남북 십성과 마찬가지로 교의 앞길에 가장 방해되는 존재.”
“나를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해 주는 건가. 영광이네.”
“효초아 님께서는 너를 죽이고 싶어 하신다. 헌데 스스로 내 앞에 나타날 줄이야. 덕분에 수고를 덜었구나.”
백야의 입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를 죽인 다음 잘린 머리를 가져가면 효초아 님께서 기뻐하시겠지. 죽어라.”
백야의 적안(赤眼)이 점점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가 익힌 황천마령술(黃泉魔靈術)이 발동하려는 것이다.
파파팟! 남량은 바람을 가르며 백야를 향해 쇄도했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미 환술은 발동했…….”
웃으며 말하던 백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냐. 어째서 환술에 걸리지 않는 거…….’
촤악-! 남량의 검격이 백야의 옷깃을 베고 지나갔다.
남량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새 반응했나. 아쉽군. 팔 하나쯤은 벨 수 있었는데.”
황급히 거리를 벌린 백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랬군. 네놈의 정신 수양이 이 정도 환술은 견딜 수 있는 경지란 말이지?”
환술은 상대방의 마음을 파고들어 현혹시키는 술수. 즉, 마음의 평정심을 잘 유지한다면 환술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환술에 한해서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남량은 긴장했다. 그의 예상대로 백야는 자존심이 제법 상한 듯 보였다.
“네가 유회를 죽인 자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군. 내가 방심했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상대해 주마.”
백야가 또다시 환술을 발동했다.
직후, 남량의 발밑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며 그를 휘감았다.
물론 실제가 아니라 백야의 환술이 만들어 낸 환각이었다.
‘하지만 환술에 걸린 너는 불의 뜨거움을 그대로 맛볼 것이다. 불에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죽어라.’
다음 순간, 백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남량이 불을 휘감은 그대로 달려든 것이다.
‘말도 안 돼! 이번에도 환술이 먹히지 않았다는 건가!’
남량은 눈을 번득이며 검을 휘둘렀다.
쇄애애액!
낙영용섬 진(眞)의 초식으로 날아간 일검(一劍)이 이번에는 백야의 어깨를 베었다.
핏방울이 튀며 백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럴 리가! 환술은 분명 제대로 들어갔을 텐데……!”
말하던 백야의 시선이 남량의 팔뚝으로 향했다.
‘소매가 붉게 물들었어? 설마. 이놈이 제 몸에 상처를 내서 통증을 일으켜 환술을 벗어난 건가?’
백야의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더 이상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너, 환술사를 상대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군.”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 낸 남량이 대답했다.
“예전에 너 같은 놈들 많이 죽여 봐서.”
백야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북 십성도 아닌 너 같은 애송이에게 밀리다니……. 한심하구나. 효초아 님께서 이 모습을 보신다면 크게 실망하셨을 테지.”
백야의 적안이 더욱 강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스스로 상처를 내 환술을 빠져나온 건 칭찬할 법하다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라. 다음 공격으로 네놈을 죽일 생각이니까.”
“흥. 이번에는 통증으로도 소용없을 것이다.”
백야가 한쪽 손을 뻗으며 말했다.
“무저갱(無底坑).”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중앙전과 빙궁 전체가 무너지며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발을 딛을 곳이 없어진 남량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크윽!’
남량은 재빨리 팔뚝을 그어 상처를 냈다. 그러나 환술은 풀리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통증으로는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백야는 허공에 우뚝 선 채 떨어지는 남량을 향해 웃었다.
“내가 환술을 풀기 전까지는 영원히 무저갱에 갇혀 고통받을 것이다. 백매화. 잘 가라.”
남량은 이를 악물었다.
‘무저갱은 백야의 환술 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이걸 깨지 못하면 놈을 이길 수 없다.’
통증이 먹히지 않는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강력한 힘으로 환술을 깨 버리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매화천수검의 비기를 써야 할 때야.’
남량은 화양검을 수직으로 세우며 내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우웅.
검이 움직이는 곳에 매화의 꽃잎이 흩날렸다.
여기까지는 9초식 천류신화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직후, 매화의 꽃잎이 서서히 검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수천 개의 꽃잎이 검으로 변하자 수천 자루의 검이 떠 있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더욱 무서운 점은, 허공에 뜬 검 하나하나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검강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매화천수검의 비기(秘技). 연화세계(蓮花世界).
빠름[快]와 부드러움[流], 단단함[勁], 사나움[暴], 날카로움[銳], 강함[强]을 모두 방출[發]하여 변화시킨[幻], 화산의 모든 검학(劍學)이 합쳐진 진정한 화산의 검.
그 검이 지금 이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부숴 주마. 이깟 환술.’
남량의 의지대로 칼끝은 어둠을 향했다.
“연화세계.”
남량이 검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수천 자루의 검이 일제히 어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어둠은 산산이 부서지고 새하얀 빛이 남량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럴 수가!”
백야는 경악했다. 그의 환술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무저갱의 술법이 너무도 간단하게 깨져 버린 것이다!
타악. 바닥에 착지한 남량이 덤덤히 말했다.
“네가 보여 줄 건 이게 다인가? 무저갱보다 더 강력한 환술이 있다면 사용해 보시지.”
“개자식이! 감히 나를 얕보는 것이냐!”
백야가 또다시 환술을 걸었다. 이번에는 지붕에서 솟아오른 쇠사슬이 남량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나 무저갱을 벗어난 남량에게 이 정도의 환술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촤악-. 남량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쇠사슬은 손쉽게 잘려 나갔다. 백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이 천하의 백야가……. 효초아 님을 모시는 칠령귀의 일원인 내가 네놈에게 질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단 말이다!”
우우웅.
백야의 전신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가 허공에 손을 뻗자 강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남량은 지붕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연화세계 초식은 분명 강력하나 그만큼 내력의 소모가 극심하다. 두 번은 힘들어서 못하겠군. 그렇다면.’
남량은 뇌전포화 초식을 발휘해 공중에서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백야는 이를 갈며 외쳤다.
“죽여 버리겠다. 백매화!”
백야가 손바닥에 내력을 집중하자 빛나는 강기의 구체, 강옥(罡玉)이 생성되었다.
백야가 강옥을 쏘아 보내는 것과 동시에, 벼락을 동반한 검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강기의 충돌로 인해 폭발이 일어났다.
남량은 즉시 초식을 바꾸어 6초식, 화운용무로 참격을 날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계였다.
화르륵-.
백야는 다급히 뒤로 몸을 날렸으나, 손목이 잘려 나갔다.
뜨거운 열기로 절단된 부분이 지져져 피는 나오지 않았다.
백야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비명을 토했다.
“백매화……. 네놈이…….”
“나를 배신한 대가다.”
“뭐라고? 그게 무슨 뜻…….”
남량은 백야의 물음에 대답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섬전과 같은 검격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득 메웠다.
낙영용섬의 난참(亂斬). 남량이 싸늘히 내뱉었다.
“그건 저승에 가서 유회랑 태광에게 물어봐.”
파파파파파팟!
한 차례 섬광이 번쩍! 하고 지나간 뒤, 백야는 한 줌의 핏물로 변해 바닥에 떨어졌다.
검을 갈무리한 남량이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환술은 풀리겠군. 이만 내려가서…….”
바로 그때였다. 걸음을 내딛은 남량이 순간 휘청거렸다.
‘어라? 몸에 갑자기 힘이…….’
남량은 자신의 몸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기로 내부를 돌리자, 아랫배 쪽에 마기가 침입해 있었다.
남량은 당황하며 그곳을 확인했다.
역시나. 아랫배 부분의 피부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내가 공격하는 순간 백야가 내 몸에 마기를 주입시켰구나. 죽기 직전에 이런 생각을 했을 줄이야.’
심지어 마기의 정수(精髓)를 몸속에 집어넣었다. 이건 도가의 정순한 내력으로도 몰아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마기가 온몸을 잠식할 것이다.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남량은 이를 악물고 내기를 운용해 마기가 퍼지는 것을 막았다.
‘이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빌어먹을.’
남량은 신음을 흘리며 지붕 바닥에 엎어졌다.
***
콰앙! 쾅!
폭음이 연이어 들렸다. 빙제의 도격(刀擊)이 사정없이 주변을 휩쓸고 있었다.
그의 공격을 피한 은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인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건 힘들겠군. 내가 아니라 남궁 대협이나 태화 진인께서 오셨다면…….’
결국 남량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칠령귀를 쓰러뜨려 빙제에게 걸린 환술을 풀어 줄 것이라고 말이다.
은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남북 십성이 어린 검수에게 의지나 하고……. 한심하군.’
그때, 빙제의 대도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은왕의 두 눈이 번득였다. 동시에, 슬쩍 몸을 피한 그가 검끝으로 대도의 옆면을 찔렀다.
쩌엉!
도신(刀身)에 금이 가더니, 이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대도의 가장 약한 부분을 연속으로 찌른 것이다.
“이, 이놈이!”
빙제가 분노하며 태산과 같은 주먹을 내질렀다.
은왕은 빙제의 공격을 비웃듯이 가볍게 피하며 손잡이 부분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퍼억!
빙제가 신음을 토해 내며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은왕은 검을 내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도 엄연히 남북 십성이란 말이지.”
바로 그때였다. 몸을 일으킨 빙제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맑은 눈동자가 돌아왔다.
“이, 이게 무슨……. 대체 무슨 일이지?”
은왕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달려왔다.
“대인! 정신이 드십니까?”
“그대는?”
“낭인회를 이끄는 수장, 유서휘라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 줄 수 있겠소? 머리가 너무 아프구려.”
“석 달 전, 북해를 찾아온 사내가 한 명 있었지요? 그자는 마교의 간부로 환술을 쓰는 환술사입니다. 그는 대인을 현혹시켜 빙궁과 중원 무림의 전쟁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제야 기억을 떠올린 빙제가 이를 갈았다.
“그래……. 분명 그때 이후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대인! 죄송하지만 먼저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대인의 명을 받은 타 부족들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어서 그들을 막아 주십시오!”
빙제는 중앙전 밖에 펼쳐진 거대한 군집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는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당장 멈추어라! 당장!”
빙제의 목소리를 들은 군사들이 창칼을 아래로 내렸다.
끝났다. 빙제가 정신을 차렸으니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은왕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다행이구나.’
안도하던 그는 남량을 떠올리고 다급히 지붕으로 올라갔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