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낙양혈사(落陽血史)(5)
맹주전 대전 내 원형의 탁자에는 아홉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남북 십성이라 칭한다.
무림계의 정점에 서 있는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가장 먼저 남루한 옷차림에 피부가 붉은 노인이 말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건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노인의 이름은 노학개(盧鶴凱).
개방(丐幇)의 방주이자 남북 십성의 금왕(金王)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다들 안부나 좀 알고 지냅시다.”
하북 팽가의 가주이자 남북 십성의 도제(刀帝) 팽인호가 술을 벌컥 들이켜며 말을 받았다.
“앞으로는 자주 이런 자리를 갖는 것도 좋겠군요.”
단정한 외모의 사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내의 도호(道號)는 유선(劉鮮).
청성파의 검수이자 남북 십성의 용제(龍帝)였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약관을 갓 넘긴 청년처럼 보일 정도로 무림에서 알아주는 동안이었다.
“나는 빼 주시게. 차 마시며 담소 나누는 건 취향이 아니라.”
종남파의 장문인이자 남북 십성의 도군(刀君) 유종학이 말했다.
“담소 나누는 게 싫으면 나랑 같이 논검(論劍)은 어떻소?”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남북 십성의 검성(劍星) 남궁천이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남궁 대협은 여전하십니다. 허허.”
무당파 장문인이자 남북 십성의 검제(劍帝) 태화 진인이 찻잔을 들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후배님은 이런 자리가 어색하지 않은가?”
사천 당가의 가주이자 남북 십성의 독왕(毒王) 당지황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낭인회의 회주이자 남북 십성의 은왕(隱王) 유서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맹주께서 오시는군요.”
검은 장삼에 붉은 가사(袈裟)를 입은 맑은 눈빛의 승려가 말했다.
승려의 불호(佛號)는 방월(方月).
소림사의 방장이자 남북 십성의 불제(佛帝)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한 사내가 등장했다.
무림 맹주이자 중원 무림의 최강자로 추앙받는 명왕(明王) 고경홍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으며 남북 십성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갑작스런 부름에 응해 주어 고맙소.”
남북 십성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전해 들어 알고 있겠지만, 그동안 음지에 숨어 있던 삼천위가 드디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소. 전쟁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우리도 이에 대비해야 하오.”
개방의 방주 노학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저들과 이쪽의 전력 차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비록 천마가 죽었지만 아직 저쪽에는 삼천위를 비롯해 칠령귀, 사흉마, 복마십군 등의 강자들이 존재하지요. 반면 맹은 남북 십성을 제외하면 그들을 일대일로 맞상대할 고수가 없습니다.”
팽가의 가주 팽인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후계자를 길러 내려 한 것이 아닙니까.”
청성파 검수 유선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후계자들은 마교의 간부들을 맞상대할 정도로 충분히 강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낙양에서의 전투만 해도 후계자 전부가 달려들었음에도 칠령귀 하나를 감당하지 못했지요. 물론 아이들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겠지만…….”
종남파 장문인 유종학이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후계자들의 기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겠군.”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이 말했다.
“딱 한 명, 칠령귀와 정면으로 맞붙어 이긴 후계자가 있기는 하지요. 매화검선의 후계자 남량 말입니다.”
무당파의 장문인 태화 진인이 반박했다.
“남량 도장이 백귀를 이긴 것은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순수한 실력으로 일궈 낸 결과로 볼 수 없습니다.”
당가의 가주 당지황이 턱을 긁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후계자들 말고 다른 고수들이 합공을 해서 마교의 간부들을 상대하는 쪽으로 전략을 짜야겠군.”
낭인회 회주 유서휘가 나직이 거들었다.
“낭인회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을 모아 그들을 상대할 부대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소림사의 방장 방월 대사가 염불을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소림의 나한진(羅漢陳)에 갇히면 설령 삼천위라 해도 살아서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대충 의견이 모이자 고경홍이 나서서 정리했다.
“마교의 동향은 개방과 흑영대에서 계속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오. 남북 십성은 지금부터 후계자들의 기량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하고 고수들을 모아 간부들을 상대할 방법을 마련하도록 하시오. 또한 휘하 중소 세력들, 속가 문파들을 정비하고 언제든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일러두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고경홍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남북 십성은 평생을 마교와 싸워 온 사람들이오. 어쩌면 마교와의 악연을 끊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일지 모르지.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해 무림을 지켜 냅시다.”
***
무림맹을 떠나는 날, 매화오절은 그간 정이 들었던 후계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찬야는 청랑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청랑 도장. 다음에 만나면 또 한 번 검을 나눕시다.”
“물론입니다. 그땐 제가 반드시 이길 겁니다.”
청랑은 웃으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유라는 남궁월에게 예를 갖추어 말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걸 배웠습니다. 남궁 여협.”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유라 도장.”
남궁월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백운산에서 만났을 때는 당신을 무시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알겠군요.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검사인지를.”
남궁월의 말에 유라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목표로 삼은 자에게 인정을 받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
한껏 고양되어 있던 유라의 기분은, 남궁월의 이어진 말에 금방 가라앉고 말았다.
“그런데 고백은 빨리 해 두는 게 좋아요. 다시 만났을 때도 이전과 같은 관계면 내가 그를 채 갈지도 모르니까. 후후.”
“…….”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죠.”
남궁월은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려 멀어졌다.
유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남궁월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하하하!”
운휘는 크게 웃으며 팽자엽의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화음현에 내가 아는 유명한 객잔이 있는데, 거기 고기만두가 그렇게 일품이야. 한입 베어 물면 육즙이 흘러나오는데 그게…….”
“쯔읍.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군!”
“궁금하면 언제 한번 놀러와. 내가 대접할 테니까.”
“그 말 기억해 두겠소. 운휘 도장.”
옆에 서 있던 진공이 조용히 손을 들며 말했다.
“저도 그 자리에 불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아아. 그래! 항상 무당에서 풀만 먹느라 고생이 많지? 사내대장부가 그래서야 무슨 힘을 쓰겠어? 가끔 몰래 나와서 우리랑 같이 맛난 거 잔뜩 먹자고! 하하하.”
운휘는 진공의 어깨에도 팔을 두르며 말했다.
진공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혁은 당지황과 대면하고 있었다.
“화산 장문인과 네놈 스승에게 허락을 구했다. 독인이 되는 과정은 멀 것이니 서둘러 본가로 오너라.”
당지황은 위지혁의 어깨를 툭 치며 그를 지나쳤다.
당지황이 떠난 자리에 당룡이 다가와 말했다.
“위 도장. 스승님께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위지혁은 당룡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이제 같은 스승을 모시는 동문(同門)이 되었으니 당 공자께서는 제 사형이십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그러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위 사제.”
당룡은 미소를 지으며 위지혁의 손을 잡았다.
남량은 제갈세가의 남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남량은 제갈랑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벌써 헤어져야 한다니 참으로 아쉽습니다.”
제갈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옆에 있던 제갈경이 남량에게 물었다.
“화산으로 돌아가면 수련에 매진하실 건가요?”
“아마도 그럴 것 같군요.”
남량은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남량 일행이 낙양을 떠나 화산으로 돌아올 무렵.
고경홍의 서신을 받은 화산파의 장문인, 구양중은 유우화를 불렀다.
“맹주께서 전언을 보내셨다.”
“무슨 내용입니까?”
“마교와의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시는군.”
유우화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쟁……입니까.”
낙양혈사는 마교와의 전쟁을 알리는 서막(序幕)이었다.
무림의 존망이 걸린 사투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고경홍이 씁쓸한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또다시 이 무림에 고통에 찬 비명 소리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의 울음소리가 진동하겠구나…….”
유우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겨 낼 겁니다. 늘 그래 왔듯이.”
“그래. 반드시 그럴 것이야.”
구양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며 말했다.
“곧 매화오절이 화산에 돌아올 게다. 유우화 너는 남량에게 매화천수검의 비기(秘技)를 전수하도록 해라.”
“비기는 이미 전수했습니다. 그걸 완벽하게 익히는 건 이제 그 아이에게 달렸어요.”
고개를 끄덕인 구양중이 말했다.
“그런가. 그럼 바로 준비해도 되겠군.”
“무엇을요?”
유우화의 물음에, 구양중이 대답했다.
“매화검수(梅花劍手) 심사를 열 생각이다.”
유우화가 깜짝 놀라 구양중을 쳐다보았다.
“남량을 매화검수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매화검수는 화산의 검사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로 구성된 조직이다.
즉, 화산을 대표하는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심사를 치른 경우는 없지만.”
구양중은 뒷짐을 진 채 미소를 지었다.
“남량은 충분히 자격이 차고 넘치는 아이 아니냐.”
그는 확신하듯 말했다.
“녀석이라면 당당히 매화검수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매화검수 심사는 매화검수의 수장이 진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매화검수의 수장인 홍매검(紅梅劍) 공월 진인은 전서구를 띄워 전국 각지에 나가 있는 매화검수들을 화산으로 불러들였다.
소집령을 받은 매화검수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례 없는 일이야. 약관의 나이에 매화검수 심사라니…….”
“남량이 얼마나 강해졌을지 궁금했는데, 잘되었군.”
“믿음직한 동료가 생긴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지.”
그들은 각자 기대를 품고 화산으로 집결했다.
***
보름달이 뜬 밤, 남량은 한적한 공터에서 홀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쇄액! 쇄애애액!
엄청난 속도로 허공에 검을 휘두른 남량은 그 자세로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매화천수검의 비기를 터득할 수 있는 거지?’
유우화가 비기, ‘연화세계(蓮花世界)’에 대해 설명해 준 건 고작 한마디가 전부였다.
‘매화천수검의 초식을 전부 합쳐라.’
초식을 합치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이지? 빠른 속도로 초식을 연계하며 펼치라는 뜻인가? 아니면 정말 초식들을 한 합에 담으라는 뜻인가?
무학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깊은 식견을 가진 남량조차도 이것만큼은 쉽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 칠령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땀방울이 콧등을 타고 떨어지기 직전, 남량이 또다시 몸을 움직였다.
쇄액! 쇄애애애액!
섬전과 같은 검형(劍形)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날도 남량은 전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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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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