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무림대회(武林大會)(4)
그렇게 무림대회의 첫 번째 날이 지나갔다.
이날은 화산을 위한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천 당가의 후계자인 당호를 상대로 승리한 위지혁.
불굴의 투지로 무당파 후계자 진공과 함께 탈락한 운휘.
두 사람이 보여 준 광경들은 관중들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어떤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과연 화산은 다음 시합에서도 놀라운 일을 보여 줄 것인가?
두 번째 날이 밝고 화산의 제자들이 비무대에 등장하자, 관중들은 그들을 향해 첫날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관심을 보냈다.
“화산파다! 매화의 검수들이 등장했다!”
“어제의 시합은 정말 굉장했다! 오늘도 멋진 활약을 보여 줘!”
“이대로 우승까지 달려라!”
“이번 무림대회는 화산의 것이다!”
“위지혁이다! 낙뢰검(落雷劍)도 있다!”
낙뢰검이란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강렬한 운휘의 검격을 보고 관중들이 붙인 별호였다. 운휘는 소원대로 멋들어진 별호를 얻게 된 것이다.
운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낙뢰검……. 낙뢰검이라. 정말 멋진 별호야.”
그는 찬야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제 별호가 없는 제자는 너뿐이다. 찬야.”
“첫 시합에서 탈락한 패배자는 좀 닥쳐 줄래?”
찬야는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어제는 내가 활약할 무대가 마련되지 않았을 뿐이야. 오늘은 제발 남북 십성의 후계자를 상대했으면 좋겠어. 그럼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을 텐데.”
빠악!
찬야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친 남량이 말했다.
“신검합일에 들더니 건방짐이 도를 넘었군. 자만심은 자신의 한계를 정하는 것과 같다고 누누이 경고했을 텐데. 넌 무림대회 끝나면 바로 정신개조술이다.”
“내가 실언했다. 제발 살려 줘.”
찬야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유라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참가자들 전원이 시합장에 도착하자 양악이 두 번째 시합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 시합의 명칭은 ‘깃발 빼앗기’입니다. 비무대 중앙을 보면 깃발이 하나 있는데, 총 세 명의 참가자가 비무대에 올라 깃발을 차지하기 위한 대결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 일다경의 시간이 흐른 뒤, 마지막에 깃발을 손에 들고 있는 참가자만이 다음 시합에 진출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남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용은 간단한데 과정이 복잡하군.”
유라가 그의 말을 받았다.
“한 참가자가 깃발을 먼저 손에 넣는다면 그는 즉시 나머지 두 참가자들의 합공을 받게 된다. 단순히 생각하면 마지막까지 기회를 노리다 깃발을 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만, 깃발을 손에 넣지 못할 위험성도 매우 크지. 이번 대결은 상대방과의 기량을 파악하는 능력과 냉정한 판단력을 요구한다.”
시합이 시작되고 참가자들이 비무대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이 올라간 시합은 그 내용이 대부분 비슷했다. 먼저 깃발을 손에 넣은 뒤, 압도적인 힘으로 다른 두 명의 참가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유라와 찬야는 무사히 시합에 통과했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후계자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둘은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다음 비무의 참가자 세 명을 발표하겠습니다.”
양악은 출전 명단을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종남파의 포훈! 하북 팽가의 팽자엽!”
“오오오!”
관중석의 열기가 단숨에 뜨거워졌다.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이 한 비무대에?”
“팽가와 종남의 대결인가!”
“이 둘과 같은 비무대에 오를 참가자는 누구인지 몰라도 참 불쌍한 친구로군. 하하.”
팽자엽과 포훈은 당당하게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제 마지막 참가자의 발표만을 앞두고 있었다.
양악은 어느 한 곳을 슬쩍 쳐다보더니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화산파의 남량!”
“뭐라고?”
관중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남북 십성의 후계자 셋이 한 비무대에 오르게 되다니!
찬야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오늘의 주역이 누군지는 정해졌구만.”
남량은 몸을 일으키며 일행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남량은 천천히 비무대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참가자들의 시선이 동시에 남량을 향했다.
‘저 사내가 바로 백매화인가.’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 중 최강이라 불리는…….’
‘폭혈검객 장태정을 쓰러뜨린 초절정의 고수.’
‘소문이 사실일지 궁금해지는군.’
남량이 비무대에 올라가자 팽자엽과 포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팽자엽은 남량과 포훈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도장님들.”
남량은 마주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포훈은 싸늘한 표정으로 남량을 노려보았다.
‘유라가 나오지 않은 건 아쉽지만 백매화를 쓰러뜨린다면 화산의 검을 쓰러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땡-.
종소리가 울리며 시합이 시작되었다. 팽자엽과 포훈은 도를 뽑아 들고 서로를 견제했다.
바로 그때, 남량이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비무대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을 뻗어 깃발을 집어 들었다.
지켜보던 관중들이 함성을 질렀다.
“백매화가 먼저 깃발을 잡았다!”
“두 사람을 한 번에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뭐 하고 있어! 어서 실력을 보여 줘라!”
두 사람은 당황하며 남량을 응시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먼저 깃발을 집어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깃발을 손에 든 남량이 화양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비무대 중앙에 우뚝 선 채로 말했다.
“둘 다 한꺼번에 덤벼라.”
남량의 도발에 팽자엽과 포훈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둘 다 한꺼번에 덤비라고?”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이 새끼고 저 새끼고 하나같이 나를 무시해?”
포훈은 도를 쥔 손을 부들거리며 말했다.
“화산파 새끼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군.”
“얼마나 실력에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팽자엽은 이를 부득 갈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 말, 단단히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소.”
비무대 위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관중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세 명의 참가자를 응시했다.
쩌엉!
먼저 팽자엽이 바닥을 박차며 쇄도했다.
그의 도가 묵직한 파공음을 내며 남량의 목을 노려 왔다.
남량은 한 손으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콰아앙!
남량과 팽자엽의 내력이 서로 충돌하며 충격파를 일으켰다.
다음 순간, 팽자엽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손으로 쥐고 전력을 다해 휘두른 도를, 겨우 한 손을 든 어정쩡한 자세로 막아 낸 것이다! 심지어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량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내가 힘에서 밀릴 거라고 생각했나?”
남량은 검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팽자엽의 도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관중들이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팽가의 일 공자가 힘에서 밀리고 있는 건가?”
“말도 안 돼.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팽자엽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전력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호단문도는 무턱대고 힘으로 덤벼드는 도법이 아닐 텐데. 머리 좀 식히고 다시 제대로 덤벼 봐.”
남량은 발로 팽자엽의 턱을 차올렸다.
뻐억!
팽자엽의 거구가 공중에 붕 떠올랐다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뻗은 발을 회수한 남량이 고개를 돌려 포훈을 쳐다보았다.
“뭐 해? 안 덤비고.”
“크윽!”
포훈은 도를 수직으로 세운 다음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그러자 섬광이 번득이며 도영(刀影)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쇄애애애액!
포훈이 만들어 낸 도기(刀氣)가 비무대 바닥의 두꺼운 청석(靑石)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남량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포훈의 도기를 피해 냈다.
“초식을 펼칠 때는 상대방의 움직임까지 고려해야 하지.”
남량은 천천히 포훈을 향해 다가왔다.
포훈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포훈의 공격은 남량의 옷자락조차 베지 못했다.
남량이 점점 다가올수록, 포훈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으아아아!”
포훈은 칼끝에 내력을 집중시키며 그대로 내질렀다.
남량은 포훈의 일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포훈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포훈은 입에서 피를 울컥 내뱉으며 날아갔다.
“태을분광검의 중요한 점은 상대방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가 다가오는데 거리를 벌릴 생각도 안 하고 공격만 하면 어떡하나? 집중해.”
참가자들, 특히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계자 두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초지적(十招之敵)조차 되지 못한다.
만약 저 자리에 자신들이 대신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참가자들을 비롯한 그 자리에 모인 관중들은 확실히 깨달았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백매화의 무용담은, 전부 진실이었음을.
“남 사제가 화산파의 제자여서 정말 다행이야.”
찬야가 말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그래. 평소에는 냉정하고 재수 없는 놈이지만…….”
유라는 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남량에게는 능히 천하를 진동시킬 힘이 있어.”
“동의하지. 그래서 우리가 저 등을 따르는 거 아닌가.”
위지혁이 말을 받았다. 운휘는 주먹을 쥐고 크게 소리쳤다.
“우리 형님은 언젠가 화산의 검황(劍皇)이 되실 분이다! 똑똑히 지켜봐!”
“우와아아아아!”
웅장한 함성 소리가 시합장을 가득 채웠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팽자엽과 포훈이 소리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아직은!”
“이 정도로 쓰러질 것 같으냐!”
남량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훌륭한 투지다. 와라.”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뻐억!
남량은 팽자엽의 도격을 피하며 그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팽자엽은 도를 놓칠 뻔한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스걱-!
남량의 검이 포훈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포훈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켰다. 그는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쩌억!
남량은 팔꿈치로 포훈의 머리를 내리쳤다.
바닥에 처박힌 포훈이 남량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사이, 팽자엽이 남량을 향해 초식을 날렸다.
“일도풍사(一刀風射)!”
거센 돌풍을 휘감은 도(刀)가 날아들었다. 남량은 검을 수직으로 치켜들고 아래로 내리쳤다.
남량의 검기가 팽자엽의 도기를 밀어내며 그의 도를 산산조각 냈다. 팽자엽은 피를 토하며 비무대 밖으로 넘어갔다.
퍼억!
남량은 포훈의 복부를 걷어차 똑같이 날려 버렸다.
두 참가자가 모두 장외로 떨어지자 양악이 입을 열었다.
“다음 시합에 진출할 참가자는 화산의 남량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은 시합장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질렀다.
“남량! 남량! 남량! 남량!”
모두가 남량의 이름을 불렀다. 남량의 도포 자락에 새겨진 매화 문양이, 지금 화산의 위세가 하늘에 닿아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
그날 저녁, 남량은 홀로 낙양의 한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음이 심란했다.
나는 천마 위광이다. 남량의 몸은 그저 빌린 것일 뿐. 화산파의 제자가 된 이유는 천마의 무공에 가까운 최상승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였고, 매화오절을 가르친 이유는 훗날 마교에 대적할 무기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명성을 얻으려던 이유는 화산파의 장문인 자리에 올라 자하신공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그래.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비무대 위에서 수많은 무림인들의 함성을 들었을 때, 동료들이 비무대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을 때.
솔직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화산파의 제자 ‘남량’이었다.
남량의 몸을 차지한 천마 ‘위광’이 아니라.
남량은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지?
나는 대체 누구지?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뿐이었다.
“빌어먹을…….”
천하의 위광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제로 고민할 줄이야.
남량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낙양의 거리를 잠시 구경하던 도중,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낭연청?’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기척마저 완벽히 지웠지만 남량은 그녀임을 알 수 있었다.
낭연청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설마 무림대회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가?
낭연청은 어두운 골목으로 들었다. 남량은 창밖으로 몸을 날리며 은밀히 그녀의 뒤를 추격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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