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무림대회(武林大會)(1)
무림대회는 열흘 뒤 열릴 예정이었다.
객청을 배정받은 남량 일행은 수련을 하거나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대회가 열리기 전날 밤, 맹에서 연회를 열었다.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연회였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후원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화려한 음식들이 자리를 채우고 악단의 공연이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연회장에는 아는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운휘가 푸른 도복 차림의 무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찬야. 저 사람들은 누구야?”
“바보야. 태극무늬를 보면 몰라? 무당파 제자들이잖아.”
일행의 시선이 무당파 제자들 쪽으로 돌아갔다.
마침 무당파 제자들도 이쪽을 발견하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유라의 시선이 그들 중 가운데 있는 인물에게 향했다.
“내력이 범상치 않은데.”
“잘 봤어. 아마 저 사내가 무당파의 일대제자이자 남북 십성, 검제(劍帝)의 후계자인 진공(眞恭)일 거야. 검의 천재라고 명성이 자자하더라.”
유라의 눈에 호승심이 떠올랐다.
“저자와도 한번 붙어 보고 싶군.”
그때, 화려한 비단 장포를 펄럭이며 무림맹주 고경홍이 연회장에 등장했다. 그의 존재감은 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단상 위로 올라간 그는 가볍게 시선을 내렸다. 이윽고 그와 남량이 눈을 마주쳤다. 고경홍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림대회에 참가한 소협들을 환영하네.”
내공을 실은 중후한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오늘은 소협들을 위한 자리이니 마음껏 즐기도록.”
고경홍은 짧은 연설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왔다.
무림대회 전야제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너 어디 문파 소속이야? 제법 쓸 만해 보이는데 나가서 나랑 비무나 한판 할래?”
운휘는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강해 보이는 참가자들에게 비무 신청을 했다.
“소저. 어디서 오셨소? 멀리서 보는데 소저의 아름다움이 내 시선을 자꾸만 끌어당기더군.”
찬야는 마찬가지로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젊은 아가씨들에게 작업을 펼쳤다.
“이 새끼들아! 제발 적당히 해!”
“도사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하지 말란 말이다!”
결국 두 사람은 유라와 위지혁의 손에 끌려왔다.
그때 낯익은 얼굴들이 일행의 앞으로 걸어왔다.
사천당가의 쌍둥이 형제. 당룡, 당호였다.
‘저 녀석들…….’
위지혁은 표정을 굳히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당룡은 찬야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때의 치욕은 아직도 잊지 않았다.”
당호는 이를 부득 갈며 유라를 향해 말했다.
“비무대에서 두 배로 갚아 줄 테니 각오해라.”
찬야는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얼마든지.”
유라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히 말했다.
“자신 있으면 말보다 검으로 증명해 봐.”
남량은 진지한 표정으로 전국 각지의 술을 맛보는 중이었다. 시종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술잔에 술을 채웠다.
“남량 소협.”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량이 고개를 들었다.
푸른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탁한 회색빛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눈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외모였다.
“남궁월.”
여인, 남궁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남궁월은 남량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남량의 손에 든 술잔으로 향했다.
“그건 고정공주(古井貢酒)네요.”
“백주인데 향이 진하군요.”
“안휘에서 나는 술인데 이름난 명주(銘酒)죠.”
남궁월은 시종에게 새 술잔을 부탁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단번에 술잔을 비운 남궁월이 홍조를 띠며 말했다.
“백운산 투연회에서 소협에게 패배한 뒤로 매일같이 소협을 머릿속에 그리며 수련을 했어요. 언젠가 무림대회에서 만나 소협과 다시 검을 마주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요.”
듣는 입장에서는 섬뜩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남량은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남궁가 새끼들…….’
그때 두 사람 사이로 누군가 다가왔다.
“남궁 여협.”
유라는 남궁월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불편해 보였다.
“백운산 투연회 이후로 오랜만이군요.”
“불사검협이군요. 반가워요.”
남궁월은 일어나 예에 답하곤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런데 유라가 한발 먼저 남궁월의 자리를 차지했다.
눈 뜨고 자리를 빼앗긴 남궁월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유라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
남궁월은 남량과 유라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저랑 남 소협은 혼담이 오가는 사이니까 괜찮아요.”
유라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건 남궁 대협께서 멋대로 결정하신 겁니다.”
남궁월은 쌍심지를 세우며 말했다.
“세상에 어떤 사내가 나 같은 미인을 거절하겠어요?”
유라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자신감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그런 걸 착각이라고 하죠.”
날카로운 말이 비수처럼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량이 중얼거렸다.
“왜 저래…….”
찬야는 청성파의 제자들과 마주쳤다.
청성파의 일대제자 백상은 지난날의 굴욕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네놈.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 주마.”
“왜, 또 기습하려고?”
찬야가 웃으며 도발하자 백상의 이가 부득 갈렸다.
“그만하거라.”
준수한 외모의 사내가 나서서 백상을 말렸다.
사내에게 시선을 돌린 찬야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설마 청파검(淸波劍) 청랑 소협?”
사내, 청랑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맞습니다.”
“남북 십성, 용제의 후계자를 여기서 뵙는군요.”
찬야는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청랑은 마주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찬야 소협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변변한 칭호도 하나 없는 애송이인데요 뭘. 하하.”
“칭호는 그저 남들이 붙인 허울에 불과하지요.”
파팟!
청랑이 손끝을 세워 미간을 찔러 왔다.
‘이것 봐라?’
찬야는 고개를 살짝 틀어 청랑의 공격을 피해 냈다.
청랑은 그대로 팔을 휘둘러 눈을 노렸다.
찬야는 손을 뻗어 공중에서 청랑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 모든 동작이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벌어졌다.
“역시.”
청랑은 뻗은 손을 회수하며 미소를 지었다.
“찬야 소협은 진짜로군요.”
“과찬이십니다.”
“대회장에서 만나기를 바라겠습니다.”
청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돌렸다.
찬야는 멀어지는 청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단정한 외모랑 다르게 거친 면이 있네.”
“으음. 이 음식은 맛이 독특하네. 숙수 영감님 음식 솜씨가 꽤 좋아졌구나.”
운휘는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차려진 음식을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운휘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소협. 오랜만이오.”
그는 바로 팽가의 일 공자인 팽자엽이었다.
아는 얼굴을 만난 운휘는 웃으며 인사했다.
“팽자엽! 열흘 만에 만나는데 오랜만은 무슨!”
“하하. 오래 같이 지내다 떨어져 있으니 허전해서 말이오.”
팽자엽의 시선이 운휘의 입가에 묻은 고기 부스러기로 향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먹성은 여전히 좋으시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팽자엽은 가문 내에서도 알아주는 대식가였다.
운휘는 젓가락으로 오리고기 한 점을 집어 팽자엽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거 먹어 봐. 엄청 맛있어.”
얼떨결에 고기를 받아먹은 팽자엽이 두 눈을 부릅떴다.
“으음! 가히 환상적인 맛이오!”
팽자엽은 어느새 젓가락으로 쉴 새 없이 고기를 집어 먹고 있었다.
운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우리 저쪽으로 가 보자. 아까 봤는데 엄청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있더라고. 돼지고기에 밀가루를 입혀 튀겼는데, 그 위에…….”
말이 끝나기도 채 전에 팽자엽이 소리쳤다.
“어서 갑시다! 앞장서시오!”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침이 잔뜩 고여 있었다.
운휘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하하하! 그래!”
“오늘 배터지게 먹고 죽어 봅시다.”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유라는 남궁월과 헤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창피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왜 그랬지? 한심하게. 누가 봐도 질투로 보였을 거 아니야.’
그녀는 식탁에 이마를 박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녀의 곁으로 도복을 입은 한 사내가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든 유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포훈?”
“그래.”
종남파의 후계자 포훈은 유라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의 비무는 어디까지나 내가 방심해서 일어난 우연임을 알아두었으면 좋겠군. 그걸 곧 증명해 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야.”
유라가 포훈을 불렀다. 포훈은 입꼬리를 올렸다.
“반박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방심도 실력이다, 뭐 이런 말을 하려고?”
“아니.”
유라는 손을 휘휘 저으며 툭 던지듯 말했다.
“기분 나쁘니까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꺼져.”
“…….”
포훈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남 사제. 저기 왼쪽 아가씨가 예뻐, 아니면 오른쪽 아가씨가 예뻐?”
“대체 니 머릿속에는 여자 말고 든 게 뭐냐?”
찬야가 눈을 반짝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남량은 그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녹색의 장포를 걸친 미공자가 주변의 시선을 받으며 남량에게 다가왔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남량을 불렀다.
“남량 소협!”
고개를 돌린 남량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귀찮은 놈이 하나 더 늘었다.
“제갈 공자.”
제갈세가의 일 공자, 제갈랑이 웃으며 예를 표했다.
“이게 대체 얼마만입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찬야 소협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그의 얼굴을 보자 지하미궁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남량은 찬야와 인사를 나누는 제갈랑에게 물었다.
“그런데 동생분은 어디 계십니까?”
그러자 제갈랑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소협! 저희 경이를 신경 쓰시는군요!”
남량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괜히 물었네.’
제갈랑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경이도 물론 같이 왔습니다. 어, 저기 오는군요.”
애체(靉靆)를 쓴 지적인 외모의 아가씨가 익숙하지 않은 옷을 휘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남량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외쳤다.
“남 소협!”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본 찬야가 남량에게 속삭였다.
“아직 마음은 여전한 것 같은데? 어떡할래?”
“닥쳐.”
제갈경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소식은 종종 전해 들었어요.”
남량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여자는 지하미궁에서 함께 고생을 겪어서 그런가 조금은 정이 갔다.
“아직도 집안에서 벌을 받고 있는 겁니까?”
“한동안은 고생 좀 했어요.”
제갈경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지금은 가문에서 기관을 공부하고 있어요. 저희가…….”
흥분하던 그녀는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속삭거렸다.
“저희가 본 장치들 있잖아요. 그걸 연구하는 중이에요. 언젠가는 그 기술들을 전부 제 것으로 만들고 말 거예요.”
“그래요?”
남량의 표정에도 흥미가 떠올랐다. 지하미궁에서 보았던 장치들, 기관들을 재현해 낼 수 있다면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완성하면 저한테도 알려 주십시오. 궁금하군요.”
“네. 꼭 그럴게요. 헤헤.”
제갈경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야제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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