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검황-73화 (73/164)

<73화>

유라의 각성. 삼매진화(三昧眞火)(4)

도관으로 돌아온 남량은 자신의 도포를 벗어 바닥에 깔고 그곳에 유라를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몸 곳곳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군.’

유라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남량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머리가 불덩이처럼 뜨겁잖아.’

남량은 즉시 유라의 몸에 손을 얹고 그녀의 몸 내부를 관조했다. 직후, 남량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런. 기혈이 역류하고 있다!’

유라는 며칠간 잠도 자지 않고 수련에 매진한 터라 피로도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무리하게 내공을 운용했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아무튼 역류하는 기혈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이대로 주화입마에 빠져 죽게 될 것이다. 남량은 즉시 몸 곳곳의 혈도를 짚어 주화입마를 늦추었다. 그러나 이걸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유라! 유라! 내 목소리 들리지?”

남량은 유라의 뺨을 때리며 크게 소리쳤다. 유라는 대답조차 하기 힘든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있으면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 거다. 내가 기를 넣어 줄 테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

남량은 품속에서 구양중에게 받은 목함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청량한 향을 내뿜는 매화단이 들어 있었다.

남량은 매화단 한 알을 꺼내 유라의 입에 집어넣었다.

굳이 삼킬 필요도 없이 혀에 닿은 순간 매화단이 녹아내리며 영단의 내력이 유라의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남량은 그녀의 등에 손을 얹으며 매화단의 영력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줄 테니 운기조식을 하는 거야. 정신 잃으면 절대 안 돼!”

남량은 자신의 내력까지 불어넣으며 역류하는 흐름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유라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아악!”

남량은 버티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활공을 하는 도중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흩어지면 되돌릴 수 없었다. 결국 유라의 의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버텨. 너라면 할 수 있다.’

남량의 마음속 외침을 들은 것일까? 유라가 천천히 호흡을 시작하며 몸속을 돌고 있던 내공이 빠르게 단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남량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한 바퀴 일주천이 끝나자 남량은 손을 떼며 한숨을 내뱉었다.

유라는 기혈이 안정됨과 동시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남량은 대(大)자로 뻗은 채 중얼거렸다.

“하아……. 내가 괜히 화산파에 환생해 가지고는…….”

고생을 겪을 때마다 염라에 대한 불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그냥 남북 십성 중 한 명의 몸에 넣어 줬으면 이런 팔자에도 없는 개고생을 할 필요가 없잖아!

그랬으면 진즉에 마교고 뭐고 전부 쓸어버리고도 남았겠다.

젠장……. 이 나이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나마 가장 믿을 만했던 녀석이 이 모양인데 나머지 놈들은 뭐 하고 있을지 앞날이 캄캄하군……. 에휴.”

남량은 잠든 유라를 가만히 바라보다 자신의 중의(中衣)마저 벗어 덮어 주었다.

***

유라는 불규칙한 빗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처음 보이는 광경은 낯익은 도관의 천장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분명 지친 몸을 이끌고 산사태가 일어나는 곳에서 수련을 했다. 큰 바위를 베어 낸 직후 거대한 흙더미에 의해 깔렸다. 그리고 정신이 캄캄해졌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기혈이 용암처럼 들끓어 금방 죽을 것 같았다.

‘분명 그때 남 사제의 목소리를 들었어.’

남량이 입에 뭔가를 넣자마자 몸에 새로운 기운이 가득 들어왔고, 등 뒤로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운기조식을 해라…….’

그리고 자신은 그 말에 의지해 필사적으로 운기조식을 했다.

이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살아남은 걸 보면 성공한 모양이군.’

또 한 번, 그 녀석에게 빚을 졌구나.

몸을 일으키려던 유라는 자신의 몸을 덮은 중의를 발견했다.

그리고 바닥에는 남량이 매일 입고 다니는 연분홍색 도포가 깔려 있었다.

유라의 눈매가 살짝 휘어지며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상의를 훤히 드러낸 남량이 들어왔다.

“어, 일어났냐?”

“자, 잠깐만!”

유라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남량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유라의 손에서 중의를 빼앗았다.

“다 벗은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 하여간 도사란 것들은…….”

남량은 중의를 입은 뒤 유라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유라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

당황한 유라가 숨을 삼켰다. 남량은 태연한 표정으로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손목을 붙잡고 맥을 살폈다.

“됐네. 기혈도 안정되어 있고.”

“……네가 활공을 해 준 덕분이야.”

유라는 남량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다. 네게는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었어. 활공은 시전자도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데…….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 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구명지은의 은혜만 입은 건 아닐 텐데.”

남량이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력을 한번 돌려 봐.”

“내력을?”

유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부좌를 틀고 내력을 돌려 보았다. 직후, 그녀는 깜짝 놀라며 남량을 응시했다. 남량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기분이 어때?”

“이럴 수가……. 내 내력이 이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나 있어!”

“그것뿐일까? 활공이 아주 성공적으로 끝난 덕분에 혈도가 넓어져 운행할 수 있는 내력의 양도 늘어났을 거다. 밖에 나가서 가볍게 검이라도 휘둘러 봐.”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벌떡 일어나 검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가볍게 몸을 푼 다음,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검기가 아지랑이처럼 칼날을 타고 솟아올랐다. 이전보다 더 짙고 뚜렷한 색을 띠고 있었다.

“매화단의 영력이 성공적으로 단전에 자리 잡았어. 하지만 완전히 네 내력과 융화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다.”

“매화단? 매화단은 어떻게 구한 거야?”

“묻지 마. 몰라도 돼.”

유라는 감격한 표정으로 검기가 맺힌 칼날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남량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허리가 접힐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어.”

“잊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기억나게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남량은 가만히 유라를 응시했다. 유라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지금도 같은 생각이야? 포훈을 이기지 못하면 종남산을 나갈 수 없다는 거?”

유라의 표정이 굳었다. 남량이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사저. 사저는 충분히 강해졌어.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을 제외하면 아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

“시간이 지나면, 어쩌면 후계자들마저 뛰어넘을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냉정히 말해 지금은 승산이 없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유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방법이 없어? 당장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

“없다면 당장 종남을 떠난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면 말해 줘.”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성공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그럼 하겠어.”

유라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저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남량은 도관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그의 손에는 화양검이 들려 있었다.

“무학에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다. 그건 곧 자신이 익힌 무학의 오의(奧義)를 받아들인다는 뜻이지. 이 깨달음은 다양한 종류로 나타나는데, 그건 그 사람이 지닌 무학의 성질과도 관련이 있어. 사저의 무공 성질은……. 그래. 마치 불과 같지. 강렬하고 폭발적인 성질이야. 내 경험상 이런 종류의 무학들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늘 비슷해.”

“그게 뭔데?”

“죽음.”

스릉. 남량이 화양검을 뽑아 들었다. 유라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한 순간, 깨달음이 찾아온다. 내 예상이 맞다면 사저가 얻는 깨달음의 조건도 그와 비슷할 거야.”

“그래서?”

“지금부터 나는 사저를 죽일 생각으로 검을 휘두를 거야. 단순히 겁을 주거나 상처를 입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죽일 거다. 그래도 해 보겠나?”

“목숨을 건 도박…….”

유라가 대답을 망설이자 남량은 검을 다시 집어넣으려 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아직은 목숨을 걸 때가…….”

“하겠다.”

유라는 두 손으로 검을 쥐며 천천히 자세를 취했다.

“남북 십성의 후계자를 상대하려면 목숨 정도는 걸어야지. 안 그래?”

“유라…….”

“남 사제. 나는 단순히 포훈을 이기고 싶은 것이 아니야. 그에게 똑똑히 알려 줄 거다. 선택받지 못한 자라도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평생 넘지 못할 벽 따위는 없다는 것을.”

“…….”

“그러니 부탁한다. 한 번만 더, 나를 도와줘.”

유라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 결의를 다진 건가. 그럼 더 말려도 소용없겠군.’

남량은 하는 수 없이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사저가 죽으면 난 동문을 살해한 죄로 화산에서 파문당할 거야. 니 목숨 말고 내 목숨도 걸려 있다고.”

“알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

“좋아.”

유라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남량에게도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도박을 하는가? 그건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녀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살아남아라. 살아남아 더 강해져라.’

남량은 천천히 내력을 끌어모았다. 그의 검이 짙은 분홍빛으로 물들며 돌풍을 동반했다. 유라는 남량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살기에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다. 해낼 것이다.’

남량의 검이 서서히 원을 그렸다. 그리고 분홍빛 검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흩어진 조각들은 곧 하나의 매화 꽃잎으로 변하고, 매화 꽃잎은 점차 하늘을 뒤덮어 갔다.

매화천수검의 9초식, 천류신화 초식이었다.

이걸 정면으로 맞선다면 죽을 것이다.

이윽고 꽃잎이 거대한 해일처럼 유라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유라는 검을 들어 올린 채 자신을 향하는 압도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때 유라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평생 강해질 수 없는가? 웃기지 마라. 무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그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로지 자신에게 달린 법이다.

나는,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으아아!”

그 순간, 가슴 속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유라는 불길을 온몸에 뒤덮은 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매화의 폭풍 속으로 달려들었다.

화악-!

***

유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는 남량이 검을 어깨에 걸친 채 흐뭇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수고했다.”

“어?”

“네 몸을 한번 봐.”

유라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살폈다. 전신을 감싼 내력의 흐름이 마치 불꽃처럼 일렁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삼매진화(三昧眞火).

내력으로 불꽃을 피워 낸다는 경지.

유라는 방금 전, 삼매진화의 경지에 발을 들였다.

“매화천수검의 6초식, 화운용무는 매화홍주검의 정수를 그대로 담고 있지. 그래서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축하해. 보란 듯 성공시켰네.”

“아…….”

“감탄은 나중에 하고,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게 이리 와.”

유라는 그제야 자신의 전신이 온통 검에 베인 상처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