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천음선녀(天陰仙女)(1)
무림맹 별채 검술 수련장.
무더운 여름이라 수련을 하는 무인들은 보이지 않았고, 하얀 무복을 입은 젊은 도사 다섯 명만이 그곳에 있었다.
남량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손에는 검을 빼 들고 두꺼운 철판 앞에 서 있었다.
검은 어깨와 일자(一字)가 되도록 수평으로 쭉 뻗어 있었는데, 검끝에는 물이 가득 담긴 찻잔이 아슬아슬하게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매화오절이 긴장한 표정으로 남량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뭐야, 형님, 언제 시작하세요? 주무시는 거 아니죠?”
“이게 무슨 수련이라고……. 뭘 하는지는 알고 봐야지.”
운휘와 위지혁이 툴툴거리자, 찬야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이런 아둔한 놈들. 날카로운 직감을 가진 내가 보기에는, 저게 수련 그 자체인 것 같다. 그냥 저렇게 가만히 명상을 하는 거지.”
유라는 무덤덤한 투로 대꾸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쏴아아-.
한 차례 바람이 불자, 남량은 가볍게 검을 튕겼다. 그러자 찻잔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매화오절의 시선이 동시에 찻잔으로 향했다.
휘릭. 휘리릭!
그사이 남량은 제자리에 서서 검을 휘둘러 철판에 글자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검술이 마치 서예와 같아 검은 곧 붓이 되고, 남량은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일필휘지로 철판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쇄액. 쇄애액!
몇 차례 검을 휘두르던 남량이 한 곳을 향해 검을 뻗었다.
투웅.
떨어진 찻잔이 조금의 흔들림 없이 검끝에 착지했다.
“아!”
철판을 향해 고개를 돌린 매화오절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철판에 새겨진 매화(梅花) 글자는 한 획(劃)에 화산 검술의 묘리가 들어 있었다. 이 글자 자체가 바로 화산의 정수였다.
찻잔을 들어 바닥에 내려놓은 남량이 눈을 가린 천을 풀어내며 물었다.
“어때?”
“대단해요 형님!”
운휘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남 사제. 나도 가르쳐 줘.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찬야도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제법 칭찬해 줄 만한 솜씨군……. 뭐, 나도 수련하면…….”
위지혁은 최대한 덤덤한 척을 하며 중얼거렸다.
‘동작은 부드럽게, 초식의 연계는…….’
유라는 눈을 감은 채 남량의 움직임을 떠올리고 있었다.
남량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검술의 극의(極意)는 곧 마음의 평정에 있으며, 그건 올곧은 글자처럼 거침이 없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눈을 가리는 것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시야를 차단하기 위함이며, 찻잔을 올려놓은 것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마음이 불안정하다면 글자가 흔들리고, 찻잔의 물이 넘치게 된다.’ 남북 십성, 무당의 검제(劍帝)가 했던 말이야. 검선이 기교(技巧)로, 검성이 힘으로 정점에 올랐다면 검제는 마음의 평정을 이루어 극의에 도달했지.”
“검제가 했던 수련을 우리가 한다? 너무 이른 것 아닐까?”
찬야의 물음에, 남량이 대답했다.
“당장 극의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검의 경지가 상승할 거야. 자, 내가 내주는 숙제는 이 정도다. 지금부터는 각자 수련을 시작해.”
매화오절은 즉시 철판 앞에 자리를 잡고 서서 천으로 눈을 가린 뒤, 남량을 따라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남량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느긋하게 사형, 사저의 수련을 감상했다.
‘날씨 좋네.’
남량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남량의 옆에는 검은 무복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은신술(隱身術)이 제법인데?’
남량은 사내를 향해 물었다.
“누구십니까?”
사내가 가볍게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저는 흑영대(黑影隊) 소속 대원입니다.”
흑영대는 맹에서 운영하는 비밀 조직이다. 흑영대라는 이름의 의미는 ‘맹이라는 태양 아래 검은 그림자[黑影]가 되어 강호를 지켜라.’라는 뜻이었다.
무림맹 건립 직후, 초대 맹주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암중에서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해결했다. 세작(細作)이 되어 정보를 빼내거나 주요 인물을 암살, 또는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마교 대전 당시에는 전투원으로 전장에서 직접 싸우거나 후방 지원을 담당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조직원들은 맹주가 직접 선출하며, 그 정체는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임무하달서로 전할 수 없는 의뢰입니까?”
남량의 물음에, 흑영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영대의 수장께서 매화오절을 부르셨습니다.”
***
흑영대원이 안내한 곳은 무림맹 지하에 위치한 작은 동굴 통로였다.
“흑영대원들이 사용하는 통로입니다. 낙양 곳곳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흑영대원은 각등(角燈)을 들고 앞장을 섰다. 남량 일행은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흑영대의 수장은 지금껏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 여자일까, 남자일까? 아마 음침하게 생긴 할아버지일 거야.”
찬야가 들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너무 뻔한 예상 아니야?”
운휘가 대꾸했다. 그러자 찬야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기하자.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을 열흘간 부려 먹기, 어때?”
“좋아!”
구미가 당긴 운휘는 찬야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남량도 흑영대주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흑영대주 비설(飛雪).
맹주의 측근 중 한 명이자, 중원 최고의 비밀 조직인 흑영대의 수장답게 매우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인재였다. 마교 대전 당시 뛰어난 기계(奇計)로 남량을 여러 차례 곤란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수년간 나를 지독하게 괴롭힌 장본인의 얼굴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되는군. 하하.’
한참을 걸어 일행은 작은 철문 앞에 도착했다.
흑영대원이 암어(暗語)로 보이는 몇 마디를 중얼거리자, 문이 덜컥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젊은 남녀로 보이는 두 명의 대원과 음침한 눈매의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거봐, 내 말이 맞았지? 내기 잊지 마.”
예상이 적중했다고 생각한 찬야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찬야는 노인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흑영대주를 실제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리 가까이서 보니 실로 대인의 풍모가 흘러나오는 것이…….”
그때, 노인이 손을 들어 찬야의 말을 막았다.
“저는 흑영대주가 아닙니다.”
찬야가 당황하며 물었다.
“그, 그럼요?”
노인이 좌측에 선 젊은 여인을 공손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수장이십니다.”
“네?”
찬야와 나머지 매화오절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젊은 여인을 향했다.
여인은 검은 단발에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제법 귀여운 외모에 체격이 왜소했다.
“저, 정말 이 애가……. 아니, 이분이 수장이라고요?”
찬야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묻자, 노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설입니다.”
일행은 하나같이 입을 벌린 채 여인을 응시했다.
‘그 비설이……. 겨우 젊은 아가씨였다고? 이립(而立:30세)도 안 되어 보이는데?’
남량이 충격을 받아 멍하니 서 있는 그때, 찬야가 노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에이, 설마요. 농담두 잘하십니다. 대주님이 이렇게 농담을 잘하시는 분인 줄 몰랐네요. 하하하…….”
그러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찬야의 웃음이 점점 멎어 갔다.
“야……. 아무래도 정말인 것 같은데?”
운휘가 찬야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말했다.
“멍청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유라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냥 멍청하고 눈치 없는 거지. 둘 다야.”
위지혁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굳어진 찬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박수를 치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의 행동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제가 준비한 작은 농담이랄까요. 하하하하하! 하하…….”
그 뒤로 찬야는 연신 죄송하다며 비설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남량의 등 뒤로 다가와 말했다.
“남 사제. 잠시만 뒤에 숨어 있을게…….”
남량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비설을 응시했다.
‘정말인가 보네. 그나저나 참 대단하군. 저 어린 나이에 중원 제일의 정보 집단을 이끌었단 말인가? 마교 대전 당시에는 더 어린 소녀였을 텐데…….’
남량은 만약 교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들을 몇 번이고 궁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한낱 여아(女兒)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나조차도 황당할 지경인데.’
비설이 조용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많이 당황하셨지요?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남량의 뒤에 숨어 있던 찬야가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정말 변장 아닌가요?”
“적당히 좀 해!”
위지혁이 눈살을 찡그리며 만류했다.
비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건 제 얼굴이 맞습니다.”
운휘가 번쩍 손을 들었다.
“잡아당겨서 확인해 봐도 될까요?”
비설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소문대로 재미있는 분들이시군요.”
유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까지 한데 묶으시면 곤란합니다.”
“미안해요. 하하. 그럼 여러분을 소집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설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근 들어 개봉(開封) 외곽에서 젊은 여인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사라진 여성의 숫자는 무려 삼백 명. 그러나 저희 흑영대는 부끄럽게도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본래 흑영대가 알아내지 못하는 정보는 없는 법인데……. 이번 일은 아무래도 누군가의 개입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번 ‘개봉 실종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매화오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남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저희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우선, 소수의 대원들이 변장을 하고 여성들이 실종되는 장소로 향해 일부러 납치됩니다. 그럼 놈들은 대원들을 자신들의 본거지로 데려가겠지요. 그때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인원이 그들을 은밀하게 추적할 것입니다.”
“들키지 않게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추종향(追踪香)을 사용하면 가능합니다. 납치를 당하는 대원들에게는 미리 산공독을 먹일 예정입니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말입니다.”
남량을 제외한 매화오절이 나직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놈들의 본거지는 십중팔구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납치된 대원들은 안에서 적들을 혼란에 빠트림과 동시에 신호를 보내고, 근처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대원들은 곧바로 돌입해 적들을 완전히 소탕하고 납치된 여인들을 구출해 내는 것이 이번 작전의 개요입니다. 적들의 허를 찌르는 일종의 기만전술인 셈이지요. 다만, 이때 납치되는 대원들은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가진 자여야만 합니다. 저는 현재 맹에 머무르는 협사들 가운데, 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량을 가진 이들이 바로 매화오절이라 판단했습니다. 물론 목숨이 위험한 일이니만큼,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물론 목숨이 아깝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비설이 재빨리 남량의 말을 가로챘다.
“다행이군요.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사실 저희가 이미 변장하고 숨어들 인원까지 정해 두었습니다. 숨어들 사람들은 남 소협, 유 여협, 그리고 찬 소협. 이렇게 세 명입니다. 여성들이 실종된 장소는 암야촌(暗野村)이라는 개봉 외곽에 위치한 마을이며, 여러분은 그곳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놈들은 분명 ‘여인’만 납치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남량의 말에 비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그런데 나와 찬야는 남자잖아요. 남자.”
“네. 그러니 여장을 하셔야지요.”
“아, 여장을 하면 될 일…… 네?”
직후, 찬야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남량은 비설을 응시한 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방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여장이라니?”
“네. 제대로 들은 것 맞습니다.”
비설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남 소협과 찬 소협을 정한 겁니다. 두 분은 무예 실력도 뛰어나시지만 무엇보다 젊고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계셔서 여장을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누구 맘대로! 웃기지 말라고 그래! 내가 왜 여장을 해야 하는데! 안 해! 집어치워!”
폭발한 남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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