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얼자(孽子). 위지혁(1)
“협행 의뢰가 왔다고?”
침상에 걸터앉아 한가롭게 당과를 씹던 남량이 물었다.
“네. 의뢰를 보낸 사람은 섬서성 유림(楡林)이라는 곳의 한 가문이래요. 의뢰 내용은 ‘흑도 무리가 집안을 위협하니 무찔러 달라.’라는 내용이네요.”
운휘가 남량에게 내려온 ‘임무하달서(任務下達書)’를 읽으며 대답했다.
의뢰 내용에 따르면 의뢰인 유씨(劉氏)는 유림에서도 제법 이름을 알린 부유한 집안의 가주라고 했다. 유씨의 가문은 중소 가문치고는 꽤나 많은 토지와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보름 전,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던 유씨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납치를 당했다가 풀려난 사건이 있었다.
유씨의 진술에 따르면, 괴한은 한 달의 시간을 줄 테니 그가 가진 재산과 토지를 전부 내어놓으라고 협박했다고 했다.
유씨가 섬서성을 관할하는 무림맹 지부에 도움을 청해 무인들을 파견했으나, 번번이 격퇴당하고 말았다.
분노한 괴한은 유씨에게 열흘 내에 토지와 재산을 내놓지 않으면 집안을 불태우고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유씨의 의뢰는 맹의 본부로 넘어왔고, 맹은 이번 의뢰를 해결할 사람으로 ‘남량’과 ‘위지혁’을 선택했다.
남량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하필 나랑 위지혁을 콕 집어서 선택했을까.”
운휘는 곰곰이 생각하며 대답했다.
“음……. 아무래도 섬서성은 화산파가 위치한 곳이니까요. 화산파의 제자들이 처리하는 게 옳다고 봐서겠죠. 굳이 형님과 위가 놈을 선택한 건…… 잘 모르겠네요.”
남량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걸터앉아 있던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산책 나간다 생각하고 가서 몸이나 풀고 와야겠군. 다녀올게.”
***
남량은 말을 타고 유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위지혁은 반나절 먼저 출발했다고 했으니 이미 도착했겠군.’
유림의 부호(富豪)로 이름을 날린 사람답게 유씨의 저택은 매우 크고 화려했다.
남량이 대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자, 늙은 노종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남량은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의뢰를 받고 온 화산의 도사, 남량이오.”
노종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잘못 왔소!”
남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여기가 유림의 유 대인 저택이 아니오?”
노종은 여전히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우린 화산에게 의뢰를 할 생각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시오!”
노종은 남량을 밀치며 아예 문을 닫으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지?’
도와주려고 왔더니 다짜고짜 문전박대라……. 남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남량은 손을 뻗어 문이 닫히려는 걸 막았다. 노종이 당황해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유나 들어 보지. 왜 화산에는 의뢰를 안 한다는 건가?”
노종은 온 힘을 다해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남량의 완력에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노종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소리쳤다.
“의뢰를 안 하겠다면 안 하는 줄 알아야지, 무슨 이유가 필요해!”
“필요하지. 내가 낙양에서 이곳까지 며칠 길을 왔거든. 그런데 댁들 변덕 때문에 다시 돌아가라고? 누구 맘대로?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 그렇지 않으면 절대 못 돌아가.”
남량은 손에 힘을 주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자 낑낑대며 문을 당기고 있던 노종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내던져졌다.
“으악!”
남량은 당당하게 문턱을 넘으며 말했다.
“내원(內院)이 시끄러운 걸 보니 손님이 온 모양이군. 위지혁인가? 아무튼, 이유는 의뢰주에게 직접 듣도록 하지.”
남량은 노종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내원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넓은 안뜰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중앙에는 화산의 무복을 입은 위지혁이 서 있었고, 그의 앞에는 화려한 비단옷으로 치장한 중년의 남성이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의뢰인인 유계성(劉桂成)인가?’
남량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상황을 살피는데,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나간 첫째 공자가 돌아왔다더니 정말이군. 십 년 만인가? 그새 많이도 컸구만. 신수가 아주 훤해졌어.”
“화산파의 제자라고 했지? 화산파라면 섬서성의 명망 높은 도문이 아닌가. 계집종의 자식이 그런 명문의 제자가 되었으니 출세했군.”
‘집 나간 첫째 공자? 계집종의 자식이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남량은 수군대던 중년 사내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저 사내가 여기 집안이랑 무슨 관계입니까?”
“모르는 걸 보면 이곳 사람은 아닌가 보오.”
중년 사내가 턱을 쓸며 말했다.
“여기 유 대인에게는 본래 사내 자식이 없었소. 정실부인이 있었지만 몇 년째 집안의 대를 이을 후사(後嗣)가 나오지를 않아 유 대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러다 위씨라고 부르던 계집종에게서 사내 자식이 나왔고, 그게 저기 저 청년이오.”
중년 사내가 위지혁을 가리켰다.
“비록 얼자(孽子:첩자식)이지만, 유 대인은 첫째 공자를 키워 장차 대를 잇게 할 생각이었소. 그런데 놀랍게도 정실부인이 몇 년 뒤, 덜컥 사내아이를 출산했소. 적자(嫡子)를 무사히 출산하자 얼자인 첫째 공자는 순식간에 유 대인의 눈 밖에 나 버렸지. 다음 해 위씨가 병사(病死)하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가문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오. 참으로 기구한 삶이지…….”
그런데 자신을 버린 집에 제 발로 찾아왔으니 위지혁의 심정은 아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위지혁은 차갑게 굳은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응시했다.
유계성은 못마땅한 눈으로 위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찾아온 것이냐?”
“……나라고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위지혁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다만 화산의 제자로서 협행을 온 것뿐입니다.”
유계성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화산파는 이름 높은 도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찌 너 같은 천한 것을 제자로 받아들였단 말이냐?”
위지혁이 부득, 이를 갈았다.
“내 몸속에 흐르는 피의 절반이 누구의 것인지 잊었습니까?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당신이 짐승처럼 대하던 과거의 아이가 아닙니다. 예의를 갖추시지요.”
유계성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건방진 놈! 천한 종년의 자식이 옷을 바꿔 입었다고 타고난 신분이 바뀌는 줄 아느냐? 자고로 천한 것들은 주제를 알아야 하는 법이거늘! 뭣들 하고 있느냐! 당장 저놈을 쫓아내지 않고!”
유계성의 말에 하인들이 위지혁을 잡기 위해 우르르 달려왔다.
그러나 위지혁이 한 번 손을 휘두르자 하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위지혁은 분노로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나를 내쫓겠다고? 내가 가면 당신들을 누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제발 살려 달라고 빌어도 모자를 판에!”
덜컹!
그때 정방의 문이 열리며 값비싼 비단옷과 장신구로 한껏 치장한 화려한 차림의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여인은 위지혁을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놈이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설쳐! 그리고, 무림맹에는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너밖에 없다더냐?”
유계성이 손짓으로 여인을 말리며 말했다.
“부인! 가만히 있으시오. 뭐 하러 저런 놈과 말을 섞는단 말이오? 부인의 말대로 맹에 전서를 넣어 도와줄 사람을 새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소.”
유계성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위지혁을 향해 외쳤다.
“네놈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으니 썩 꺼져라! 한 번만 더 들락거리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위지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분노에 찬 악담을 퍼부었다.
“좋다! 어디 두고 보자고! 당신들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그 처참한 모습을 똑똑히 지켜봐 줄 테니까!”
위지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유씨 집안 사람들이 욕을 하며 위지혁을 비난했다.
“종년의 자식이 집안에 들어와 패악을 부리는 꼴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유 부인은 노발대발하며 분을 표출했다.
“그만 들어갑시다. 곧 열흘이니 그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알 수 없소. 무림맹에서 새 인원을 파견할 때까지 버틸 수밖에…….”
유계성은 부인을 살살 달래며 안으로 들어갔다.
소란이 끝나자 구경하던 사람들도 우르르 흩어졌다.
홀로 남은 남량은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어째 골치 아픈 사연에 휩쓸린 것 같은데…….’
***
남량은 해가 지고 나서 객잔으로 돌아왔다.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어두운 1층에 위지혁이 홀로 등잔불 아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소 품위를 입에 달고 살던 그가, 지금은 잔뜩 흐트러진 옷차림을 신경도 쓰지 않고 술을 벌컥 마셨다.
남량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앉았다.
“……예전에 운휘가 네 집안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 그때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군.”
“닥쳐라.”
“너무 부끄러워할 것 없다. 이 강호에 그런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닥쳐! 닥치라고!”
콰앙!
위지혁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외쳤다. 술병이 엎어지는 걸 남량이 잡아 세우며 말했다.
“어떡할 거냐. 의뢰를 받아 흑도 무리를 소탕할 거냐, 아니면 이대로 돌아갈 거냐. 선택해. 네 집안의 일이니, 결정도 네가 해야지.”
위지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주먹을 떨었다.
남량은 태연히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말이 없는 걸 보면 미련이라도 남은 모양이군.”
“……웃기지 마라. 그런 거, 조금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위지혁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
“미처 지우지 못한 옛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가? 자신을 버린 사람이라도 결국 핏줄이라는 건가? 그래서…….”
“이 자식!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위지혁은 벌떡 일어나 남량을 향해 술잔을 던졌다. 남량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술잔을 피했다.
쨍그랑!
날아간 술잔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남량은 거친 숨을 내쉬는 위지혁에게 말했다.
“그럼 선택해. 어떻게 할 건지.”
“나는! 나는…….”
위지혁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때였다. 객잔 밖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이 밤에…….’
남량이 객잔 밖으로 나가자, 검은 무복을 입은 무리가 말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돌린 남량이 눈살을 찡그렸다.
‘저 방향은…… 유씨 가문의 집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유씨 가문을 습격한 흑도 무리들인가?
‘습격이다. 유씨 집안을 쓸어버리려고 하는 거야. 분명 경고한 기간까지는 조금 남았을 텐데……. 하긴, 흑도에게 정직함을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인가.’
남량은 고개를 돌려 위지혁을 쳐다보았다.
위지혁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유씨 가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안 가면 전부 죽을 거다.”
남량이 위지혁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 선택해라. 구할 거냐, 말 거냐.”
위지혁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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