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명탐정 찬야(1)
채채챙! 카캉!
무림맹 연무장에 청량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남량과 찬야는 연무장에서 대련을 하고 있었다.
화산의 검술은 대부분의 검초(劍招)가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남량의 검술이 파도처럼 변화무쌍한 궤적을 그리면서 바람처럼 거세게 몰아붙인다면, 찬야의 검술은 흩날리는 꽃잎처럼 화려하고 번개처럼 빨랐다.
남량과 찬야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검기가 주변에 흩날리며 잔상을 남기고, 검이 마찰하며 생기는 불똥이 사방에 튀었다.
주변 연무장에 있던 무림맹의 무사들은 두 사람의 대련에 감탄하며 곁으로 몰려들었다.
검의 본산인 화산. 그중에서도 제일이라 평가받는 매화천수검과 이십사수매화검법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상당한 견식이 되었다.
무사들은 넋이 나간 채 두 사람의 대련에 깊이 빠져들었다.
카캉!
찬야의 검을 튕겨 내며 착지한 남량이 말했다.
“기량이 한층 늘었구나. 찬야.”
찬야가 능글맞은 미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살살 해 줘. 보는 눈도 많은데.”
쇄애액!
남량은 자세를 낮추며 찬야의 하체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찬야는 허공에 몸을 띄우며 동시에 검을 내리쳤다.
휘리릭.
남량은 공격을 피하며 검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콰과곽!
그러자 매서운 검풍(劍風)이 휘몰아치며 찬야를 덮쳐 왔다.
찬야는 재빨리 검을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내리그었다.
푸확-!
그러자 덮쳐 오던 검풍이 좌우로 갈라졌다.
“남 사제! 날 죽일 셈이야?”
남량은 찬야의 엄살을 무시하고 정면으로 달려듦과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
찬야는 재빨리 대응했지만 남량은 매화천수검 2초식, 옥녀유영(玉女遊泳) 초식을 전개해 검의 궤적을 바꾸었다.
검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찬야는 당황하며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남량은 찬야의 턱 바로 밑에서 검을 멈추었다. 검끝이 찬야의 턱 밑에서 서슬 퍼런 빛을 내뿜었다.
찬야는 꿀꺽 침을 삼키며 검을 든 손을 내렸다.
남량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채앵! 화양검이 칼집 속으로 들어가며 빛이 사라졌다.
찬야는 외마디 신음을 내뱉으며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예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워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고. 남 사제를 보면 항상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느껴. 어떻게 한 번을 못 이기지?”
남량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언젠가 남북 십성에 준하는 검호(劍豪)가 될 수 있을 거다. 네 무공을 이해하는 감각은 그야말로 천재니까. 재목이 충분하니 노력만 뒷받침된다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어.”
찬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이건 반칙이야, 남 사제. 그렇게 예쁜 미모로 나를 홀리려고?”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 가지 잊었군. 일단 네 몸에 붙은 색귀(色鬼)를 떨어뜨리는 게 먼저일 것 같다. 마침 너 같은 녀석들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아. 마교의 정신개조술(精神改造術)이면 충분히 고칠 수 있을 거야.”
찬야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신개조술?”
남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해. 사흘 동안 나무 위에 묶인 채 곡기를 끊고 미친 듯이 두들겨 맞는 거야. 내가 들었는데, 이 방법이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더군. 일종의 만병통치약이랄까. 말 나온 김에 당장 시작할까? 난 언제라도 가능한데…….”
찬야가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도 충분히 두들겨 패고 있거든!”
“네가 아직 진짜 지옥을 몰라서 그래.”
“아니야! 그래도 도사 된 몸으로 어떻게 마도의 술법을…….”
“도사? 네 입에서 도사란 말도 나오냐? 어제도 기루에 놀러 간 주제에? 기가 차는군. 참…….”
남량은 헛웃음을 흘리며 찬야의 옷깃을 잡고 억지로 끌어당겼다.
“따라와. 기절한 채 실려 가고 싶지 않으면.”
“자, 잠깐만! 남 사제!”
찬야는 사흘 동안 신나게 두들겨 맞을 생각을 하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이네. 무림맹에서 보관하던 귀물(貴物)들이 어젯밤 도둑맞았다면서?”
“마침 경계가 소홀하던 시간을 노렸다는군.”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히 멍청한 놈이야. 맹이 움직이면 하룻밤 새 바로 잡아들일걸? 하지만 이미 물건들을 빼돌렸을 수도 있으니……. 곤란하게 되었어.”
“이번 일은 청성파가 의뢰를 맡았다더군. 그들이 과연 찾아낼 수 있을지…….”
이야기를 듣던 찬야는 돌연 반색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내가 찾아올 수 있어!”
***
얼떨결에 같이 의뢰를 맡아 버린 남량은 팔짱을 낀 채 거리를 걸으며 찬야에게 물었다.
“정말 자신 있나?”
“그럼! 이런 일은 내 전문이지. 하하.”
찬야는 남량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남 사제는 이 사형만 믿고 따라와.”
남량은 찬야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계획이 뭔데?”
찬야가 대답했다.
“간단해. 일단…… 검이나 주먹을 쓰지 않아도 돼. 또 귀찮게 돌아다닐 필요도 없어. 거기다 이미 의뢰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준비물은 전부 갖추었고. 바로 우리의 미모와 내 재력이지.”
남량은 더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때, 저만치서 비취색 도포를 입은 젊은 도사들이 가까워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포 왼쪽 어깨에 새겨진 난화(蘭花)가 그들이 몸담은 문파를 짐작케 했다.
청성파(靑城派).
화산이 검의 본산이라면 청성은 도교의 발원지였다.
중원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검파(劍派)이자 도문으로, 제약이 덜하고 풍류를 안다는 점에서 화산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스윽.
남량과 찬야는 자연스럽게 청성파 제자들을 지나쳤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말을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청성의 일대제자, 백상(白想)이라고 합니다.”
“화산의 일대제자, 찬야입니다.”
“동문(同門). 남량입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자, 백상이 말했다.
“얘기 들었습니다. 화산에서도 도둑맞은 맹의 물건들을 되찾아오는 의뢰를 맡으셨다고요?”
“그렇습니다만.”
남량이 대답하자 백상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미리 알려 드려야겠군요. 그 물건은 저희 청성파에서 찾아 돌려놓을 겁니다. 그러니 괜히 헛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마시고 물러나시지요.”
찬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의뢰를 받았는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리고,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함께 찾으면 더 나을…….”
그때, 백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찬야의 말을 끊었다.
“후우. 제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신 모양인데,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괜히 방해만 될 뿐이니까요. 물론 맹에는 화산의 도움도 아주 약간 있었다고 잘 말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저희의 작은 배려입니다.”
남량이 눈살을 찡그렸다.
“그 말은 즉, 화산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백상이 가볍게 웃었다.
“이제야 대화가 통하는군요.”
남량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화산의 명예가 많이도 추락했구나.’
남량은 전(前) 남북 십성이었던 유우화의 은퇴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했다.
남북 십성이 강호에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조금 과장해서 남북 십성을 보유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그 문파의 성세를 좌지우지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종남에는 도군(刀君)이 있고, 청성에도 용제(龍帝)가 있다. 이들이 대놓고 화산을 무시하는 것도, 자신들은 남북 십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남량이 차가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여간에 수준하고는. 한심한 것들.”
백상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말이 거칠군. 입조심하시지요.”
“입조심? 기가 차는군. 남북 십성의 명성이 네놈들 것이냐? 청성파에 들어와 난화가 그려진 도복을 입은 것 외에는 제 손으로 세운 업적 하나 없는 애송이들이 호랑이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꼴이라니…….”
남량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좋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내기를 하자.”
뜬금없는 말에 백상이 미간을 좁혔다.
“내기요?”
“그래. 내기 말이다.”
“갑자기 무슨…….”
“내기는 간단해. 누가 먼저 의뢰를 완수할 것이냐. 당연히 진 쪽은 벌칙을 받아야 한다.”
남량이 고개를 까딱했다.
“어때? 네놈들이 이길 것을 확신한다면 물러설 이유는 없지. 안 그런가?”
백상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왜 그런 유치한 장난에 어울려야 합니까?”
“그래? 그럼 도망치는 걸로 간주해도 되겠어?”
“도망은 무슨! 화산의 앞에서 청성이 왜 도망을 친단 말이냐!”
곁에 있던 다른 제자들이 발끈하며 외쳤다.
“백 사형! 받아들입시다! 어차피 이길 내기 아닙니까!”
“…….”
남량은 팔짱을 풀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럼 제안을 받아들인 걸로 알지.”
고민하던 백상이 나직이 물었다.
“……진 쪽이 받을 벌칙은 뭐지?”
남량이 대답했다.
“무림맹 연무장 앞에서 속옷 바람으로 춤추기. 물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들 시간대에.”
“…….”
일순 제자들이 조용해졌다. 생각만 해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감히 내가 속한 곳을 모욕하고도 무사히 넘길 거라 생각했나? 이 정도는 해야 속이 좀 풀리지. 어때?”
백상이 이를 부득 갈았다.
“좋다. 내기는 반드시 이행해야 할 것이다. 서로의 명예를 걸고!”
남량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찬야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자자, 얘기는 대충 정리가 된 것 같네. 그럼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 소문을 내서 판을 좀 키워 볼까? 자고로 내기는 구경꾼들이 많아야 재미있는 법이니까.”
백상과 청성파 제자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해보자며 씩씩거렸다.
그들은 도포 자락을 거칠게 펄럭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이 물러나자 찬야가 말했다.
“역시 남 사제는 무서운 사람이야. 흐흐.”
남량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방법이 뭔데? 설명해 봐.”
“도둑이 훔친 게 맹의 귀중한 물건들이라며? 손에 쥐고 있으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도둑도 얼른 팔아 치우고 싶을 테지. 그런 물건들을 빠르게, 그리고 비싸게 팔아 줄 곳은 딱 한 군데밖에 없어.”
“그곳이 어딘데?”
남량의 물음에, 찬야가 대답했다.
“흑점(黑點).”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군.”
“그렇지?”
흑점은 간단히 말해 암시장이다.
그들은 온갖 불법적인 경로로 물건들을 반입한 뒤, 비밀리에 경매를 열어 비싼 값에 되팔았다.
당연히 흑점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초대되는 방법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 우선, 흑점에서 여는 경매에 참가할 방법부터 알아내야겠네.”
찬야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을 알지.”
“누군데?”
궁금해진 남량의 물음에, 찬야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따라와. 그럼 알게 될 거야.”
***
찬야가 남량을 데리고 향한 곳은 낙양에서 가장 유명한 기루인 명월루(明月樓)라는 곳이었다.
건물은 창기(娼妓)들이 몸을 파는 곳이 아니라면 왕족이 거하는 곳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했으며, 곳곳에 홍등(紅燈)을 달아 눈이 부실 정도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사방에 신음 소리와 웃음소리, 분 냄새와 술 냄새가 진동했으며, 값비싼 비단옷을 차려입은 사내들이 창기들을 품에 안고 한창 주색을 즐기고 있었다.
남량과 찬야는 명월루에 오기 전, 포목점에 들러 명문가 귀공자처럼 비단옷과 장신구로 한껏 꾸민 채였다.
누가 봐도 눈이 돌아갈 만큼 잘생긴 남자 둘이 기루에 발을 딛자, 자연히 그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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