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은영단(隱映團)(3)
다음 날 아침. 일행은 낙양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
지부장 권혁은 남량 일행에게 감사를 표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남량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말에 권혁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해야 할 일이라……. 허허.”
권혁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남량을 응시했다.
“그래……. 해야 할 일이지. 그 일을 해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고작 일대제자 네 명이 종남파 제자들을 죽이고 무림맹 보초들의 눈을 피한 자객 무리를 상대로 싸워 이겼다.
그리고 약관도 채 되지 않은, 강호 초출의 젊은 도사에게서 목숨을 구원받았다.
전란의 바람이 부는 이 시대에, 이런 늠름한 젊은이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권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암습 사건과 더불어 그대들의 훌륭한 활약상이 알려졌네. 본부에 가면 나름대로 보상이 있을 것이야.”
‘명성!’
위지혁은 화색을 띠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려 지부장의 목숨을 구했다. 결코 가벼운 활약이 아니다.
이걸로 풍수검으로서의 명성은 한층 더 올라갈 것이다.
‘저 천박한 놈들과 같이 묶인다는 게 짜증나지만…….’
위지혁은 남량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혀를 찼다.
권혁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남량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정파인으로서의 긍지를 잊지 말고 살아가게. 당당히.”
긍지라…….
남량은 속으로 냉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빌어먹을 배신자들을 향한 단죄(斷罪).
오직 그것뿐이다.
“그럼 이만.”
“조심히 가게.”
권혁과 노복들은 문 앞까지 나와 배웅했다.
남량 일행은 그길로 서안을 나와 성을 넘어 며칠 길을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림맹 본산이 위치한 낙양에 도착했다.
***
낙양의 가장 번화한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무림맹 본부.
거대한 궁전을 연상시키는 건물과 드넓은 광장. 맹의 구성원이자 남북 십성을 상징하는 깃발이 궁전을 에워싸고 있었다.
뒤편으로 보이는 산 중턱에는 금색 팔작지붕으로 된 궁전이 있었는데, 저곳이 바로 역대 맹주가 기거하는 맹주전(盟主殿)이었다.
“엄청 크네…….”
“화려하다…….”
“가슴이 웅장해지는군.”
남량 일행은 처음 도시에 유학을 온 시골 청년들처럼 정신없이 그곳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때 일행을 마중 나온 학사풍 차림의 중년인이 정중히 예를 갖춰 말을 걸어왔다.
“반갑소이다. 화산에서 오신 도사님들이지요?”
“그렇습니다.”
“소인은 접객당(接客堂)에서 온 사람입니다.”
접객당은 말 그래도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총관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남량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총관이?
후기지수를 맞이하는 자리라면 굳이 총관이 나올 필요가 없을 텐데. 부총관이라면 모를까.
중년인은 남량의 의문을 눈치챈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며칠 전, 서안 지부에서 여러분이 펼친 활약상을 들으시고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저, 정말입니까?”
위지혁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반문했다.
총관은 무림맹의 내정(內政)을 총괄하는 위치다.
외부의 일을 살피는 순찰당(巡察堂)의 수장인 총순찰. 전투 조직인 칠검대(七劍隊)의 수장인 총대주. 무림의 법을 집행하는 호법당(護法堂)의 수장인 대호법. 그리고 내정을 총괄하는 총관.
이 네 위치는 무림맹주를 제외하고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였다. 즉, 무림의 고위 직책이라는 뜻이다.
총관이 직접 관심을 가진다는 건, 후기지수의 입장에서는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남량을 제외한 네 명의 표정은 벌써부터 긴장에 차 있었다.
“자, 따라오시지요.”
“네!”
중년인은 내당(內堂)으로 걸음을 옮기며 맹의 전각들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저기 왼편의 전각은 향련전(饗漣殿)이라 하여 각종 행사나 연회를 할 때 쓰는 궁궐이며, 오른쪽 뒤편 전각은 마검전(摩劍殿)이라 하여 맹의 무사들이 수련을 할 때 쓰는 수련관입니다. 그리고 저기 뒤쪽을 보시면…….”
“이곳입니다.”
문 앞에 멈춰 선 중년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화산의 후기지수들을 모셔 왔습니다.”
“들라 하게.”
중년인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드륵-.
방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간과 각종 예술품들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주인의 취향에 걸맞게 노송이나 벽에 걸린 유명한 서체의 명문(名文)도 눈에 띄었다.
마침 탁자 위에 찻잔을 준비하던 온후한 인상의 노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왔는가?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네. 앉게.”
총관 건옹(乾邕).
뛰어난 행정관이자 맹주의 든든한 참모(參謀).
천마였던 시절, 남북 십성과 더불어 뛰어난 지략가로서 남량의 골머리를 썩게 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이렇게 만나니 감회가 새롭군.’
쪼르륵.
건옹은 손수 일행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자네들 취향을 고려해 특별히 서안에서 공수한 찻잎이네.”
“감사합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건옹이 일행을 응시했다.
“며칠 전 활약상은 잘 전해 들었네. 훌륭히도 해냈더군.”
“과찬이십니다.”
“실은, 자네들이 겪은 사건은 근래 맹에서도 골머리를 썩는 사건이라네.”
건옹은 밑에서 뭔가를 들어 탁자 위에 올렸다.
그것은, 바로 지부를 습격한 흑의인들이 쓴 가면이었다.
건옹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낯설지 않은 가면이겠지?”
“자객들의 가면이군요.”
“그래. 이들이 처음 활동을 시작한 건 두 달 전일세. 첫 암살 대상은 경양상단(景陽商團)이라는 곳의 상단주였네. 맹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곳이지. 그 뒤로 광서 지부장, 파견을 나간 맹의 대원들. 그렇게 차례대로 이자들에게 암살을 당했지.”
“이자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게 골머리를 썩는 이유야. 맹은 정보대인 흑영대(黑影隊)를 움직여 조사에 나섰지만 놈들은 흔적을 지우는 데 탁월하더군. 뭐, 조금씩 틈을 좁혀 가고는 있지만…….”
건옹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아무튼, 더 이상 맹의 인물이 암살당하는 일은 사양일세. 그래서 자네들이 이 일을 맡아 주었으면 좋겠군.”
“…….”
“물론 첫 임무치고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다면 자네들이 얻을 명성과 보답은 기대해도 좋을 것이야.”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쉬운 일은 질색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명성을 쌓고 입지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화산을 손에 넣고 나아가 무림을 먹을 수 있다.
이 모두가 마교와의 결전을 대비해 반드시 필요했다.
조급한 만큼, 남량은 서두르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군.”
건옹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그리고 몇 가지 서신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이건 흑영대에서 보내온 정보일세. 놈들의 암살 대상에 올려져 있는 인물들의 명단을 확보했네. 자네들은 지금부터 이 인물들을 보호하도록 하게. 반드시 놈들은 이들을 죽이기 위해 찾아올 것이야.”
“알겠습니다.”
일행은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서신을 들고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건옹은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 아이로군. 매화검선의 제자가…….”
마교의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 후.
무림맹주는 남북 십성에게 밀명(密命)을 내렸다.
『쓸 만한 후계자를 찾아 키우도록 하라.』
그리고 남북 십성의 후계자는 맹에서도 집중적으로 눈여겨보고 있는 인재들이었다.
매화검선 또한 지금은 은퇴했으나 한때는 검의 정점이라 불렸던 강자.
그의 전승자인 남량 또한, 맹에서는 주시해야 할 인물인 것이다.
“어디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도록 할까.”
건옹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정주 지부대인 저택, 개봉 유성상단 상단주, 안양 공영무관 관주, 그리고…….”
“그래서, 다들 어디로 갈 거야?”
남량은 서신을 확인하며 말했다.
“찬야는 뭐 여자만 있으면 어디든 좋을 것이고…….”
“응.”
“운휘는 공영무관. 아무래도 가장 잘 맞겠지?”
“네, 형님!”
“유라, 너는 아무 데나 상관없나?”
“사저라고 불러라. 망할 놈아.”
“대충 아무 데나 간다고 하고…….”
남량은 살짝 거리를 벌리고 있는 위지혁에게 말했다.
“어이, 물욕.”
“내가 왜 물욕이냐!”
“아까 명성이니 보답이니 하는 말에 좋아 죽더만.”
“으윽……. 저 천박하고 건방진 놈이 감히…….”
“너도 대충 아무 데나 가라.”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
위지혁은 발끈하며 서신을 낚아채듯 받아 갔다.
“그럼 남 사제는 어디로 갈 거야?”
“나는…….”
남량은 손에 든 서신 한 장을 흔들었다.
“여기.”
『허창(許昌) 거상(巨商). 임(任) 대인.』
***
허창의 거상 임 대인은 하남성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중 한 명이었다.
가면 자객 집단의 표적 중 하나가 된 이유에서 알 수 있듯, 임 대인 또한 평소 맹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무림맹에 자금을 조달하며 물적 지원을 했고, 맹은 보답으로 무사들을 보내 임 대인의 상단을 보호했다.
남량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임 대인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시종이 안으로 들였고, 마당에 들어서자 수십 명의 낭인(浪人)들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전부 주인 어르신께 고용된 무사들입니다. 정체불명의 암살 집단에서 어르신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소식은 무림맹으로부터 접해 들었거든요.”
“그렇군요.”
역시, 부유한 거상답게 돈으로 무사들을 고용해 집안을 지키게 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무림맹에서 지원받은 무사들까지. 이 정도면 굳이 자신이 지키지 않아도 충분할 듯한데…….
남량은 구석진 나무 위로 올라가 검을 어깨에 기댄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대략 한 시진 뒤, 모두가 잠에 든 시간.
후우우-.
담장을 넘어 마당으로 연기가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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