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200화 (200/203)

# 200

현세귀환록

200. 신성(2)

그리스와 한국은 6시간의 시차를 두고 있어, 강민과 유리엘이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한국은 아직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대였다. 하지만 지금 둘은 바로 자리에 누울 생각이 없었다.

“일단 결계부터 새로 만들어야겠죠?”

“그래, 아무래도 미케아 차원에서 밀려난 신들이 이미 지구로 온 것 같으니 서둘러야겠어.”

“그럼, 말 나온 김에 바로 들어가죠.”

유리엘의 말에 강민은 고개를 끄덕인 뒤 오른손에 하얗게 빛나는 기운을 두른 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강민의 손짓에 따라 공간의 갈라짐이 생겼고, 그 틈을 통해서 강민과 유리엘이 들어갔다.

사실 마나 축은 아무 곳에서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편의를 위해 마나 축으로 가는 공간과 집의 정원을 연결해 놓은 상태라 둘은 바로 마나 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하얀 공간에는 거대하다 할 수 있는 하얀 기둥이 서 있었다. 그 둘레만 수 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라 가까이에서 본다면 기둥이 아니라 벽으로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였다.

그 기둥을 보며 강민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많이 회복되었군.”

“민이 심어놓았던 기운이 마나 흐름을 견디는 데 도움을 주어서 그런지 회복이 빠르네요.”

둘이 마나 축에서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마나 축은 둘레가 수백 미터 정도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육안으로도 그때보다 확연히 커진 마나 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나 축이 빠르게 복구되는 것을 확인한 강민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회복된다면 설령 주신급 신을 소멸시킨다고 해도 후폭풍에 부러지지는 않겠네.”

“나도 결계를 구축할 때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겠어요. 들어오기 전만 하더라도 방어 결계와 동시에 회복 결계까지 펼치려고 하였는데, 이대로라면 회복 결계는 따로 필요 없겠네요. 방어에만 집중하면 방어력도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구요.”

“다행이네.”

“그럼 바로 시작하죠.”

말을 마친 유리엘은 양손에 마나를 끌어올리더니 기이한 동작의 수인을 맺었다. 동시에 큰 울림이 담은 영창도 시작하였다.

“@#$%@#$%@@#%[email protected]#% #@$^%@#$% @#%@!#%”

간단한 주문이 아니었는지 그녀의 수인과 영창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문을 시작한 지 족히 십수 시간이 넘었을 무렵, 길었던 그녀의 주문은 세 마디의 시동어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알카리드 바라스 카라트!!”

그녀의 주문에 따라 응집된 어마어마한 마나는 세 마디의 시동어와 함께 전면의 흰 기둥으로 쏘아져 나가더니 풀어지기 시작했다.

기둥을 중심으로 풀어지는 마나 중 일부는 기둥 안으로 스며들었고, 나머지는 기둥의 표면과 살짝 거리를 둔 허공에 기이한 문양과 각종 룬문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략 십여 미터 정도의 폭으로 룬문자와 문양을 남긴 마나는 빠른 속도로 수 킬로미터가 넘는 기둥의 둘레를 돌아가며 결국은 하나의 고리를 완성하였다.

그렇게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순간, 마법진은 십여 미터의 폭이 아닌 무한으로 뻗은 것처럼 보이는 기둥의 위와 아래까지 쫘악 펼쳐지면서 눈이 멀 것만 같은 광채를 내뿜었다.

“휴, 이제 끝났네요. 이 정도면 주신급의 신이 와서 장악하려 한다 해도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전에 충분히 우리가 돌아올 시간이 될 거고요.”

“그래, 고생했어.”

“마나 축을 직접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이런 주문은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네요. 이럴 때마다 차라리 마나 축을 직접 사역할 수 있는 신이 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그렇게 되면 그 차원에 묶여 버리니 지금처럼 여행 다니기가 힘들잖아. 뭐 그렇게 해도 차원 여행을 계속하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번거로울걸?”

“호호호. 나도 알죠.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한 것이죠.”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유리엘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리엘, 슬슬 우리도 정착해 볼까?”

정착이라는 말에 유리엘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강민을 돌아보며 반문하였다.

“정착이요? 이 차원에서 정착하자는 이야기인 건가요?”

“아니, 이 차원은 이미 만들어진 지도 오래되었고 다른 차원과 통합 중인 상태이니, 정착하기 좋은 상황은 아니지.”

강민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유리엘은 다른 제안을 하였다.

“하긴 그렇죠. 음……. 그럼 저번에 지나왔던 케스파 차원은 어때요? 아니면 알타리스 차원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강민이 말하는 정착은 단지 신이 없는 차원의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뭐 그런 곳도 나쁘진 않지만, 새로이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지금껏 나와 유리가 모은 창세력(創世力)을 생각해보면 큰 차원은 아니겠지만 중간 규모의 차원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겠죠. 흠……. 새로이 만든다라…….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그런데 이럴 줄 알았으면 본격적으로 창세력을 모아보는 건데, 아쉽네요.”

“하하. 창세력을 모으자고 멀쩡한 차원을 파괴하거나 신들을 소멸시킬 수는 없잖아. 광신(狂神)이나 말세에 접어든 차원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그렇지요.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호호호.”

강민 역시 그녀의 말이 단지 아쉬움에서 하는 빈말임을 알고 있기에 가볍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당장 정착하자는 건 아니니까, 계산해 보고 모자라다 싶으면 조금 더 여행하면서 창세력을 모아도 되겠지.”

“그래요. 민도 고향을 찾았으니, 숙원도 해결되었겠다. 급한 것은 없으니 천천히 생각해 봐요.”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다시 돌아보기로 한 차원들도 많으니까 그곳들도 돌아보면서 생각을 구체화시켜 보자고.”

“간만에 고민해 볼 거리가 생겼네요. 호호. 재미있겠어요.”

* * *

그렇게 강민과 유리엘이 마나 축의 결계를 강화하고 있는 동안, 지금은 폐허만 남은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의 인근에서는 정체 모를 이들의 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곱 명의 남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면을 보며 부복하고 있었는데, 전면에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무슨 이유인지 일곱 명의 남녀는 가만히 엎드리고만 있었는데, 그때 그 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퍼스터,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냐?”

목소리는 엎드려 있는 일곱 명 중의 한 명이 아닌 전면의 어둠 속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두 개의 뿔을 가진 40대 중년인이 목소리가 지칭하는 리퍼스터인지, 그 물음에 더욱 깊이 허리를 숙이며 그가 대답하였다.

“그, 그게 미케아 대륙에서 쏟아져 나온 마나 때문에 마나장이 왜곡되어서 그런지 아직 입구를 찾지…….”

“허. ‘거짓과 기만의 해체자’라는 별칭이 아깝구나. 상급신이라는 것이 이러니 원…….”

어둠 속에서 그를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리퍼스터는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의 뜻을 표시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자 일곱 명 중 가장 앞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미남자가 입을 열었다.

“바르자크 님, 어차피 이 세계의 마나장에는 신의 흔적이 없음을 확인하였는데 조금 여유를 가지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루스틴, 이곳으로 넘어와 처음 했던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어서 마나 축을 장악하고 차원 축과 동조를 끝내야 제대로 된 신력(神力)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이곳엔 신이 없으니…….”

“쯧쯧, 아직도 이해를 못 했구나. 이렇게 차원이 연결된 상태에서 만일 아르포스를 따르는 신 중 하나라도 이곳에 넘어와 우리보다 먼저 차원 축과 동조해 버린다면, 우리는 이곳에서도 아르포스에게 밀려 버릴 수 있을 것이야.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겠느냐!”

루스틴라 불린 상급신은 바르자크의 강한 어조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하였다. 그런 루스틴의 침묵에 바르자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황을 알 만한 녀석인 너조차도 그런 생각을 한다니……. 수천 년간의 봉인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것이냐? 참고로 말해주지. 조금 전에 하급신 중 하나가 소멸되었다. 아직 신성이 깨어나지 못한 녀석이지만, 그래도 신인 만큼 불멸의 권능쯤은 있었겠지.”

하급신이 소멸되었다는 말에 일곱 명의 상급신은 다소 놀란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루스틴이 이 일곱 신의 대표인지 그가 나서서 바르자크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그 말인즉, 이 세계에 신은 없지만, 신의 불멸을 깨뜨릴 수 있는 초월자들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봉인으로 약해져 있는 너희들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서 마나 축을 찾아서 힘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말이지. 이제 리퍼스터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겠다. 루스틴 네가 신성이 깨어난 신들을 총동원해서 마나 축을 찾는 일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하도록 하거라.”

“네, 바르자크 님.”

바르자크의 지시에 루스틴을 비롯한 다른 신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좋다. 그럼 난 마나 축을 찾으면 그것을 장악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찾는 대로 연락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면에 있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을 두르고 있던 바르자크는 사라졌다. 아마 이면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힘을 회복하는데 집중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바르자크가 사라지고 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루스틴이 바르자크의 뜻에 따라 다른 신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리퍼스터를 비롯한 세 명의 신은 그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떠났는데, 붉은 드레스를 입은 미모의 20대 여성과 회색빛 로브를 입은 80대 노인은 이동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 다른 신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미모의 여신이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스틴에게 물었다.

“루스틴 님, 바르자크 님께서 너무 조심스러우신 것 아닐까요?”

“레이나, 아르포스 일당에게 당하신 것이 있으니 당연히 조심스러우시겠지.”

“그렇지만…….”

레이나라 불린 여신이 루스틴의 말에도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노인의 모습을 한 신이 입을 열었다.

“레이나는 모르겠지만, 창세전쟁의 초기에 아르포스 일당은 겉으로는 정의로운 빛의 진영이라 표방하고선 뒤로는 갖은 협잡과 배신을 감행했었지. 애초에 바르자크 님이 마나 축에서 밀려났던 것도 아르포스의 배신 때문이었으니, 지금 바르자크 님의 행동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

노인의 모습을 한 신의 말에도 여전히 레이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반문하였다.

“렉스 님, 저도 그 이야긴 대략 듣긴 했는데…… 그게 그렇게 치명적이었던가요?”

“허허. 레이나는 마나 축에서 나오는 무한한 마나를 받아들여 싸워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루스틴은 짧지만 경험이 있지?”

“네, 제가 바르자크 님이 마나 축을 공유하고 계셨을 때 창조하신 마지막 상급신이었지요. 그 무한한 마나의 힘이 그립군요.”

아련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스틴을 잠시 바라보던 렉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아르포스의 계략에 바르자크 님이 마나 축만 완전히 빼앗기지 않았다면 결코 아르포스 쪽 진영은 우리 쪽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네. 아르포스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마나 축에서 바르자크 님을 축출하려 했던 것이고.”

“그렇지요. 저쪽 상급신의 수장인 데시앙을 만나봤는데, 제가 마나만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면 결코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요. 게다가 우리 쪽의 다른 신들도 바르자크 님의 성향처럼 창조의 권능보다는 궁극을 위한 수련에 집중하였으니 신들 간의 싸움에서 우리가 질 리가 없었지요.”

루스틴의 자신만만한 말투에 레이나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군요……. 저는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기에 우리를 미토스 산맥 너머로 밀어내고 봉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네요.”

“그래, 그러니 어서 바르자크 님의 말대로 마나 축을 찾아. 마나 축만 찾아서 이 차원을 장악한다면 훗날 차원 통합이 되었을 때 아르포스 쪽에게 제대로 복수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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