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현세귀환록
199. 신성(1)
마을의 경계에 서자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과 함께 수백의 시체들이 검은 갑옷을 입은 칼리 칸, 즉 데스나이트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보통 좀비 등의 언데드는 느리게 움직인다는 상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사실 좀비나 구울 등의 언데드는 인간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느리지 않았다.
움직일 필요가 없을 때는 당연히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인간의 생기를 느끼고 달려들 때는 살아 있는 인간보다도 빠른 속도를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지금 데스나이트와 함께 움직이는 시체들은 데스나이트에 영향을 받는지 일반적인 언데드들보다도 더 빠른 움직임으로 견인족의 마을에 달려오고 있었다.
“저놈들입니다! 왔군요. 역시 시체가 늘어났습니다.”
하크마 족장의 말에 따르면 데스나이트를 따르던 시체는 이백여 구 정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제의 공방으로 백여 구 정도의 시체를 처리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언뜻 보아도 300여 구 이상의 언데드가 데스나이트를 따르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데스나이트의 흉흉한 안광을 보던 하크마 족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만일 강민 님께서 와주시지 않았다면 오늘 저희 부족은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겠군요. 우리 종족의 수호전사 세드릭마저 없는 상태에서 도저히 저놈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제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마을의 수호전사인 세드릭이 데스나이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수인족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자신들의 마을을 지키는 수호전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수호전사는 족장인 경우도 있었지만, 수련만 하기 위해서 족장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수련만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크마 족장이 이끄는 마을의 수호전사는 세드릭이라는 자였는데, 그랜드 마스터급의 경지에 있었던 세드릭은 충분히 데스나이트를 일 대 일로 상대할 수 있는 강자였다.
하지만 한 달 동안 데스나이트의 목을 잘라냈지만 데스나이트는 매번 다시 살아 돌아와 하크마 족장의 마을을 공격하였다.
문제는 단순히 살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 돌아올 때마다 데스나이트가 조금씩 강해진다는 것이었다. 처음의 데스나이트는 마스터급 정도만 되어도 상대할 수준의 몬스터였으나, 다시 돌아올 때마다 데스나이트의 무위는 급격히 올라갔다.
결국 데스나이트는 지난주부터 강기를 뿜어내며 자신이 그랜드 마스터급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다만, 세드릭이 그랜드마스터에 들어간 지는 십수 년이 지났기에 데스나이트가 그랜드 마스터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처치하였다.
그러나 데스나이트의 성장은 그랜드마스터에서 멈추지 않았고, 결국 어제 세드릭과 동귀어진을 하며 데스나이트는 세드릭에게 죽음을 선물하였다.
달려오는 데스나이트를 보던 유리엘이 강민에게 말을 건넸다.
“강기로 죽여도 살아나는 데스나이트라니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네요.”
“그래, 이름이 달라서 혹시 데스나이트와 다른 류의 마물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군.”
“다만, 신성(神性)이 깨어나고 있는 중인지 아직 미약한 것 같네요.”
“어쨌든 이렇게 한 놈이 보인다는 것은 다른 녀석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겠지.”
지금 강민과 유리엘이 보는 것은 데스나이트의 겉모습이 아니었다. 그 내면에 있는 본질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데스나이트는 껍데기는 데스나이트이지만 그 본질은 데스나이트라 할 수가 없었다. 미약한 신성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신성이 데스나이트를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게 하고 있었다.
“저런 맹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아직 이지(理智)를 찾지는 못했나 보네요.”
“그래도 빠른 속도로 힘을 찾는 것을 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껍질을 벗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쩔 거예요?”
유리엘이 묻는 말은 저 데스나이트, 아니, 신성의 처리 문제였다. 아무리 약하고 아직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신은 신이었다. 단순히 마물을 죽이듯이 해치울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대화가 통할 상대도 아니고, 오랜 봉인 속에 있다 풀려났다면 이성을 상실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그냥 처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하긴, 하급신이지만 자칫 잘못하다 마나 축에라도 붙어버리면 상대하기가 까다롭기도 할 거니 지금 처리해 버리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네요.”
유리엘이 마나 축을 언급하자 강민이 생각났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아. 그런데 마나 축에 결계는 아직 펼쳐져 있는 거지?”
이렇게 신성이 하나 나타났다는 것은 다른 신성들이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미케아 차원의 신성 중의 하나가 마나 축을 장악한다면 상대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강민의 질문은 만일 미케아 차원의 신이 마나 축에 접근한다면 그것을 알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네, 기본적인 결계는 펼쳐놨어요. 하지만 기본 결계이다 보니 모르고 접근하는 초월자들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이지, 권능을 가진 신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에요.”
유리엘이 현재 마나 축에 펼친 결계는 인간으로서는 뚫을 수 없을 것이지만, 신들이 뚫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결계가 파훼되거나 뚫으려는 시도가 있지는 않았어?”
유리엘이 펼친 결계는 그것이 파훼되거나 공격이 들어오는 경우 그녀가 즉각 알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유리엘은 강민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결계는 멀쩡해요. 그리고 파훼하고자 하는 시도는 없었구요. 하지만 저렇게 신성이 나타난 것으로 봐선 어서 결계를 강화해야겠네요. 최소한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는 결계를 펼쳐야지 제대로 된 대응이 가능하겠지요.”
“그래, 이 녀석만 처리하고 바로 그 일부터 하자.”
강민과 유리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데스나이트와 그 수하들은 하크마의 마을 인근까지 도착하였고, 그들은 대열을 정비하려는 생각도 없이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마을을 덮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전면으로 손을 뻗은 유리엘이 하나의 시동어를 외쳤기 때문이었다.
“하시리스 투로난!”
화르르륵-!
유리엘의 시동어와 함께 그녀의 전면에는 두께 1미터, 높이는 5미터가 넘는 불의 벽이 무려 오백 미터가 넘는 길이로 나타났다.
그렇게 등장한 불의 벽은 등장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전면으로 치닫기 시작했는데, 달려오는 데스나이트와 시체들을 쓸어버리고도 한참을 더 나아가며 도시의 폐건물과 쓰레기로 가득 찬 도로들을 화염으로 정화시켰다.
“커헉…….”
그 불의 벽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검은 갑주를 걸친 데스나이트 하나였다. 나머지 시체들은 뼈마저 화염에 정화되어 가루로 변해 버렸기 때문에 같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화염을 견디느라 바닥에 검을 대고 무릎을 꿇고 있던 데스나이트는 잠시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힘을 되찾았는지 다시 일어나 허리를 폈다.
“광역 마법으로는 완전히 처리하기 힘든가 봐요.”
“아무래도 신성이 깨어나고 있으니 회복도 빠르겠지. 단순한 데스나이트였다면 조금 전 그 공격에 정화되어 버리고 말았을걸?”
“그렇겠지요? 내가 마무리할까요?”
절그럭, 절그럭.
데스나이트가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유리엘이 말했다. 데스나이트는 아직 완전히 이지가 깨어나지 않았는지 조금 전의 마법에도 상대의 실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순히 생명체를 말살하고자 하는 맹목적인 본능만을 따르고 있었다.
“방금 유리가 힘을 썼는데, 이번엔 내가 하지.”
말을 마친 강민은 오른손의 검지를 세워 데스나이트를 가리켰다. 강민의 손가락에 심연의 어둠을 닮은 듯한 검은 기운이 모여들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했지만 신성을 가진 상대였기 때문에 완전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본질을 가르는 검인 암검의 능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지금의 상태에서는 막대한 마나를 담은 광검만으로도 신성을 흐트러뜨릴 수 있겠지만, 본질을 부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신성을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쉭! 퍼억!!
강민의 손가락에 모인 검은 기운은 어느새 레이저 광선처럼 쏘아져 나가 데스나이트의 명치를 뚫었다.
털썩.
이미 저항의 능력을 거의 상실한 데스나이트는 피하거나 막으려 하는 모습도 보이지 못한 채 암검의 능력이 담긴 강민의 지공에 명치가 뚫려 쓰러지고 말았다.
아마 지금까지의 데스나이트라면 쓰러진 채 사라진 뒤 인근에서 부활하여 다시 하크마 족장의 마을을 공격해 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본질인 신성이 깨어진 데스나이트의 시체는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그 몸에서 기이한 위엄을 머금은 회색빛이 나타났다.
지금껏 데스나이트에 깊숙이 숨어 있는 신성을 알지 못했던 하크마 족장도 표면으로 드러난 신성에 눈을 부릅뜨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을 공격했던 상대가 저런 것일지는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타난 빛은 한동안 데스나이트의 시체에 머물러 있다가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빛의 흩어짐과 동시에 데스나이트의 시체를 중심으로 반경 백여 미터에 순간적인 마나 증발이 발생하였고, 공동화(空洞化)된 마나를 채우기 위해서 사방에서 마나의 흐름이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끝났군.”
“아직 각성 전이라 그런지 신의 소멸임에도 후폭풍도 거의 없다시피 하네요.”
태풍과도 같은 마나 폭풍이 불고 있었지만 강민과 유리엘은 후폭풍이 없다는 식으로 언급했다.
실제로 신이 소멸하는 것은 차원에서도 큰일이었다. 만일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신이 소멸하고 그 후폭풍을 제대로 누르지 않는다면, 바다가 뒤집히고 대륙이 끊어지는 후폭풍이 몰아쳤을 것이다.
그것에 비한다면 지금의 마나 폭풍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았다.
“감사합니다. 강민 님, 유리 님.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이 없었다면 우리 종족은 아마 저 칼리 칸에게 모조리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마나 폭풍이 잠잠해지자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한 하크마 족장은 강민과 유리엘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뭐 덕분에 상황을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로서도 잘된 일이지.”
“그러게 말이에요. 여기 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신성이 넘어왔는지도 몰랐을 테고, 혹시 깨어난 신성이 마나 축을 장악한다면 곤란할 뻔했어요.”
“그래, 나중에 이들에게 데려다준 벤자민에게도 치하의 말을 해줘야겠군.”
“그럼 우리 돌아갈까요?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말이죠.”
유리엘이 당장에라도 돌아갈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자, 하크마 족장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미 밤이 늦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쉬시는 것이…….”
“됐어. 마을이나 잘 정비하도록. 만일 정착에 어려운 점이 있으면 아까 만났던 유니온의 벤자민을 찾아. 내가 도와주라 했다면 적극적으로 나설 테니 말이야.”
“아…… 감사합니다. 강민 님."
정착 또한 도와준다는 강민에게 하크마 족장은 거듭해서 고개를 조아리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의 인사에도 아무 말이 들리지 않자 하크마 족장은 고개를 들어 강민을 바라보려 하였는데, 둘은 어느새 사라졌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바람만이 가득하였다.
“정녕 신이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