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현세귀환록
073. 수련(3)
“그럼 마스터에 들기 전에는 밑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 불교 용어에 돈오(頓悟)라는 말이 있는데 들어봤어?”
“돈오?”
아직 한국 문화에 깊은 이해가 있지는 않은 정시아는 처음 들어본다는 식으로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민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최강훈이 대답하였다.
“단번에 깨닫는 것을 뜻하는 말 아닙니까, 형님?”
“그렇지. 시아가 이해하기 좋게 표현한다면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가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지.”
영미 문화권에서 오래 살았던 정시아는 한자어보다는 영어가 더 익숙했기에 돈오는 몰라도 티핑 포인트라는 말은 알 수 있었다.
“아, 티핑 포인트!”
티핑 포인트는 균형을 이루고 있던 어떤 상황이 한순간에 극적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단어였다.
“돈오든 티핑 포인트든 결국 밑의 단계에서 꾸준히 수련을 쌓고 쌓다 보면 어느 순간 대오각성하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지. 물론 모두가 그런 순간을 겪는 것은 아니겠지. 대부분은 사람들은 그런 순간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삶을 마칠 확률이 높지.”
강민의 대답이 아직 정시아에게 와닿지 않았는지 그녀는 재차 강민에게 물었다.
“오빠 그럼 어떤 것을 계기로 돈오 할 수 있는 거야? 특정한 상황 같은 것이 있는 거야?”
정시아의 질문에 강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지금 그녀가 들어봤자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것이지만, 최강훈이나 정시아나 한 번쯤은 들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강민은 말을 이었다.
“그 상황은 모든 사람마다 다를 것이야. 어떤 이는 하늘에서 구름의 운행을 보다가 깨닫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강물의 흐름에서, 어떤 이는 바다에서 깨닫는 경우도 있지.”
“음…… 자연에서 깨닫는다는 말이야?”
“꼭 그런 건 아냐 이렇게 대자연에서 대자연의 마나를 느끼고 깨닫는 경우가 많지만, 명상을 통해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여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럼 지금은 나중에 어떤 식으로 마스터가 되는 깨달음을 얻을지는 알 수 없다는 거네?”
“그래 이 녀석아. 그러니까 지금은 소용없다고 말한 거야.”
강민이 그의 팔에 매달린 정시아의 머리를 다시금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이런 모습은 둘의 첫 만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강민 역시 정시아에게서 브리딘에서 함께 했던 카리나의 옛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럼없이 그녀를 대하였다.
유리엘 또한 그런 정시아의 모습을 재미있어하며 기꺼이 받아주었다.
만약 강민과 유리엘이 그녀의 애교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그런 모습을 애초에 포기하고 예전의 순종적인 부하의 모습이 되었을 테지만, 의외로 강민이 정시아의 그런 모습을 싫어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요즘 부쩍 애교가 늘어난 상태였다.
애교를 부리는 정시아에게 강민이 약간은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진정 더 강해지고 싶은 생각은 있는 거야?”
강민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아차린 정시아는 애교를 부리며 장난치는 것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정시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눈치를 잘 보는 것이었는데, 어릴 적에 고생을 많이 하며 입양아로 자랐기에 눈치를 보는 것에는 도가 트였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의 전환에 눈치 빠르게 맞추어 분위기를 바꾸었다.
“응, 오빠도 알다시피 나 복수해야 하잖아. 강해지고 싶어 정말.”
정시아는 강민의 팔을 놓고 몸을 바로 세워, 강민을 바라보며 눈도 피하지 않고 대답하였다. 자신의 결의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외모는 19살 여고생과 같았지만 강민은 그녀의 눈 속에 있는 아픔을 볼 수 있었다.
“그 복수 내가 해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어때?”
강민은 그녀의 생각을 알아봤다. 복수는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이긴 했지만 과도하게 복수심에 얽매이면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마음에 제약을 걸어 오히려 마스터 이상의 단계로 가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최강훈의 경우가 그 좋은 예가 되었다. 최강훈도 오히려 모든 복수를 해결하고 나니 마음의 족쇄가 풀어져서 성장 속도가 전보다 훨씬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처음엔 수하로서 그녀를 받아들였지만, 그녀의 살가운 모습에 강민은 카리나가 생각났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녀에게 단순한 수하보다는 친밀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민은 충분히 그녀의 복수를 대신해 줄 용의가 있었다.
“아냐. 내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야. 아버지께 저지른 내 잘못은 내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지…….”
정시아는 최강훈과는 달랐다. 복수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그 복수의 과정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강민에게 복수를 부탁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만 들어보아도 그녀의 양아버지 소르빈의 죽음에는 뒷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지만 강민은 굳이 묻지 않았다.
강민이 명령으로 말하기를 원한다면 정시아는 말해주어야 할 것이지만 굳이 이런 관계를 깨면서 그녀에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그녀가 먼저 강민에게 사연을 말해줄 것이다.
이렇게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소소한 재미이고 행복인데, 굳이 이런 상황에서 명령을 하여 그런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소 무겁게 변한 분위기를 느낀 정시아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강민에게 물었다.
“오빠, 근데 강훈이하고 대련을 그만한다면 어떤 식으로 수련해야 하는 거야?”
“일단, 넌 실전 경험이 너무 부족하니 실전을 통한 수련이 필요할 거야.”
“실전이라면 지금 강훈이 하고도 하고 있었는데?”
정시아는 입술을 오므리고 오른손 검지를 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그런 귀여운 모습에 강민은 한 번 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대련 말고 진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실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어차피 지금 강훈이나 너나 서로가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서 대련하지는 않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마 강훈이 녀석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너도 지금처럼 이기긴 쉽지 않을 거야.”
최강훈은 이미 C등급 시절에 B등급의 강자, 슌스케를 해치운 경험이 있었다. 물론 살을 주고 뼈를 깎는 한 수였지만, 어찌 되었든 쓰러진 것은 슌스케였고 살아남은 것은 최강훈이었다.
지금 정시아와의 대련에서도 만약 대련이 아니라 실전이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단지 대련이기에 사용하지 못하는 무공도 있을 것이고, 마음가짐 또한 다를 것이다.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정시아가 최강훈을 이길 확률이 월등히 높을 것이지만 실전을 해보기 전에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묵한 최강훈은 여전히 정시아와 강민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고, 마지막에 강민이 한 말에 아까 전의 실마리가 무엇인지 알아챈 듯 눈을 번뜩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그게 내 강점이고, 시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겠지…….’
마나를 참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고요하고 외떨어진 곳에서 내적으로 침잠해 가는 방식이 있을 것이고, 피가 튀고 뼈가 갈리는 전장에서 마나를 참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강훈은 아직 마나 자체에 집중한다는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강점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 목숨을 걸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세였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실전 속에서 자신의 강점은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 정시아와의 대련은 목숨을 잃을 우려가 없었기에 그런 본능적인 감각이 살아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정시아와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최강훈도 느낀 바가 많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기에 강민은 정시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최강훈에게도 같이 말을 하였다.
“어떠냐? 실전을 한번 겪어볼 각오가 되어 있어?”
“네! 형님!”
“네, 오빠!”
아직 둘은 강민이 말하는 실전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강민이 아이들과 나누는 말을 듣고 있던 유리엘이 심어로 강민에게 물었다.
[수련 마법진을 사용하려고요? 실전이라면…… 리얼 모드로요?]
[그래, 여긴 전장이 없으니 실전을 겪을 일이 별로 없잖아.]
[버츄어 모드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버츄어 모드를 통한 수련은 지금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어차피 환상임을 알게 되는 순간 몰입감도 깨지고,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 애들에게 필요한 실전 감각도 얻기 힘들겠지.]
[음…… 리얼 모드면 애들한테 위험하지 않을까요? 민이 하는 방식대로라면 애들이 간신히 버티거나 약간 버티기 힘든 정도로 할 거니…….]
[이 정도도 못 이겨낸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겠지. 그리고 웜홀의 폭주가 일어나면 피 터지는 전장이 형성될 건데 미리 겪어보는 거지. 지금 이걸 이겨내지 못하고 죽는다면, 어차피 그때도 버티기 힘들 거야.]
[그래도 만약에 죽게 된다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곤란?]
둘 중 하나, 아니, 둘 모두가 죽는다 하더라도 강민과 유리엘에게는 그저 많은 수하 중 하나의 죽음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어차피 영원을 사는 둘과 달리 모든 인간의 삶은 유한하니 그저 조금 빨리 간 것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유리엘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곤란하다고 말한 것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둘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어머니나 서영이나 충격을 받지 않겠어요?]
과거에는 강민과 유리엘 둘만 있는 상황이었고, 둘은 타인의 죽음에 대해 충격을 받기에는 너무도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 당장 최강훈이나 정시아가 목숨을 잃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강민이나 유리엘은 아무런 충격은 없을 것이다.
설령 한미애나 강서영이 죽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강민은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를 지을지언정 충격을 받을 일은 없었다. 물론 한미애나 강서영이 강민이 있는 한 비명횡사할 일은 없었고, 나중에 시간이 흘러 노화로 인하여 생명을 다하게 될 것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미애나 강서영은 그런 충격을 버텨낼 정신력이 없었다. 한미애에게 정시아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녀에게 많은 정을 느끼고 있어, 그녀가 죽는다면 한미애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또한 강서영 역시 최강훈을 좋아하고 있는 눈치였는데 만약 최강훈이 갑자기 비명횡사한다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 자명하였다.
[음…… 그 생각까지는 못했네. 그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내 잔류 마나를 좀 남겨놓을게.]
[그래요. 아무튼 굳이 가족들에게 충격을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말했어요. 그리고 지금 얘네들도 귀엽구요. 호호호.]
유리엘의 말에 강민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마움을 표시했고, 유리엘은 미소로 답을 하였다.
[고마워, 잠시 간과했던 것 같아.]
[고맙긴요. 우리 사이에. 그럼 마법진의 수준은 어느 정도로 할 거예요?]
[시아는 최상급 익스퍼트급, 강훈이는 상급 익스퍼트로 설정하면 될 것 같아.]
[시아는 그렇다 치고 강훈이한테는 무리 아닐까요?]
[처음은 힘들겠지만 그래야 배우는 것이 있겠지. 강훈이 같은 타입은 자기 역량보다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수련하는 것이 성장하기 좋을 거야.]
유리엘과의 대화를 마친 강민은 다시 최강훈과 정시아를 보며 이야기했다.
“일단 오늘 수련은 여기서 마치고 내일부터는 실전 같은 수련을 해보자.”
“네, 오빠!”
“네! 형님!”
아직 둘은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있었다. ‘실전’ 같은 수련이라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아직 간과하고 있는 둘이었다.
그들에게 내일을 기약하고 돌아서니 유리엘이 강민에게 다시 물었다.
“오늘은 서영이가 연수 마치고 오는 날이었죠?”
“그렇네, 벌써 두 달이나 되었구나.”
강서영을 언급하자 정시아는 눈을 빛냈다. 유일하게 강민의 가족 중 만나지 못한 사람이 강서영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오빠, 동생처럼 지내고 있지만 강민과의 관계의 본질은 마스터와 부하였다. 때문에 강서영 또한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자신이 이 집에서 머무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서영이 언니한테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으려나? 흐응.’
실제로는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강서영이었지만 이미 19살 여고생의 본분에 충실한 정시아는 당연히 강서영을 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