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74화 (174/200)

◈ 174화

그의 신언이 대지를 진동하자.

맑았던 하늘에 나팔 소리가 울리듯 천둥이 쳤고.

사사사사삭-

산이 있었던 자리 위로 푸르른 녹지가 생겨나 새로운 신의 탄생을 기뻐하듯 잎사귀를 살랑거렸다.

“저게… 주신.”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하일리가 넋을 놓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자.

옆에 있던 레티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뭐가?”

“분명 그는 신이었지만 인간이기도 했어. 근데 어떻게 오리하르콘으로 완전한 신이 된 건지 모르겠어. 오리하르콘에 우리가 모르던 뭔가가 있었던 걸까?”

“…지금 그게 중요해?”

연신 주신의 눈치를 살피며 숙덕거리는 레티.

“만약 저놈이 우리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는 그대로 죽는 거라고!”

“그건…….”

두 소녀가 자신들의 안위를 두고 소곤거리던 중.

[주신이시여! 드디어 완전한 힘을 얻으셨군요.]

펠기누스가 감격한 듯 소리치며 주신의 앞으로 나아간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이만하면 베논을 상대하는 건 충분하겠어.]

[혹시 불편한 곳이나 이상한 점은 없으신가요?]

펠기누스의 물음에 주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진다.

[너의 걱정을 받아야 할 정도로 난 나약하지 않다.]

[아, 물론이죠! 제가 괜한 말을……. 죄송해요.]

펠기누스가 고개를 푹 숙여 보였으나.

주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두 소녀를 응시한다.

[너희의 염원은 내가 대신 이루어 줄 것이다. 그러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종족의 번식과 안녕에 힘쓰도록 해라.]

“정말… 정말 베논을 소멸해 주시는 건가요?”

[약속하지.]

주신의 신언이 두 소녀의 귓가를 울리자.

하일리는 고개를 숙였고 레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속삭인다.

“정말 주신이 베논을 이길 수 있긴 한 걸까?”

“글쎄……. 하지만 만약 정말 주신이 베논을 꺾는다면… 대륙의 역사가 새로 쓰이게 되겠지.”

두 소녀가 하수인들을 끌고 천천히 자리에서 물러나자.

주신은 엎드려 있던 펠기누스를 보며 말한다.

[마계로 돌아가지.]

* * *

한편, 같은 시각.

마계 제1계층, 베논의 거처.

[…….]

베논을 필두로 열 마리의 대악마와 각 계층의 주인들이 모인 이 자리를 지배하는 건.

오직 깊은 정적과 침묵뿐이었다.

[놈이 완전한 신이 되어 버렸군.]

고목 같은 베논의 메마른 음성이 울리자.

옆에 있던 아몬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고개를 수그린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놈이 베논 님을 이길 일은 없을 겁니다.]

[놈이 아직 인간이었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놈은 완전한 신이 되었다.]

인간은 신을 죽일 수 없다.

하지만 놈이 완전한 신이 됐으니 이제 놈은 그를 죽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셈이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저희가 최선을 다하여 베논 님을 수호할 것입니다!]

아몬을 시작으로 악마들이 앞다투어 자신들의 충성심을 내비쳤으나.

베논은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아가멤논을 상대할 때도 난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내 안에 두려움이라는 게 휘몰아치는 것 같구나.]

[베논이시여…….]

자신감과 패기만을 앞세워 억겁의 세월을 보냈던 베논.

그러한 베논의 입에서 처음으로 약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

대악마들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 * *

일주일 뒤.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굉음이 마계 제1계층을 뒤덮는다.

[크허어어어억!]

늙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 대악마가 벽에 처박혀 몸을 움찔거리자.

[마… 몬…….]

바닥에 누워 있던 아몬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친우의 이름을 불러 본다.

[…….]

하나 마몬의 입에선 미세한 신음만이 흘러나올 뿐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아스타로트, 벨리알… 벨제브…….]

아몬이 이미 쓰러져 있는 대악마들의 이름을 힘겹게 읊던 중.

[이제 너희가 섬겨야 할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나?]

저 멀찍이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흑남… 마신께서 네놈을 그리도 아끼셨건만, 은혜를 저버리고 배신을 해!]

그에 아몬이 남은 힘을 쥐어짜 고성을 지르자.

걸어오는 흑남의 입가에 실소가 걸린다.

[은혜? 배신? 애당초 난 은혜를 입은 적도, 배신을 한 적도 없다.]

[…뭐라고?]

애초에 베논이 그를 흑남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는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건만 은혜를 입지 않았다니?

[애당초 서로 필요에 의해서 잠시 손을 잡았던 것뿐이지. 그 손도 베논이 일방적으로 내밀었던 거고.]

[그게 은혜가 아니라면 뭐가 은혜란 말이냐!]

분노한 아몬의 코에서 불길이 치솟자.

콰작-

흑남은 그의 거대한 몸을 가볍게 짓밟으며 말한다.

[베논을 향한 너희의 충성심은 잘 봤다. 하지만 이제 그 충성은 새로운 마계의 주인에게 바쳐라.]

[네놈을… 섬기라는 거냐.]

[그래. 아니면 아직도 패배를 납득할 수 없는 건가?]

그에 아몬이 눈을 부릅뜬 채 펠기누스를 노려본다.

[펠기누스! 이게 네가 원하던 그림이었나?! 이게 네가 원하던 결과였냔 말이다!]

[그래. 난 오늘 같은 날만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이 더러운 배신자 년이!]

아몬이 발버둥 치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의 바람은 흑남의 발에 짓밟혀 무위로 돌아갔다.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베논을 버리고 새로운 마계의 주인을 섬겨라.]

흑남의 무심한 음성이 그들의 귓가를 울리던 그때.

[그쯤 해라.]

벌판 멀찍이서 베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 *

나는 아몬의 몸에 올리고 있던 발을 거두곤.

힐끔 고개를 돌렸다.

[…….]

수만의 악마 군세를 대동한 베논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호오… 분명 이 모습을 보고 있었을 텐데도 용케 나왔네.’

대악마 열이 별다른 힘도 쓰지 못하고 내게 고꾸라지는 모습을 봤을 터인데도.

도망을 택하는 대신 결전을 택한 그 용기는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랄프!]

나를 부르는 베논의 고성에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입가를 올렸다.

[호오, 이제 더 이상 흑남이라고는 안 하는 건가?]

[고작 둘뿐인가.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군.]

그에 나는 비웃듯 입을 열었다.

[둘이라니?]

내가 슬쩍 손을 까딱이자.

쿠구구구궁-

타이탄과 거대한 방주가 나의 뒤편에 나타났다.

[이제 넷이네.]

[…뭘 원하지?]

[원하다니?]

나의 반문에 베논이 얼굴을 찌푸린 채 소리친다.

[원하는 게 있으니 이 난리를 피운 걸 텐데.]

[원하는 거라……. 원하는 게 있긴 하지.]

나는 베논을 보며 손을 까딱거렸다.

[네 목숨.]

[…….]

내 발언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예상했던 게 현실로 다가왔다고 느낀 걸까.

스르릉-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베논이 결단한 듯 천천히 검을 빼 든다.

‘호오… 검을 바꾼 건가? 조금 특이하네.’

놈은 전에 사용하던 검은 대검 대신.

검신이 구불구불 굴곡진 꽤나 특이한 검을 쥐고 있었다.

‘뭐, 상관없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베논을 보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너도 몰랐겠지.]

피식 맥없는 미소를 흘리는 베논.

[…그때 네놈을 선택하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은 후회가 되는군.]

[후회할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내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베논이 내게 검을 겨누며 싸늘히 대답한다.

[내가 만들어 낸 과오는 내가 청산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삽시간에 자리에서 사라진 베논.

스스슥-

[죽어라.]

언제 이동한 것인지 어느새 나의 등 뒤로 와 있던 베논이 나의 등을 향해 힘껏 검을 내지른다.

그에 내가 잽싸게 손을 위로 까딱이자.

콰과과과과곽-

바다도 틀어막을 정도로 거대한 철문이 생겨나 나와 베논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서걱, 스스슥-

그러나 무언가 베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리더니.

실금이 생긴 철문이 동강 나 천천히 허물어져 내린다.

‘어마어마한 완력이네.’

마신보단 투신이란 칭호가 더 어울릴 정도로 베논의 일격은 매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되지.’

조금 놀라긴 했으나 그뿐이다.

내가 오른손을 들어 베논에게 뻗자.

스스슥-

소리도 기척도 없는, 공허한 검은 구체가 놈을 향해 쏘아져 갔다.

[으음…….]

이번에는 검으로 가르는 대신 회피를 택한 베논.

검은 구체가 놈의 옆구리를 지나 저 멀리 있는 산중에 작렬하자.

스륵-

검은 구체에 삼켜진 산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 버렸다.

[…이미 완성되어 있었나.]

그 모습을 본 베논이 씁쓸히 말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물밑에서 열심히 신도를 늘렸지. 바알의 도움이 컸어. 놈의 능력 덕에 네놈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놈은 죽어서까지 내게 도움이 되질 않는군.]

[애당초 네놈들이 날 재앙의 문의 열쇠로 사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 이 사달이 나진 않았어.]

[…알고 있었나. 네놈을 진작 열쇠로 사용했어야 했는데…….]

놈은 회한과 후회가 느껴지는 한마디를 내뱉곤.

다시금 검을 고쳐 잡는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면, 미래를 바꾸면 될 일이다.]

[바꿀 수는 있고?]

나의 도발에도 베논은 검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개방.]

그러자.

쩌저저저저저적-

‘…뭐야, 저건?’

어째선지 베논의 검이 점차 커다래지더니.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해진 검이 살아 있는 것처럼 아가리를 벌린다.

[소멸해라!]

베논이 괴성을 지르며 있는 힘껏 검자루를 휘두르자.

하늘을 가린 검날이 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씁… 아무래도 피하는 건 어렵겠네. 피하기 어렵다면… 정면 돌파 하면 될 뿐이야.’

화아아아악-

난 창조와 소멸의 힘을 한껏 끌어내곤.

대지로 떨어지는 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억-

검날로 뒤덮였던 하늘에서 거대한 폭발 소리가 울리고.

콰자자작-

하늘에서 검이었던 파편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크으윽…….]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른 탓일까.

[…….]

저만치 밀려난 베논이 금이 가 있는 검과 떨리는 손을 보며 씁쓸히 웃는다.

그사이 다시 난 지상으로 내려가 저만치 멀어져 있는 베논을 보며 말했다.

[뭐, 엄청난 걸 준비한 줄 알았더니 별것 없네.]

[…이미 괴물이 되어 버렸군.]

[그 괴물을 만든 건 너랑 레바논이야.]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지면에서 발꿈치를 뗐다.

사삭-

삽시간에 베논의 앞으로 이동한 나는 검붉게 물든 주먹을 들어.

놈의 턱주가리에 힘껏 내다 꽂았다.

뻐어어어어억-

일격이 정확히 적중했는지, 주먹에서 묵직한 타격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베논의 몸이 하늘로 드높이 치솟았다.

[끝장을 보자.]

나는 날아가는 베논의 몸보다 더 빨리 놈의 옆으로 이동했고.

그대로 놈의 등짝을 발로 힘껏 내려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베논이 꽂힌 자리에서 짙은 흙먼지가 피어오르자.

나는 놈이 누워 있을 자리를 내려다보며 양손을 좌우로 뻗었다.

[이걸로 끝이다.]

나는 손에 모여든 빛과 어둠의 구체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스르르르륵-

소리 없이 소멸해 버린 일대 위로.

풀과 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한다.

‘후우…….’

나는 손을 탁탁 털곤.

꽃밭에 누워 있는 베논을 보며 생각했다.

‘베논도 별것 없네. 긴장한 내가 등신 같아 보일 정도야.’

내가 속으로 고개를 젓던 그때.

사사사사사삭-

갑자기 베논이 있던 자리에서 검은 장막 같은 것이 넘실거리기 시작하더니.

일순간 천지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으로 뒤덮인다.

‘이건 또 뭐야. 마법인가?’

나의 시선조차 가리는 어둠을 봤을 때.

필시 보통 마법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디, 어떤 마법인지 한번… 음?’

뭔가 이상하다.

‘뭐야.’

분명 타이탄과 포세이돈 그리고 펠기누스와 수만의 악마들의 기척은 느껴지는 반면.

어째서인지 베논의 존재감만이 소멸한 듯 사라져 있는 것 아닌가?

‘허 참… 어이가 없네.’

나는 곧 상황을 파악하곤 실소를 터트렸다.

‘설마 그 베논이 도주한 건가.’

감각을 집중하니 저 멀리서 베논의 기척이 언뜻 느껴졌으나.

나는 느긋했다.

‘뭐, 도망친다고 해도 네가 도망갈 곳이야 뻔하지.’

놈은 필시 구원을 요청하러 천계로 향할 터.

‘어차피 천계도 한번 정리를 해야 하니까, 겸사겸사 한 번에 처리하면 되겠지.’

내가 생각을 정리하던 중.

천지를 가리고 있던 어둠이 점차 가시기 시작했다.

스스슥-

이윽고 어둠이 완전히 가시자.

[…….]

모든 악마들이 하늘에 떠 있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스럽겠지.’

그들이 그토록 믿었던 베논이 자리에서 사라졌으니.

저들이 느낄 당혹감은 상상 그 이상일 터였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신 베논은 마계를 버리고 도주했다. 오늘부터 마계는 나 주신이 통치한다.]

[저, 저 마몬은 주신님을 따르겠습니다.]

[저주의 군주 아스타로트, 주신을 섬기겠나이다.]

이미 내게 패배했던 대악마들이 하나둘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하자.

[주신님을 섬기겠습니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악마들도 무기를 버리고 대악마들을 따라 바닥에 엎드린다.

[마계는 나의 것이다.]

이날, 마계는 나의 손에 떨어졌다.

* * *

한편, 천계.

[몰골이 말이 아니네. 너… 설마 패배하고 도망친 건 아니지?]

거지꼴을 하고 찾아온 베논을 본 레바논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패배했다. 놈은 나의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뭐라고?]

베논의 입에서 패배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레바논의 얼굴에 긴장감이 흐른다.

[놈은 곧 천계로 올 거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레바논이 차갑게 대꾸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논은 아랑곳 않고 그녀를 보며 한 가지 제안을 던진다.

[재앙의 문을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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