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악마들 몇이 소멸되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놈들도 인간계를 멸망시키네 마네 하는데 나라고 못 할 건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이곳은 향후 랄프 님이 통치하실 곳인데, 놔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또 대악마들이 내게 저항하려고 할 것 아냐.”
펠기누스가 나의 대답에 반박하지 못하고 어두운 표정을 짓자.
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내 계획이 마음에 안 드나 본데, 그럼 내가 계획을 철회해야 할 이유를 말해 봐. 납득할 만한 이유라면 계획을 철회하지.”
[…….]
하나 펠기누스가 대답하지 못하자.
나는 차갑게 입을 뗐다.
“아무래도 이유가 없는 것 같으니 진행하마.”
내가 목걸이와 팔찌화된 타이탄과 포세이돈을 본모습으로 돌아오게 하려던 그때.
[이유가 있어요! 있다고요!]
펠기누스가 황급히 소리치며 나를 제지했다.
“말해 봐.”
[아직 우리는…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해요!]
‘준비가 안 됐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베논을 소멸하기 위해 아가멤논의 두 병기를 깨웠다.
그뿐인가?
혹시 모를 레바논의 지원을 틀어막기 위해 동맹을 맺었던 정령신들에게 말하여 레바논을 견제하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슨 준비가 안 됐다는 건지 모르겠네.’
“준비가 안 됐다고?”
[그래요. 비록 당신이 아가멤논의 후계자라고 해도, 상대는 그 아가멤논의 힘을 일부 흡수한 존재라고요. 그리고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그가 어떤 힘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요.]
“흠…….”
‘뭐, 펠기누스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냐.’
베논은 나보다 오랜 시간 그곳에 존재해 있었다.
시간이 강함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건 그 정도로 오래 살았으면 무엇을 배웠건 간에 천외천의 경지에 이르렀을 터.
“네 말은 이해했어.”
[정말인가요? 그럼 계획은 철회하시는…….]
“철회를 하기보단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도록 할까.”
나의 말에 펠기누스가 의아함을 내비친다.
[신중하게요?]
“그래.”
상대는 신이다.
그것도 이 세계를 주무르던 신.
‘작은 변수가 있다면 난 아직 인간이라는 거고.’
언뜻 별것 아닌 차이점처럼 느껴지긴 했으나.
그 차이가 어떠한 불확실성을 갖고 올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껏 미뤄 왔지만, 이제는 감행해야겠지.’
나는 펠기누스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신을 소멸하려면 나도 신이 되어야겠지.”
* * *
몇 시간 뒤.
쩌저저저적-
펠기누스를 따라 균열 밖으로 나가자.
깡- 깡-
“키이이!”
“허억, 허억!”
곳곳에서 곡괭이질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이곳은 여전하네.’
페른 왕국에 위치한 오리하르콘 광산.
이곳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 슬슬 시작해 볼…….’
내가 광산을 보며 소매를 걷어 올리던 그때.
“조심해! 방금 파동을 봐선 분명 보통 놈이 아니야!”
“알았어.”
좌측의 길목에서 소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각각 붉고 푸른 머리를 가진 소녀들이 나를 보자.
“아, 후우… 당신이었군요.”
그녀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베논이라도 찾아온 줄 알았나?”
“베논이 아니라도 그만한 파동을 느끼면 누구나 긴장할 수밖에 없어요.”
푸른 머리의 소녀가 볼멘소리를 하자.
펠기누스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들을 응시한다.
[드래곤들과도 인연이 있으셨던 모양이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지.”
내가 어깨를 으쓱이던 중.
붉은 머리의 소녀가 나를 보며 묻는다.
“근데 이곳엔 어쩐 일이죠? 오리하르콘이라면 약속한 대로 계속 정해진 양을 보내고 있었잖아요?”
이제는 내가 주신이라는 걸 알게 된 덕일까.
전과 달리 그녀의 말투는 조금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그야 볼일이 있으니까.”
“볼일이요?”
“그래.”
나는 오리하르콘 광산을 쓱 훑어보곤 느긋이 말했다.
“나는 이곳의 오리하르콘을 모조리 흡수할 거다.”
“…네?”
두 소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한다.
“그러니까… 오리하르콘을 전부 가져가시겠다는 건가요?”
“느낌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봐도 돼.”
나의 대답이 끝나자.
붉은 머리의 소녀가 발끈하여 소리친다.
“뭐라고? 그건 약속과 다르잖아! 하일리, 내가 뭐라고 했어! 놈들을 믿어선 안 된다고 했었잖아!”
“레티!”
하일리가 황급히 붉은 머리의 소녀를 만류했으나.
레티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내게 손가락을 뻗었다.
“네가 신이면 다야? 신이면 더더욱 약속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는…….”
투드득-
그에 나는 말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손가락을 홱 꺾었다.
“아아아악!”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애당초 이 광산의 채굴권은 내게 있었다. 그걸 무시하고 무단으로 채굴한 건 너희고. 나는 너희와 약속을 한 게 아니라 작은 아량을 베풀었을 뿐이다.”
내가 차갑게 소녀들을 응시하자.
하일리가 레티를 뒤로 물리곤 앞으로 나선다.
“맞아요. 지금도 저희는 당신의 배려에 감사드리고 있어요.”
“감사하고 있다고? 네 친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녀도 표현을 저렇게 해서 그렇지, 감사하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하일리가 완곡히 말하자.
‘흠… 일단 이쯤에서 멈출까.’
나는 천천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말해.”
“왜 갑자기 오리하르콘을 다 가져가시려고 하는 건가요? 당신 같은 존재에게 이런 광물은 큰 의미가 없잖아요.”
가져가려는 게 아니라 흡수하려는 것이었으나.
어쨌건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의미가 있고 없고는 내가 정할 일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있어서도 나쁠 것 없는 일이고.”
“나쁠 게 없다고요?”
하일리의 물음에 옆에 있던 펠기누스가 넌지시 대화에 끼어든다.
[그래요. 랄프 님… 아니, 주신께서는 베논과의 일전을 준비 중이에요. 오리하르콘을 가져가는 것도 그 일환 중 하나고요.]
“베논과의 일전…….”
하일리가 몸을 바르르 떨자.
펠기누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베논에게 무참히 죽은 고룡들의 복수를 여기 계신 주신께서 대신 해 주는 셈인 거죠.]
“하지만… 그 베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건가요?”
소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펠기누스의 눈가가 싸늘해진다.
[주신님의 권능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하일리가 말꼬리를 흐리던 중.
뒤에 있던 레티가 어느새 회복한 건지 다시 손가락을 들어 삿대질을 한다.
“솔직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잖아! 베논은 몇백 년이 넘게 마계를 통치했어! 반면 주신인지 나발인지 하는 놈은 탄생한 지 얼마 되지도…….”
콰드드드득-
“으아아아악!”
내가 채 나서기도 전에 레티의 손을 분질러 버리는 펠기누스.
[말조심해라. 아무리 어린 드래곤이라고 해도 참아 주는 데 한계가 있다.]
“펠기누스, 그쯤 해라.”
[네.]
펠기누스가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물러나자.
나는 소녀들을 보며 말했다.
“어쨌건 이제 상황 파악이 됐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희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겠네요. 그래서, 저희는 뭘 도와드리면 되는 거죠?”
하일리의 물음에 나는 빙긋 웃었다.
“딱히. 아, 광산에 있는 너희 하수인들을 치워 주면 좋겠는데.”
* * *
몇 시간 뒤.
“키이익!”
유독 체구가 큰 고블린이 광산의 인부들이 모두 나왔다고 알리자.
레티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광산을 응시했다.
“도대체 뭘 하려고 저러는 걸까?”
“글쎄… 엄청난 병기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오리하르콘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을 것 같긴 한데…….”
하일리도 좀처럼 이유를 유추하지 못하던 그때.
구구구구구궁-
갑자기 지면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러던 그때.
콰자자자자자자자작-
“오…….”
광산 위에 자리하고 있던 커다란 산이 송두리째 들리더니.
점차 구겨진 종잇장처럼 우그러지고 우그러 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세상에…….”
하일리가 나지막이 탄식을 터뜨리자.
옆에 있던 레티가 중얼거린다.
“뭘 그렇게 놀라? 우리도 브레스를 뿜으면 저 정도는 가능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저 힘은 다르다.
단순히 브레스로 산을 없애는 것과 달리.
저 힘에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저게 주신의 힘…….”
“흥. 그렇다고 해도 겨우 저 정도론 절대로 베논을 이길 수 없을걸?”
“…….”
고룡들도 우습게 베어 넘겼던 베논의 무위가 계속 머릿속에 아른거린 탓일까.
레티의 빈정거림을 하일리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던 그때.
우르르르르-
평평해진 지면 위로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고.
그 위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저건… 주신이잖아?”
“산을 없애면서까지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소녀들이 멍하니 하늘 위의 주신을 응시하던 중.
갑자기 그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읍!”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오자.
우르르르릉-
다시금 지면이 크게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아씨… 도대체 뭘 하려는데 저 난리인 거야?!”
두 번이나 손이 작살났음에도 여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한 레티가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던 중.
“잠깐, 저건…….”
“…어?”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상황에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저게 뭐야.”
“오리하르콘이…….”
촤르르르르륵-
어째서인지 광산에 매장되어 있을 오리하르콘들이 바닥에 난 구멍을 타고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 아닌가?
“이게 대체 무슨…….”
두 소녀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레티가 떨리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저, 저것 봐. 진짜로 오리하르콘을 흡수하고 있어.”
스스스슥-
하늘로 솟구쳤던 무수한 양의 오리하르콘들은 빛에 휘감기어 녹아내리더니.
점점 주신의 몸에 스며들어 갔다.
“흡수한다던 게 진짜로 흡수한다는 말이었어?”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아니, 그보다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야?! 오리하르콘으로 무기를 만드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텐데.”
두 소녀가 멍하니 기이한 광경을 응시하던 중.
스스스스슥-
오리하르콘을 흡수하던 주신의 몸에서 두 가지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찬란하면서도 검은 기운은 양립된 세력처럼 갈라져 팽팽히 맞섰고.
그 탓인지 주신의 얼굴에도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설마 저러다 죽는 건 아니겠지?”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다른 오리하르콘 광산을 찾아봐야지. 어르신들의 복수를 하기 전까지 난 절대로 못 죽어!”
레티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던 바로 그 순간.
화아아아아아악-
양립되어 있던 두 빛이 주신을 중심으로 점점 섞여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빛이 있었다.
“으윽…….”
찬란한 광채가 천지를 뒤덮자.
두 소녀는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이윽고 빛이 가시자.
“…….”
천천히 팔을 내리는 소녀들.
“아…….”
오롯이 하늘에 떠 있는 주신을 본 하일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두근-
그저 주신이 하늘에 떠 있는 것뿐이건만.
피부로 느껴지는 압박감과 두려움은 베논을 맞닥뜨렸을 때의 감정 그 이상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잘 모르…….”
두 소녀가 어안이 벙벙해하던 중.
[오오오! 주신이시여! 주신이시여!]
펠기누스만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주신이 있는 방향을 향해 엎드렸다.
그러던 그때.
스윽-
감고 있던 주신의 두 눈이 천천히 뜨이고.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모두가 나의 전능함에 전율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