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그러게 말이야. 그보다 언데드는 좀 많이 만들어 뒀어?”
“누더기 골렘 3천 기와 스켈레톤 1만 7천 구를 완성해 놨습니다.”
“그럼 흑탑에서 지원해 준 5만이랑 합치면 얼추 7만은 되겠네.”
나의 계산을 귀담아듣던 제른이 나지막이 질문을 해 온다.
“페른의 병력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카밀라 공주의 말로는 훈련받은 정예병들이 5만 정도 그리고 차출한 농민들이 10만 정도 된다고는 하는데… 뭐, 실질적으로 10만은 구색 갖추기 정도지 큰 도움은 안 될 거야.”
‘겨우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되는 훈련 기간 동안 얼마나 바뀌겠어?’
아무리 긴급히 차출한 농민들을 훈련한다고 한들, 당장 그들이 정예병으로 탈바꿈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 실질적으로는 5만 정도의 병력이 있는 거군요.”
“10만 병사는… 기적이 따르지 않는 한, 그저 적군이 왕성까지 진격하는 걸 막는 시간 벌이 정도밖에 안 되겠지.”
“하지만 우리의 지원이 있다면 판도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피를 갈망하는 것 같은 제른의 음성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다만 한 가지 명심해 둬야 할 게 있어.”
“말씀하십쇼.”
“이번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군세를 지휘하는 건 네가 될 거야.”
나의 말에 제른의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가 걸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군세를 통제하는 건 흑남께서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휘권을 넘겨주려는 것 같아?”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난 페른에서 포교 활동을 해야 되니까.’
그러나 나는 속내를 숨기고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페른에 도착했다 치자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반겨 줄 것 같아?”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크게 환대 할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만 의외로 그럴 가능성은 낮을 거야.”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제른을 보며 계속 말했다.
“이미 페른을 연합군에 팔아먹기로 작정한 놈들은 물론이고, 우리의 참전을 고깝게 여기는 귀족들도 있겠지. 난 왕성에서 남아 그런 놈들을 상대해야만 해. 그러니 지휘권을 네게 준다는 거고. 누군가는 페른 왕성에 있어야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
“과연…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제른이 감탄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자.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지만, 페른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 가능성도 있으니까. 페른에 도착하거든 그 누구도 믿지 마.”
“물론입니다. 애당초 전 흑남님 외에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나는 제른의 어깨를 툭툭 친 뒤.
“공주! 잠깐만 이쪽으로 와 보시겠습니까?!”
한창 언데드 공방을 구경 중이던 카밀라를 향해 소리쳤다.
“네? 무슨 일이시죠?”
“잠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덜그럭-
나는 스켈레톤 두 구를 불러다가 엎드려뻗치게 한 뒤.
그들의 등짝에 펼친 지도를 올려놨다.
“잠시 지도를 좀 봐 주시겠습니까?”
나는 페른 왕국의 중심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저희 7만 병력은 포털을 타고 이동을 할 예정입니다. 저희가 도착할 곳은 이곳 트리미나스고요.”
“트리미나스면… 수도 바로 옆이네요? 그런데… 그곳에 포털이 있다고요?”
카밀라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나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켄 왕국을 경유하여 가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그럼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그래도 상관없으시다면야 크라켄을 통과하는 쪽으로…….”
“아니요! 아니요! 당연히 포털을 이용해야죠!”
화들짝 놀란 카밀라가 손사래를 친다.
“그렇지요? 어쨌건 7만이라는 숫자가 포털을 타고 넘어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또한, 트리미나스에 대규모의 언데드가 등장하면 사람들의 혼란도 가중될 거고요.”
“그렇죠?”
“그러니 공주께서 미리 본국에 연락을 취해 두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에요. 조치를 취해 둘게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카밀라 공주를 보며.
나는 계속 의견을 피력해 나갔다.
“좋습니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저희의 신분을 증명할 물품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요.”
“아아,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카밀라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내게 내밀었다.
“이걸 받으세요.”
그녀가 내민 건 페른 왕국의 문양이 새겨진 반지였는데.
대충 봐도 평범한 반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왕족만이 지닐 수 있는 보물이에요. 그걸 갖고 가신다면 신분을 증명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봐요.”
“호오… 잘 알겠습니다.”
나는 반지를 주섬주섬 챙기며 질문을 이어 갔다.
“그리고 혹시 유의 사항 같은 건 없습니까?”
“유의 사항이요?”
“네. 예를 들어 연합군에 들러붙으려 하는 귀족들의 이름이라든가, 아니면 우리에게 동맹을 요청하는 걸 반대했던 귀족들의 이름을 알려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나의 말에 카밀라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당연히 있죠! 왜 없겠어요? 모두 알려 드리면 되는 거죠?”
“여기 양피지에 적어 주시겠습니까?”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적어 드릴게요.”
‘설마 이 와중에 정치적 숙적의 이름까지 적는 건 아니겠지?’
사각-
“자, 여기요.”
“으음…….”
난 양피지를 힐끔 살피곤 혀를 내둘렀다.
“생각보다 조심해야 할 대상들이 좀 많은 것 같네요.”
“의심이 가는 놈들의 이름은 싹 다 적었어요.”
“여하튼 일단은 알겠습니다.”
나는 양피지를 잘 챙겨 주머니에 넣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용건은 끝났습니다. 공주께서도 볼일을 보시지요.”
“또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언제든 이야기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카밀라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자.
제른이 넌지시 말을 걸어온다.
“정말 흑남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배척하려는 귀족들이 은근히 많은가 봅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왕성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뒤통수를 맞을 확률이 낮아지지.”
“아무래도 이번 원정이… 쉽지만은 않겠습니다.”
전투에 대해선 항상 자신감에 차 있던 제른이 우려를 보이자.
나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세상에 쉬운 원정이 어디에 있겠어? 다만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될 뿐이야.”
“물론입니다.”
결국 전쟁이라는 건, 서로의 이권을 쟁취하기 위한 아귀들의 무대일 뿐이다.
‘그런 전쟁에 참여하는 나도 아귀인 셈인가?’
시답잖은 생각에 난 속으로 웃음을 흘리다가.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제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지금 네 언데드들은 어디에 있지?”
“아직 북부 지역에 있습니다.”
“그럼 탑주님한테 내가 이야기를 해 놓을 테니까, 출정 전까지 케이탈 요새 앞에다가 집결해 둬. 그래야 출정하는 날 바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이만하면 당장 필요한 일들은 얼추 끝낸 건가.’
이제 남은 일은 나와 관련된 일들을 임시로 인계하는 일 정도일 터.
‘그 부분은 레논 부탑주에게 맡기면 되겠지.’
* * *
내가 페른 왕국으로의 출정을 결정한 지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케이탈 요새 앞.
“그어어어어어!”
커다란 포털 앞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언데드 군세가 진열해 있자.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나지막이 수군거린다.
“이야… 저 숫자 좀 봐? 저게 도대체 몇이래?”
“어디 전쟁이라도 하러 나가는 모양이지?”
“소문 못 들었나? 흑탑이 페른 왕국을 지원한다던데? 아마도 저 병력들이 그 지원병인 모양이네.”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린 가운데.
나는 나가란과 수많은 흑마법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말에 올라탔다.
“좋은 소식과 함께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베논 님의 가호가 함께하길 기원하겠네.”
“그럼…….”
나는 슬쩍 묵례를 하곤 말을 포털이 있는 방향으로 돌리며 소리쳤다.
“출정한다!”
마침내 나의 명령이 지면을 울리자.
뿌우우우우우-
누더기 골렘들이 거대한 뿔피리를 불었고.
척, 척, 척-
7만의 언데드 군단이 포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한편.
[하… 이것들이 진짜로…….]
하늘에서 언데드들의 출정을 지켜보고 있던 레바논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홱 고개를 돌린다.
[아니, 대체 뭘 어떻게 한 건가요?!]
[어떻게 하다니?]
베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자.
레바논은 점점 목청을 높였다.
[대체 흑마법사들이 왜 출정을 하는 거냐고요! 아니! 출정하는 거야 그렇다고 쳐요! 적어도 당신은 흑마법사들을 말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흑마법사들이 출정하는 게 뭐 어떻다고 그러는 거지?]
[…뭐라고요?]
레바논이 가자미눈을 하자 베논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7만의 언데드 병사가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판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도 아니잖나? 저건 그저 하나의 작은 행사 정도일 뿐이다.]
[만약에 흑남이 정말 페른 왕국을 보호하는 데 성공하기라도 하면요? 그땐 어쩔 건가요?]
[걱정이 과하군. 연합군의 숫자는 20만이 넘는다.]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는 베논의 모습에 약이 오른 걸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레바논이 신경질을 내며 소리치자.
베논은 그런 그녀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만약 성공하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일 텐데?]
[그게… 좋은 일이라고요?]
[흑남이 정말 페른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면, 2년 뒤엔 확실히 대륙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것 아닌가?]
베논의 물음에 레바논은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오히려 다른 왕국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쟁을 준비할 거란 생각은 안 드나요?]
[그래 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네가 더 잘 알 텐데?]
아무리 인간들이 전쟁을 대비하고자 한들.
그들이 간접적으로 개입을 하면 결국 대륙은 흑마법사들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페른이 무너지건, 흑남이 연합군의 공세를 막건, 우리는 그저 저 광경을 즐겁게 구경하면 될 뿐이다. 그보다 내기나 하지 않겠나?]
[하…….]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레바논.
하나 그녀는 곧 슬며시 베논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내기죠?]
[페른이 버틸지, 아니면 무너질지 선택하는 거지.]
[당연히… 무너지겠죠. 애당초 성립될 수가 없는 내기 아닌가요?]
레바논의 대답에 베논은 피식 미소를 흘린다.
[그리 말할 거라 생각했다. 여하튼 일단은 전쟁을 즐겁게 구경하도록 하지.]
* * *
한편, 같은 시각.
스스슥-
‘이곳이 페른……. 뭐지?’
먼저 포털을 탔던 난 포털 주변을 살피곤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이 자리에 지부가 있어야 할 텐데?’
지부는 어디로 가고 포털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저 수많은 군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흑남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 공손히 말을 걸어왔다.
“전 페른 왕국 지부의 지부장을 맡고 있는 칼손이라고 합니다.”
“칼손, 반갑군.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이지?”
“대규모의 언데드 병력이 한 번에 이곳에 들이닥치면 소란이 일 것 같아, 미리 페른 왕국 측에 양해를 구해 두었습니다.”
칼손의 대답에 나는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호오… 페른이 꽤나 배려를 해 준 모양이군.”
“카밀라 공주의 명령이 있었다고 다행히 허락을 해 줬습니다.”
‘아아, 그것 때문이었어? 미리 준비를 해 두길 잘했네.’
아무래도 내가 사전에 카밀라를 통해 진행했던 작업이 유효하게 적용된 모양이었다.
“그렇군. 수고했다.”
내가 칼손의 노고를 치하하던 그때.
스스슥-
그어어어어!
포털에서 누더기 골렘을 필두로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으으으…….”
“역겹게 생기긴 했네.”
“설마 갑자기 우리를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멀찍이서 우리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조용한 적의와 두려움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