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73화 (73/200)

73.

‘뭐야. 저 인간은 왜 또 저렇게 웃고 있어?’

한편 나는 어딘가 음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크 교수를 보다가.

그의 눈길이 성녀에게 닿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늙은이… 설마… 성녀를 순교시킬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저 나의 신경과민일 수도 있겠으나.

순교당할 뻔했던 나의 옛 경험들이 나의 피부를 자극해 온다.

‘어우… 저걸 진작 쫓아냈어야 했는데.’

볼드 학장의 만류를 비롯하여 탑주도 아크 교수의 해임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아크 교수는 진작 축출됐으리라.

‘뭐… 그래도 다행이라면 성녀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니 쉽게 죽지는 않는다는 거겠지만.’

나는 돌아서는 아크 교수를 보다가.

눈을 돌려 제이나에게 손짓했다.

“일단 이동합시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려고요?”

“우리는 유물의 마을로 갈 겁니다. 도굴꾼 길드가 모인 곳이죠.”

나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제이나.

“도굴꾼들이 건물도 짓나요?”

“아, 도굴꾼들을 인부로 사용하려는 게 아닙니다. 인부들과 건물을 올리는 데 필요한 자재들은 레논 부탑주가 손을 써 주시기로 했으니까요.”

“그럼 도굴꾼들은 왜 만나려는 건데요?”

제이나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야 그들에게서 구입할 물건이 있기 때문이죠.”

* * *

나는 제이나와 함께 흑카데미를 나가.

흑탑의 동쪽 구역으로 이동하려 했다.

‘며칠 전에 삽과 곡괭이 길드가 도착했다고 했었지. 좋은 기회야.’

그들이 어떤 무덤을 도굴하고 어떤 장비를 꺼냈는지는 모르지만.

개중에 신성력이 있는 물건이 있다면 신성력 착즙기를 이용하여 신성력을 얻을 수 있을 터.

“구경하는 건 좋은데 조금만 서두릅시다.”

내가 제이나와 함께 상가를 빠져나가려던 그때.

“저것 좀 봐요! 저기 문이 열리는데요?”

그그그그그그긍-

갑자기 거대하고도 검은 흑탑의 정문이 좌우로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 저 문이 갑자기 왜 열리는 거야?’

검은 문.

통칭 흑탑의 대문으로 저 문이 열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레논에게서 들었다.

‘분명 전쟁이 났을 때 흑마법사들을 출정시키려고 여는 경우 외에는 없다고 들었는…….’

하지만 벌어진 검은 문 안에서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하자.

나는 걷는 것도 멈추고는 우두커니 서서 그것을 바라봤다.

끼이이익, 끼이이익-

여섯 기의 데스나이트들을 필두로, 그 뒤로 스켈레톤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검은 문에서 나오고 있다.

‘어디서 전쟁이라도 벌어졌나? 왜 갑자기 병력들을 움직이는 거지?’

잠시 의문이 내 머릿속에 팽배했으나.

나는 곧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저건…….’

데스나이트들 뒤로 철창살이 가득한 수레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제른 부탑주였다.

‘유배를 간다더니 그게 오늘이었나?’

내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중.

옆에 있던 남자들이 수레 속의 제른을 보며 저들끼리 말한다.

“이야, 내가 살면서 부탑주가 유배 가는 거는 또 처음 보네.”

“어디로 간다는데?”

“에린도르섬.”

한 남자의 말에 동료들의 표정이 뜨악해진다.

“…에린도르로 보낸다고? 무슨 죽을죄를 지었나? 아니면 탑주의 뺨이라도 후려친 것 아냐? 그래도 부탑주였던 사람을 어떻게 그 섬에 보낼 수 있는 거지?”

“부탑주라서 차마 대놓고 죽일 수는 없으니 에린도르섬에 가서 죽으라는 거겠지 뭐. 높으신 인간들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

“어휴… 난 딱히 제른 부탑주를 좋아하진 않았는데 저건 그냥 인간으로서 안쓰러운 마음이 드네. 그 불구덩이 섬에서 사느니 그냥 죽는 게 낫지.”

남자들이 수레 속의 제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얼마나 환경이 열악하기에 사람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물론 레논 부탑주에게서 에린도르섬의 환경에 대해 대강 듣기는 했다.

‘화산이 계속 활동하는 탓에 마그마에 휩쓸려 죽기 십상이라고는 했다만. 뭐, 어쩌겠어? 제 업보인 걸.’

나는 더 이상 제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권력의 중심에서 쫓겨난 죄인을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그만 보고 이만 갑시다.”

나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등을 돌렸고.

제이나는 철창 속의 제른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헐레벌떡 나의 뒤를 쫓는다.

* * *

유령마가 모는 마차를 타고 달리기를 몇 시간.

나는 곧 도굴꾼들의 거점이라 불리는 유물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믈의 마을은 뭘 하는 곳인가요?”

“말 그대로 도굴꾼들의 거주 구역이죠. 아, 물론 도굴꾼들이 다 이곳에 사는 건 아니지만 대형 도굴꾼 길드들은 대부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죠.”

“오오오오!”

나의 설명에 제이나는 신기하다는 듯 마을을 두리번거리더니.

곧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그런 것치곤 조금 많이 평범해 보이는데요.”

‘그야 그렇겠지. 도굴꾼이라고 뭐 다를 줄 알아?’

“각자의 직업만 다르다 뿐이지 결국 사람 산다는 게 다 똑같은 겁니다. 도굴꾼들도 밥은 먹어야 할 거고 잠도 자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간단히 대답을 하곤 삽과 곡괭이 문양이 간판처럼 박혀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크라켄 왕국의 데칼 기사의 무덤을 도굴하실 유능한 도굴꾼 다섯 명을 모집합니다. 10년 정도 지난 무덤이라 방치되어 있을 확률이 높으니 안전은 보장합니다!”

“드루이드 숲에 들어갈 사람 있나?”

안으로 들어서니 도굴꾼들이 저들끼리 파티를 구하고 있었고.

“흐음… 뭔가 괜찮은 게 없네. 죄다 위험해 보이는 것뿐이고…….”

“어쩔 수 있나? 우리가 하도 파먹어서 요즘은 무덤에 함정들을 설치하는 게 추세인데.”

일부는 게시판에 박혀 있는 양피지들을 훑기 바쁘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 구경 좀 하고 있어요.”

“알았어요.”

나는 제이나를 잠시 로비에 놔두고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물건을 좀 보러 왔습니다.”

“원하는 게 뭐죠? 뭐가 됐건 시중가보단 저렴하겠지만요.”

“신성력이 있는 물건도 있습니까?”

내 물음에 도굴꾼이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본다.

“있기야 하죠. 근데 흑마법사 아니세요? 괜찮겠어요?”

“괜찮습니다.”

“…특이하시네요. 근데 대부분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거라 검증이 안 됐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혹시나 물건을 확인하다 죽으셔도 저희는 책임을 지지 않아요.”

“상관없습니다. 안내해 주시죠.”

내가 재차 손짓하자.

안내원 역할을 맡은 도굴꾼은 나를 길드 하우스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안내한다.

‘워… 물건 많네.’

정원은 무덤에서 꺼내 온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로 가득했고.

도굴꾼 몇이 물건들을 바삐 정리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 신성력이 있는 물건들입니까?”

“그게… 사실 신성력이 있는 물건인지 아닌지는 우리도 몰라요. 신관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다만 저기에 있는 물건들은 신관의 무덤에서 꺼내 온 거니까 잘 살펴보세요.”

“그러죠.”

곧 안내원이 사라지자.

‘어디 한번 구경 좀 해 볼까.’

나는 신성력이 담긴 물건들을 모은 구역으로 이동하여.

눈대중으로 물건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씨! 그건 건들지 말라니까! 잘못 건드렸다가 다 죽는다고!”

“아… 미안, 미안.”

‘저 녀석들은…….’

웬 도굴꾼 놈들이 내 눈에 들어왔는데.

놈들은 다름 아닌 주기적으로 흑카데미에 유골들을 납품하러 왔던 그 녀석들이었다.

‘뒈진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네. 근데 저 새끼들은 운디네의 눈물을 주러 오지도 않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도굴꾼들 앞으로 걸어갔다.

“물건을 좀 사러 왔는데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나의 물음에 도굴꾼들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았고.

“아아, 잘 왔어! 여기에 있는 것들은 전부 레바논의 신관 무덤에서 꺼내 온…….”

“너, 넌…….”

영업용 미소를 짓던 녀석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져 간다.

“너, 어떻게 그곳에서 나온 거냐?!”

그간 대륙에서 계속 지냈던 탓일까.

역시나 녀석들은 내 위치가 달라진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설명하기도 귀찮으니 대강 적당히 맞춰야겠다.’

“어떻게 나오긴요. 교수님의 허락을 받고 나왔죠. 그보다 그쪽들은 왜 요즘 방문이 뜸했답니까?”

나의 물음에 한 녀석이 푸념을 늘어놓는다.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요즘 경쟁자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몰라도 무덤에 유골이 없어!”

“그래, 요즘은 유골을 태우는 게 또 유행이라나 뭐라나. 유골을 못 얻으니 어떡해? 당연히 우리도 흑카데미에 못 들어가지.”

도굴꾼들이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자.

‘그래, 애당초 너희한테 크게 기대도 안 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지난 일이니 그건 넘어갑시다. 그보다 뭘 팔고 있는 겁니까?”

“뭘 팔긴? 흑탑에서 퇴짜 놓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지. 다 팔아야 또 새 무덤을 파러 갈 것 아냐?”

‘당연히 퇴짜를 놓겠지. 흑마법사들이 신성력이 있는 물건에 관심이나 보이겠냐?’

“넌 필요한 것 없냐? 운디네의 눈물이 있긴 한데, 살래?”

한 녀석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건 됐습니다. 그보다 좀 괜찮은 건 없습니까? 제가 학생들 상대로 매점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매점? 그건 또 뭐냐?”

“뭐… 일종의 상점 같은 거죠.”

나의 말에 두 도굴꾼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상점? 하인장이? 그게 가능해?”

“혹시 너… 하인 행세 하는 학생이었냐?”

그들이 당황하여 묻자 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너… 출세했구나! 이야! 잘됐다! 그럼 우리 물건 좀 팔아 줘라! 이 거울은 어떠냐? 매점인지 뭔지 여하튼 그 안에 거울을 놔두면 예쁘지 않겠어?”

‘음… 매점을 꾸며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렇잖아도 어딘가 삭막한 매점을 인테리어 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거울이라도 하나 두면 괜찮을 것도 같다.

“얼만데요?”

“우리 사이도 있고 하니까. 딱 잘라서 10골드.”

“너무 비싼데요?”

내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도굴꾼 중 한 녀석이 내게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인다.

“야야, 좀 봐줘라. 이건 진짜 엄청난 거야.”

“엄청난 거요?”

“그래! 무려 레바논의 신관이 쓴 거울인데. 어때? 딱 봐도 귀티가 좔좔 흐르지 않냐?”

‘귀티는 무슨, 그냥 흔해 빠진 거울 같… 근데 가만…….’

나는 도굴꾼이 내민 거울을 유의 깊게 살펴봤다.

‘이거 어째… 에밀라가 제이나한테 사용하려 했던 그 거울이랑 조금 비슷하게 생긴 것도 같은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손바닥을 펼치며 소리쳤다.

“5골드.”

“뭐?! 5골드?! 이런 도둑놈이 다……!”

“옛정을 생각해서 그 정도라도 부른 건데 싫으시면 말고요. 다른 것도 좀 사려고 했는데 싫으면 어쩔 수 없죠, 뭐.”

다른 것도 산다는 나의 말에 도굴꾼들의 눈이 팽그르르 돌아간다.

“어허,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 5골드가 좋은 것 같다.”

“그렇죠?”

나는 피식 미소를 흘리고는.

도굴꾼들이 정리하고 있던 물건들 중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추려 냈다.

‘이 정도 신성력이 담긴 물건들이면 신성력 착즙기를 돌려서 야무지게 신성력을 뽑아낼 수 있겠어.’

나는 거울 외에도 몇 가지 물건들을 그들에게서 구입하고는.

다시금 로비로 돌아가 제이나를 보며 말했다.

“살 건 다 산 것 같으니 이제 돌아가죠.”

* * *

한편, 같은 시각.

흑탑 인근 대로변에 위치한 한 선술집 안.

“흐음…….”

구석 테이블을 차지하고 경전을 읽기에 여념이 없는 아크 신관장.

그는 테이블에 놓인 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저 경전에 몰두할 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툭-

누군가가 다가와 그의 맞은편에 착석한다.

“허허, 오셨습니까?”

아크 신관장은 경전을 덮고는 착석한 보우렌과 메피르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보인다.

“이 자리에 나오셨다는 건 제 말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고 봐도 되는 거겠지요.”

아크 신관장의 말에 메피르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봐, 늙은이. 착각하지 마. 지금 같은 사태만 아니었다면 너희같이 역겨운 종자들이랑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어.”

“허허, 그러시겠지요. 이해합니다만 제른 부탑주를 그리 놔두실 겁니까? 말이 유배지 실질적으로 사형선고와 다를 게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아크 신관장이 허허롭게 웃으며 묻자.

메피르가 으르렁거리며 반박한다.

“우리라고 화가 안 나는 줄 아나? 나도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구해 드리고 싶다. 이미 대회의에서 결정 난 사안이라고! 무슨 짓거리를 해도 뒤집을 수 없단 말이다!”

“허허, 그럼 결정을 뒤엎으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들의 지휘자가 끌려가는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 겁니까?”

신관장의 질문에 보우렌과 메피르가 차마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던 중.

보우렌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아크 신관장을 노려본다.

“그런데 당신이 왜 부탑주님을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성녀한테 원한이라도 졌습니까?”

“허허, 제 목적과 제른 부탑주의 목적이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지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가는 아크 신관장.

“저는 그녀가 아무쪼록 무사히 순교하여 레바논 님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고 또 원합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늙은 신관장의 대답이 너무 예상 밖이었는지.

두 흑마법사는 멍하니 아크 신관장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뗀다.

“좋아. 헛소리 같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왜 우리를 찾은 거지? 정 성녀를 죽이고 싶었다면 다른 흑마법사들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흑카데미 안의 다른 흑마법사를 포섭하는 게 더 쉬웠을 수도 있잖아?”

메피르의 질문에 아크 신관장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허허, 물론 그런 방법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성녀가 흑카데미에서 자유로이 행동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더군요. 대체 왜 흑탑은 성녀님을 방치했는가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나름의 해답을 찾았습니다.”

아크 교수가 눈을 번뜩이며 두 흑마법사를 응시한다.

“흑탑의 고위 인사들은 성녀님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하기보단 그저 방치하는 걸 택했습니다. 제 말이 틀린지요?”

“…….”

두 흑마법사가 침묵하자 아크 신관장이 계속 말을 이어 간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성녀님의 순교를 시도한 게 바로 제른 부탑주였고, 저는 거기에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른 부탑주의 최측근인 당신들에게 이야기를 꺼낸 겁니다. 제른 부탑주를 제외하면 흑탑은 성녀님을 순교시킬 생각이 없다고 봐야 할 테니까요.”

분명 아크 신관장은 흑탑에 들어온 적도 없건만.

이쪽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것 같은 그의 발언에 두 흑마법사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허허, 그보다 저도 한 가지를 묻겠습니다.”

“…말해.”

“제른 부탑주 말고 다른 흑마법사들 중 성녀님을 순교시키자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아크 신관장의 질문에 두 흑마법사가 무거운 한숨을 토해 낸다.

“찬성한 쪽도 있긴 합니다만 반이 넘게 반대했습니다.”

“허허… 그렇군요. 그런데 제른 부탑주는 어째서 성녀님을 순교시켜 드리지 못한 겁니까?”

“그건… 우리도 잘 모릅니다. 다만…….”

이걸 말해야 할지 말지 보우렌이 잠시간 머뭇거리자.

메피르가 무거운 표정으로 대신 아크 신관장의 질문에 답한다.

“제른 님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성녀가… 괴물 같은 힘을 갖고 있었다고. 오우거 같은 몸에서 나오는 완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었지.”

“성녀님이… 오우거? 괴물 같은 힘을? 허허… 그럴 리가 없을 터인데…….”

아크 신관장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두 흑마법사가 의자를 바짝 당긴다.

“뭐 알고 있는 게 있나?”

“허허… 제이나 성녀님은 역대 성녀님들 중에서도 가장 레바논 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성녀라는 평이 교단 내에서도 지배적이었습니다.”

“은총을 덜 받았다는 말은… 신성력이 기존 성녀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허허, 그렇습니다.”

아크 신관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계속 말을 이어 간다.

“페른 왕국에 역병이 창궐했을 때도, 페이크 왕국에 발생한 큰 지진으로 대량의 부상자들이 속출했을 때도 그녀는 기존의 성녀님들과 달리 기적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성녀님에게 제른 부탑주가 당했다니…….”

말꼬리를 흘리던 아크 신관장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두 흑마법사를 응시하며 말한다.

“허허, 제른 부탑주님께서 약하신 건 아닐 터이니 변수가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군요. 예를 들어… 흑남이라거나.”

“당신의 말은 흑남이 제른 부탑주님을 꺾었다는 말입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아무리 흑남이 베논 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그렇지,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이면 그땐 네 혓바닥부터 잘라 버리겠어.”

두 흑마법사가 발끈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크 신관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진정시킨다.

“허허, 가당치 않은 일이라니요? 흑남은 펠기누스의 계약자입니다. 대악마라면 부탑주를 제압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제른 님께서는 펠기누스에 대해선 언급하신 게 없으셨습니다.”

두 흑마법사가 반박하자 아크 신관장은 다시 생각에 잠긴다.

“흠… 펠기누스가 없었다면 흑남이 부탑주를 이길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크 신관장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난다.

“허허, 흑남이 펠기누스 없이 부탑주를 이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르긴 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제껏 힘을 숨기고 살던 제이나 성녀님과 함께 제른 부탑주를 제압한 것이지요. 그럼 제른 부탑주가 당한 것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아크 신관장의 의견이 그럴싸하다고 여긴 걸까.

두 흑마법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확실히… 당신 말대로 성녀가 힘을 숨기고 살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허허, 이렇게 의견만 말하다가는 끝이 없겠습니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크 신관장.

그는 두 흑마법사를 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허허, 누가 제른 부탑주를 제압했건 이제 와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일단 부탑주부터 구출을 하지요. 그런데 부탑주를 구하면 파멸 병단을 기용할 수 있는 건 확실한 겁니까?”

“당연히 가능하지. 애당초 우리 파멸학파는 흑탑이 아니라 제른 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허허, 그럼 제른 부탑주부터 먼저 구하지요.”

아크 신관장이 활짝 미소를 보이자.

두 흑마법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근데 우리야 그렇다 쳐도 당신은 흑탑과의 공존을 원하는 쪽 아니었어? 성녀가 죽으면 필연적으로 전쟁이 발발하게 될 텐데 무슨 생각이야?”

“허허, 맞습니다. 저는 공존을 원하지요. 그렇기에 교황님의 명령을 기꺼이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아크 신관장의 얼굴에 감동과 환희의 미소가 걸린다.

“성녀님이 순교하심으로 발발할 전쟁에서 수많은 성기사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순교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공존도 좋지만 수많은 영혼들이 영적 구원을 얻는 것이 제게는 더 큰 사명이지요. 허허…….”

“어… 그렇구만. 여하튼 일단 움직이자고. 그리고 아직 완전히 댁을 믿는 게 아니니까 이번 일에 선두로 나서 줘야겠어.”

“허허, 그러지요.”

* * *

일주일 뒤.

“어이! 거기! 놀지 말고 빨리 목재 가져와!”

“예! 지금 갑니다!”

‘좋구만.’

다져진 땅 위로 들어서는 구조물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건물의 뼈대만 올리고 있지만 저게 완성이 되면 흑립 유치원도 본격적으로 가동할 수 있겠지.’

이미 레논 부탑주가 흑탑의 흑마법사들을 비롯하여.

각 가문의 유지들에게도 열심히 홍보를 하고 있다고 하니 흑립 유치원의 입학식 날이 기대될 정도다.

‘아무리 못해도 몇백 명은 모일 거고 그 애들이 매점이랑 흑카지노를 열심히 이용해 주면 흑마력 펌핑도 크게 되겠어. 크으…….’

내가 달달한 미래를 꿈꾸며 속으로 탄성을 지르던 그때.

“흑남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볼드 학장이 소리치며 허겁지겁 달려온다.

‘아씨… 무슨 툭하면 문제가 생겨?’

“또 무슨 일인데? 요즘은 뭐 큰일이 나는 기간인가? 뭐만 하면 큰일이 나? 그래서 이번에는 또 뭔데?”

“어떤 놈들이 에린도르섬으로 유배 가던 제른 부탑주를 탈출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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