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제른 부탑주의 형벌이라……. 솔직히 정말 부탑주에게 징벌을 가할지 의문이었는데, 부탑주라고 해도 가차 없구나.’
내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중.
제이나가 내게 질문을 해 온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예?”
“며칠 전을 생각하면 정말 아직도 피부가 오싹거려요. 그 부탑주라는 사람 때문에 제가 죽을 뻔했잖아요. 그러니 저도 가서 그 사람이 어떤 벌을 받나 지켜보고 싶어요.”
제이나가 이마를 잡은 채 몸을 휘청거리자.
‘…뭐요? 죽을 뻔해? 제른이 그쪽한테 죽을 뻔했던 걸 잘못 말한 건 아니지?’
나는 어이가 없어 그저 실소를 흘렸다.
‘진짜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냥 속았겠어.’
어쩌면 성녀라는 작자가 저렇게 철면피를 깔고 뻔뻔하게 연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저런 메소드 연기를 펼쳤으니 최측근인 에밀라도 몰랐을 수밖에 없지.’
내가 그저 속으로 웃고만 있던 그때.
볼드 학장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한다.
“성녀의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건 그녀 또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니 대회의에서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나는 성녀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대회의에 참석시켜 드리는 대신 쓸데없는 말은 삼가 주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이쪽에 불리한 말을 하셨다간 일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요.”
“물론이죠. 설마 제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봐요?”
제이나가 배시시 미소를 보이자.
‘어우… 적응이 안 되네.’
나는 홱 등을 돌려 무심히 말했다.
“…일단 가시죠.”
* * *
흑탑의 회의장 안.
‘대회의라 그런지 오늘은 사람들이 유독 많네.’
기존의 주요 인사들을 비롯하여 각 학파에서 100명씩 흑마법사들이 회의에 참석한 탓일까.
회의장 안은 평소보다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대회의를 시작하지.”
적막만이 흐르는 가운데 나가란 탑주가 좌중을 보며 입을 뗀다.
“규율을 어긴 죄인을 데려와라.”
탑주의 말이 끝나자.
끼이이익-
열린 회의장 문 사이로 제른이 흑마법사들에게 끌려온다.
‘저 목걸이는 또 뭐야?’
내가 제른의 목에 달린 가시 돌기 같은 것을 바라보던 중.
제른을 회의장 중심에 무릎 꿇린 흑마법사가 양피지를 펴고 내용을 읽기 시작한다.
“죄인 올러티 제른, 너는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레바논 왕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려 하였으며 숭고한 교육의 장소인 흑카데미에 무단 침입까지 하는 큰 범죄를 저질렀다. 이에 대해 이의가 있나?”
그러자 좌중을 보며 픽 웃는 제른.
“큰 범죄라고?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는데……. 어이, 거기! 누가 대신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저, 저 고얀 놈 같으니……. 네 행동 하나 때문에 흑탑에 큰 위기가 닥칠 뻔했는데도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고?!”
악마학파의 한 노마법사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자.
제른은 그런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위기? 위기라고 했나? 천만에! 성녀를 죽이는 건 흑탑에 있어 기회이자 축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 행동이 죄악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추, 축복이라고?! 저 전쟁에 미친 놈이! 네놈은 그저 전쟁터에 나가고 싶어 할 뿐인 미친놈이야!”
“아아, 그래? 내가 미쳤다고? 푸하하하하하하하!”
제른은 회의장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다가.
입에 비웃음을 건 채 좌중을 보며 묻는다.
“미친 건 네놈들인 것 같은데. 어떻게 네놈들은 성기사들, 사제들과 웃고 떠들 수 있는 거지? 어떻게 흑마법사의 근본을 버리고도 아무렇지 않은 낯짝을 보일 수 있는 거냐?”
“…….”
제른의 물음에 순간 회의장 안이 고요해진다.
“너희 중 누구 하나 내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너희는 흑마법사가 아니야. 그저 권력과 잇속을 챙기기 바쁜 기회주의자들이지.”
“더 이상 못 들어 주겠군. 탑주님! 놈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시지요!”
그의 일갈에 여러 흑마법사들이 분통을 터뜨렸으나.
제른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간다.
“왜 레바논 놈들이 흑남 축하 사절단으로 성녀를 보냈을까? 한 번이라도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본 적은 있나? 그저 레바논 왕국이 우리를 그만큼 친한 동맹이라고 생각해서 성녀를 보낸 거라고 생각한 병신이 있다면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군.”
“벼, 병신?!”
“왜 레바논 쪽에서 성녀를 보냈을까? 정말 흑남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그래! 놈들은 우리가 성녀를 죽이길 바라며 성녀를 이곳에 보낸 거다! 놈들도 우리와의 전쟁을 원하고 있다고!”
울부짖음에 가까운 제른의 포효에 좌중은 압도되어.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하지만 제른 당신의 말대로라면 더욱 성녀를 건드려선 안 됐던 것 아닙니까? 성녀를 죽이면 결국 레바논 왕국이 원하던 꼴이 되는 거잖습니까?”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전쟁은 나 역시 원했던 거다. 그리고 너희가 성녀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전쟁은 반드시 일어난다.”
제른의 말이 끝나자 나는 생각에 잠겼다.
‘흠… 제른이 전쟁에 미친 놈이긴 해도 어느 정도 현실성이 없는 건 아니야.’
나 또한 레바논 왕국 쪽에서 성녀를 보내왔을 때만 해도.
레바논 왕국이 전쟁을 원하는 건가 싶었으니까.
‘물론 제이나가 엄청난 괴력녀니까 레바논 왕국 입장에선 자신만만하게 검은 대지로 성녀를 파견 보낸 걸 수도 있지. 하지만…….’
제이나가 레바논의 오함마라는 사실은 제이나의 최측근인 에밀라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레바논 왕국의 중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솔직히 보면… 몰랐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긴 해.’
그렇다면 레바논 왕국은 정말 성녀가 죽길 바라며 그녀를 검은 대지로 보낸 걸지도 모른다.
‘전쟁이라…….’
난 제른을 좋아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싫어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부분은 깊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긴 하겠어.’
만약 정말 레바논 왕국이 전쟁을 바라고 성녀를 보낸 것이었다면?
‘전쟁을 막기 위해선 전쟁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로브를 쓴 채 그저 회의를 관전하는 제이나를 보며 생각했다.
‘저 정신 나간 괴력녀를 암살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내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중.
“그만하면 충분하다.”
좌중의 의견을 듣던 나가란 탑주가 입을 뗀다.
“올러티 제른을 부탑주 자리에서 파면하고 에린도르섬에 5년간 유폐한다.”
“…….”
탑주의 선언에 제른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타, 탑주님…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됩니다!”
“제른 부탑주는 얼마 전 기랄 군도에서 바알의 추종자들을 성공적으로 토벌하였으며 대마녀의 수급을 챙겨 오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무쪼록 그 공로를 생각하시어 형벌을 낮춰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제른의 최측근인 보우렌과 메피르가 다급히 탑주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단호히 고개를 젓는 나가란 탑주.
“그 공로를 감안하여 내린 형벌이다. 이의는 받지 않겠다.”
“…….”
보우렌과 메피르가 말을 잃자.
나가란 탑주는 고개를 돌려 제른을 보며 묻는다.
“더 할 말이 있나?”
“나는 도저히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 대체 당신은 어느 쪽이지? 뭐, 아무래도 좋아. 네놈들은 오늘의 선택을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반드시! 반드시!”
제른은 집행자들의 손에 끌려 밖으로 나갈 때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고.
쾅-
회의실의 문이 닫히고서야 비로소 회의장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후우… 이제 다 끝난 건가.’
정말 길고 길었던 회의였다.
‘그보다 제른 부탑주가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조만간 새로운 파멸학파의 부탑주를 선출하려 하겠네.’
내가 향후 흑탑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하던 중.
레논 부탑주가 나가란 탑주를 보며 묻는다.
“그보다 탑주님, 제른이 성녀를 암살하려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암살을 저지한 이에게는 응당 그에 합당한 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논 부탑주의 말이 끝나자.
“그러고 보니 누가 암살을 저지한 거지? 제른 부탑주를 막아선다는 게 가당키는 한 건가?”
“볼드 학장이 사전에 눈치를 채고 암살을 막은 걸 수도 있지.”
“하지만 볼드 학장은 이 자리에 없는데?”
좌중의 수군거림이 점차 커져 간다.
“랄프, 앞으로 나오게.”
나가란 탑주의 음성이 회의장 안을 울리자.
“흑남이 제른 부탑주의 계략을 저지했다고?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그의 흑마법이 부탑주를 능가할 정도란 말인가?”
“크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설마 그 정도이겠나? 레논 부탑주의 조력을 받았거나 성녀 일행의 도움을 받아 막을 수 있었겠지.”
한순간 좌중의 이목이 내게 쏠린다.
‘…나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제른 부탑주를 제압한 건 레바논의 오함마인 성녀이지 내가 아니건만.
얼른 회의장 중심으로 가라는 듯 눈짓하는 레논을 보아하니 진실을 말해도 들어 먹지 않을 것 같다.
‘뭐… 내가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누가 믿기나 할까?’
갑자기 성녀의 몸이 거대해지고 엄청난 완력을 가졌다고 좌중에게 말한들.
누가 그 말을 믿을까?
‘나 같아도 개소리라고 치부하겠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는 옆에 있던 제이나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니요? 애당초 제른 부탑주를 제압하신 건 당신이잖아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죠?”
‘아아… 그냥 아예 모른 척하시겠다? 그래, 나야 고맙지.’
나는 이제껏 제이나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해 보며.
느긋하게 회의장 중심으로 걸어가 나가란 탑주 앞에 섰다.
“자네의 훌륭한 대처로 흑탑은 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네.”
“하하… 과찬이십니다.”
‘레바논의 오함마에게 감사하쇼.’
“원하는 게 있나? 만약 있다면 내 힘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대한 수용하도록 하지.”
“…원하는 것 말입니까?”
‘흐음… 원하는 거라……. 원하는 거…….’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겨 있다가 좌중을 보며 입을 뗐다.
“최근 흑혼해 듀오를 통해 많은 흑마법사들이 결혼을 한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예? 예… 그렇습니다.”
실제로 흑혼해 듀오가 흑탑에 도입된 이후로.
적어도 백 쌍이 넘는 부부가 탄생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흑혼해 듀오는 왜 언급하시는 건지…….”
“이제 흑혼해 듀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저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다음 단계?”
좌중이 어안이 벙벙하여 나를 바라보자.
나는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이제 곧 결혼한 부부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겠지요. 이미 어떤 부부는 아이를 가졌다고 제 수하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합니다.”
“참으로 경사스러운 소식입니다.”
레논 부탑주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족하다니요?”
“아이가 자라서 흑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긴 공백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나의 물음에 대부분 수긍하는 좌중.
“확실히 흑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냥 적당히 흑마법을 가르치는 것 말고는 없을 것 같긴 하군.”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시체를 만지게 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한데…….”
좌중이 저들끼리 수군거리자.
나는 다시 입을 열어 이목을 내게로 집중시켰다.
“저는 그 공백의 시간을 지우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 검은 대지에서 자라날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더 질 좋은 교육을 받길 원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제고 태어날 제 아이를 위해서라도 말이죠. 지금 흑카데미 1학년들의 평균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나는 좌중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계속 말했다.
“1학년의 평균 나이는 열다섯 살 정도입니다. 저는 그 평균 나이를 적어도 다섯 살은 앞당기고 싶습니다. 아, 물론 흑카데미의 규율을 지적하려고 언급한 건 아닙니다.”
“그럼 흑남님께서는 10살 아이도 흑카데미에 입학시키겠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반은 맞습니다. 10살이 아니라 8살, 9살이라도 재능이 출중하다면 미리 교육을 해야지요. 단!”
나는 좌중을 응시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흑카데미가 아닌 흑립 유치원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