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살아 있었군……. 허허… 정말 다행이군, 다행이야…….”
“그러게 내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지 않았나? 다만 저 그림은 좀 의외군. 설마 흑남이 성녀를 데리고 돌아올 줄이야.”
일부 흑마법사들은 성녀의 귀환에 기뻐하면서도 의아해했고.
“…….”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들은 한결같은 침묵을.
“빌어먹을… 이번에는 뭔가 좀 바뀔 줄 알았더니…….”
“기대한 내가 등신이지.”
다른 일부는 불만과 살기가 담긴 눈으로 나와 제이나를 노려봤다.
‘…분위기 살벌하네.’
상반된 분위기가 회의장 안에 자욱이 깔리던 가운데.
나가란 탑주가 온화한 눈빛을 보이며 제이나에게 말한다.
“으허허허, 무사했었군. 정말 다행이네. 자네가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곤 답답해서 앉아 있지를 못했었는데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군.”
어째선지 엉거주춤 지팡이를 옆에다 두고는 자리에 앉는 나가란 탑주.
제이나는 그런 탑주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보다,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전날 밤에 흑마법사랑 암살자들이 대거 저희가 있던 별채를 습격했었어요. 하지만…….”
제이나는 나를 흘낏 바라보며 계속 말한다.
“여기에 계신 흑남께서 사전에 도움을 주셔서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죠.”
“호오… 흑남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나가란 탑주를 보며.
‘뭘 그렇게 쳐다보쇼, 부끄럽게시리.’
나는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흑남이 아주 큰일을 했군. 자네는 습격이 있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저 작은 꾀를 생각해 냈을 뿐입니다.”
나의 말에 한쪽에 있던 흑마법사들이 나지막이 속삭인다.
“허어… 흑남이 저리도 지혜로울 줄이야…….”
“베논께서 미리 흑남에게 경고를 하셨던 걸지도 모르네만… 여하튼 그의 판단 덕분에 전쟁은 면했군. 후우… 정말 다행이야.”
“나중에 따로 찾아가 감사라도 표해야겠어.”
‘크흠… 거기 할배분들, 다 들립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속삭임에 내가 괜히 겸연쩍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나가란 탑주가 좌중을 보며 소리친다.
“흑남이 떨어질 뻔했던 흑탑의 위신을 지켰다. 따라서 그에게 합당한 상을 주는 것이 지당하겠지.”
“그렇습니다! 공을 세운 자에게는 당연히 그에 합당한 상이 주어져야지요!”
“흑남은 충분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일부 흑마법사들은 흔쾌히 지지를 보낸 반면.
“…….”
일부 흑마법사들은 입을 꾹 다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랄프, 원하는 게 있나?”
‘원하는 거라……. 그렇다고 진짜 말하는 대로 다 주지는 않을 테고. 아마도 적정선이 있겠지.’
그 적정선은 당연히 내가 세운 공에 비례할 터.
‘막말로 탑주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흠… 그러면 어떤 걸 받아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소실된 지혜의 방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음…….”
내 요청이 너무 의외였던 걸까.
나가란 탑주가 낮게 침음하던 그때.
“소실된 지혜의 방이라뇨! 아무리 흑남이 공을 세웠다고 해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요구지요!”
“그렇습니다! 애당초 탑주님만이 들어가실 수 있는 방의 출입을 요구한 것부터 불경한 일입니다!”
일부 흑마법사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결사반대를 외친다.
‘오오… 진짜로 그런 게 있었어?’
솔직히 레논 부탑주에게서 소실된 지혜의 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건만.
반쯤 의심하며 던졌던 요구가 현실로 되어 돌아오다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다.
“소실된 지혜의 방이 뭔가요?”
“오직 흑탑의 탑주만이 들어가실 수 있는 서고입니다. 안에는 금지된 흑마법을 비롯하여 대륙에서 빼앗아 온 여러 가문들의 검술이나 세간에는 퍼지지 않은 정보들을 기록한 책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전에 흑남께서 바알에 대해 물으실 때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제이나와 레논 부탑주가 저들끼리 속삭이던 중.
나가란 탑주가 나를 보며 묻는다.
“소실된 지혜의 방에 들어가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이유가 있나?”
‘이유라……. 이유야 있지.’
내가 원하는 건 금지된 흑마법도, 검술 명가의 검술 비전이 담긴 책도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바알과 베논 그리고 레바논이니까.’
왜 신들이 나를 두고 내기를 한 건지.
바알은 왜 그런 두 신의 내기를 파투 내려 하고 나를 죽이려 하는지를 너무 알고 싶었다.
“찾아보고 싶은 정보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그곳은 오직 탑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자네를 그 안으로 들일 수는 없네.”
“그렇습니까.”
‘역시 안 되는 건가…….’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중.
나가란 탑주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말한다.
“대신 자네에게 그곳의 책들 중 한 권을 볼 수 있는 권리를 주도록 하겠네.”
탑주의 말이 떨어지자.
“아무리 흑남의 공을 높이 평가하신다고 해도 그렇지, 어찌 저런 특혜를…….”
“나도 살면서 한 번도 그곳의 책을 구경한 적이 없건만. 허어…….”
흑마법사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으나.
한 권이라는 제한을 둔 탓인지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어떤가?”
‘어떻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흑남은 회의가 끝나거든 나를 찾아오도록 하게.”
그 말을 끝으로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제이나를 응시하는 나가란 탑주.
“이번 피습은 우리 흑탑의 안일함으로 벌어진 일이니 응당 책임을 져야겠지. 혹시 자네도 원하는 게 있으면 이야기해 보게. 아, 물론 외부인은 소실된 지혜의 방에 들어갈 수도,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없다네.”
“당분간 흑카데미 안에서 지내고 싶어요. 그게 제가 원하는 거고요.”
“흑카데미에서… 생활을 하고 싶다는 말인가?”
제이나의 당찬 발언에 탑주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렸다가 점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래. 탑주가 봐도 어이가 없었겠지. 무슨 저런 이상한 요구를…….’
“으허허허허허! 알겠네. 그리하라고 말해 놓지.”
‘…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쉽사리 수락하는 나가란 탑주.
‘뭐야. 학생들이 성녀한테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다만 자네의 안내를 맡고 있는 사람이 흑남인 만큼, 최대한 그에게 협조를 해 줘야 할 걸세.”
“물론이죠. 요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제이나와의 대화를 마치고.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보이는 나가란 탑주.
“랄프, 아무래도 자네가 신경을 써야 할 게 많이 늘어났군. 괜찮겠나?”
‘…괜찮겠냐?’
만약 제이나나 에밀라가 흑카데미 안에서 칼춤이라도 춘다면.
그 모든 책임은 화살이 되어 나에게로 향할 터였다.
‘어쩌면 성녀가 흑카데미 안에서 칼춤을 추길 바라는 걸지도 모르지. 에이씨, 전쟁? 까짓것, 일어나면 그냥 하고 만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대신 두 권으로 늘려 주신다면야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두 권? 으허허허허! 알겠네. 그리하지. 회의가 끝나거든 나를 찾아오게.”
‘이걸 들어준다고?’
“모든 상황이 깔끔하게 마무리된 것 같으니 이제 다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들 가게.”
* * *
회의가 파한 뒤.
나는 성녀 일행을 잠시 흑혼해 듀오의 총책임자인 아스칼에게 맡겨 놓고는 나가란 탑주를 찾아갔다.
똑똑-
“탑주님, 계십니까?”
“왔는가? 들어오게.”
나가란 탑주의 승낙이 떨어지자.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설마 소실된 지혜의 방이 탑주의 방 안에 있는 건 아니겠지?’
“으허허허, 소실된 지혜의 방을 찾는 건가? 안타깝게도 이 방에는 숨겨진 문 같은 건 없네만.”
“그저 잠시 둘러봤을 뿐입니다.”
“이 늙은이의 방에 뭐가 볼 게 있다고, 으허허허.”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나를 바라보는 나가란 탑주.
“그래서, 어떤 책을 원하나?”
“…어떤 책을 원하다니요? 소실된 지혜의 방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곳은 탑주만이 들어갈 수 있네. 자네라고 예외는 아니지.”
‘뭐라고? 그러면 어떻게 책을 고르라는 건데?’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탑주에게 물었다.
“그럼 책은 어떻게 고릅니까?”
“그래서 자네에게 어떤 책을 원하는지 물어봤잖은가?”
“…예?”
나의 반문에 나가란 탑주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 간다.
“금지된 흑마법을 원한다면 그에 관련된 책을, 검술과 관련된 책을 원한다면 그에 맞는 책을 주겠네.”
‘뭐야… 셀프가 아니라 오마카세라고?’
이 무슨 어이가 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최대한 속내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원래 그런 겁니까?”
“예외는 없었네.”
‘쯧… 어쩔 수 없지.’
“좋습니다. 그럼 바알의 비사나 그와 관련된 책 한 권. 그리고 제 실력을 향상시킬 흑마법 책 한 권을 주십쇼.”
“호오… 바알의 비사라……. 아직도 바알의 종자들이 마음에 걸리는 건가?”
나가란 탑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도 아닌 베논께서 직접 경고를 하셨습니다. 안심할 수는 없죠.”
“그렇군……. 알겠네. 흑마법과 관련된 책은 내가 자네와 어울릴 법한 것으로 한 권 골라 주지.”
흐뭇하게 날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가는 나가란 탑주.
“좋네.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오겠나? 책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당일 저녁.
‘어우… 정신이 다 피곤하네.’
나는 방에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흑혼해 듀오의 어디에 꽂힌 건진 몰라도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건지…….’
나는 고개를 돌려 함께 들어온 성녀를 흘낏 째려봤다.
“에밀라는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흑혼해 듀오 말이에요!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에밀라가 말꼬리를 흐리자.
신이 난 제이나가 계속 말한다.
“우리도 저런 걸 대신전에서 해 보면 어떨까요?”
“어…….”
‘비슷한 걸 대신전에 차리고 싶다고? 아서라, 아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신관 놈들이 들고 일어날 게 분명한데 왜 사서 욕 먹을 짓을 해?’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그때.
“…죄송합니다, 성녀님.”
퍽-
성녀의 머리 부근에서 작고 둔탁한 소리가 일더니.
제이나의 몸이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진다.
‘…뭔 짓거리를 하는 거야?’
죽진 않았는지 제이나의 입에서 작은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 뭘 한 겁니까?”
내가 어안이 벙벙하여 묻자.
에밀라가 복잡한 표정으로 제이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성녀님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의견이 목숨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성녀의 의견을 따라 주고는 싶은데 그럴 여건이 안 될 것 같다, 이 말인가?’
“의외군요. 갑자기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까?”
“회의장에 있었을 때 난 습격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생각 이상으로 레바논을 혐오하는 흑마법사들이 많더군.”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까요?”
나의 물음에 희미한 미소를 보이는 에밀라.
이내 잠깐이나마 보였던 미소가 사라지고 그녀는 말을 이어 간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성녀님을 기절시킨 거다. 대체 왜 성녀님께서는 계속 이곳에 남으려고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더 이상 시간을 보낼 수는 없겠지.”
‘크… 그냥 성녀 한정 예스맨인 줄 알았는데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뛰어난 기사였구만! 잘 생각했수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치며 그녀에게 물었다.
“현명한 결정입니다. 이미 흑남 축하라는 목적도 완수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으실 거고요. 목숨이 우선이죠.”
“네 말이 맞다. 어쩌면 진작 네 말대로 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짧은 시간이었지만 민폐를 끼쳤군. 사죄하지.”
“사죄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무사히 레바논 왕국으로 복귀하셨으면 좋겠군요.”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어 갔다.
“케이탈 요새까지는 같이 가 드리죠.”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갑자기 성녀의 짐 꾸러미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드는 에밀라.
‘저건… 거울이잖아?’
“그건 갑자기 왜 꺼내신 겁니까?”
“레바논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예?”
‘아… 설마 저것도 좌표 저장 반지 같은 건가? 그런데 여기서 레바논 왕국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내가 거울을 보며 의아해하던 중.
불현듯 한 가지 가설이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근데 저거… 설마 나를 납치하려고 가져온 건 아니겠지?’
화악-
에밀라의 손이 환하게 빛나더니 신성한 기운이 거울을 감싸 간다.
“후… 잘 작동되는군.”
“그 거울 말입니다. 혹시 저도 사용할 수 있습니까?”
“그럴 리가. 오직 레바논의 신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
“아아…….”
나는 그제야 납득하곤 고개를 끄덕였고.
에밀라는 나를 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다음이 있다면 전장에서 보게 되겠군. 레바논 님의 사랑 아래에 평온을 누리도록.”
“만나서 개 같았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내가 얼른 가라는 듯 손짓하자.
에밀라는 성녀와 짐들을 둘러메고는 거울에 손가락을 뻗었다.
그 순간.
덥썩-
“서… 성녀님?!”
분명 혼절한 것으로 보였던 제이나가 에밀라의 손을 붙잡은 채 묻는다.
“에밀라, 지금 뭐 하는 건가요?”
“그게… 지금 흑탑의 상황은 너무 위험합니다. 당장이라도 본교로 돌아가는 게…….”
“위험하고 말고는 제가 판단해요, 에밀라.”
제이나가 웃으며 에밀라의 팔을 꽉 잡자.
콰드드드득-
“크으윽… 이게 무슨…….”
에밀라는 고통스러워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뭐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소드마스터가 성녀의 완력에 고통스러워한다고?’
내가 멍하니 그녀들을 바라보던 중.
에밀라의 손에 들려 있던 거울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성녀님…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저는 싫다고 했잖아요?”
제이나가 느긋하게 떨어진 거울을 들더니.
파창-
거울을 한 손으로 감자 으깨듯 박살을 내 버리는 것 아닌가?
“…성녀님, 그 힘은 대체…….”
그 모습을 본 에밀라가 멍하니 성녀를 바라본다.
‘손 가죽이 철로 되어 있나?’
나는 성녀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그래서… 언제 간다고요?”
나의 물음에 에밀라는 파편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문다.
“…미안하게 됐다. 아무래도 우리는… 걸어서밖에 못 돌아갈 것 같다.”
“뭐요?”
* * *
한편 같은 시각.
제른의 집무실.
“부탑주님의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기랄 군도에서의 일정을 끝마친 것인지.
“음, 크읍…….”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의자에 착석하는 제른.
어째선지 그는 연신 얼굴을 찌푸리며 왼쪽 다리를 노려본다.
“대마녀를 비롯하여 수십에 이르는 마녀들의 목을 수급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공헌은 없을 겁니다.”
“그뿐입니까? 마녀들과 손을 잡았던 해적들도 대거 소탕하셨으니 이제는 감히 차기 탑주의 자리에 몇 걸음 더 다가가셨다고 봐야지요.”
추종자들이 기랄 군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논하며 자신의 업적을 칭송하자.
“차기 탑주라……. 듣기 싫지만은 않군. 술과 안주를 가져와라!”
기분이 좋아진 제른이 껄껄 웃는다.
쪼르륵-
유리잔에 붉은 술이 채워지자.
제른은 잔을 들고는 흘낏 시선을 돌려 대마녀의 목을 바라본다.
“자, 오늘은 편안히 한잔씩 하지. 보우렌! 자네가 건배사를 하지.”
“예! 크음음……. 어… 기랄 군도에서 용맹함을 떨친 우리 파멸 병단과 예비 탑주님의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흑마법사들의 손에 들린 유리잔이 비워지고 집무실 안에 웃음이 번져 가던 그때.
똑똑-
한 흑마법사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제른을 보며 조심스레 말한다.
“저… 부탑주님……. 이 기쁜 날에 말씀드리기에 정말 송구스럽습니다만… 긴급히 말씀드려야 할 사안이 있어서…….”
“눈치가 없나! 그런 말은 내일 하라고! 내일! 오늘은 파멸 병단의 복귀를 축하하는 날이잖아!”
“메피르! 그쯤 해라.”
제른이 눈치를 주자 얼른 고개를 수그리는 메피르.
“그래, 무슨 큰일이 났다고?”
“그게…….”
흑마법사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제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져간다.
“그러니까… 성녀가 코앞에 걸어왔는데… 그걸 안 처먹고 그냥 놔뒀다?”
파창-
제른이 던진 유리잔이 벽으로 날아들어 산산조각이 난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죄, 죄송합…….”
“이런 빌어먹을 늙은이 새끼들이! 탑주님은! 탑주님은 가만히 계셨나?”
분노한 제른이 씩씩거리며 묻자.
흑마법사는 송구스럽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며 답한다.
“그게…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뭐라고? 중립? 중립?! 나한테는 대륙 정벌이라는 이상향을 들먹이더니 결국 선택한 건 늙어 빠진 평화론자 새끼들이라고?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미친 듯이 폭소하는 제른.
“…….”
추종자들은 그런 제른을 보며 감히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한다.
한참이고 폭풍처럼 집무실을 휩쓸던 제른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바알이고 레바논이고 그런 잡것들을 신경 쓸 게 아니었군. 안이 썩어 가고 있었는데, 바깥을 신경 쓸 게 아니었어.”
제른은 멍하니 허공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 말씀은…….”
“대륙 정벌을 논하기 전에 흑탑의 썩어 난 부위부터 먼저 도려내야겠다.”
제른이 술병을 떠넘기듯 부하에게 던지자.
그의 최측근인 보우렌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파멸 병단을 소집할까요?”
“…….”
잠시 고민에 잠기는 제른.
그는 곧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혁명은 최후의 수단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러면 성녀는… 어떻게 할까요?”
“성녀가 흑카데미로 갔다면 가서 죽이면 될 뿐이다. 많이도 필요 없겠지. 혼자 가마.”
제른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평화에 물들어 병신이 된 흑탑… 내가 바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