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319화
또다시 그 환청이 들린다.
누군가를 잃을 때마다 내 앞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던 이진윤의 환영이…….
-환영 아니에요.
‘응?’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 여기 있어요. 형님.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다르다.
내 심리를 일방적으로 무너뜨리려고만 하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엔 이진윤이 나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 살아 있는 거야?’
-삶. 죽음. 그런 걸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전 여기 있어요.
확신이 들었다.
지금 들리는 이진윤의 목소리는, 내 죄책감이 만들어 낸 망상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실존하는 존재의 목소리라는 걸.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마력도, 에테르도.’
그의 존재를 규명할 수 있는 단서가 적어도 내 감각 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는 실재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같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그걸 이해하려면…….
이진윤이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건 말할 수 없는 비밀 때문에 망설인 거라기보다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너무 난해해서 말문이 막힌 것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아직은 어려워요. 저도 여기까지 닿는 데에 너무 긴 시간과 많은 과정이 필요했으니까.
그 말을 듣자 난 그가 대강 어떤 영역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인식 가능 차원 너머의 공간에서 온 거군. 지금의 너는.’
-맞아요.
이진윤은 이 세계에서 죽었다.
그것도 에테르가 모조리 붕괴해 그 근원인 존재조차 잃은 채로.
바리공주의 오색꽃을 통한 절대적인 부활 권능으로도 살릴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다른 세계에 아직 남은 채였다.
영혼도, 육체도 모두 사라졌지만 그의 의지만큼은 그대로였다.
그건 이진윤의 말대로 아직까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만 설명이 가능한 현상이다.
차원을 뛰어넘기 위해 혼돈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인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완전 격리된 제5 차원 너머의 상위 세계 말이다.
‘그런 네가 나에게 말을 전달하고 있다는 건…….’
-제가 그 초월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는 뜻이겠죠.
‘그렇군.’
-그리고 지금…… 일반적인 물리법칙으로는 닿을 수 없는 저곳에.
존재할 수 없는 이진윤의 환영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지점.
아후라 마즈다의 등 뒤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당장 닿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 수 있어요.
‘……정말인가?’
-네.
혼돈은 내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공의 끝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정도의 강력한 차원 도약 권능을 지니고서도.
그에 비하면 겨우 한 끗 수준이나 다름없는 이 짧은 거리조차 도약하게 해주지 않았다.
전적으로 내가 가진 현실의 능력만으로 이 순간을 극복하게 내버려 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유메미와 아델을 잃는 것이고.
-저를 따라오세요.
하지만 이진윤은 그것을 자신이 대신 가능케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저 인간일 뿐이었던 그가, 상위차원의 의지로 화해 내 앞에 나타나 혼돈의 역할을 대체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신들을 죽여라.
-우리에게 자유를.
그건…… 언젠가.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이었던 그날.
마을 사람들이 오크들에게 납치당해 끌려가던 것을 추격하고.
그 과정에서 모나가 아르테미스의 농간으로 죽고.
분노한 내가 악의의 오른쪽 눈을 개방해 최초로 신살자가 되었던 바로 그날.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다오.
내 귓가에 들리던 무수한 원혼들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래…… 이건…….’
지금껏 운 좋게 얻은 거라고 생각했던, 신을 죽이기 위한 그 모든 힘들이, 실은 그들의 염원을 실체화한 것이었다.
-이쪽으로.
이진윤이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나는 홀린 것처럼 그의 인도를 따른다.
콰드득. 콰득.
그와 동시에 손에 쥔 파슈파타가 변형되기 시작한다.
검은 갑각이 검신 전체를 감싸고 형태의 변화를 이뤄낸다.
십자가를 연상케 하던 긴 가드는 줄어들어 내 손을 보호하는 수준으로 작아졌고.
그 반대급부로 칼날과 자루는 더 길어져 내 키를 훌쩍 넘길 정도의 대검이 되었다.
칼날에는 곡률이 생겨 도의 모습이 되었으며.
그 재질은 번쩍거리던 금속 대신 단단한 케라틴질로 대체되었다.
검 전체가 마치 하나의 용 발톱을 연상케 하는 대도의 형태로 변형된 것이다.
-여기예요.
그리고 이진윤이 가리킨 곳.
그곳에.
-이 세계 아후라 마즈다의 본질.
나의 검을 휘둘렀다.
흑검 아지다하카를.
* * *
세 갈래의 참격이 거칠게 공간을 찢고, 초월 세계를 도약해 보이지 않는 본질을 도륙했다.
마침내 지겹도록 길게 이어진 아후라 마즈다와의 악연이 여기서 끊어지는 것이다.
“네가…… 감히.”
심상세계 속에서 그는 나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자신이 세운 수많은 계획과 원대한 야망을 번번이 방해했으니까.
그렇게 나에게 무수한 패배를 이어져 왔음에도, 아후라 마즈다가 나를 보는 시선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다.
위에 있는 자가 아랫것을 바라보는 시선.
“그런 눈으로 보지 말지?”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놈은 결국 내 손에 끝장나고 말았으니까.
“닥쳐! 필멸자 따위가 명령하지 마!”
“필멸자가 아닌지는 오래됐는데.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너나 나나 불멸자인 건 똑같아.”
아후라 마즈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 그걸 날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의 실체는 소멸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고, 이곳은 나의 심상세계 속이니까.
여기선 그 어느 것도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너는 내 몸의 일부에서 태어난 후손이다.”
“그래서?”
“나는 네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란 말이다! 이런 짓을 하는 게 용인될 것 같나?”
“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을 그렇게나 무자비하게 죽여댄 건 괜찮고?”
“그건…….”
“네 몸에서 태어났다고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더 이상 아무것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없음을 깨달은 모습이었다.
난 그런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미안한 마음은 없나?”
“뭘?”
“지금까지 너에게 휘말려 사라져 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이다.”
“내가 왜 그래야지? 이미 다 끝난 일인데.”
“반성이라곤 없군.”
“내가 무슨 소릴 지껄여도 내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 아닌가? 어차피 난 이 세계에서 사라질 텐데.”
아후라 마즈다는 그런 나를 오히려 비웃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아니라도 이미 세상에 흩뿌려진 수많은 내 형제들이 있고,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해 온 일들과 비슷한 일들을 반복할 거다. 오히려 더 끔찍할지도 모르지. 아무리 너라도 그 모든 세계를 다 구할 수는 없을 거야. 그렇지?”
“…….”
“뭐, 어차피 네놈은 네놈의 세상을 구했으니 다른 곳들은 상관없나.”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의 그거.”
그러더니 그가 미간을 좁히며 비열한 표정을 지었다.
“혼돈도 알고 있는 건가?”
그는 마지막에 자신의 실체를 가른 내 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볼만하겠군. 네놈이 그런 힘을 쓴다는 걸 그 녀석이 알게 되면.”
흑검 아지다하카.
혼돈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인식 차원을 초월하게 해준 온전한 나의 무구.
아후라 마즈다가 저렇게 비웃는 건, 그 실체를 알게 된 혼돈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그 눈들이 빤히 우리의 싸움을 보고 있는 그 현장에서 꺼냈으니, 어찌 숨길 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아쉬운 건 그것뿐이다. 네놈이 혼돈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걸 직접 내 두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
아후라 마즈다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난 여기서 끝이군. 네놈이 잔혹하게 당할 걸 즐겁게 상상하며 퇴장하도록 하지.”
그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심상세계의 밖으로 벗어나면 그걸로 이 모든 이야기는 끝.
아후라 마즈다는 영원히 사라진다.
“어딜 정신승리를 하려고.”
하지만 난 그대로 보내주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콱.
“무, 무슨?”
나는 누워 있는 그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시체를 끌듯 질질 끌고 가, 심상세계 속의 한 호수에 이르렀다.
그 아래는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심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거 놔!”
“애초에 내가 왜 너를 내 심상세계 속으로 데리고 왔는지 알아?”
나는 아후라 마즈다의 머리를 그 호수 안으로 집어넣었다.
“으그그극!”
“이 안에서는 바깥세상과는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거든.”
그가 물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쳤다.
내 손을 떼어내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그렇게 하기엔 그는 한 줌조차 되지 않는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격리된 가상세계 속에서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느껴라. 그렇게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에 손을 뻗어봐.”
나스트론드.
수없이 많은 뱀들이 그 호수 안을 헤엄쳐 다니고, 아후라 마즈다는 그 뱀들에 의해 사정없이 얼굴을 물어뜯겼다.
그러고도 얼굴은 다시 샘에 의해 멀쩡하게 회복되었으며, 뱀들은 끊임없이 그의 가죽을 탐식한다.
그야말로 무한의 고통이 엄습하는 지옥에 빠진 것이다.
“으그으으윽! 앙그르……으…… 마……이뉴!”
아후라 마즈다는 계속해서 발버둥 쳤다.
난 그러면 그럴수록 그를 더 호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태껏 네놈이 눈을 뜨고 살아 있던 시간보다, 지금부터 네놈이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더 길 것이다.”
첨벙!
그러곤 그대로 그를 호수 안에 완전히 빠뜨렸다.
아후라 마즈다의 주변으로 수백 마리의 뱀들이 먹이를 찾은 물고기 떼처럼 모여든다.
“잘 가라.”
죽음 직전, 영원에 가까운 고통을 겪게 만드는 것.
지금껏 놈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형벌이라기엔 충분치 않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전부 한 셈이다.
나는 그 길로 심상세계를 벗어났다.
* * *
수많은 아후라 마즈다들이 태어나는 고치 앞에서, 나는 흑검 아지다하카를 휘둘러 공간을 베어냈다.
쿠구궁.
무색인들의 세계의 중심점.
그곳이 붕괴하는 순간 우린 유메미가 열어낸 차원문을 건너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돌아온 세계의 하늘에 나타나 있던 거대한 균열은 봉합되어 있었다.
“하나는 끝냈군.”
이걸로 일단은 한숨 돌릴 기회가 생겼다.
끊임없이 떨어지던 무색인들은 여전히 세상을 활보하고 있지만, 그 숫자가 더 늘지는 않는다.
“우선은 재정비를 해야 해.”
지금 시점에선 망가져 가는 이 세계를 어떻게든 원상복구 하는 것이 우선.
마물이건, 무색인이건, 위협이 되는 것들을 전부 처리해야 한다.
야드가르를 데리고 간 태공망을 쫓는 건 그다음이다.
‘예루살렘…….’
복귀하면서 예루살렘 쪽을 내려다보았다.
태공망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차원 통로.
그 사이로, 황금색 갑주로 무장한 악마들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