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79화
레아는 자신의 와이번과 함께 무수히 많은 마물들을 격퇴하며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앞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성이 하나 서 있었다.
이곳의 문명 수준과는 어울리지 않는, 중세시대를 연상케 하는 돌 벽으로 둘러싸인 성.
‘저기가…… 예루살렘인가?’
그곳은 하멜 평원 위에 세워진 제도 예루살렘이었다.
‘크기가 장난 아니네.’
돌로 만들어진 성벽은 좌우의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나가 있었다.
마치 지구의 만리장성을 방불케 하는 규모.
그 성황 백선율, 아니, 아후라 마즈다가 이런 도시를 세웠다는 게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한 번…… 보기만 하는 거야.’
그 앞에서 레아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어떤 헛된 유혹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도 가장 옳은 길을 선택하기로.
자신의 신념에 가장 부합하는 길을 따르기로.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퀘스트 로그를 펼쳐 보았다.
───
<일반 퀘스트: 진정한 인류>
-내용: 당신은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의무를 짊어지고 태어난 인간입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깊게 고심하십시오.
-목표: 예루살렘 제국의 황제와 접촉
-보상: 제국 집정관으로서의 행정적 권한 및 권능
───
유신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어느새 레아에겐 이러한 퀘스트가 부여되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결코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유신우에게도, 드워프인 스사노오에게도 일어났던 일 역시 이미 들었었다.
시스템은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해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가려 했다.
그 결과 스사노오는 자신의 부하들을 잃었지만, 유신우는 그 퀘스트를 그만의 능력으로 돌파해 비극을 막아냈다.
지금 레아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바로 그 덕분.
그러니 이쪽에서는 당연히 시스템이 퀘스트랍시고 부여하는 온갖 보상들을 당연히 좋게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신우의 편에 섰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럼에도 그녀가 이 퀘스트의 지시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아후라 마즈다가 시스템에 관련이 있다는 사실 또한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가 됐건 간에, 둘은 서로 끝장을 보기 위해 싸우는 적.
그렇다면 아후라 마즈다의 영향을 받는 시스템이 유신우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것도 당연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유신우와 대적 관계에 선 사람에게는 시스템이 우호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당연히 신우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몰라.’
이 땅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여태껏 고수해왔던 자신의 입장을 바꿨다.
지키기로 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지금.
타카마 시티는 사실상 소수의 인간과 다수의 드워프들이 사는 도시가 되었으나.
예루살렘 제국에는 현 대륙에 남아 있는 대다수의 인간들이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인류’는 과연 유신우 쪽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후라 마즈다 쪽에 있는 것인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 두 눈으로 현실을 확인한다면, 답은 명확해지는 것이다.
‘가장 옳은 길을 향해.’
레아는 자신의 와이번을 성 외곽의 숲속에 숨겼다.
유신우를 떠난 순간부터 용인화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와이번을 혼자 두기만 한다면 마물들 사이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격받을 걱정이 없기에 이렇게 야생에 풀어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스윽.
레아는 두 자루의 단창을 와이번의 등에 묶어 두고, 자신은 배낭만 둘러맨 채 제도 예루살렘의 성문 앞으로 걸어갔다.
* * *
성문 앞에는 각기 다른 현대적 전투 복장을 갖춘 트롤과 다크엘프가 한 명씩 서 있었다.
그들은 마나건으로 무장하고 있긴 했지만, 하는 일이라곤 출입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뿐.
실질적인 방어는 방어 장막과 흉악한 발톱을 가진 마물이 맡고 있는 모양새였다.
“음? 누구십니까?”
출입을 관리하던 다크엘프가 레아의 얼굴을 보고 곧장 외부인임을 알아챘다.
이 거대한 도시에 거주하는 수백, 수천만에 달하는 주민들의 얼굴을 전부 외운 건 아니고, 그가 장착한 전자 의안의 스캐닝 기능을 사용한 것이다.
철컥.
그러자 곧장 옆에 서 있던 트롤이 대형 마나건의 총구를 레아에게 들이밀었다.
“아니, 아니야. 총 내려.”
“예? 거수자인데…….”
“인간이잖아. 지침 못 들었어?”
“아, 아아.”
트롤은 다크엘프의 그 한 마디에 곧바로 총을 거뒀다.
왜인지 ‘인간’을 조금 특별하게 취급하는 듯한 둘의 대화.
레아는 거기서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 안에 들어가 봐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오신 거죠? 용무가 따로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갈 곳이 없어서.”
“아, 난민이셨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다크엘프는 그녀를 입구 부근에 설치된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곳엔 세 명의 직원들이 각자 일을 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도 인간은 없군.’
하나 특이한 건, 이들 모두가 다크엘프 아니면 트롤이라는 것이었다.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여기서 서류 작성하시고, 지시에 따라주시면 됩니다.”
어쨌든 레아는 그들의 안내를 받아 이런저런 절차를 거치기 시작했다.
서류의 내용은 전부 거짓으로 작성했지만, 딱히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난민 자격을 인정받아 제도 예루살렘의 내부로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끼이익.
좁은 사무실 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나자, 곧장 드넓은 도심이 펼쳐졌다.
타카마 시티처럼 높은 빌딩은 없지만, 그 대신 낮은 벽돌집으로 가득한, 밖에서 본 것과 일치하는 중세풍의 도시.
다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기존에 살던 곳에서 가져온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중세와 미래가 섞인 기묘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안엔 사람이 많네. 그냥 우연이었구나.’
한편, 레아는 도시 내에 수많은 인간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덕분에 아까 전에 가졌던 의문은 기우였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읏차!”
이제 갓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조그만 고무공을 바닥에 튕기며 걸어간다.
아이의 부모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놓쳤다! 흐잉…….”
“한 번 더 해봐. 아까보다 두 번 더 튕겼으니 이번엔 열 번도 할 수 있을 거야.”
“응!”
그들은 그렇게 레아의 옆을 지나쳐 갔다.
창궐한 마물들 때문에 밖에선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내부에선 부족한 물자 때문에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타카마 시티와는 전혀 다른 풍경.
수많은 난민들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하지만, 어느 곳보다도 이곳의 사람들은 풍족해 보였다.
오히려 마물 창궐 이전의 빈부격차가 심각했던 멀쩡한 드워프 사회보다도 더 살기 좋아 보였다.
“넌 이제 마물 사냥은 안 해?”
길을 걷던 도중, 두 명의 인간 남자가 식당 야외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려치웠어.”
“왜? 그래도 한 때는 꽤 잘나갔었잖아?”
“여기선 그게 다 쓸모없어. 각성자고 뭐고.”
“엥? 왜?”
“우리가 할 일을 마병(魔兵)들이 다 하거든. 그것들이 세기도 겁나게 세요.”
“아……그렇구나.”
“이제 우리는 마물들하고 싸울 필요가 없어. 그냥 여기 안전한 곳에 앉아서 그것들이 바깥에서 가져오는 걸 받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서 갑자기 소재 가공 사업을 하는 거구나? 벌이는 좀 어때?”
“쏠쏠하지. 예전처럼 위험하게 직접 뛰어들 필요도 없고.”
아후라 마즈다는 마물 병사들을 부려 사람들을 보호한다.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방어체계.
아무리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도 사람이 죽거나 다칠 일도 없고, 전투력도 높다.
상상만 해오던 일이 여기선 현실이 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부족함 없이 안전하게 살아간다…….’
레아는 예루살렘 내부를 걸어 다니며 자신의 생각이 더욱 확고해짐을 느꼈다.
더 많은 인간을 위한, 인류를 위한다는 대의의 정당성은 이쪽에 있다고.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툭.
그때, 레아의 발 앞에 작은 동전 하나가 굴러왔다.
그것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려던 그녀는.
“너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를 보고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아후라 마즈다.”
* * *
흑발에서 새하얀 백발로 변해버린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예전의 얼굴 그대로였다.
그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그가 이곳 도시 한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잘 왔다. 네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어.”
아후라 마즈다는 레아가 이곳에 온 이유를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시스템이 그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 그건 당연한 이야기.
레아는 이전의 적대했던 기억 때문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높였지만, 아후라 마즈다의 묘한 매력은 그것을 단숨에 허물어뜨렸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 그런 건…….”
“거부할 필요 없다. 알고 있지 않으냐. 네 신념을 관철하는 일은 곧 나를 따르는 일이라는 걸.”
마치 이 모든 게 다 레아를 위해 준비된 연극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완벽한 사회를, 아후라 마즈다가 만들어놓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절대 환영이 아니었다.
레아 정도의 정신력을 가진 자에게 환영을 거는 것부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뿐더러.
환영 안에서 환영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지면, 반드시 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모두 진실이었다.
아후라 마즈다야말로 레아가 따르는 이상에 더 가까운 쪽이라는 진실.
“자, 내게 손을 내밀어라. 그로써 퀘스트를 완료하고 제국의 집정관이 되는 거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내민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바닥 위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 무수히 많은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유신우와 함께했던 기억들.
동료들.
자기 신념을 위해 그런 개인적인 요소들을 저버리는 것이 옳은가.
‘……이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대의를 위한 길.
깊은 생각에 빠져 몇 번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펼치던 레아는, 아후라 마즈다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받아들이겠어. 네 제안.”
“잘 생각했다.”
{<진정한 인류> 퀘스트 완료}
{보상이 지급됩니다.}
곧 그녀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고, 체내의 마력 흐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제국 집정관의 권능이 추가됩니다.}
{권능 <마병 소환>을 획득합니다.}
지금껏 레아가 구사하던 정순한 마력과는 상반된 성질의 마력이 그녀의 몸 안에 자리 잡았다.
어둡고 끈적끈적한 죽음의 힘.
시종일관 빛과 백색을 두르고 다니는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부여받은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더러운 힘이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건 아후라 마즈다의 손목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가자. 앞으로 네가 머물 곳을 보여주지.”
이윽고 레아는 그와 함께 예루살렘의 중앙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