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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272화 (272/348)

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72화

거의 시신이나 다름없어 보일 정도로 창백한 몰골인 길가메시.

불사의 육신으로 인해 원하는 대로 죽지도 못하고, 간신히 숨만 붙어서는 좀비처럼 왕좌에 걸터앉아 있다.

‘엔키두……. 저 녀석이 길가메시의 생기를 착취하고 있군.’

그리고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최초의 불멸자인 길가메시를 저런 몰골이 되게 한 게 바로, 지금 그를 향해 정성스러운 애정을 쏟아붓고 있는 엔키두라는 걸.

영원에 대한 끊임없는 탐욕이 왜곡된 욕망으로 발현되어 둘을 이런 꼴로 만든 것이다.

‘여긴 시스템이 만든 가상의 세계가 아니다……. 즉, 환상이 아닌 현실. 최초의 불멸자가 도달한 진짜 끝.’

그리고 나는 이것이 수많은 신이라 자칭하는 불멸자들이 결국 닿게 될 모습임을 깨달았다.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큰 나머지, 스스로를 이런 좁은 공간에 가둬 놓고서라도 살아가려 하는 추한 모습을 말이다.

마찬가지로 시스템이라는 기이한 법칙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

나에게 죽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신들이 스스로를 수호령이라는 조그마한 틀 안에 가둬 놓고서 삶을 연장했으니 말이다.

‘더러운 것들.’

자기들은 그렇게나 살고 싶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필멸자들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함부로 다뤘다.

서로 죽이고 싸우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자기 손으로 직접 능멸하는 개짓거리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더럽고 추한 몰골을 보고 있자니, 그 과거의 신이라는 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금 나는 바로 그런 자들과 같은 존재가 되려 하는 것이다.

‘난 절대로 저렇게 되지 않는다.’

주먹을 움켜쥐고 굳게 마음을 먹는다.

결코 삶에 집착하는 영원의 노예가 되지 않기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전부 이룬 후에는,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오겠다고.

“필멸자여, 나로부터 길가메시를 빼앗으러 온 것인가.”

엔키두가 턱을 바짝 쳐들고 나를 내리깔아 보면서 말했다.

그는 머리 양쪽에 황소 뿔이 돋아나 있고, 펑퍼짐한 로브 아래로는 발굽이 보이는 반인반수였다.

“그러나 한 줌도 되지 않는 그 하찮은 무력만으로는 나에게서 무엇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엔키두를 빤히 쳐다보며 그의 몸 안에 내재된 힘을 가늠해 보았다.

‘허세라도 부리는 건가.’

그 역시 불멸의 삶을 살아온 자였기에 평범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수한 시간 동안 업을 쌓아 온 신계의 수많은 투신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굳이 투신까지 갈 필요도 없이, 어지간한 일반 신들조차도 넘지 못하는 수준.

당연히 별 불꽃을 머금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건 아무래도 태초 이후 꽤나 오랫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이곳에 갇혀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바깥에 나가질 않으니 업을 쌓을 기회도 적었고, 그만큼 성장하지도 못했겠지.’

신의 힘을 기반으로 하는 각성자들과도 크게 다를 것 없는 이유다.

이런 꽤나 높은 수준의 테크놀로지가 집약된 성에 살고 있으면서, 정작 그 안에 든 것은 창이나 던지는 로봇들이라는 기이한 발전 양상 역시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빨리 끝내고 여기서 나가자.’

그게 어쨌든 간에 내 볼일이 있는 대상은 길가메시뿐.

엔키두는 그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일 뿐이다.

장애물은 제거하고 그 뒤의 보물만 취하면 된다.

화륵.

손바닥에서 형성한 별 불꽃이 빠르게 탄체를 쏘아내 엔키두를 향해 날아들었다.

굳이 어떤 기술이라고 할 필요도 없는, 그저 순수한 힘을 방출한 것이다.

큐웅!

그것이 엔키두의 몸에 닿자, 묵직한 폭발음과 함께 흑청색의 불기둥이 일며 그가 서 있던 공간을 통째로 소멸시켰다.

그는 그대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럼 어디…….”

그렇게 길가메시에게 다가가 할 일을 진행하려던 순간.

“너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뒤쪽에서 엔키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느새 그곳에서 되살아나 있었다.

‘아차.’

생각해 보니, 이 녀석들은 내가 알고 있는 신들과는 다른 성질을 가진 ‘불사’의 능력자들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이 공간을 몸속에 봉인하고 있는 하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 녀석은 죽어도 수호령만을 빼앗길 뿐, 자기 자신은 몇 번이고 되살아났으니 말이다.

그 불사의 능력이 기반으로 한 힘이 이들로부터 나온 거라면, 엔키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자는 악의의 오른쪽 눈으로는 영멸시킬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걸 깨닫고서 제대로 대적하기 위해 손에서 무기를 소환하려던 순간.

“무한한 짐승의 감옥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라.”

스르륵.

주변이 갑자기 암흑으로 휩싸였다.

그러고는 내 몸을 지탱하던 땅이 사라졌다.

* * *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인해 나는 한순간 중심을 잃고 몸이 기울었다.

딛고 설 만한 바닥이 사라졌기 때문.

나는 곧장 별 불꽃의 날개를 펼쳐 밸런스를 유지했지만, 이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이곳은 사방이 탁 트인 검은 무중력 공간.

나는 그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힘을 가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우주 공간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새하얀 별빛들이 사방을 수놓고 있었다.

마치 맑은 날의 밤하늘과도 같았다.

‘그 안에서 갑자기 이런 곳에…… 어떻게?’

이런 게 엔키두의 능력인 걸까.

그와 길가메시의 기운은 여기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아예 다른 공간으로 보내버린 모양이었다.

우우웅.

곧이어 주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떤 금빛의 형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금으로 만들어진 황소였다.

아까 전 길가메시가 머물고 있는 성의 로봇들과 동일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투웅!

그것들이 나를 향해 뿔을 내밀며 돌진해 왔다.

이 무중력 공간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발판이라도 밟는 것처럼 허공을 내달리면서 말이다.

나는 곧장 별 불꽃의 날개를 펼쳐 고속으로 활공하며 황소들의 공격을 피했다.

‘이런 게 엔키두의 능력인가.’

이 모습들을 보며 생각했다.

엔키두는 여태껏 직접적인 성장을 이루진 못했지만.

외부로부터 자신과 길가메시를 지키는 영역에 한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술자가 되었음을 말이다.

당장 이 기묘한 영역을 벗어나, 애초에 그 황금 성에 도착하는 방식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자신들이 머무는 공간 자체를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필멸자 한 사람의 육신에 봉인시키고, 특별한 표식 없이는 함부로 진입조차 못 하게 만들어 두었다.

그런 식으로 세대를 거쳐가며 누군가의 몸에 기생하듯 계속해서 옮겨 가며 살아온 것이다.

길가메시의 불사 능력을 얻으려면, 이 모든 안전장치들을 돌파해야만 하는 식.

삶에 대한 집착이 끊임없이 반복된 결과, 엔키두는 결국 이런 말도 안 되는 공간까지 만들어냈다.

‘분명 여기에도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어떠한 파훼법도 통하지 않는다고 할 수만은 없다.

만약 그 정도로 완벽한 차단이 가능했다면 굳이 하비의 몸속에 숨을 필요도 없었겠지.

{특성 <악의의 오른쪽 눈> 발동}

{공간의 비밀을 꿰뚫어 본다.}

난 이미 비밀을 내다보는 이 눈으로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사방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영역.’

그리고 알게 된 것은, 이 공간은 정말 실제 우주처럼 사방이 끝없이 열려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숨도 쉴 수 있고, 소리도 들리는 것으로 보아 진짜는 아닌 듯하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하나.

이 ‘공간 자체’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상호작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리적으로든, 마나로든 아예 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은 저것뿐이겠지.’

그래서 난 발상을 바꿔서 이 안에서 만들어지는 황소들에 집중했다.

그러자 허공을 내달리며 나를 향해 끊임없이 다가오는 그것들 중 일부의 몸속에서, 어떤 미세한 불빛이 들어 있음을 보았다.

평범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악의의 오른쪽 눈으로만 꿰뚫어 볼 수 있는 이 공간의 ‘비밀’이었다.

‘저거다.’

난 곧장 손에서 파슈파타를 꺼내 들어 그 불빛을 머금은 황소들을 베어내려 했다.

파삭.

그런데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쥔 순간, 내 손가락이 전부 부서져 버렸다.

별 불꽃에 의한 부작용으로 몸이 하얗게 경화된 탓이었다.

‘벌써 이렇게까지…….’

이젠 아예 피부가 조금 벗겨지는 수준을 벗어나 신체 일부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내 몸이 죽어간다.

‘얼른 불사의 육신을 얻어야 해.’

이런 상태가 되니 나는 더더욱 조급해졌다.

길가메시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나는 곧 죽는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것도 지키지 못하고, 이루고자 했던 일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 사라지는 셈.

그러니 얼른 방법을 찾아내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야차 소환.’

그렇게 떠올린 비책은 소환물을 사용하는 것.

직접 몸을 움직이는 대신, 그것들을 조작해 저 황소들을 파괴할 작정이었다.

{<별의 불꽃>에 <트리슈라의 프라나>를 조합}

{<사냥개자리 야차>를 소환한다.}

격멸의 업화와 환란의 빙정.

그 두 가지 힘을 동시에 머금은, 흑청색 화염을 두른 날개 달린 늑대 형상의 야차들이 소환되었다.

투화아악!

검은 매가 내뿜던 화염보다 훨씬 더 뜨겁고 격렬한 열기가 야차들의 몸으로부터 퍼져 나왔다.

야차는 무중력 공간에서도 어떠한 제약도 없이 고속으로 움직이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황금 황소들을 한꺼번에 녹여내린다.

‘무작정 전부 부수면 안 돼. 빛을 머금은 것들만 골라서 없애야 한다.’

빛을 머금지 않은 황소를 없앨 때마다 빛을 머금은 황소의 숫자가 증식하는 것을 보고, 난 여기에도 규칙이 있음을 깨달았다.

오로지 정해진 황소들만 골라서 부숴야 한다는 규칙을 말이다.

트릭이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간단하기 그지없는 함정이지만, 이건 악의의 오른쪽 눈이 없었다면 절대로 파해가 불가능한 함정이다.

생각 없이 부숴대다간 곱절로 증식하는 황소들로 인해 이 거대한 공간이 금세 가득 차버려 질식사하기 딱 좋을 테니까.

‘마지막!’

어쨌든 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 없이 오로지 야차들만을 움직여 이 함정의 출구를 찾아냈다.

엔키두가 침입자로부터 자신과 길가메시를 지키려는 마지막 보호 장치를 내가 깨뜨린 것이다.

파캉!

주변 공간들이 마치 유리에 금이 가듯 깨져 나가고, 나는 곧 다시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 * *

“길가메시……. 이제 우린 헤어져야 해.”

엔키두는 왕좌에 걸터앉아 있는 길가메시 앞에 주저앉은 채 그의 허벅지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연인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모습.

“결국 이런 날이 오게 되는구나.”

더 이상 나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지키고 지키다 저런 추한 모습이 될 정도로 추락해 버린 자들.

난 그런 그들을 향해 다가가.

{<유결부 파라슈>를 소환한다.}

“염병 떨고 있네.”

서걱!

가차 없이 신살의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는 엔키두의 목을 통과해, 그의 육신 안에 있는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앙그라 마이뉴의 눈으로도 어쩌지 못한 태초의 불사자는, 똑같은 태초의 존재인 시바의 도끼에 의해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다.

“길가메시.”

그리고 난 그 앞에 서서, 태공망이 건네주었던 두루마리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미안하지만, 넌 좀 더 이용당해야겠다.”

{<태극도(太極圖)>를 펼친다.}

그가 건네준 두루마리의 이름은 태극도.

목표로 한 대상을 이 그림 안에 가둬두는 봉인구였다.

다른 일반적인 봉인구와 다른 점은, 그 봉인 가능한 대상이 신까지도 포함된다는 점.

그야말로 곤륜 신계 내에서도 최강으로 여겨지는 신물 중 하나였다.

스르륵.

{대상을 태극도에 봉인한다.}

그것을 길가메시에게 사용해 그의 육신을 통째로 그 안에 가둔 다음.

으적.

입안에 넣어 씹어 삼켜버렸다.

이것이 바로 길가메시가 가진 불사의 육신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

한 신계의 최강의 신물을 이렇게 일회용으로 사용한다는 게 꽤나 충격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그런 만큼 효과도 확실했다.

쿠구구궁.

{<우루크>가 무너진다.}

{시나리오 영역 <최초의 불멸자>가 예기치 않은 손상으로 인해 파괴됩니다.}

{시나리오 영역 내부의 외부인은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곳의 주인인 길가메시가 사라지자, 영역은 통째로 붕괴했다.

나는 곧 시스템의 인도에 따라 다시 원래 내가 있던 장소로 돌아갔다.

하비가 갇혀 있던 지하 감옥.

아후라 마즈다가 두 눈을 부릅뜨고서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바로 그 위치에 다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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