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77화
얼마 전, 아델은 유신우에게 비밀스러운 임무를 받았다.
“아델. 당분간 네가 타라가 되어 줘야겠다.”
뜬금 없이 그녀가 타라인 척 연기를 하라는 유신우의 명령.
그 둘은 당연히 서로 다르게 생긴 사람이긴 했지만, 둘 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중동계 인종에 나이대도 비슷한 터라 이런 얼굴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이 보기엔 혼동되기 아주 쉬웠다.
특히나 아예 마음 먹고 속이기 위해 옷차림은 물론이고 행동이나 주변 사람들의 취급까지 바꾼다면 평소에 알고 지낸 게 아닌 한 더더욱 속을 수밖에.
그렇기에 위장하려면 누구보다도 그녀가 제격이긴 했지만, 왜 그런 걸 시키는 건지, 그 의도가 궁금했다.
“왜 그러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하비가 널 납치하려고 할 거다.”
유신우는 하비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그에 대응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아하, 그때 그 녀석을 제가 잡아버리면 되겠군요.”
“아니, 넌 계속 타라인 척 연기를 하면서 그 녀석에게 납치를 당해줘.”
“……네?”
다만 이 ‘대응’은 단순히 당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역으로 상대를 완전히 찍어 누르는 것을 의미했다.
“하비가 널 납치해서 데려가는 곳은 아마도 적진의 한가운데일 거다. 그럼 넌 가만히 있기만 해도 키안 측의 진영 깊숙한 곳에 잠입하게 되는 셈이지.”
“그 안에서 적의 내부를 흔들어 놓으면 되는 건가요?”
아델은 곧장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투로 결의에 차서 대답했다.
지금 유신우가 내리는 명령은 단신으로 적의 소굴에 뛰어드는 위험한 임무.
뭣하면 얼마든지 자기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물론 정작 유신우는 그녀를 그런 식으로 버리는 패로 쓸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넌 그냥 안에서 정찰 정도만 하면 돼. 위험한 상황이 되면 이 스크롤을 사용하고.”
그는 아델에게 작은 양피지 뭉치 하나를 건넸다.
유메미가 만들어 뒀던, 사용 시 거리에 상관없이 지정한 대상에게 신호를 보내는 스크롤이었다.
“이걸 쓰면 넌 그 자리에서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적당한 순간에 써. 알겠지?”
“음……. 알겠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라. 이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명령이야.”
“네.”
아델은 유신우의 신신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임무에 보내면서도, 자신을 잃길 원치 않는다는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지는 명령이었다.
* * *
그렇게 아델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민간인인 척 위장한 채로 키안의 성채에 감금되었다.
그곳은 당연히 능력자를 구속하기 위한 특수한 장치 같은 것도 없이, 평범한 돌벽과 철창으로 이뤄진 감옥일 뿐이었다.
“적의 감옥에 인질로 사로잡힌 공주님이라니. 낭만적이군.”
성채의 간수가 철창 너머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현실을 더 절망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겠어. 큭큭큭.”
쩔그렁. 쩔그렁.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묶인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에는 지극히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상상을 품은 채, 공허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는 아델을 천천히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반대쪽 주먹을 움켜쥐고서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의 열쇠를 잡아당겨 자물쇠로 가져갔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인질을 잘못 건드렸다가 문제가 생기면 도리어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상급자들은 절대로 그녀의 몸이 상하도록 만들어선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지금 이 간수에게 그런 깊은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저 한순간을 위한 위험한 행동.
거기서 느껴지는 스릴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철컹. 끼이익.
자물쇠가 열리고, 문이 열린다.
그리고 인질과 간수 사이의 벽이 사라진다.
곧이어.
“……조금만 참지 그랬어.”
“으, 응?”
서걱.
그림자가 드리웠던 아델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털썩.
간수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아델은 자신의 손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렇게 죽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그러곤 주저앉은 간수의 몸과 머리채를 부여잡고서,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혀 놓았다.
목과 머리가 분리되는 마네킹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두 신체 부위를 조립하면서 말이다.
그 후 자신이 입은 옷과 간수가 입은 가죽 갑옷을 바꿔 입었다.
목 부위의 절단면에서 흘러 나오는 피는 적당히 옷을 찢어 천 스카프처럼 둘러서 가렸다.
끼이익. 철그렁.
그렇게, 그녀는 자신과 간수의 위치를 완벽하게 뒤바꿨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들통나고 말겠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시간은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니까 말이다.
그전에 들통난다 하더라도 유신우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고.
어쨌든 아델은 그렇게, 키안의 성채 내부를 간수로 위장한 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정찰……. 우선 내부 구조부터 파악해야겠어.’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고 지휘자와 최전방의 선봉장을 오가며 수많은 싸움을 승리로 이끈 유신우의 곁에서 얻은 숱한 전투 경험으로 인해.
어떤 정보가 적에게 치명적이고 아군에게 유용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성채의 내부 구조. 그리고 지휘 계통과 전력.’
그녀는 서슴없이 그 안을 활보하며 사방에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아델의 근본은 엄청난 수준의 습득 능력이다.
아무런 마력 운용 능력도 없이 피지컬만으로 유신우가 가르쳐 준 검술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던 그때부터.
사실상 각성자를 제외하고서 인류 최강 수준의 검사가 된 지금까지 줄곧 그녀의 강점은 학습 능력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정찰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능력 또한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이다.
“어이, 너 뭐야?”
그때,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어떤 여자가 그녀에게 위협적인 말투로 물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그는 이곳의 병사가 아닌 각성자였다.
아델은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동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동초? 네가?”
각성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지금 아델이 입고 있는 간수의 옷은 이곳 성안의 NPC 병사들이 입는 보통의 가죽갑옷이었다.
그렇기에 옷차림을 본다고 해서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 그럼 수고해.”
각성자는 고개를 갸우뚱하긴 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아델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라고 한들 이 넓은 성채의 경계 계획이나 병사의 면면을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델은 신분이 발각될 위기를 넘기는가 싶었다.
“……근데.”
막상 지나치려던 각성자가 다시 아델을 불러세웠다.
그 표정은 무언가 매우 불쾌하다는 얼굴이었다.
“필멸자 새끼가, 표정이 건방지네? 감히 신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고 말이야.”
각성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은 브리이드.
오하드 브레스의 아내, 신성한 불꽃의 여신이었다.
“짜증 나니까 죽여야겠다.”
그녀가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그 위에 자신의 무구를 투영했다.
꿀꺽.
그 앞에 마주 선 아델은 침을 삼키며, 왼손으로 왼쪽 허리춤에 꽂혀 있는 칼자루에 슬쩍 손을 가져갔다.
* * *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탁 트인 대평원.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드넓은 초원이, 거대한 두 세력의 병력들에 의해 사정없이 짓밟히고 있었다.
쿠구구궁.
지축이 흔들린다고 착각할 정도로 커다란 진동이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물기가 촉촉한 풀과 나무들이 지면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음에도 그 위로 흙먼지가 일었다.
그만큼 많은 숫자의 인원들이 이 땅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쿠웅.
이윽고 진동이 잦아들었다.
두 거대한 세력은 서로를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먼 거리에 멈춰 섰다.
나의 알포드 클랜을 주축으로 한 필멸자 연합.
각성자의 몸을 빌어 깨어난 세계 각지의 신들이 합류한 백산 클랜 잔당.
두 세력이 각자의 최강 전력을 이끌고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당장 병력을 물려라! 그 여자가 시체가 된 채로 끌려 나오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먼저 백산 클랜 잔당 측에서 마력이 실린 함성이 퍼져 나왔다.
그건 키안이 내지른 함성이었다.
‘아직도 자신들이 누굴 데려간 건지 인지하지 못했나 보군.’
그 말을 들은 나는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정작 인질이랍시고 데려간 게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저런 협박을 하고 있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여기서 병력을 물리지 않으면 어쩔 거냐?”
그래서 나 역시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되물었다.
말 그대로 쩌렁쩌렁한 소리를 지른 키안과는 달리, 내 목소리는 훨씬 더 낮고 나직하게 상대 쪽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듣기에 충분할 만큼 크고 분명했다.
“그렇다면 넌 네 소중한 여자도 잃고 네 동료와 힘, 그리고 목숨까지 잃게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전부!”
키안은 자신만만했다.
사실 그건 단순히 자신이 인질을 붙잡고 있다는 데에서 나오는 기세만은 아니었다.
그런 꼼수로 내 심리를 흔들지 않더라도, 정면으로 맞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만큼 자신과 자신 옆에 있는 각성한 신들의 전력이 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수성전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바깥까지 나온 건가.’
그 증거로 키안은 내가 자신의 영지 안으로 들어오도록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아예 영지 바깥의 평야에서 나와 정면으로 대치했다.
이건 수비의 이점 따위를 기대할 것도 없이 대놓고 나와 회전(會戰)을 벌이겠다는 의미였다.
‘바보 같을 정도로 우직하군. ……하기야, 그게 신이란 족속들이지.’
저들은 우리를 힘으로 꺾어버릴 생각인 모양이다.
전투에서 살아남더라도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예 심리적으로 완전히 뭉개버리려는 것 같다.
“어디, 한번 해보고 싶으면 해봐.”
난 그런 그의 도발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줬다.
자신감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저 신들이 가지지 못한 걸, 나 또한 가지고 있었으니까.
펄럭!
내 용날개가 펼쳐짐과 동시에 와이번들 역시 날개를 펴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일제히 하늘로 뛰어올라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아델을 제외한 일곱 명의 용기사.
내게 가장 강한 추가 전력이 하나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네놈들이 제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졌다 해도, 우린 너희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다.’
거신의 동력원 기술로 강화된 에테르 큐브.
저 강대한 무력을 가진 신들과 동등한 힘을 낼 수 있게 해 주는 영체 투영 권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물건.
고고도로 상승하는 동시에, 나는 인벤토리에서 그걸 꺼내 적에게 사용할 기회를 봤다.
‘아직.’
나는 공중에서 적이 우리 진영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모습을 내려다 봤다.
나를 격추하기 위해 비병을 하늘로 띄우고, 대공 포병들이 방열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당연히 아군 중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가 나이기 때문에 이쪽을 상대하는 데에 가장 큰 신경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다.’
전장을 뒤흔드는 게 나 혼자일 거라는 생각은 틀렸다.
“다리우스!”
우우웅.
상대가 사거리에 들어왔음을 인지한 순간 내가 내뱉은 전음에, 다리우스가 마법봉을 내밀어 고르곤 포병대에게 사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강철의 황소들의 몸통 후방에 장착된 커다란 동력원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축적된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
그로부터 이어진 몸통 양옆에 장착된 거대한 쌍발 레이 캐논(Lay cannon)이 빛났다.
엘프들의 무기인 황금 거신에 달려 있던 주포.
그 막강한 위력의 주포가 지금, 이 전장에 무려 108문이나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