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75화
며칠 후, 로마노프는 나에게 완성된 개량 에테르 큐브를 건네주었다.
“다 완성됐어. 여기.”
기존의 매끈한 정육면체 모양에서, 각 면들의 가운데에 파랗게 빛나는 보석 같은 것이 납작하게 박혀 있는 형태.
그리고 모서리들도 황금색의 금속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그 말대로 듀엔데에게서 받은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구조로, 완전히 새롭게 동력원을 주조해 에테르 큐브와 결합시켰다.
그는 정말로 동력원의 구조를 완벽하게 해석해 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이전과는 뭐가 달라진 거지?”
“그걸로 네가 투영해 내는 무구의 파괴력이 훨씬 더 강해질 거야. 기존의 동력원 구조에서 마력의 축적과 생산 기능을 뺀 대신 정제하고 증폭시키는 기능을 극대화시켰거든. 그 덕분에 그만큼이나 소형화가 가능해진 것이기도 하고.”
로마노프는 어차피 사용자가 마력을 공급을 할 테니, 굳이 동력원 자체가 마력을 만들어내거나 저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확실히 옳았다.
“그럼 이제부턴 내가 사용하는 무구 투영 권능이 전보다 더 강해지는 건가?”
“그렇지. 심플한 기능이지? 딱히 번거롭게 뭔가를 추가하거나 그러진 않았어. 어차피 네 능력 자체로도 이미 충분하잖아? 난 그걸 더 강하게 만들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사용하는 힘의 강화, 증폭.
간결하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게 없다.
내가 상상한 건 신형 마나건과 같이 아주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으나, 로마노프는 아주 간단한 발상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 굳이 우리가 엘프들처럼 될 필요는 없지.’
그들의 기술력으로 그들처럼 되려고 한다면, 결국 추격자에 그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기반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군. 수고했어. 고맙다.”
“뭘, 당연한 거지. 난 요즘 계속 기대하고 있다고. 네가 또 무슨 재밌는 물건을 가져올지 궁금해서 말이야.”
“다음엔 더 재미있는 걸 갖고 오도록 하지.”
로마노프는 내게 한껏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 * *
난 에테르 큐브를 가지고 바벨탑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이곳에 주둔한 엘프들을 다른 이종족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렇게 된 이상, 굳이 듀엔데와의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핵심 기술은 로마노프가 스스로 다 터득해 냈기 때문에, 앞으로 그에게서 얻어낼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럼에도 그와의 신의를 지킬 생각이다.
그건 더 먼 미래를 내다본 결정이었다.
‘듀엔데를 이용해서 엘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제 와서는 듀엔데에게서 얻을 ‘동력원 기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듀엔데가 내게 동력원 기술을 몰래 넘겼다’라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핵심 군사기술을 빼돌려서 다른 세력에게 넘긴 것.
그 사실이 본국에 알려진다면 듀엔데는 극형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문화가 어떻든지 간에 체계를 갖춘 집단이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나는 바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다.
요컨대, 내 손에는 그의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약점이 쥐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번 일로 그가 종족 내에서 신임을 얻게 되면…… 내가 더욱 쥐고 흔들기 좋아지는 셈이지.’
그런 상황에서 바벨탑의 문제를 잘 처리한 대가로 그의 입지가 올라간다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아진다.
여러모로 지금 상황은 나에게 유리한 상황.
“렙틸리언 쪽에서 새로운 신이 각성한 것 같다.”
한편, 해모수가 나에게 긴급 상황을 전달했다.
내가 에테르 큐브를 사용하지 못하는 그동안, 그가 나 대신 엘프들과 협력해 이종족들과 싸워왔다.
물론 듀엔데가 자신만만해했던 만큼, 오딘이 죽은 이후로는 그렇게 매서운 공격이 있지는 않았다.
가끔 라르스가 공격해 올 때만 두 종족의 협력이 필요했을 정도.
한데 여태껏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던 렙틸리언들 쪽에서 큰 변화가 관측된 것이다.
“렙틸리언? 어떤 신이지?”
“나와 같은 해의 힘을 사용하는 자……. 태양신 라.”
“이우누 신계의 주신이로군.”
주신격의 각성.
아무래도 오크 계도 그렇고, 수호령 자체가 강력한 각성자들이 먼저 강함을 얻을 확률이 높고.
그런 자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고 조건을 달성할 확률도 높아진다.
그래서 렙틸리언계에서도 가장 강력한 신, 라의 각성이 먼저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놈들의 공격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센 것 같다.”
“더 거세다니?”
“2층의 중앙 거점이 빼앗겼어.”
“2층이?”
현재 엘프들은 바벨탑의 2층부터 5층까지의 중앙 층계 구간을 점거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허락을 받지 못하거나, 그 거점을 돌파하지 않는 한 2층부터는 위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한 것이다.
오크들 역시 바로 그 2층의 중앙을 무너뜨리려고 공격을 지속했었는데.
어째선지 이번엔 오딘과 라르스가 멀쩡히 살아있을 때보다도 더 허무하게 렙틸리언들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
“어떻게 된 거지? 이우누 신계의 신들이 원래 그렇게나 강했나?”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워낙 예전부터 다른 신들과는 동떨어진 자들이라.”
이우누 신계의 신들도 그렇고, 그들의 후손인 렙틸리언도 그렇고, 이들은 과거부터 그다지 외부와 그렇게 많은 접촉이 있지는 않은 자들이었다.
하계의 필멸자들도 굉장히 폐쇄적이었을뿐더러 그들이 따르는 신들조차 호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 대륙에서 인간, 오크, 엘프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동안 렙틸리언들은 대륙 남부에 틀어박힌 채 거의 등장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나나 해모수나 그들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럼 결국 일단 부딪혀 봐야 한다는 거군.”
이럴 때는 무작정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에테르 큐브도 강화된 김에, 이건 그들을 상대로 실전 테스트를 해볼 기회였다.
* * *
나는 용기사들과 함께 2층으로 들어와 중앙 거점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빠른 속도를 이용해 공중에서 치고 빠지는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미스텔테인으로 검기를 뿌리고 나온다.’
가장 무난한 파동기를 준비한다.
미리 아지다하카의 힘을 끌어모아 보랏빛을 형성한 다음, 자색파동을 축적했다.
‘그리고…… 미스텔테인 소환.’
그러고는 무구를 꺼내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 검 역시 먼저 뽑으려 했다.
인벤토리에서 개량된 에테르 큐브를 꺼낸 후, 손안에서 거기에 미스텔테인을 투영시켰다.
그런데.
‘으음……?’
우우우웅.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에테르 큐브가 필요 이상으로 강한 파장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
그 안에 주입한 마나가, 로마노프가 달아 준 장치를 통해 증폭되었다.
그런데 그 증폭 수준이 너무나도 커서, 무구의 형상으로 유지되지 않고 그 이상으로 새어 나와버리는 것이다.
“뭐지?”
이상했다.
그동안은 내가 강해지면 강해진 만큼, 에테르 큐브 역시 그에 응해 더욱 강한 마력을 지닌 무구를 만들어냈다.
이건 원래 그런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사용자에 맞춰 함께 성장하는 성장무기.
그래서 이 증폭 장치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력이 커지면 그만큼 투영무구도 강해져서 만들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건가?’
이번엔 그 대단한 로마노프도 틀린 것 같다.
역시나, 엘프들의 기술로 만든 장치를 무턱대고 큐브에 달아놓은 건 실수…….
터억.
……인 줄 알았으나.
‘영체?’
푸른 마력으로 이뤄진 오크가 내 앞에서 두 발을 딛고 섰다.
눈은 천으로 가린 채, 겨우살이를 손에 쥔 형상.
미스텔테인의 주인, 오크 신 호드가.
내 에테르 큐브를 매개로 영체 투영된 것이다.
‘미스텔테인이 아니라…… 신 자체를 투영해 버렸다고?’
무구 투영의 한 단계 위 수준의 권능인 영체 투영.
레아나 라르스처럼, 이 권능은 보통은 자신의 몸을 매개로 자신의 수호령을 사용해 이뤄지는 것인데.
지금 나는 에테르 큐브를 통해 그걸 해내 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마력은, 지금껏 내가 투영무구를 사용할 때 느꼈던 것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이었다.
‘영체 투영……. 이 상태에서 공격을 투사한다면…….’
내가 중앙의 렙틸리언들이 있는 쪽을 향해 공격 의사를 가졌다.
그러자.
화악!
호드가 그쪽을 향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미스텔테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주의 기운이 부채꼴을 그리며 앞으로 퍼져 나갔다.
쏴아아아.
서늘한 감각이 파도처럼 전신을 덮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눈 앞에 펼쳐진 나무와 풀, 그리고 마수들까지.
온갖 식생이 순식간에 썩어문드러져 버렸다.
그것도 엄청나게 넓은 반경에 걸쳐서 말이다.
파동기를 사용할 때와는 달리 물리적 충격을 가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에너지를 죽여버린다는 미스텔테인 본연의 성능에는 매우 충실한 효과였다.
‘파동과 섞이질 않아.’
문제는 이렇게 영체 투영을 해버리면 무구가 파동과 조화되지가 않는다는 점.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하자가 없을 정도로, 위력은 충실했다.
아니, 오히려 이게 파동기보다 더 강했다.
‘부대원들의 힘을 빌리지 않은 단독 공격이 이 정도……. 잠깐, 그렇다면.’
난 이 상태에서 호드 대신 누아다를 영체 투영으로 꺼냈다.
아발론 신계의 주신, 누아다.
그는 인간 신들 중에서 주신격에 속하는 강력한 신이지만, 그동안 난 이 녀석의 무구인 클리브 솔리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무구의 속성은 신성이었기 때문이다.
‘기존엔 화, 수, 목, 금, 토 오행에 아지다하카의 주 속성인 암흑 속성만 제대로 쓸 수 있었지. 파동은 6가지 색깔밖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실제 속성은 10개…….’
신성 속성은 속성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편에 속한다.
‘정의’를 상징하는 만큼, 신들 중에서도 꽤 강한 신들이 이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서왕의 엑스칼리버, 누아다의 클리브 솔리쉬, 아테나의 아이기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무구들만 해도 매우 유명하고 강력한 것들이 넘쳐난다.
그동안 난 이걸 실전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동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하지만 이젠 어차피 파동기에 구속되지 않고서 더 강한 기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라면.’
난 그 상태에서 용기사들의 마력을 끌어왔다.
그리고 렙틸리언들이 있는 쪽으로 누아다가 클리브 솔리쉬를 휘두르게 했다.
콰우우우우!
신성 속성의 묵직한 검풍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미스텔테인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건 암흑과 신성의 속성 차이가 아니라, 물리적인 ‘파괴’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성질이 다르다는 의미였다.
“적이 하늘로 옵니다!”
그 검풍의 영향력이 지평선 너머에 있는 렙틸리언 진영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저 멀리 하늘에서 비병들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우리의 존재를 알아챈 것 같았다.
‘힘에 심취해서 위치를 노출시켜 버렸군. ……하지만.’
물론 그래도 상관없었다.
전부 격추시켜 버리면 그만이니까.
‘아서 펜드래곤.’
난 그대로 하늘로 손을 뻗어 내 앞에 떠 있는 에테르 큐브에 아서 왕을 투영했다.
그러고는 엑스칼리버를 휘두르게 해 고속의 참격으로 비병들을 모조리 베어냈다.
‘전보다 훨씬 빠르고 자유롭다.’
영체의 즉각적인 교체.
마치 무구를 계속 갈아치우듯, 신과 영웅들의 영체를 순식간에 교체시키며 내 앞에서 권능을 사용하게 한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에테르 큐브에 적합한 마나와 영혼만 공급하기만 하면 된다.
무기가 아닌, 신 그 자체를 휘두르는 힘을 얻은 것이다.
‘아테나.’
‘수르트.’
‘아르테미스.’
연속적으로 영체를 투영해 나가며.
나는 렙틸리언들의 수장인 태양신 라를 대적하기 위해 정면으로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