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34화
‘독자적으로 이뤄낸 마법 문명이라니.’
생각해 보면, 각 종족마다 문명 발달 수준이 차이가 날 수는 있다.
당장 인간과 오크만 비교를 해 봐도, 오크들의 생활양식은 인간에 비하면 천 년쯤 뒤떨어진, 바이킹 시대 수준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건 지난번 공성전 당시 알포드 성 내부의 낙후된 시설들이나, 그 오크들이 입고 다니는 생가죽 옷 같은 것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인류는 엄청나게 발전된 문명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스템이 발현된 세상에서는 그런 차이가 다 무의미하다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기로는 조그만 고블린 한 마리조차 죽일 수 없다.
죽이기는커녕 상처조차 낼 수 없다.
심지어 그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핵무기로도 말이다.
인간이든 오크든, 시스템의 규칙 안에 존재하는 도구로 직접 마물을 도륙해야 하는 것이 현재 세상의 진리.
문명 발전의 격차가 얼마나 나든 간에, 시스템의 발현 이후로는 인간과 오크가 거의 동등한 입장이 되었다는 게 정설인 것이다.
‘이건…….’
하지만 지금 저 엘프들은 다르다.
그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
신의 권능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는 듯, 수호령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도구만을 사용해 마물을 처리하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마물과 이세계의 환경에서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었던 인간의 기술문명과는 달리.
엘프들은 긴 시간 동안 자신들이 발전시킨 것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인간도 ‘마나건’이라는 독자적인 무기를 만들어내긴 했으나.
그 한계가 명확한 무기는 지금 저 엘프들이 사용하는 마법 문명의 도구들에는 전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너무 불공평하잖아.’
종족 간 출발점 자체가 다른 상태에서 발현된 시스템과 그 사이에서 어떠한 보정도 없이 진행되는 세계 통합.
언뜻 생각하면 이렇게 불공평한 게임이 또 있을까 생각이 들지만.
애초에 현실은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종족 간에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일지도 모른다.
‘……그래. 세상이 게임처럼 변한 게 아니다.’
21세기 지구에서 생애를 보냈던 유신우로서의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후대의 인간들이 만들어 낸 사가와 창작물들이 그저, 인간의 영혼에 새겨진 실제 과거 세상 속 기억을 반영했을 뿐.’
애초부터 시스템이라는 규칙 그 자체가, ‘신’이라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절대로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 *
‘내 목적은 바벨탑 5층에 있는 내 영혼을 거둬들이는 것.’
나는 이쯤에서 다시금 이곳에 들어온 내 목적을 상기했다.
눈앞의 엘프들을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저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유는…….’
엘프들은 현재 3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입구인 중앙을 장악했다.
그들은 저기서 특유의 마법 기술로 만든, 독특한 구조물을 건설했고.
그 안에서 중앙으로 몰려드는 마물들을 사냥하고 있다.
‘강화 마력석을 모으는 것.’
그 목적은 투영무구의 강화 재료인 ‘강화 마력석’의 확보.
엘프들은 황금 지팡이에서 광선을 쏘아 대며 마물들을 죽인 다음, 그들의 가슴에서 마력석을 추출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한 데 모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다.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 문명을 가진 저들이라 할지라도 수호령 투영무구 강화는 꼭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가 따로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강화 마력석을 대량으로 모으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저들과 나의 목적은 상충되지 않아.’
그렇다는 말은, 굳이 나와 엘프 종족이 지금 싸워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
이곳 바벨탑은 이권으로 인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곳이었지만.
그 이권이 겹치지만 않는다면 구태여 무의미한 분쟁을 일으킬 이유는 없는 셈이다.
오크들처럼 다짜고짜 무식하게 시비부터 걸 필요가 없다는 내 생각은 지금도 여전했다.
‘심지어 수호령도 급이 죄다 하급 아니면 상급이고 말이지.’
{수호령: 울토르(하급)}
{수호령: 데펜소르(상급)}
게다가 적어도 그 오크들은 신화급 각성자들의 존재 때문에 죽여야 할 당위성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 엘프들 중에는 신화급은커녕 희귀급 이상 각성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싸움부터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
일단 대화를 해보기로 생각한 나는, 혈혈단신으로 엘프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 다가갔다.
물론 문제 상황을 대비해 무력 투사를 할 준비는 충분히 해뒀다.
주변에 아델을 필두로 한 기사들을 숨겨 둠으로써 말이다.
그들은 내 신호를 받는 순간 언제든 적진에 검기 포화를 쏟아부을 것이다.
“오오, 드디어 왔군.”
그런데, 엘프들은 불쑥 나타난 나를 보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환영한다. 바벨탑 2층에 도달한 최초의 종족이여.”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나에게 경계는커녕 보자마자 환대를 한 것이다.
‘환영한다고?’
적어도 거수자를 향해 자신들의 무기를 조준하는 제스처라도 취할 법 한데.
그런 것도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저런 말을 했다.
그래서 난 순간 이들이 혹시 이곳 바벨탑의 NPC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은…… 이곳의 거주민인가?”
“거주민?”
“하하. 그럴 리가. 우리는 바깥에서 온 엘프들이다. 바로 당신처럼 말이야.”
하지만 역시나 그럴 리가 없었다.
애초에 눈앞에 ‘하급 수호령’ 표시가 저들 머리 위에 떠 있는 게 빤히 보인다.
NPC는 절대 각성자가 될 수 없으니, 내 발상은 처음부터 틀린 것이었다.
“그럼 당신들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이곳 바벨탑을 ‘관리’하고 있다.”
“관리라고?”
“그렇다. ……그런데, 당신은 혼자서 여기까지 온 건가?”
“그렇다면?”
“뭐, 그렇게 말한다면 우린 그렇게 믿어야겠지.”
엘프들은 어떠한 적의도 품지 않고, 매우 온화하게 말했다.
그 말 안에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가득히 풍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2층에 도달한 최초의 종족이 된 걸 환영한다.”
“아까부터 자꾸 날더러 2층에 도달한 최초의 종족이라고 하는데……. 왜 날 그렇게 부르는 거지? 당신들이 먼저 왔으면서.”
“우리?”
사실 저 엘프들이 처음 보는 이종족을 눈앞에 두고서 이렇게나 여유를 부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야 우린 다른 종족과는 다르니 예외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
이종족은 무슨 수를 써도 자신들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는 절대적 믿음으로부터 기인한.
종족적 우월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 * *
“반갑다. 나는 듀엔데라고 한다.”
‘울토르’라는 하급 수호령의 각성자 엘프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이 엘프 거점의 지휘자인 것 같았다.
그가 쓰고 있는 황금 투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유신우다.”
그들 특유의 인사법에 나 역시 목례로 답했다.
그리고는 그 듀엔데라는 자에게 물었다.
“나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난 지금 이 엘프들이 만들어 놓은 간이 막사 안에 들어와 있다.
엘프들의 리더가 나와 대화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는 인간의 대표자인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인간의 대표자? ……난 그런 게 아닌데.”
“그럼 지금부터 당신이 대표자를 맡으면 되겠군.”
은근히 고압적인 태도.
한갓 하급 수호령의 각성자가 신화급 각성자인 나에게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선, 각성자로서의 능력이나 수호령의 등급은 무의미했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마법 무구의 성능은 그런 능력과는 상관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급 수호령의 각성자가 지휘자를 맡고 있는 걸 보면 더더욱 그렇지.’
무엇보다도 난 여기에 대화를 하러 왔다.
말투가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 뭐……. 그게 당신들이 원하는 거라면. 내가 그 역할을 하도록 하지.”
“후훗. 정말 인간이 제일 낫군.”
“그건 무슨 뜻이지?”
“우리 세에서 오크나 렙틸리언들은 말이 통하질 않았거든. 하나같이 호전적으로 달려들기만 하는 놈들이었는데, 인간은 그나마 ‘사회화’가 되는 종족이었다.”
“…….”
“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도록. 우리가 말한 ‘사회화’는 당신들 ‘진성 인간족’이 아니라, ‘가공 인간족’에 대한 이야기이니 말이야.”
이 엘프들이 말하는 ‘가공 인간족’은 곧 NPC를 의미하는 것일 터다.
우리가 던전에서 만나는 오크와 엘프들을 마물취급하며 사냥했듯.
다른 세계인 오크계나 엘프계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겠지.
그리 생각하면 내 쪽에서도 딱히 뭐라 할 만한 발언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종족들을 ‘사회화’의 대상으로 봤다니, 엘프들의 이종족에 대한 시각이 어떤 건지 잘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인간의 대표자인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이 뭐지?”
“아, 그래.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듀엔데가 잠깐 뜸을 들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인간 종족 전체와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고 싶다.”
그가 꺼낸 말은 다름 아닌 평화 협정.
사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같은 시기에는 너무나도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바깥에선 한창 공성전이 벌어져 종족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 바벨탑에도 곧 피바람이 불 게 명약관화한데.
대체 무슨 수로 평화 협정이 이뤄질 수 있다는 말인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서로 투쟁하도록 부추기는 시스템의 강요를 넘어, 종족 간의 상호 이해와 보완을 통해 평화와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듀엔데는 이어서 그럴듯한 담론을 늘어놓으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이들 엘프는 정말, 진지하게 그게 가능하리라고 믿는 것 같았다.
“이상적이군.”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이상을 좇아야지.”
말 한마디에서 발산되는 짙은 지적 우월감.
아마도 그들이 저런 발상을 하는 것도 바로 그 근거 있는 우월감 때문일 것이다.
지금 세계의 규칙을 조성하는 시스템마저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평화 협정이라…….”
그런데 사실, 진짜 중요한 건 그런 대의가 정말로 실현 가능한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그건 애초에 나와는 상존할 수 없는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여기까지 말을 들은 나는, 이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 완벽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이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명확하게 보인다.
“좋은 얘기로군. 나도 당신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호오. 내 말을 곧바로 수용하는 건가?”
“당연하지. 인간 입장에서 너희같이 강력한 종족의 제안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먼저 평화 협정을 제안하겠다니,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야말로 손해라고.”
적당한 띄워주기.
그를 통해 짐짓 논리적으로 들리는 발언 전개.
“우리의 제안을 이해타산적 결과 도출로 받아들인다라……. 정말 인간답군. 하지만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지.”
“다만 그러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런 거짓 립서비스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조건?”
“바벨탑 5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열어다오.”
그건 바로 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건 기회다.’
저 말은 단순히 5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임기응변적 거짓말이 아니다.
내 진짜 ‘목적’은 영혼 수복, 그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엘프들을 이용할 기회.’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한 종족 전체를 속여 넘겨 세상을 뒤흔들어 버릴 거대한 사기극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