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96화
아흐리만의 성화에 못 이겨 정령 소환으로 우선 루 라바다를 불러냈다.
사실 성화에 못 이겼다기보다는 나도 궁금했다.
이렇게 불러내는 루 라바다가 진짜 그를 무시하고 괴롭혔던 과거의 신이 맞는 건지.
그런 자가 이렇게 나에게 속박된 채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면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그래서 망설일 것 없이 소환 절차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루 라바다. 부름에 응하라.”
일단 정령을 소환하려면 해당 정령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통상적으로 그 과정을 ‘계약’이라 한다.
정령술과 강령술의 결정적 차이점이 바로 그 계약의 존재.
강령술은 계약이 필요 없는 대신 부릴 수 있는 혼의 종류가 악령 등 급이 떨어지는 것들일 수밖에 없지만.
정령술은 계약을 통해 자연계에 존재하는 아주 높은 수준의 혼을 데려올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술자의 능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그 혼들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존재가 바로 수호령이다.
그리고 난 그 수호령들을 자유롭게 봉인하고 제어할 수 있는 앙그라 마이뉴의 힘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니 이걸로 내 영혼 안에 봉인된 수호령들, 특히 신화 수호령들을 겁박해 강제로 소환 동의를 얻어낸 뒤, 계약을 한 것처럼 꾸며 현실 세계에 불러낼 수 있는 것이다.
……라는 것까지가, 아흐리만의 설명.
파아앗.
과연 그 말이 맞아떨어진 걸까.
내 명령에 불투명한 에너지 덩어리 형태로 존재하던 루 라바다의 영혼이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이거다.’
이윽고 그것이 나와 모종의 힘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령 소환.’
난 그게 계약 상태임을 확신했고, 그 자리에서 루 라바다의 영을 현세에 강림시켰다.
파직. 파지지직.
그러자 허공에서 전기 불꽃이 튀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씩 내 몸으로부터 마나가 빠져나갔다.
마나는 루의 영혼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전기 불꽃이 튀는 지점에 모여든 것이다.
-나와라! 루! 이 쓰레기 자식!
아흐리만은 이제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렸던.
하지만 너무 순식간에 죽어버려서 충분히 복수를 음미하지 못했던.
루 라바다를 여기서 다시 만날 생각에 한껏 불타올랐다.
나도 그 두 사람의 재회가 어떨지 궁금해서 흥미로운 기분으로 다음에 벌어질 상황을 기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직. 치지직.
“……이게 뭐야.”
-…….
막상 눈앞에 나타난 루 라바다를 확인한 나와 아흐리만은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건 그냥 전류가 흐르는 마나 덩어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루가 맞긴 한데, 이건…….”
물론 그 덩어리 안에도 어떤 의식이나 의지, 감정 같은 게 담겨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특히 아흐리만은 이것보다 훨씬 더 진짜 ‘루 라바다’ 같은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때 드루이드가 브리이드를 소환할 때도 이랬었구나.”
다시 그 시련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떠올렸다.
이와 비슷한 건 거기서도 본 적이 있다.
일반 드루이드가 브리이드를 소환했을 때는 불덩어리 같은 게 나왔을 뿐이었는데.
‘제사장’이라던 옹구스가 그녀를 소환했을 때는 진짜 사람의 모습을 한 정령이 소환되었다.
“그렇다면……. 정령마술의 경지가 이것보다 더 높아야 한다는 건가.”
결국 문제는 스킬의 단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정령마술이 ‘기초 정령마술’인데, 아흐리만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려면 ‘심화 정령마술’이나 ‘고등 정령마술’까지 스킬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봐.
“응?”
-정령술. 키우자.
아니나 다를까, 아흐리만은 여기에 진심이었다.
어떻게든 이 신 놈들이 원본 형태로 나타나서 노예처럼 구는 모습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건 꼭 그런 문제만은 아니다. 분명 너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한테도? 어떻게?”
-정령마술의 단계가 올라가면 소환하는 정령의 형태가 완전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소환 가능한 개체 수도 늘릴 수 있다.
“수호령들을 여럿 부릴 수 있다? ……그건 좀 끌리는데.”
확실히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소환물에 대한 수요가 간절해지는 때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진윤이 같은 진짜 사람들이나 아델 같은 NPC들은 한 번 죽으면 되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위험한 일에 막 데려가기가 난감한 경우가 많지만.
반면 이렇게 소환한 정령은 죽어도 다시 영체가 될 뿐.
즉, 얼마든지 사지로 내던져서 갈아버려도 된다는 뜻이다.
그런 걸 한 번에 여럿 소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할 테고.
-그래, 그거지!
아흐리만은 봉인당한 신들이 그렇게 고통받을 거라는 점 때문에 내 생각에 더 격하게 맞장구를 쳤다.
“좋아. 그럼 한번 해보자.”
* * *
마나건.
이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는 각성자의 수 자체는 많다.
총기류라는 특성상, 창, 칼, 활 같은 냉병기에 비해 훨씬 적은 힘으로 강한 위력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제 총기와는 달리 탄약이 필요 없고 사용자의 마나를 탄 대신 소모하니, 사용하기가 원본보다 훨씬 간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런 특징은 수준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희석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전설 수호령 중에는 총기류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수호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나건은 오직 제조 스킬을 갖춘 각성자들이 직접 만든 것뿐이기 때문에, 유니크 무기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최강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 중에 마나건을 주 무기로 하는 각성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와우, 저 사람, 혼자서 저 괴물을 처치했다, 브로.”
“최윤아…….”
“뭐야? 너랑 아는 사이냐?”
하지만 이번 기초스탯 1,500 미만 레이드에서 이변이 벌어졌다.
마나건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역사 수호령 ‘시모 해위해’의 각성자, 최윤아가 다른 모든 유망주들을 제치고 압도적인 레이드 포인트 1위를 해버린 것.
“윤아야.”
이진윤이 보상을 선택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뭐야?”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최윤아의 동료로 보였다.
스릉.
“죽고 싶나?”
무기를 뽑고 그 위에 무구가 투영된다.
그저 다가갔을 뿐인데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지금 레이드 보상이 분배되고 있기 때문일 터다.
보상을 빼앗으려는 의도로 보이기에 딱 좋은 타이밍.
특히나 현재 최우선 소유권을 가진 최윤아에게 다가가는 건 더더욱 그렇다.
“괜찮아요. 내버려 둬요. 저랑 아는 사이예요, 그 사람.”
그런 그녀를 지키려던 사람들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곧장 무기를 거둬들였다.
이진윤은 다시 그녀를 부르며 안부를 물었다.
“윤아야, 오랜만이야.”
“응.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연락도 없고…….”
“서로 각자 일 하느라 바빴던 거지.”
이진윤과 최윤아는 작년 레이드 이후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건 바로 몇 달 전, 유신우가 알포드 성으로 돌아갈 때였다.
“그렇구나. ……그때 우리 클랜으로 들어왔으면 좋았을 텐데.”
유신우가 코홀리테 성에서 병력을 데리고 몰래 탈출할 계획을 세울 때 즈음, 이진윤은 최윤아에게도 알포드 클랜에 들어올 것을 제의했었다.
그러나 최윤아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하. 너 그 현실성 없는 망상에서 좀 벗어나, 제발. 세상이 벨그레이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너만의 독자적인 클랜이라는 게 말이 돼?”
너무 허황된 이야기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이진윤이 혼자서 이끄는 클랜.
최윤아는 지금 알포드 클랜을 그렇게 알고 있다.
유신우의 존재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른 채로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신우로서도 그녀가 자신을 따라올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
만약 유신우가 자신의 탈출 계획에 대해 다 말해주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는데.
최윤아가 벨그레이브에 남겠다고 한다면?
유신우는 그녀를 죽여야 했을 것이다.
벨그레이브 내에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아는 자가 하나라도 존재해선 안 되니 말이다.
그래서 유신우는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최윤아에겐 자신에 대한 정보를 숨겼다.
현재 그녀는 세간에 알려진 대로, 유신우가 염왕이나 하비 둘 중 하나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덕분에 그녀의 눈에 알포드 클랜이 이진윤 혼자서 운영하는 약체 집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진윤은 이제 최윤아의 생각을 돌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느꼈다.
그녀가 벨그레이브 안에서도 낙오자가 되었다면 모를까, 지금 보기엔 오히려 그 안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중에 또 연락할 수 있으면 좋겠네.”
그렇게 그는 최윤아에 대해서는 단념하고 작별하려 했다.
그러자,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를 불렀다.
“야. 이진윤.”
“……응?”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선율 오빠한테 연락해 봐. 네 친척이잖아.”
그건 진심으로 그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 * *
염왕 문제 때문에 벨그레이브는 1급 각성자 네 명을 중심으로 쪼개졌다.
그건 비단 유신우가 퍼뜨린 염왕의 내부 문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벨그레이브라는 클랜 자체가 국가를 초월한 유일무이한 무력 집단이 되었을 때부터, 분열은 예견된 일이었다.
유신우는 단지 그 단초를 제공했을 뿐이고.
아무튼 그런 대격변이 벌어지고 있을 때, 최윤아 또한 클랜원으로서 줄을 서야 할 곳을 선택해야만 했는데.
그녀의 선택은 성황 백선율.
그나마 같은 한국인이고, 집안의 인맥을 통해 어떻게든 닿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을 고른 것이었다.
“이번 레이드에서 1순위 클리어했다고 들었어.”
그리고 그 선택은 제대로 적중했다.
백선율은 그녀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네.”
“지금 가지고 있는 수호령이 역사 수호령이라고 했나?”
“네. 맞아요. 역사 수호령.”
“실력 좋네.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퍼포먼스를 내는 거 보면.”
“감사합니다.”
백선율은 그녀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너 같은 사람 발견하기 힘들지. 높은 스탯, 좋은 스킬, 좋은 수호령. 이런 것들은 돈과 시간만 들이면 누구든지 만들어줄 수 있지만, 센스를 타고나는 사람은 발견하기 힘들거든.”
그 돈과 시간을 아무나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수많은 각성자들이 그렇게나 아웅다웅하고 있지만.
그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어때? 너도 이젠 좋은 수호령 갖고 싶지 않아?”
좋은 수호령.
각성자들에겐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일 수밖에 없다.
다들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지만, 다이아라는 벽에 가로막혀 함부로 넘보기 힘든 영역.
하지만 그게 최윤아에겐 당장 확 와 닿지는 않았다.
“아…….”
그녀는 이미 총기류를 사용하는 것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전설 수호령을 얻게 된다면, 뭐가 나오든지 간에 총을 버려야 했다.
그러면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온 ‘실력’이나 ‘센스’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전 그냥 이대로가…….”
물론 그 모든 걸 다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수호령이라면 말이 달라질 것이다.
“너도 신화 수호령 가져야지.”
“네에?”
“갖고 싶지 않아?”
신화 수호령.
그걸 주겠다는 말은, 이 세상을 이끌고 있는 1급 각성자들과 똑같은 선상에 서게 만들어주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런 걸 얻을 수만 있다면, 당연히 총 따위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아아…… 네!”
최윤아는 금세 태도를 바꿔 대답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그래. 밖에서 그럼 기다리고 있어. 너한테 곧 다이아 퀘스트 계약 들어갈 테니까.”
“넵! 알겠습니다!”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는 최윤아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백선율.
“영혼을 담기엔 나쁘지 않은 그릇이군.”
……아니, 아후라 마즈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