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 장 자연지도 (4)
과거의 정정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완전히 시골 초로의 모습과 다를바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고생을 했는지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고 손은 농사 일로 터 있는 것이 이렇게 된 것이 못내 죄송스러울 뿐이였다.
물론 그 자신이 행한 일은 아니였지만, 비도문이 세상을 뒤엎으려 한 계획은 모두 어린 장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고, 반대하는 자들을 수족을 시켜 베어 넘기고 강제로 일을 진행한 사람도 장천이였다.
어린 나이에 그저 자신의 머리만을 믿고 해서는 안되는 일과 해야 되는 일을 분간하지 못한 우에서 범한 일이 지금 그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 것이였다.
기문숙은 이런 장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으니 잠시 후 오승에게 물어 보아 차를 준비해 놓은 민예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민예가 내려 놓은 나무로 된 찻잔을 들어서는 한모금을 음미하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랫만에 맛보는 차맛이구나. 승이라는 놈은 손이 커서 차맛도 독하기만했는데, 여아의 손이 닿아서 인지 부드럽기 그지 없구나.”
“아!”
민예는 그의 말에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비도문의 수법으로 변장을 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 보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무림의 곳곳에 첩자를 보냈던 비도문은 변장술만은 고금에 어느 곳도 따르지 못할 만큼 뛰어난 곳이였기에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알아낸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제가 어떻게 여자인지 아셨나요?”
비도문에 있었을 때도 그랬지만, 민예는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곧잘 말문이 트인 장천이나 비도문의 고수들에게 물어보곤 했었으니 기문숙을 만난 것이 처음임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말을 붙이는 그녀였다.
“허허. 여아의 기운이 흐르는데 왜 그것을 모르겠느냐?”
“응?”
민예로선 그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장천은 어느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가르쳐 준 자연도는 주위의 기운의 변화를 읽어 그 기운을 빌어 사용하는 무공이였기에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서 나오는 기운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물론 이러한 기운은 극히 미약한지라 어느정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알아채지 못함이니 장천은 겉으로 보는 기문숙의 모습은 이제 살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였지만, 그 내면의 깊이는 어느 누구보다 깊어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민예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답한 기문숙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 놓고는 장천을 보며 말했다.
“그래 이 늙은이를 보니 마음은 조금 풀렸느냐?”
“예?”
“쯧쯧..어쩌다가 이렇게 됐누..”
장천은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기문숙은 이런 사람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사문을 배신한 것을 후회하며 자신의 무학에 전념하던 노무사였다.
자상한 면도 있었지만, 괴팍한 면이 더 많았던 사람은 이제 어디론가 사라지고 동네 어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남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한마디의 말은 장천이 감추고 있는 부분을 적나라하게 파해치는 듯 했다.
“후회가 되면 이 늙은이라 같이 살자꾸나.”
마치 어린 손자를 도닥여주는 듯한 말에 장천은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하기에는 남겨진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것은 그의 모든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장천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기문숙은 쯧쯧 혀를 차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니, 근심만이 쌓이는구나.”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장천의 현재의 위치는 이 모든 것의 원흉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버리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흐른듯 했기에 줏어 담지도 새 잔에 물을 담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기문숙의 말대로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그와 함께 살고 싶었지만, 그것이 회피라는 것을 알기에 대답하지 못하는 장천이였다.
“어찌하겠느냐? 잘못을 알았으니 매라도 맞겠느냐?”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리 할 수 있지만, 세상일이 그리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망설이느냐?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니, 네 손으로 행한 일이라면 네 손으로 끝내면 될 것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 이대로 있으려무나.”
“.....”
그저 자신이 좋을대로 하라는 듯한 기문숙의 말에 장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가만히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더욱 안좋은 결과라는 것을 가져 올 것임을 알기에 마음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침묵이 이어지는 차 한잔을 비울 때 쯤 기문숙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를 보며 말했다.
“무료하구나. 산책이라도 하자꾸나.”
“예.”
장천 역시 조금은 갑갑함도 느끼는 지라 공손히 대답하고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산책이라고 해봤자 주위가 온통이 평원이였으니 그리 볼만한 풍경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멀리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태양 이외에는 끝이 안 보이는 평원만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기문숙은 말없이 그저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였다.
산책이라고는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서 그저 말 없이 걷는 것이 장천으로선 처음 당하는 일이였던지라 고개를 어디에도 돌려야 할지도 막막할 뿐이였다.
그저 옆에서 말 없이 걷고 있는 기문숙을 몇번 돌아보던지 해가 지고 있는 서쪽 하늘을 고개를 돌려 힐끔 처다보는 것 외에는 그저 걷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도 앞으로 쭉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문숙이 가는 방향데로 따라 갈 뿐이였으니 이러한 무료함은 시간이 지나자 답답함으로 이어지니 언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산책은 거의 반시진 이상을 계속 이어지니 집에서 멀지 않은 공간에서 방향도 정해지지 않은채 그저 걷고 또 걷는 산책이 끝나자 장천은 가슴이 시원해지는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이러한 심경의 변화에 그 자신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자신이라면 말 없이 수시진 아니 몇일을 걸어도 이러한 심경도 들지 않을 것이요.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러한 것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 자신을 이렇게 답답하게 만들었을까?
어느 곳에도 눈을 돌릴 수 없는 평원의 모습? 어디로 갈지 모르게 움직이는 자신의 사숙조를 따라 다니는 것이?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이러한 모든 것이 한 순간 자신을 마치 꽉막힌 공간으로 몰아넣을 정도의 압박감을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장천이였다.
단 반시진의 산책이였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장천은 자폐로 스스로 마음을 가두었을 때 보다 더한 고통과 공포를 느껴야 했으며, 그것은 오랜 사색으로 이어졌다.
만약 이 전에 기문숙을 상대로 자신의 현 심정에 대해서 토로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마음도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왜 그러한 느낌을 들게 했는지 명확한 대답을 안겨주지 않았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기문숙과 함께 걸어가던 것이 현 자신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현 상황은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는 넓은 평원만이 존재할 뿐이였고, 자신이 뜻도 없이 의미없이 기문숙을 따라 걷던 것 처럼 그저 과거의 장천이란 존재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형편이였기 때문이다.
‘사숙조님은 나에게 이것을 말해 주시려 했던 것일까?’
현재 자신의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기문숙이 그런 의도로 자신과 산책을 했다고는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였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마치 득도한 자와 같은 모습을 기문숙이라면 현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어느정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저런 생각으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민예가 방으로 들어와서는 장천을 보며 말했다.
“문주님 저녁 식사가 준비 되었습니다.”
“알았다.”
민예와 함께 나가자 이미 기문숙과 오승이 자리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 간단히 인사를 한 장천은 자리에 앉았다.
“네 입맛에 맞을 지 모르겠구나. 늙은이야 늘상 먹는 음식이지만 말이다.”
기문숙의 말대로 식탁에는 시골 농가에서 흔히 먹는 반찬이 대부분이였지만, 무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는 이것 보다 못한 음식을 먹는 일도 다반사였기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건량만을 먹었기에 진수성찬 여겨지는군요.”
“이 놈에게 마당에 닭 한마리라도 잡으라니까 절대 안된다고 하더구나. 늙은이 호강이나 한번 하는가 했더니 말이다. 허허허”
“어르신!”
기문숙의 농에 오승은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으나 장천에게는 이러한 모습에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
그 모습에 민예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니 장천은 영문을 몰라 그녀를 처다 보았는데, 민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물론 그녀가 놀란 것은 바로 장천 때문이였으니 자폐로 인하여 마음을 닫아버린 장천은 그동안 민예에게 단 한번도 웃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민예는 처음 보는 장천의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으니 이곳으로 온 것이 잘한 것이라는 생각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 언제쯤 떠날 생각이냐?”
“사숙조님을 뵈었으니 오늘 오후 쯤에 떠날 생각입니다.”
“마음은 정했느냐?”
“그렇습니다.”
“다행이구나.”
기문숙은 마음을 정했다는 장천의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니 장천의 얼굴 속의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눈에서 빛이 나는 것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끝낸 장천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그 때 기문숙이 그를 보며 말했다.
“자연도는 어느정도까지 익혔느냐?”
장천을 본 후 처음으로 무공에 대한 말을 꺼내는 기문숙이였으니 그는 공손히 자신의 자연도의 경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천지동아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헉!”
그 말에 놀란 것은 기문숙이 아닌 오승이였으니 장천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기껏해야 기유조종의 초입단계 정도라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이 사단의 마지막 단계인 천지동아의 단게에 이르렀다 말했기 때문이다.
자연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오승으로선 천지동아의 단계가 어느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호오! 천지동아.”
기문숙 역시 장천이 천지동아의 수준에 올랐다는 말에 크게 흡족한 표정을 지으니 그 역시 장천이 천지동아의 수준에 올랐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의 실력을 잠시 보자꾸나.”
“예.”
그의 말에 장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민에에게 병기를 가져오게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천지동아의 수준에 이르렀다면 그 무공의 위력또한 추측하지 못한 경지였기에 오두막에서 멀이 벗어난 곳까지 걸어온 그들이였으니 장천은 민예가 가져온 검을 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응?”
오승은 장천이 쌍도문 출신이란 것을 알고 있기에 그가 검을 들고 나가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천지동아의 수준에 이르렀다면 이제 그의 손에는 어떠한 것이 들려 있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기에 그렇구나 하는 생각으로 넘길 뿐이였다.
검을 들고 자리에선 장천은 천천히 자신의 내력을 끌어 올리니 그의 몸에서는 강렬한 기도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홍련십팔검 제 일식 홍련분멸!”
기도를 퍼뜨린 장천이 시전한 검술은 홍련교의 무공인 홍련십팔검이였으니 제 일식인 홍련분멸의 초식을 시전하자 그의 주위로 뜨거운 열기가 치솟아 오르는 듯 싶더니 초식에 따라 강렬하게 움직이며 주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자연도는 실제적으로 무공이라기 보다는 무리에 가까운 것인지라 어떠한 무공을 시전해도 그것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그저 도(刀)라 이름을 붙인 것은 기문숙 자신이 도를 사용했을 따름이지 만약 검을 사용했다면 자연검이라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에 와서는 이것을 자연도(自然刀)라 하지 않고 자연지도(自然之道)라 부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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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생각보다 힘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