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스레이드-182화 (182/197)

182 제2바벨탑 공사(2)

제2바벨탑의 토양은 전체적으로 흙빛이었으며 상당히 두꺼운 얼음 아래에 부드러운 흙이 잠들어 있는 형국이었다.

또한, 토양에 제법 영양분이 많은 편이었고 지력으로 따진다면 어지간한 황금 평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이 흙으로 실험을 해 봤는데, 1년에 삼모작까지 가능하다요!”

“이모작이면 몰라도 삼모작이 가능하다고? 아무리 그래도 식물이 자라는 시간이 있을 거 아니야. 그건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태하의 질문에 총총은 복슬복슬한 털 사이에 끼워 넣었던 종이를 한 장 꺼내어 내밀었다.

종이 안에는 흙에 대한 데이터가 모두 들어 있었다.

헌데 종이 안에는 태하가 못 보던 종류의 단어들이 꽤나 많이 들어 있었다.

“증폭 수치? 이건 또 뭐야?”

“이계 방사선은 때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요! 특히나 지금 이 흙처럼 이계에서 온 흙일수록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범위를 줄여 주기도 하는 것 같다요!”

“이 흙이 이계에서 왔어?”

“그렇다요! 지구에 있는 모든 흙의 표본을 살펴봤는데, 이런 특이한 흙은 없었다요!”

“흠, 그렇구나. 세상에는 이런 흙도 있었어.”

“아무튼 그런 흙에서 생기는 에너지는 일종의 증폭 효과를 낳는데, 그로 인해서 식물의 생장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요!”

“생장에 영향을 미친다면, 조금 더 빨리 식물이 자라나게 해 준다는 건가?”

“아아, 맞다요! 바로 그거다요!”

“허어, 그런 게 있었던가? 나는 처음 들어 보는 것이라서 조금 당혹스럽네.”

“아무튼 이런 흙만 있다고 한다면 1년에 삼모작이 문제가 아니라 사모작도 가능하다요!”

신묘한 힘을 가진 흙이라는 것은 얼핏 봐서 알고 있었지만, 이런 힘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다.

쿠그그그극!

한참을 아래로 내려가던 몰먼호가 일순간 정지했다.

“거의 다 왔다요!”

“흠, 거의 다 왔어? 이 근방에서 강렬한 수치가 감지되고 있다는 거지?”

“그렇다요! 잘하면 우리가 가진 장비로는 방어가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요!”

“그럼 몰먼호는 괜찮아?”

“몰먼호와 이두박근호는 우주 한복판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요! 방사능쯤이야!”

총총의 호언장담이 있었으니 일단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는 몰먼호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태하는 에너지 학자 뱀파이어인 사무엘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사무엘, 언제쯤 우리가 밖으로 나갈 수 있지?”

“그건 대장님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는 없습니다. 솔직히 가장 좋은 방안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근원을 찾는 것이고요.”

“아, 그런 거야?”

“방사능이라는 것에 대한 연구도 아직 완벽하지 않은 것이 인간의 기술입니다. 그런데 이계 방사선에 대한 지식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흐음, 그럼 계속해서 몰먼호를 움직여야지. 별수 있겠어?”

“네! 잘 선택하셨습니다. 어지간하면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모든 학자들이 다 그러하듯 사무엘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채로 살아간다.

지금의 경우처럼 절대 안전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쿠그그그극!

다시 땅을 파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몰먼호.

태하는 아까보다 확연히 느려진 몰먼호의 속도에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제1바벨탑의 지질보다 이곳의 지질이 훨씬 더 단단한 건가? 드릴이 잘 안 먹는군.”

“아무래도 이곳의 지질이 제1바벨탑보다 생성된 지 오래된 것 같다요! 거기에 추위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요!”

“하긴. 기후와 환경이 다 다른데 속도가 같을 리가 있나?”

몰먼도는 계속 아래로 내려갔지만, 금방 연료가 고갈될 판이었다.

총총은 이제 이곳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 번 파 놓았던 땅은 다시 파기 쉽다요. 여기서 일단 멈추었다가 연료를 채워서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요!”

“흠,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고.”

불과 탐사 30분 만에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종료되려는 모양이었다.

허나 바로 그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끼기기긱……!

태하의 인벤토리에서 뭔가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라?”

“왜 그러시냐요?!”

“이, 이스터에그가 반응하는데?”

“그 계란 말이냐요?!”

인벤토리에서 이스터에그를 꺼낸 태하. 원래 백색이었던 이스터에그는 금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것은 잔잔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끼긱……!

“어?”

“계란에 금이 간다요!”

그동안 부화기 안에 잘 들어 있었던 이스터에그가 드디어 부화하려는 것일까?

태하와 동료들은 그저 숨을 죽인 채 이스터에그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두근, 두근!

이번에는 어디선가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팔은 눈을 번쩍 떴다.

“어, 어어……?!”

“왜 그래요?! 뭐가 보여요?”

“저, 저거! 저거 안 보여요?!”

혼자서만 난리를 치는 용팔, 동료들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가운데 용팔이 난리를 피우니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한나는 용팔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퍽!

“어흑!”

“난리 좀 그만 피워요! 뭐가 보인다는 건데요?”

“……저기, 안 보여요? 얼굴이 없는 여자가 지금 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잖아요.”

“어, 얼굴이 없어요?”

사신이라서 귀신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용팔은 가끔 자신의 생각처럼 생기지 않은 귀신을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이건 아마 그가 100년 이상 그림리퍼로 살아간다고 해도 절대 고쳐지지 않을 고질병일 것이다.

“그나마 레이스는 좀 나은 편인데, 저건 도무지 보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네요.”

“레, 레이스가 아니라고요?”

“네. 그냥 귀신이에요.”

한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웃었다.

“……귀신이 어디 있어요?”

“그럼 내가 보는 건 뭔데요? 헛것?”

“다, 당연하죠!”

생각보다 한나는 귀신을 무서워하는 모양인지, 용팔에게 버럭 화부터 냈다. 그러자 용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했다.

“헌터님, 제가 밖으로 나가 볼게요!”

“지, 지금요? 지금 나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요?”

“괜찮아요. 저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잖아요?”

그제야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마다 성좌의 자리를 대신해서 임무를 부여받은 반신이 아니던가.

“아 참,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구나?”

“당연하죠! 여기서 보직을 못 받은 사람들 말고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죠. 특히나 저처럼 사신의 자리에 올라선 사람은 더더욱이요.”

태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다녀오세요!”

“오케이!”

용팔은 용감하게 몰먼호 밖으로 나갔다.

해치로 단단하게 방어가 되어 있으며 에어로크가 설치되어 있는 몰먼호는 외부와 완전히 차폐된 구조였다.

용팔은 그런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아갔다.

-으흐흐흐……!

“얼굴이 없는데도 우네.”

-……내, 내가 보여?

“당신, 내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알 수가 있나? 얼굴이 없어졌는데.

“그럼 말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게 미스터리라는 거야. 넌 내가 하는 말이 들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없으면 눈도 없을 것이고 귀도 없을 것 아닌가. 제아무리 귀신이라도 못 보고 못 들으면 답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이곳을 왜 떠돌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여기에 발이 묶였어.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고.

“대충 이곳에 얼마나 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여기가 어딘데?

“제2바벨탑이요.”

-……바벨탑? 지금은 몇 년 몇 월인데?

“2025년 8월이요.”

그녀는 없는 얼굴로도 충분히 표현이 될 정도로 가녀린 떨림을 보였다.

-80년은 넘게 지났잖아!

“80년이요……?”

-그동안 얼굴이 사라져서 앞도 못 보고 소리도 못 들어서 답답했었지. 이곳을 나가려고 길을 몇 번이고 찾았는데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그런 세월이 80년이나 지났다니!

8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것도 이 답답한 지하에서 80년을 혼자 보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용팔은 그녀를 저승으로 인도해 주기로 했다.

“저는 사신입니다. 당신을 삼도천으로 인도해 줄 수 있어요.”

-……사신? 난 죽은 기억이 없는데.

“아니요, 죽은 게 확실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얼굴이 없는데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요?”

-죽은 건 아니야. 확실해. 왜냐하면 누군가의 저주를 받고 얼굴이 서서히 사라졌고,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서 이러고 있었거든.

“죽은 기억이 아예 없다고요……?”

-응, 없어.

용팔은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그녀에게 다가선 용팔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죽음의 기억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그동안 그녀의 곁을 스쳐 갔을 제3자의 죽음들이 용팔의 뇌리를 스쳤다.

허나 결정적으로 그녀의 죽음만 없었다.

“어……? 진짜 안 죽었네?”

-그렇다니까?!

“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나저나 난 이제 어떻게 하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삐비비빅!

용팔의 몸에 부착되어 있던 방사능 측정 기계가 터질 듯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허, 허억!”

-뭐, 뭐야? 왜 그래?

“이계 방사선 수치가 터질 듯이 폭주하고 있어요! 혹시, 당신이 바로 이계 방사선의 근원……?”

-에이, 말도 안 되는……. 아니, 아니지! 나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저주를 받았거든? 그래서 여기에 갇히게 된 거야.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있었겠지.

“이계 방사선이 저주로 인해 생긴 것이다?”

-아무튼 나 좀 꺼내 줘. 여기서 조금 더 있다간 아주 죽을 것 같아.

“아,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용팔은 몰먼호로 돌아가서 여벌의 탐사복을 가져다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비록 용팔의 눈에만 보이는 사람이라곤 해도 일단 죽은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옷부터 입히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용팔이 건네준 옷을 입고 몰먼호에 올랐다.

그러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어, 어어?! 투명인간이 걸어 다니네?!”

-투, 투명인간이라고?

“말소리도 들려! 우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허나 이윽고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쨍그랑!

[부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부화가 완료된 이스터에그에서는 아리따운 여성의 얼굴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으, 으아아아악! 이게 뭐야?!”

“사, 사람의 얼굴이잖아요!”

알에서 태어난 얼굴은 정체불명의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용팔은 얼굴이 그녀에게로 달려가는 것을 보곤 본능적으로 뚜껑을 열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딸깍!

탐사복의 뚜껑을 열어 주자, 정말로 얼굴은 그녀와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합체를 했다.

“콜록, 콜록!”

“……어? 이제 보인다!”

그제야 형체가 드러나는 그녀. 용팔은 그녀에게 방호복을 입히길 아주 잘했다고 생각했다.

잘은 몰라도 80년이면 옷은 다 해져서 이제 더 이상 몸을 가려 줄 수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였다.

“저기…… 누구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