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스레이드-180화 (180/197)

180 불쌍한 사람들(2)

제1바벨탑 100층으로 향하는 용팔과 태하.

두 사람은 유리아에게 제2던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 얘기를 들은 유리아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뱀파이어라고 해서 무조건 언데드 계열로 들어가는 건 아니에요. 아시겠지만, 뱀파이어는 좀비나 스켈레톤과는 다르게 엄연히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이니까요. 심지어 순환계나 소화기도 갖추고 있죠.”

“그럼 아주 방법이 없는 거야?”

“뱀파이어 로드를 죽인다고 해도 사실 포로들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죠. 다만, 100층을 공략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요.”

“흠…….”

결국 뱀파이어들에게 죽음을 선사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신룡과 100층으로 향한 두 사람은 저승을 오가는 또 다른 사신들에게 이에 대해 묻기로 했다.

우선 태하와 유리아는 명계로 함부로 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입구에서 용팔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잘 다녀와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네, 헌터님!”

용팔은 그림리퍼의 활을 등에 질끈 동여맨 후, 명계로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명계로 들어선 용팔은 이내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삼도천의 축축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솨아아아!

잠시 후, 어두웠던 시야가 뚫리면서 얕게 일렁이는 몇 개의 빛이 용팔을 맞이했다.

-사신님!

“응, 잘 있었어?”

그를 따라오는 빛 덩어리들은 삼도천에서 황천으로 영혼들을 안내하는 친절한 황천의 수호령들이다.

수호령들은 용팔의 어깨와 머리에 올라앉아 친밀감을 표시했다.

-오늘은 영혼들이 없으시네요?!

“응, 오늘은 그래서 온 게 아니니까.”

-그럼 저희들을 보려고 오신 건가요?

“아하하!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

-헤헤, 사신님께서 저희들을 보고 싶어 하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수호령들이 좌우로 살랑살랑 몸을 흔들자, 그 주변으로 분홍빛 빛의 먼지들이 눈꽃처럼 떨어져 내렸다.

용팔은 그런 귀여움 덩어리들에게 물었다.

“그……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네, 뭔데요?!

“던전에 갇힌 뱀파이어들은 사신이 영혼을 거둘 수 없는 거야?”

-뱀파이어요? 만약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었다면 영혼은 불타서 없어져 버려요.

“……영혼이 없어져?”

-자의든 타의든 간에 뱀파이어가 되면 영혼은 사라지고 말아요. 뱀파이어 로드가 악마와 계약을 맺어서 탄생한 것이 뱀파이어거든요. 그때 악마는 자신의 마력을 높이기 위해서 인간들의 영혼을 주로 섭취하는데, 그때 인간을 영생으로 현혹시키기 위해 영혼을 달라는 조건을 달았던 거죠.

“흠, 그런 거였어?”

-뱀파이어가 빛에 불타 버리는 몸을 가졌다든지,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든지 하는 것은 다 육신만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영혼의 결핍은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갈증과 빛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 주게 되거든요.

“불쌍한 사람들이네. 이 사람들, 일부러 뱀파이어가 된 건 아니거든.”

용팔은 수호령들에게 뱀파이어들의 사정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러자 수호령들의 색은 파란색으로 변해 버렸다.

-……너무 불쌍하네요. 살아서는 장기 밀매로 고통받고 죽어서는 영혼까지 빼앗기다니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이걸 어쩌면 좋나 싶어.”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명계에서는 도움을 줄 수 없을 거예요. 이미 영혼은 황천길을 건넜으니까요. 다만, 그 사람들에게 영면이라는 것을 허락하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제1바벨탑에 있는 뱀파이어 나이트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요.

“아아, 그렇지! 우리에게는 이미 뱀파이어가 있었구나!”

태하의 부하 중에는 이미 인간의 피를 빨아 먹어야만 살 수 있었던 가혹한 운명의 뱀파이어가 존재하고 있었다.

용팔은 그길로 한달음에 태하를 찾아갔다.

명계 입구에서 용팔을 기다리고 있던 태하와 유리아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오오, 용팔 씨! 어때요? 좀 진전은 있었어요?”

“음……. 그게 말이죠. 딱히 방법은 없는데, 동병상련인 처지의 사람은 있을 것이라는 게 명계의 전체적인 의견이었어요.”

“아아, 뱀파이어 나이트?!”

“네, 맞아요!”

“그럼 당장 녀석을 좀 만나 볼까요?”

***

뱀파이어 나이트와 뱀파이어 노블들은 제2바벨탑에 갇혀 버린 불쌍한 이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운명의 노예라…….”

-그렇습니다. 운명의 노예가 된 겁니다. 쯧쯧, 어쩌다 그런 극악무도한 무리들에게 당하고 말았던 것인지.

“아무튼 간에 그 사람들을 영면에 접어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야?”

뱀파이어 나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음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영면이라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들에게만 허락된 것, 뱀파이어처럼 스스로 저주를 받아서 영혼을 팔아먹은 것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고통만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죠.

“그럼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는 소리야?”

-뱀파이어는 죽어서 명계에 가면 자살한 사람, 스스로 영혼을 팔아먹은 자로 간주되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게 됩니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말이죠.

“……그건 너무 가혹한 것 같은데. 저 사람들이 일부러 뱀파이어가 된 건 아니잖아?”

-명계의 법도가 그렇습니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 절감되지 않으십니까?

“빌어먹을.”

-아무튼 간에 저들을 이대로 몰살시키면 어차피 지옥 불에서 고통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뭐, 아예 방법이랄 게 없다는 소리네?”

-있기는 한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겁니다.

“오호, 방법이 있어?!”

-저주에도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뱀파이어도 영원불멸할 것 같지만, 그건 인간에 비했을 때의 얘기이고요. 뱀파이어는 대략 천 년쯤 지나면 서서히 신체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저주의 유효기간이 다했기 때문이죠.

“아하, 그래?! 그럼 천 년만 버티면 되는 거네?”

-그렇긴 한데, 천 년 동안 사고를 당한다든지 햇볕에 노출된다든지 하는 일로 인해 신체가 사라지면 안 됩니다. 저주가 효력을 다하면 자의와 타의를 구별해서 명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때, 그동안 뱀파이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지옥행과 윤회, 극락 등이 결정되겠지요.

“천 년이라!”

드디어 영면에 접어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태하는 이 소식을 들고 제2바벨탑에 기거하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찾아갔다.

던전 4층에서는 이미 공사가 한창이었다.

쿵쾅, 쿵쾅!

시끄러운 공사장 소음이 던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뱀파이어들은 저마다 도구를 하나씩 들고 다니면서 몰먼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그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자자, 다들 먹고 하세요!”

“……으윽, 이건 뭐냐요? 꿀꿀이죽처럼 생겼는데.”

“오트밀이라고, 귀리를 불려서 만든 겁니다. 근육을 키울 때에도 종종 먹는다고 들었어요.”

“오, 오호! 그렇다면 먹는다요!”

몰먼은 이미 두뇌가 100% 헬창화가 되었기에 근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라면 뱀의 껍질이라도 산 채로 씹어 먹을 것이다.

제법 몰먼족과 잘 어울리고 있던 뱀파이어들에게 다가간 태하는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나?”

“아아! 오셨습니까?!”

“음…… 내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동시에 가져왔어. 뭐부터 들을래?”

뱀파이어들은 씁쓸한 표정과 함께 나쁜 소식부터 선택했다.

“아무래도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나쁜 소식을 먼저 들어야 나중에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에 기쁨이 더 크겠죠.”

“좋아, 그럼 나쁜 소식부터 전해 줄게. 일단 당장 명계에서는 너희들을 받아 줄 수가 없다는군. 그렇다고 해서 지금 스스로 심장에 말뚝을 박는다거나 억지로 던전을 탈출하려 한다면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네.”

“……그럼 영면이라는 건 아예 허락조차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뱀파이어로 변한 그 순간에 이미 영혼은 불에 타 버렸고, 그건 계율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어서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군. 이게 다 악마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뱀파이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허나 이것이 태하의 잘못은 절대 아니기에 그를 원망한다거나 책망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저희들 때문에 그런 고생까지 하시고…….”

“아니, 고생은 뭘.”

“그나저나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뱀파이어들은 덤덤하게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대로 또다시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머리를 덮어 주는 집은 만들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 뱀파이어들에게 태하는 저주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 일러 주었다.

“천 년. 딱 천 년만 아무런 사고 없이 버티면 스스로 신체가 허물어지게 된다는군. 저주의 유효기간이 끝나기에 제대로 된 영혼의 심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거야.”

“……허어! 천 년이라! 어쨌거나 살아만 있다면 나중에 제대로 영면에 들 수 있다는 겁니까?”

“바로 그런 셈이지.”

“아하하! 그렇다면 희망은 있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천 년 동안 계속 이곳에 머물러야 해. 그래도 괜찮겠어?”

“이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살았습니다. 이 정도는 저희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지요!”

인간은 때론 너무 극심한 고통을 겪은 나머지, 보다 약한 고통은 오히려 행복이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예전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이니 이곳에서 무엇을 하든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하는 이들에게 천 년을 버틸 수 있는 지하도시를 만들라고 조언했다.

“천 년이야. 그동안 같은 모습,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사람들끼리 영원히 살아가야 해. 그러자면 일거리도 만들어야 할 거고 완벽하고 튼튼한 도시도 만들어야겠지.”

“시간은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서서히 익힌 음식에도 적응하고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던전 안에서 저희들끼리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찾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찾아야지. 앞으로 당분간 우리 헌터들이 교역품을 가져다줄게. 바깥세상과 교역품을 나누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좀 낫지 않겠어?”

“아아……! 그러면 너무 감사하지요!”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설비를 몰먼들이 해 줄 거야. 그를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세상을 구축하기를 바랄게.”

“감사합니다!”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에게도 희망이 생겼다는 것에 몹시도 기뻐하고 있었다.

태하는 그런 뱀파이어들을 위해서 이곳에 건축자재를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리아는 4층까지 정복한 뒤부터 이곳에 화이트홀을 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 홍이와 만났는데, 이곳으로 던전과 던전을 연결하는 화이트홀을 놓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오호, 그래요?!”

“다만, 우리가 돌파한 층만 연결할 수 있고 나머지는 불가능하다고 해요.”

“그 정도면 충분하죠! 그럼 제1바벨탑을 타고 이곳으로 물건을 넘기는 것으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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