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각성, 아나볼릭(2)
물밀듯이 밀려드는 언데드의 웨이브를 막다가 지쳐서 주저앉아 버렸다.
-캬아아아악!
좀비는 빠르고 저돌적이었다. 그리고 스켈레톤은 한없이 무자비했다. 두 몬스터들의 조합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였다.
좀비가 태하의 양팔과 다리를 붙잡고 물어뜯으면 스켈레톤은 훤히 열린 가슴팍을 망치 등 들고 있는 무기로 마구 내리쳤다.
퍽퍽퍽!
그러다 녹슨 검을 휘두르자 가슴이 갈라졌다.
푸하아아악!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 피의 분수.
바로 그때였다.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절체절명의 위기, 태하는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예스!’
순간, 몸이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뭐랄까, 화려한 근육이 몸을 감싼다고 해야 할까?
마치 갑옷을 입은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이 강해질 때쯤에 태하는 눈을 떴다.
“허억!”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태하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슴팍이 간질간질했고 손발이 얼얼했다. 아직도 누군가 온몸을 뜯어 먹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당시의 기억은 태하에게 있어선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제기랄.”
샤워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몸이 평소와는 좀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어라? 몸이 약간…….”
단단한 갑옷을 입은 느낌. 아까 꿈에서 느꼈던 그것과 같았다.
그대로 거울 앞에 선 태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어……?!”
마치 몸이 빵빵해진 것 같은 느낌, 흡사 걸어 다니는 피규어를 보는 것 같았다.
태하는 손으로 근육을 만져 보았다.
탄력이 대단했고, 강도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그럼 그 스킬이라는 게…….”
근육이 이렇게 한순간에 커지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는 몸속에서 미친 말 한 마리가 마구 날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친, 이거 실화야?”
태하는 당장 벽에 잽을 날렸다.
쿠우웅!
그저 가벼운 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이 흔들렸다.
전력을 다해서 후렸으면 집 안의 벽이 무너질 뻔했다.
“장난이 아니잖아……?!”
슈퍼맨이 되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태하는 잽을 날렸던 벽면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허어! 뭐야, 주먹 자국까지 났네?!”
과연 이게 F등급의 능력이 맞나 싶다.
가슴이 웅장해지려 한다.
“오오옷……!”
[강화 스킬의 지속 시간이 소진되었습니다]
아까 꿈속에서 들었던 음성이다.
헌터가 각성을 하면 ‘천상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안내 음성이 들린다고 했다.
아마 이게 그것인 모양이다.
“스킬창!”
[스킬: 강화]
[근육은 최고의 무기이자 갑옷입니다]
[신체를 강화시키는 스킬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해제하시려면 ‘해제’라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뭔가 헬창스러운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해제!”
우드드득!
순간, 온몸에 퍼졌던 알 수 없는 힘이 사그라지면서 빵빵했던 근육도 줄어들었다.
원할 때 입고 벗을 수 있는 갑옷.
이 정도면 최소한 좀비에게 두들겨 맞은 걸로 뻗을 일은 없을 것이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쌈빡한 능력이잖아?”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태하는 애써 심호흡을 하고 스킬 목록부터 확인했다.
“스킬 목록!”
천상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는 일종의 비서가 생기는 셈이라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과연 그 소문이 틀리지 않았다.
[스킬 목록]
[패시브: 기회의 창, 인연의 사슬]
[각성을 통해 기회의 창, 인연의 사슬을 얻었습니다]
[기회의 창: 인간은 끝도 없는 시련과 단련을 통해 강해집니다. 다만 강해지는 것에도 공식과 타이밍이 있습니다. 그것을 잡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팁: 퀘스트를 수행하세요]
가끔은 각성과 동시에 보너스가 주어진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 태하의 경우가 딱 그런 모양이었다.
“근육량 증가를 통해 저항력이 높아진다니.”
저항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외부에서 가해지는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생긴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맞아도 타격이 없다는 뜻.
“허어! 점진적 과부하라는 게 그럼?”
근육만 키우면 무적이라는 뜻이었다.
실로 엄청난 특성이다.
[인연의 사슬: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얻은 스킬도 어쩌면 인과 연으로 이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을 낳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과 연은 소중한 법입니다]
[스킬 보너스: 기본 스킬에서 파생 스킬이 생성됩니다]
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업계에 발 담근 기간이 적지 않았는데, 파생 스킬이라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각성 보너스라고 하더니, 별게 다 있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무슨 스킬이라는 게 패시브 비스무리한 것밖에 없다.
“그나저나 공격 스킬이나 방어 스킬 같은 건 없나? 강화인가 뭔가가 끝이야?”
태하의 읊조림에 스킬창이 생성되었다.
이윽고 좌로 살짝 기울어지는 태하의 고개.
[시드 액티브 스킬 1번: 변형]
[시드 액티브 스킬 2번: 강화]
[하위 스킬 1-1번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습득 조건: 시드 스킬에서 파생됩니다]
……
“그러니까, 시드 스킬에서 하위 스킬이 갈라져 나온다는 거잖아. 바탕이 되는 스킬에서 하위 개념의 스킬이 꾸준히 파생되는 형태인 거네?”
스킬창이라고 적혀 있지만 마치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마인드맵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시드 스킬을 필두로 파생되는 하위 스킬의 개수가 거의 무한대라는 소리였다.
“……인연의 사슬이라는 게 이런 무한대의 스킬을 만들어 낼 수도 있구나!”
도저히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언젠가는 아수라 길드를 밟아 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딩동!
[스킬 습득으로 인한 파생 스킬이 생성됩니다]
“오오! 파생 스킬?”
[패시브: 점진적 과부하 - 멸치로 살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강인함을 담는 그릇은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다다익선, 강인함의 그릇을 넓혀 보세요]
파생 스킬이라니, 뭔가 대단히 있어 보이는 말이다.
그런데 스킬명이 좀 거시기하다.
“뭔 스킬명이 이따위지?”
다소 아스트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이한 스킬명.
허나 그 페널티는 훨씬 더 어마어마했다.
[‘득근 포인트’에 따라 타격 저항에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단, 득근 포인트가 하락하면 페널티를 받습니다]
[페널티: 타격 저항 마이너스로 전환]
“……이게 뭔 쌉소리야?”
진짜로 멸차죽이 되어버렸다.
***
헌터협회 소속 길드 ‘아수라’의 본부.
후루루룩!
맛깔나게 넘어가는 짜장면의 면 치기 소리가 인상적이다.
멀끔한 얼굴과 정장, 하지만 날카로운 눈빛.
아수라 길드의 수장 ‘던전의 마귀’ 이용광은 단무지를 씹으며 물었다.
“쩝쩝, 화이트홀 실험은 어떻게 됐어?”
표준어와 경상도 사투리의 중간 그 어디쯤인가에 머문 말투였다.
길드의 참모진들이 그에 답했다.
“반반입니다. 아무래도 그때마다 일시적으로 바벨탑이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쯧! 별수 없지. 서판은?”
“잘 묻어 두었습니다.”
이용광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이제 마이너스 코어 회수할 준비 해라.”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100층 돌파 실패를 두고 펀드에서 말들이 많습니다.”
흠칫 멈춰지는 면 치기.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 안광이 번쩍였다.
“……또 이리 발목을 잡나?”
레이드에는 돈이 든다.
던전 입장에 필요한 필수품부터 시작해서 탐사에 필요한 장비, 약품, 심지어는 사람이 먹는 것까지 던전에서 쓰는 것은 값이 많이 나간다.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투자를 받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생긴 것이 바로 ‘레이드 펀드’이다.
그런 펀드 내에서 얘기가 많아진다는 건 다소 귀찮아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허나 이용광은 펀드보다는 길드가 우선이었다.
“됐다. 계속 진행해라.”
“괜찮을까요?”
“……안 괜찮으면 우얄 끼고.”
“네, 알겠습니다.”
무던한 말투였지만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모 아니면 도. 이용광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내 다시 시작되는 면 치기.
후루루룩!
보고도 계속되었다.
“코인 가격이 많이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수급이 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쩝쩝, 코인? 갑자기 코인 얘기는 왜 나오나?”
코인의 등급에 따라서 입장이 가능한 인원과 올라갈 수 있는 층에 대한 상한선이 정해지게 된다.
S등급은 무제한, A등급은 100인 이하 99층 상한, 이런 식으로 FFF등급까지 코인이 나뉘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펀드에서 100층 진입을 원하고 있으니, 최소한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던전 입장을 위해선 코인 확보가 필수적이다.
허나 인간이 손수 채굴해야 하는 코인의 가격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싸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100층 진입을 위한 양을 확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용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펀드 눈치만 보다가 일 그르친다.”
“하지만…….”
“치아라, 마.”
펀드가 원하는 것은 수익, 그리고 던전의 지배.
이용광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로 했고, 지금 그 계획은 차근차근 잘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나고 있기에 참모진은 불안해했다.
“펀드가 우리를 손절하기 전에 코인부터 사야 합니다.”
계속되는 코인 수급에 대한 역설.
타악!
“……손절?”
이용광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주변 분위기가 급랭되는 느낌이 들었다.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의 목숨이 달아날 것 같은 긴장감.
그 중간을 길드의 세컨드 마스터 최연화가 비집고 들어갔다.
“화이트홀 사태가 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하면 샌드타워에서 생산 물량을 줄일 겁니다. 지금이라도 코인을 확보하는 것이 낫습니다.”
무려 20년을 함께한 최연화이기에 이용광도 일단 화를 누그러뜨려 주었다.
오랜 동료에 대한 예의였다.
“……흠.”
“다시 생각해 보시지요. 펀드도 펀드이지만 코인은 지금 사는 게 이득입니다.”
샌드타워에서는 지구의 인류가 잡동사니 쓰레기를 들이붓는 만큼 그 질량에 비례해서 ‘블루샌드’에 파묻혀 이계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온다.
그 안에서 헌터가 사용하는 무기나 장구류도 나오는 것이고 바벨탑의 입장권인 ‘코인’도 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샌드타워는 건설자재 및 합금 소재로 사용되는 블루샌드를 생산하는 산지다.
그곳에서 생산 물량을 줄이기 시작한다면 던전의 입장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에너지자원의 가격도 올라갈 게 분명했다.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이용광. 그러다가 슬그머니 웃는다.
“나쁘지 않네.”
“뭐가 말입니까?”
“에너지자원의 전체적인 가격 상승 말이다.”
이용광은 코인 가격 상승에 숨겨진 내막을 알곤 웃은 것이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던 최연화 또한 눈을 반짝 떴다.
“……시장이 출렁이고 있는 것이로군요!”
“자네 말대로 코인은 구매해. 가끔은 펀드 밑도 좀 핥아 줘야지.”
에너지자원의 가격이 상승하면 길드의 수익도 올라갈 것이고 코인 가격도 올라갈 것이다.
여러모로 일석이조의 효과라는 뜻이었다.
다시 기분 좋게 짜장면을 흡입하는 이용광.
후루루룩!
그런 그에게 최연화가 말했다.
“아 참, 제가 말씀드렸었나요?”
“쩝쩝, 뭘?”
“이번에 새로 각성한 사람이 있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가?”
“이번엔 좀 다릅니다. 그때와 같습니다. ‘드리머’의 등장이 있었을 때 말입니다.”
타악!
젓가락을 내려놓는 이용광이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상당한 흥분, 그런 것이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골드?”
“네, 길드장님.”
“마, 참말이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이용광의 눈이 순간 이채롭게 빛났다.
헌터들 사이에서도 비밀에 부쳐진 등급이 있다.
S부터 F까지 부여된 알파벳 이외에 따로 정해지는 예외 등급으로, 브론즈부터 실버, 골드에 이르는 3단계의 등급이다.
허나 이 예외 등급이 부여되는 경우는 100억 분의 1도 채 안 된다.
한마디로 이 예외 등급을 받는 것 자체가 이미 일반 등급에선 SSS등급을 넘어선 것이다.
그런 초월 단계에서도 최정상의 골드 등급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1명도 탄생하기 어려울 정도로 귀했다.
“S골드의 헌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라.”
“하지만 드리머처럼 이놈에게도 뭔가 초월의 존재가 붙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초월의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