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308화 외전 94화
정수리 위에서 내려꽂히듯 쏟아지던 햇살은 어느새 정오의 기세를 잃은 채 담장 위로 굼실거리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흘러내리는 어슴푸레한 빛무리는 발뒤꿈치에 고여 있던 그림자를 점차 길게 늘여서는 겅중겅중 춤추게 했다.
왕부의 담장에 기댄 채. 태감은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태감은 마치 지평선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듯한 자신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동녘은 이미 한 움큼 새카만 어둠이 번져 있었고, 서녘에는 개밥바라기별이 빛나고 있었다.
밤이 올 것이다. 하지만 새벽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태감은 먹물 번지듯 검기울어가는 하늘을 보며 해가 뜰 것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그림자가 누군가의 그림자와 겹쳐지는 것을 본 태감은 흉중에 차올랐던 근심을 송두리째 잊어버렸다.
황혼이 길게 늘였음에도 여전히 작고 왜소한 그림자.
태감은 다급한 동작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소년이 있었다. 틀림없이 소년이었다.
고단한 세상살이에 닳고 닳아 탁해진 눈과 피로에 짓눌려 축 늘어진 좁은 어깨와 족쇄라도 찬 것처럼 질질 끌리는 왼 다리는.
분명 소년의 것이었다.
분명 나갈 때만 해도 허름할지언정 얼룩 없이 깨끗했던 옷은 흙과 먼지와 땀으로 찌들어 남루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핏자국은 없었다. 그의 피도, 다른 이의 피도. 피가 튄 흔적도 없었다.
태감은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탕아의 귀환이구나. 꼴이 말이 아니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소년은 제 옷자락을 굽어보며 낄낄 웃다가 나지막이 숨을 들이켰다.
태감은 그의 폐부에 들어찬 한 모금 숨에 무엇이 딸려 나올지 깨닫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소년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은 했는데 말입니다. 역시…….”
“용서는, 못 하겠더냐.”
선황께서, 아버지께서는.
태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소년의 지친 얼굴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찌하였느냐.”
“참지 못하고 칼을 뽑기는 뽑았습니다만. 손도 못 써봤습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양손을 펴 보이고는 혀를 내두르는 소년을 보며 태감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랬을 테지. 금룡기를 내걸고 전장을 질타하셨던 분이신데.
태감은 선황에게 달려들었을 소년의 모습을 그리며 잠시 쿡쿡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 선황께서는. 뭐라 하셨느냐?”
소년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다시 오라더군요.”
“다시?”
“예.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 목이 가지고 싶거든 오라더군요.”
“그 말만을 남기셨느냐? 다른 말은?”
사과도, 변명도. 한마디 없이?
되물으려 했던 태감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바라지 않음을 알기에, 하지 않으신 걸 테지.
태감은 부루퉁한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툴툴거리는 입가에, 그 탁한 눈동자 속 깊은 곳에 응어리진 것들을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다시 갈 것이냐.”
“가야지요. 매듭을 헐겁게 지었으니, 언젠가는 다시 지어야 할 것 아닙니까.”
“언젠가?”
“예. 일단은 서방도 다녀와야 하고, 자질구레한 뒷정리도 해야 하고. 짬을 내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급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소년의 퉁명스러운 말에 태감이 배시시 웃으며 긍정했다.
그래, 급한 일이 아니지. 급하게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지. 시간을 가지자꾸나, 충분히. 해를 넘기고, 다시 다가올 계절을 보자꾸나. 네가 겪어온 고통스러웠던 겨울과, 여름과, 봄과, 가을이 덧칠될 때까지. 그것들이 기억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기다리자꾸나.
태감은 웃으며 소년에게 다가와서는, 가만히 그를 끌어안았다.
허물어지듯 그에게 기대려는 태감을 밀어내며 무겁다 투덜대려던 소년은 태감의 눈가를 보고는 말했다.
그의 눈가가 유난히 붉게 짓물러 있었다.
“태감, 혹시 우셨습니까?”
“자, 가서 뭐라도 좀 먹자꾸나. 너 오는 거 기다리느라 다들 굶고만 있었다.”
“태감, 혹시 우신 거…….”
“역시 돼지고기가 좋겠다. 조려도 좋고 구워도 좋고 삶아도 좋다만, 역시 튀긴 게 제일이지. 돼지고기 튀김. 이왕이면 당초 넉넉하게 끼얹어 새콤달콤한 탕수육으로 만들어다오.”
“태감, 우신 거 아닙니까? 역시 운 것 같은데?”
소년은 완강한 자세로 딴청을 피우는 태감의 뒤를 졸졸 따라붙으며 집요한 공세를 펼치다가, 한걸음 성큼 내디뎌 그를 앞지르고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소년의 시선은 그들이 울고 웃고 떠드는 사이 살그머니 그들을 감싸 안은 밤과, 흘러넘칠 듯 찬란한 별빛에 머물러 있었다.
별이 밝으니, 분명 내일은 맑으리라.
“예, 태감. 돼지고기로 합시다. 든든하게 먹어두는 것이 좋겠지요.”
내일부터는 또 고단한 나날이 펼쳐질 테니. 오늘 밤은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늘어지게 잡시다.
* * *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늦고, 점심이라 하기엔 이른, 경계선에 느슨하게 걸친 나른한 오전.
포근한 이부자리에 휘감긴 채 단잠에 빠져 있던 태감은 벼락과도 같은 호된 노호성과 함께 눈을 떴다.
침상의 옆자리에는 찬물이라도 한 바가지 끼얹어주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한, 부루퉁한 얼굴의 소년과 수탉이 있었다.
멍한 눈으로 소년을 보던 태감은 소년의 손에 들린 수탉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수탉?
부스스 일어난 태감은 눈을 한번 비비고는 다시 그것을 보았다.
멋들어지게 뻗은 벼슬과 윤기가 흐르는 꽁지깃. 분명 수탉이었다. 그것도 제법 잘생긴.
도대체 뭐에 쓰려고?
그 수탉이 어떤 용도로 이용될지는 너무나 명백했지만, 잠이 덜 깬 태감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 좀 깨셨습니까?”
“그 수탉, 어디에 쓰려고 가져온 것이냐?”
“어디에 쓰긴요. 태감님 잠 깨시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가져왔지요.”
수탉의 목청껏 지르는 계명성이라면 분명 팔다리를 누르는 노곤한 잠기운도 단번에 달아날 테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자신을 깨우는 것이 수탉의 계명성일지, 아니면 모이를 쪼며 단련된 뾰족한 부리일지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 소년은 내심 아쉽다는 티를 내며 수탉을 풀어주었다.
푸드득 한번 날갯짓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수탉을 보며 태감이 입맛을 다셨다.
“그냥 놔주는 거냐? 잘생긴 것이, 맛도 좋아 보이던데.”
“저걸 언제 잡아서 언제 요리를 해 언제 아침을 먹겠습니까. 이미 상 다 차려놨으니, 몸만 내려오십쇼.”
한동안 사막길을 걸어야 할 테니, 오늘 아침은 사막에선 먹을 수 없는 귀한 재료로 한 상 그득하게 차려놨습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의 목울대가 크게 움찔거렸다.
사막에선 먹을 수 없는 귀한 재료로, 그득하게 차린 상이라니.
태감의 눈동자가 식욕으로 반짝이는 것을 본 소년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시지요.”
“그래, 가자꾸나.”
여정의 시작을 기념하는 아침 식사. 가혹한 사막길을 버틸 수 있도록. 배를 든든하게 채워줄 아침!
태감은 거의 나는 듯한 속도로 복도를 내달리고, 계단을 뛰어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상 앞에 당도하였을 때. 커다란 상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온갖 요리의 향연을 둘러보며, 태감은 신음했다.
“이게, 무엇이냐.”
“사막길을 걷는 동안은 맛볼 수 없는 재료로 차려낸 아침상입니다.”
“그래, 확실히. 사막에선 맛볼 수 없는 것들이지……. 채소는.”
아주, 파릇파릇하구나.
태감은 마치 끝없는 평야와도 같은, 온갖 채소로 근사하게 차려진 아침상 앞에서 힘없이 주저앉았다.
끈적하고 미끈한 감촉의 토란에 달콤 짭짤한 양념을 끼얹어 쪄낸 봉화우두(奉化芋頭), 청경채의 일종인 왜각황(矮脚黃)을 부드럽게 삶아낸 돈채핵(炖菜核), 설탕에 절인 은목서꽃과 꿀로 향기롭게 볶아낸 은행요리 시례은행(詩禮銀行).
비들비들 말린 당근 볶음인 양반라복용(凉拌萝卜龍), 마늘이 푸르스름해지도록 초에 절인 납팔산(臘八蒜)에 일곱 가지 채소로 끓인 죽 칠보갱(七寶羹), 밀가루 전병에 볶은 채소로 속을 채운 채전병(菜煎餠).
싱그럽다 못해 채소의 비율이 너무 높아 토끼가 숲인 줄 알고 뛰어들어 올 것만 같은 밥상을 둘러본 태감이 배를 부여잡았다.
기대감으로 한껏 들떴던 위장이 절망으로 곤두박질치며 비명을 지른다.
그 낙차에 괴로워하던 태감은 황급히 자신의 불만에 동조해 줄 동료를 찾았다.
하지만 식탁에 둘러앉은 단혜림과 장소, 이삼. 그리고 길잡이로 초청한 표자승. 누구 하나 이 파릇파릇 신선한 밥상에 불만을 표출하는 이가 없었다.
가끔은 이런 담백한 밥상도 먹을 만하군. 아삭아삭하니, 장이 건강해지는 것 같습니다그려.
이런 말들을 주워섬기는 이들을 증오의 시선으로 노려본 후, 태감은 외롭게 홀로 일어섰다.
그의 앞에는 입꼬리를 귀밑까지 길게 찢은 비열하기 그지없는 흉소를 머금은 소년이 있었다.
“아침상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태감은 왈칵 치밀어오르는 것을 폐부 깊숙한 곳으로 내리누르며, 조롱과 기만의 화신과도 같이 웃고 있는 소년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내 분명 사막에서는 먹지 못할 재료로만 상을 차렸다 들었다만.”
“예, 싱싱한 채소는 사막에서 구하기 힘들지요.”
“그래, 사막에서 채소는 맛보기 어려운 음식이지. 어쩌면, 훗날엔 오늘 채소를 먹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회에 번민할 날이, 오늘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후회란 말을 되뇌는 태감을 보며 소년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다른 음식을 준비해 드릴까요? 무더운 모래땅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싱싱한 생선 요리? 아니면.”
물을 많이 먹고 위생이 불결하여 사막에서는 기르지 않는, 돼지라던가.
소년의 말이 입술 바깥으로 흘러나온 순간, 태감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그야 물론, 돼지고기지.”
“하지만 말입니다. 사막에서 다른 고기는 언제든 구할 수 있지만, 채소는 구할 수 없으니……. 태감님의 건강이 걱정돼서 말입니다. 평소에도 원체 채소를 안 드시니…….”
“돼지고기를 먹고 싶다면, 채소를 먹으란 말이냐.”
“싫으십니까?”
교활하고 악독한.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앞에서 태감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여름날, 장맛비에 고개 숙인 백합꽃과도 같이, 처연한 모습의 태감을 앞에 두고 소년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였다.
“그러게 진작 평소에 골고루 편식 않고 잘 드셨으면 이런 일도 없잖습니까.”
풀죽은 태감 앞에서 이죽거리며 소년은 상의 빈자리에 육중한 접시를 올려놓았다.
파릇파릇하고 신선하고 아삭한 것들 사이에서 유독 빛나는 그 고고한 자태. 기름 번들거리는 육중한 고깃덩어리가 상에 오른다.
간장 양념이 흠뻑 배어든, 그 야들야들한 살코기. 고기와 비계가 층을 이루고 있는 뱃살. 그 뱃살을 통으로 조려낸-
“동파육이로구나.”
“아침으로는 좀 무거울까요?”
소년은 작게 끌끌거리고는 태감의 앞에 놓여 있었던 죽그릇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진주 알 같은 밥알이 소복하게 담겨 있는 밥공기를 올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슬고슬한 쌀밥.
“역시, 동파육에는 쌀밥이지요.”
그럼, 드시지요.
소년이 한 걸음 물러섬과 동시에 태감이 민첩한 동작으로 동파육을 집어 들었다.
정사각형으로 썰린 두툼한 고깃덩어리. 가느다란 젓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육중함.
하지만 그 무게 때문일까. 동파육은 집어 들자마자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르르 갈라졌다.
이 얼마나 부드러운가.
태감은 신속하게 도구를 젓가락에서 숟가락으로 교체했다. 그리고는 그 기름진 양념과 함께 동파육 덩어리를 밥 위에 올려, 그 달콤 짭짜름한 양념이 담뿍 배어든 밥과 함께 동파육을 입으로 가져갔다.
녹는다. 고기가.
마치 이른 때에 내린 첫눈과도 같이. 혀 위에서 녹아내린다.
달착지근하고 녹진한 비곗살은 혀 위에서 스르르 녹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지고, 고깃점은 혀로 살짝 문대면 결대로 올올이 풀어진다.
앞니와 송곳니, 어금니가 저작 운동을 할 새도 없이, 동파육은 짙은 잔향만을 남긴 채 입안에서 스러졌다.
그 공허한 빈자리에, 동파육의 기름진 감칠맛을 한껏 흡수한 밥알이 채운다.
달큼하고, 짭조름하고, 고소한.
기름진 행복감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태감의 얼굴을 본 소년이 말했다.
“잘 드셨습니까.”
“그래. 역시 아침은 고기가 있어야지.”
“잘 드셨다니 차린 저도 보람이 있습니다그려.”
기름으로 반들거리는 입술을 핥으며 태감이 소년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정말로 잘 먹었다. 김승조.
그 솔직한 감사에 낯부끄럽다는 듯 볼을 긁적인 소년이 피식 웃었다.
“잘 드셨으면, 이제 일어납시다.”
서방에 가야지요.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