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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307화 (308/314)

환관의 요리사 307화 외전 93화

습기 찬 어둠 너머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모래알갱이가 구르는 듯한, 자잘한 것들이 밀려오는 듯한.

소리가 점점 커지고, 가까워진다.

소년은 어둠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갔다.

그가 내디딘 걸음을 따라 퇴적되어 있었던 어둠이 한걸음 물러섰고, 맴돌던 소리가 멈추었다.

소년은 그의 머리 위에서 눈뜨는 태양을 보았다.

하나.

첫 번째 태양이 눈을 뜨고, 뒤를 이어 수십 개의, 수백 개의 태양이 눈을 뜬다.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태양들이 빛을 쏟아냈다.

소년은 늘어선 붉은 열주와 반짝이는 비늘과 그 위로 쌓인 해묵은 먼지와 폭포처럼 흘러내린 흰 수염을 보았다.

뱀이 그곳에 있었다.

금룡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일만 하고도 사천 년을 산 뱀이 소년을 굽어보았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거대한 뱀의 머리에는, 사람이 분간하기 어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년은 뱀이 내쉬는 더운 숨이 볼 거죽를 스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공.”

[오랜만이구나. 환관. 상호 오운. 김승조.]

대답하기 전, 소년은 뒤쪽의 문일을 힐끔 돌아보았다.

하지만 문일은 우두커니 선 채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김승조란 이름 석 자를 듣지 못한 것은 확실했다.

어쩌면, 뱀의 말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확인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러자 뱀이 바닷물을 들이켤 것만 같은 입에서 아름드리나무를 휘감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끝이 갈라진 혀를 한번 날름거렸다.

소년은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소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뱀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좀 더 일찍 찾아뵀어야 했는데…….”

[짬을 내기 어려웠을 테지. 괜찮단다.]

홍문에 예봉. 그리고 동정호까지.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으니 손에 물 마를 날이 없고 등허리 젖지 않은 날도 없었을 테지.

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이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고 계셨군요?”

[보고 있지.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부.]

용께서, 땅밑을 기어야 하는 이 불민한 제자가 보기 안쓰럽다 하시어 알려주신 재주란다. 그 재주 덕에 지금껏 땅 밑에서도 바깥세상을 훤히 알 수 있었지. 그렇기에.

뱀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용의 피를 이었음이 분명한. 늙은 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용의 얼굴.

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김승조의 것이었다. 세상살이 고단함에 찌든 빛바랜 눈동자.

뱀은 그 눈동자 안쪽에 스며든 것을 보고는 한숨처럼 말했다.

그렇기에, 네가 가야 할 길이 어떨지도, 보이는구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담담한 눈으로, 어찌 보면 체념한 듯한 눈으로, 소년이 뱀을 보았다.

[거친 풍파를 버티고 이제야 겨우 제 자리를 찾았건만. 이제 겨우 꽃을 피우고, 뿌리를 내렸건만. 가야 할 길이 가혹하구나. 험하구나. 금빛용께서도, 아흔아홉 천궁을 가호하시는 신령스러운 신선께서도. 어찌 이리 무심하신가.]

하지만, 사람의 슬픔을 위해 하늘이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밤이 애도를 표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비통함에 절규하더라도 비가 내리는 일은 없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도 별이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년은 혀 위에 올라온 그 말을 다시 삼켰다.

하지만 뱀은 소년이 삼킨 그 말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그래. 그저 늙은 뱀의 한탄일 뿐이지. 넋두리일 뿐이지. 하늘은 본래 무심했으니. 비는 오지 않고 별은 그 자리에서 빛나지. 사람의 슬픔에 함께 눈물 흘리고, 사람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것은, 결국 같은 사람이지.]

사람이기에 슬픔에 공감할 수 있고, 사람이기에 아픔을 나눌 수 있고. 사람이기에.

[용서할 수 있지.]

그래도 가겠는가.

뱀이 소년에게 물었고, 소년이 답했다.

그렇지만 사람이기에.

소년은 웅얼거리듯 말했고, 뱀은 가만히 그의 답을 받아들였다.

[그럼, 길을 열어주마.]

그 말과 함께, 뱀이 부드럽게 소년의 옆을 미끄러졌다.

거대한 것, 물결치는 비늘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한눈에 담을 수 없는 그 크기 때문에, 소년은 한참 후에야 뱀이 자신들을 감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똬리를 틀 듯이. 품에 안듯이.

천천히, 벽과도 같은 뱀의 동체가 소년과 문일을 겹겹이 에워쌌다.

빛이 차단되었고 어둠만이 남아 그들을 조여왔다.

그 새카만 공간 너머에서 울림이 그를 떠밀었다.

[아무리…….]

소년은 뱀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시야가 흔들렸고, 소년은 현기증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바람이 그를 밀어 올리는 듯한, 하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부유감.

등허리가 오싹해지는 느낌과 함께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년과 문일이 없는. 늘어선 열주 사이로 이따금 더운 바람이 몰아치는 캄캄한 공동에서. 뱀은 소년이 듣지 못할 말을 흘리고는 고개를 파묻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겹더라도. 상처는 아물고 기억은 흐려지는 법이니. 금빛용이시여. 당신께서 뿌리신 피가 쉬이 저물지 않도록. 부디 굽어살피소서.]

* * *

“태감.”

식은 죽을 뜨던 태감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숟가락을 들지도, 들 생각도 없어 보이는 단혜림이 그를 바라보았다.

태감은 입안에 남아 있던 것을 삼키고는 말했다.

혀에 닿는 것은 모래알갱이처럼 까끌거렸다.

“말씀하십시오.”

“전하께서는, 가신 건가.”

그녀답지 않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태감은 단혜림과 시선을 맞추려다 고개를 조금 떨궈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분명,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을 텐데도. 그의 성격상,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고는 떠났을 텐데도.

식탁에 앉은 이들 중 누구 하나 웃고 있는 이가 없었다.

태감은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예.”

“그렇다면.”

옆자리의 아이들을 곁눈질한 단혜림이, 아이들이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질문했다.

전하께서는, 돌아오시나.

그 소박한 질문에 태감은 답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듯 창백하게 질린 태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 단혜림은 그것이 그의 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영 입맛이 없군.”

먼저 일어나겠네.

단혜림이 일어섰고, 뒤를 이어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일어섰다.

침묵으로 그들을 배웅한 후, 태감은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던지듯 내려놓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늘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먹는 부산한 소음이 사라진 식탁 위는 기이할 만큼 쓸쓸하고, 넓게만 느껴졌다.

태감은 깊게 패인 듯한 빈자리를 한차례 보고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흘리듯 내뱉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저, 돌아와 주기만을 바랍니다.

* * *

하늘이 낯설었다.

언제부턴가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소년은 올려다본 하늘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하늘이야 다 같은 하늘이겠지만, 그가 보는 하늘은 경사의 하늘이 아니었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얹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 문일이 있었다. 주름지고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이 소년을 일깨웠다.

소년은 가슴속에서 왈칵 치밀어 오르는 사나운 감정을 느끼며 부르르 고개를 털었다.

어딘가의 야트막한 산의 중턱쯤인 듯했다.

밟고 있는 흙은 단단히 다져져 있었고, 가장자리로는 드문드문 잡초가 자라있었다.

사람이 오가며 가꾼 길이었다.

소년은 길옆의 잡초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꽃을 보았다.

자주괭이밥, 쑥부쟁이에 인동덩굴, 물양지꽃.

들과 산에 제멋대로 자란 야생초가 아니었다. 사람이 보기 좋게 심고 공을 들인 꽃이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꽃을 보고만 있는 소년을 향해 문일이 말했다.

“전하. 가시지요.”

“여긴 어디지?”

“요녕(遼寧)의 심양(沈阳) 인근입니다.”

“심양이라. 멀리도 왔군.”

요녕이라면 동북지방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었다.

경사보다도 한참은 북쪽에 있는 곳.

그래서인지 소년은 코끝을 스치는 바람결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경사에는 아직 여름이 한창이건만. 그가 올려다본 하늘은 높았고, 바람은 선선했으며, 이파리는 끝자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 여름의 빈자리를 채우기 전, 잠시 가을이 머무는 듯한 곳에서. 소년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문일이 그의 뒤를 따랐다.

산길은 험하지 않았다.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도 숨이 차지 않을 만큼 경사가 완만했다.

따사롭게 느껴지던 햇살이 조금 무덥게 느껴질 때쯤이면 키 큰 버드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걷다가 다리가 아플 때쯤이면 쉬어가기 좋은 평평한 바위와 목을 축이고 갈 만한 맑은 샘이 있었다.

소년은 너무 빠르지 않게, 하지만 너무 느리지도 않게 길을 따라 걸었다.

길의 끝에는, 작은 집 한 채가 있었다.

담장을 치지 않아 마당이 훤히 보였다.

소년은 멈춰선 채 집과 마당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의 흔적을 보았다.

짚을 엮어 지붕을 씌우고, 흙을 개어 벽을 세우고, 나무로 기둥과 들보를 올린. 허름한 초가집.

누군가가 사랑을 나누고, 짧은 시간을 함께하며 오순도순 살다가.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소년은 깨달았다.

“그렇군. 여기가.”

“예. 전하께서 태어나신 생가입니다. 그리고.”

주화 공주께서, 잠드신 곳이기도 하지요.

문일이 느릿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소년은 그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집의 뒷마당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누군가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검박한 차림새에, 조금 전까지 풀을 베고 있었는지 손에는 낫자루를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농부의 차림새였지만, 그 걸음걸이에서는 숨길 수 없는 과거가 엿보였다.

절제되어 있는, 힘 있는 걸음.

아마 군이나, 그와 관련된 업종에 오래 몸담았던 이일 것이다.

소년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이를 훑어보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져 있었으며,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있었지만, 주름은 없었다.

많아도 서른쯤 되었을까 싶었지만, 그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카락만큼은 희끗희끗했다. 마치 잿가루를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은 그 입가와, 그 콧대와, 그 턱선과, 그 눈에서.

황제를 보았고, 태감을 보았다.

그의 겨울이었다. 여름이었고, 봄이었으며, 가을이었다. 잠 못 이루었던 밤이었고, 그늘에 숨었던 낮이었다. 의문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보냈던 일 년이었고, 체념과 절망 속에서 보냈던 십 년이었다.

그곳에 선황이 있었다.

소년은 다시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품 안에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소년을 본 선황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년이 그러했던 것처럼, 선황 역시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때때로 왼 다리를 질질 끄는, 본래 그가 왼 다리를 절었음을 알려주는 걸음걸이와 반드시 펼 수 있음에도 무의식적으로 숙이게 되는 허리와. 고된 노동으로 마디가 굵어지고 굳은살이 두텁게 박인 손과. 그 얼굴.

소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선황은 입술을 달싹였다.

닮았군.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선황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본 소년은 선황이 그 말을 입에 머금었음을 깨달았다.

닮았다. 그래, 닮았는가. 닮았구나.

소년은 품고 있던 것을 꺼내 손에 쥐었다. 단단한 손잡이에 사슴 가죽으로 된 칼집에 쌓여있는.

한 뼘을 조금 넘는 길이의 새빨간 칼날.

피를 머금은 듯 요사스럽게 빛나는 칼날에 제 얼굴을 비춰보며, 소년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태감.”

역시 안될 것 같습니다. 못할 것 같습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매듭을 지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핏빛 칼날 위에 비치는 건조한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고,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가 칼날보다도 붉게 물들었다.

소년은 칼을 내리고는 선황을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오른발을 뒤로 빼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었던 선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부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울림이 혀끝에서 말로 빚어지기 전에, 소년이 피를 토해내듯 거친 목소리로 노호하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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