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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21화 (221/314)

환관의 요리사 221화 외전 15화

어쩔 수 없이 원치는 않았으나 내칠 수도 없었기에 받아든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것.

지금껏 소년에게 왕좌란 그런 것이었다.

황족의 혈통을 타고났으니 어쩔 수 없이 쓰고 있어야 하는 감투.

그래도 황족이니 체면치레나 할 생각으로 적당히 내세울 이름 하나 던져준 것이리라.

즉위식에서부터 지금까지, 소년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김승조였고, 후궁의 상호 오운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그에게 숙친왕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백성의 목숨값이라는 책임을.

호환으로 망해가는 도시 홍문.

호랑이에게 갈기갈기 찢긴 시체가 그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제 지고 있던 것도 내려놓아야 할 늙은이가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들이었다.

소년은 문득 태감을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태감의 얼굴에는 수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다. 슬픔과 후회. 그리고 자책감.

소년은 태감이 도시에 도착했던 첫날 그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태감은 그에게 왕의 책임을 요구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때의 대화를 후회하고 있었다.

태감을 지긋이 본 소년은 웃음을 터트리고 싶어졌다.

“태감님. 제게 책임을 지라고 말씀하셨지요.”

“그것은…….”

“책임을 질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태감님.”

태감의 말을 가로챈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담담한 선언에 태감은 빗장뼈 안쪽에서부터 엄습해 오는 통증을 느꼈다.

그가 책임을 요구하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이 도시를 여행의 경유지로 고르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여전히, 동창의 제독이었더라면. 그의 책임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자리였다면.

태감이 한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이어진 소년의 말이 그의 발을 멈춰 세웠다.

“하지만, 저 혼자 짊어지기는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여기 황족이 저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닌데.”

과장된 억울함은 오히려 익살스럽게 느껴졌다.

도저히 웃고 싶지 않았음에도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렸다.

태감의 웃음에 소년은 투덜대듯 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약관도 안된 어린놈 머리에 왕관 하나 씌워놓고 왕 노릇 하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확실히 억울한 일이구나. 네가 원해서 앉은 자리도 아니지 않으냐.”

“예. 억울해서 아주 복장 뒤집히겠습니다. 후궁 밑바닥에서 환관 노릇 하며 갖은 고생을 다 했는데, 이젠 왕 노릇까지 하라니. 그러니 좀 도와주십쇼.”

약관도 안 된 어린놈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소년을 보던 태감은 옆에 단혜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본모습에 관한 이야기. 그것은 아직 단혜림과는 나누지 않은 비밀이었다.

단혜림과 소년을 번갈아 본 다음, 태감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뭘 도우면 되겠느냐?.”

“별일은 아닙니다. 좀 귀찮기는 하겠습니다만.”

킬킬거리던 소년은 웃음을 멈춘 후 숨을 고른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랑이를 잡는다고 해도, 한번 기운 도시가 되살아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어쩌면 극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몰락할지도 모르고요.”

“그래. 한번 발길을 돌린 상인들이 다시 홍문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남과 경사로 통하는 길이 홍문 한 곳만 있는 것도 아니니.”

“단순히 호랑이가 잡혔다는 소문으로는 부족하겠지요. 제 목숨이 달린 일이니 상인들도 의심이 먼저 들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찌해야 하겠느냐?. 어찌해야 홍문이 안전해졌다는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키득거린 소년은 악동과도 같은 사악한 미소를 그렸다.

얇은 입술이 길게 찢어지는, 모략과 흉계를 꾸미는 미소.

사례 태감의 요리사, 상호 오운의 상징과도 같았던 흉소를 마주 보며 태감 또한 미소 지었다.

“태수의 목을 베어야겠지. 도시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지켜야 할 자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음은 물론, 자신의 무능이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 도시의 쇠락을 방조하였으니, 마땅히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효수함이 옳다.”

“그리하여야만 백성들의 한이 풀리고 상인들이 호환이 해결되었음을 진정으로 믿겠지요. 태감님, 황제 폐하께 서신을 보내주십시오. 감찰관을 보내 달라고.”

그리고 말을 마친 소년이 단혜림을 바라보았다.

단혜림을 보며 소년은 웃지 못했다. 그는 그녀에게 요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왕의 책무였다.

소년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하지만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단혜림이 먼저 내뱉었기 때문이었다.

“명령하시오.”

“예?”

소년은 자신의 반문이 썩 얼간이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년은 이왕 얼간이가 된 김에 조금 더 얼간이처럼 굴기로 했다.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호랑이를 잡아야 할 것 아니요.”

“그렇……지요?”

“그러니 내게 명령하시오.”

호랑이를 사냥하고, 백성들을 구하라고. 홍문을 덮친 호환을 해결하라 내게 명령하시오.

말을 끝낸 단혜림은 허리춤에서 검을 끌러 오른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의 왕을 올려다보았다.

당혹스러움에 굳어버린 왕을 보며 단혜림이 말했다.

“존귀한 숙친왕 전하께 감히 청하옵니다. 부디 사냥을 윤허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검으로서 황실의 명예를 드높이고 백성들을 지킨다는 영광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던 소년은 간신히 너무 늦지 않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추태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소년은 천천히,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의 청을 수락했다.

“호위무사 단혜림. 황제 폐하께서 내게 위임하신 권한으로 명하노니, 인명을 해하는 맹수를 사냥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라. 그리고 부디, 무사히 돌아오도록.”

그 뒷말은 붙이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무사의 명예를 실추시킬 만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소년은 뒷말을 붙이지 않을 수 없었고, 단혜림 또한 왕의 염려를 받아들였다.

소년은 잠시 그녀에게 수하가 필요하지는 않을지 고민했지만 이내 단념했다.

만약 진정 필요했다면 그녀가 먼저 요청했을 것이다.

그 이상 원치 않은 배려로 그녀를 귀찮게 하는 대신, 소년은 자신이 해야 할 일로 눈을 돌렸다.

“자, 그럼 바쁘게 움직여야겠군요.”

소년은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목을 비틀고는 태감을 돌아보았다.

그 말에 태감은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일이 그리 급하길래 그처럼 서두르느냐?”

“단 호위가 돌아오면 성대한 축하연을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회를 열려면 지금부터 바삐 움직여야지요.”

단혜림이 가는 길을 잠시 지켜보던 소년은 이내 잰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 * *

소년은 가장 먼저 쉬고 있던 수행원들을 전부 불러 모아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의 명령에 혼비백산하여 시장으로 뛰쳐나가는 호위들을 본 장소는 벌써부터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소년에게 물었다.

“그럼 재료가 도착할 때까지는 뭘 하실 거예요?”

“일단 장원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걸 만들어야겠지?. 원래 연회는 한꺼번에 모든 음식을 하려 하면 손도 꼬이고 주방도 혼잡해진단다.”

그러니 손이 많이 가는 음식부터 미리 준비해 둬야겠지?

자질구레한 재료 손질이나 발효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한 만두류, 특히 끓이는데 시간이 필요한 탕 종류는 미리 준비해 두면 한결 수월하단다.

배울 기회에 눈을 빛내는 아이들을 한번 쓰다듬어준 후, 소년은 큰 솥을 가져다 아궁이에 걸었다.

“오늘은 어디 가서 보기 힘든 진귀한 요리를 알려주마.”

“진귀한 요리요?”

여간해서는 진귀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소년이 진귀하다며 자신하는 요리는 과연 무엇일까.

기대감에 부푼 아이들을 향해 소년은 자랑스럽게 경사에서부터 마차에 실어 가져온 그 ‘진귀한’ 재료를 선보였다.

소년이 내민 단지 안에는 하얀색에 메추리알보다 약간 큰 타원형의 무언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기대가 배신당했단 것은 확실했다.

이게 뭐냐고 묻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 아이들을 보며 피식 웃은 소년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엄숙한 목소리로 그 괴이한 재료의 정체를 공개했다.

“이건 소금에 절인 오징어 알이란다.”

“오징어 알이요?”

“그래. 혹시 산동의 회오어단(烩烏魚蛋)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니?”

회오어단(烩烏魚蛋)은 역사 깊은 산동의 명요리로 중국의 국빈관 조어대(钓鱼台) 만찬에 빠지지 않는 별미이며 중국 개국주석 모택동(毛澤東)과 중국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등소평(鄧小平)이 가장 좋아했던 요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단한 명성을 설명하기엔 소년의 어휘력이 그리 풍부하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울까.

사절단을 대접하는 만찬에 나오는 요리?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고는 요리를 시작했다.

실제로 회오어단은 조리하기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시간도 무척 오래 걸리는 요리였다.

우선은 오징어 알을 미지근한 물에 담가 소금기를 빼준 다음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내야 했다.

“싱싱한 오징어 알은 그대로 먹어도 괜찮지만, 회오어단에 사용하는 오징어 알은 소금에 절였기 때문에 알껍데기가 무척 질기단다. 이걸 일일이 제거해 줘야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껍질을 전부 제거한 오징어 알은 다시 끓는 물에 다섯 번 데쳐 비린내를 제거하고 미지근한 물에 담가둔다.

오징어 알 손질을 끝낸 소년은 국물을 내기 위해 솥에 새로 물을 받았다.

“회오어단은 닭고기와 버섯으로 국물을 내는 것이 전통인데, 국물이 기름기 없이 담백하고 그릇 바닥이 비쳐 보일 만큼 맑아야 한단다. 그래서 닭 껍질을 전부 제거하고 국물을 내지.”

“닭 껍질이 제일 맛있는데…….”

“허허, 요 녀석 좀 먹을 줄 아는구나. 껍질은 원래 술꾼들이 제일 좋아하는 부윈데, 이거 나중에 술꾼 되겠어?”

껍질은 나중에 매콤한 향신료를 입혀 바싹하게 튀겨주겠다 약속한 후, 은근한 불에 껍질 벗긴 닭과 최상품의 백화고(白花膏), 영지와 곰보버섯 등 각종 버섯을 올린 소년은 뚜껑을 덮고는 다음 요리를 준비하기 위해 도마 앞에 섰다.

“연회 하면 또 튀김이 빠질 수 없지. 튀김도 밑 준비만 미리 해둔 다음 뜨거운 기름에 튀겨 내주기만 하면 되니 연회 준비할 때 좋은 음식이란다.”

“이번엔 어떤 음식이에요?”

“최마령(崔馬鈴)이라고, 동북 고원지대에서 많이 먹는 완자 튀김이란다.”

전하는 데에 따르면 청조 건륭제 때 길림(吉林)에서 만들어진 요리로 최(崔)씨 성을 쓰는 요리사가 만들었다 한다는구나.

기름기 잘 박힌 돼지고기를 가져온 소년은 음식의 유래를 이야기하며 큰 칼 두 개로 고기를 다지기 시작했다.

두 개의 칼이 연주하는 박자는 마치 초원을 질주하는 준마의 말발굽 소리처럼 경쾌했다.

“길림성은 예부터 드넓은 목초지로 유명했던 만큼 유목민족이 많이 살았는데, 길림의 유목민은 구리방울을 말 목에 달아 서로의 말을 구분한단다. 방울마다 모양도 다르고 소리도 다르거든. 모양도 소리도 다른 구리방울을 단 여러 무리의 말이 한꺼번에 달리면 말발굽 소리에 방울 소리가 가세해 지축이 뒤흔들릴 만큼 기세가 대단하다는구나.”

곱게 다진 고기에는 파와 생강, 마늘을 약간 더한 다음 간장과 후추, 짭짤한 황장 약간으로 간을 맞추고 달걀과 녹말가루로 끈기를 낸 다음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살짝 넣어 감칠맛과 향을 내준다.

소년은 완성된 반죽을 긴 봉 모양이 되도록 만든 다음 뚝뚝 끊어 달걀노른자만 한 크기의 완자로 만들었다.

“그때 길림에서 장사하고 있던 최씨 성의 요리사가 말방울을 본떠 돼지고기로 마령환자(馬鈴丸子)라는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게 큰 인기를 끌어 훗날 최씨 성을 쓰는 요리사가 만든 말방울 완자다 하여 최마령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단다.”

다 빚은 완자는 천을 덮어 튀기기 전까지 서늘한 곳에 보관해야 했다.

광주리에 완자를 담아 서늘한 찬장에 올려두려던 소년은 안타까운 아이들의 한숨에 슬그머니 올리려던 광주리를 도로 내렸다.

“커흠, 몇 개만 튀겨 먹을까. 마침 배도 고플 시간이고.”

“정말요?”

“그럼, 연회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미리 배 좀 채워둬야지. 삼아, 아궁이에 불 좀 피워주렴. 장소는 가서 기름 좀 가져오고.”

기름에서 연기가 올라오면 완자를 넣고는 겉이 바싹하게 튀겨낸다.

겉에 노릇한 색이 돌 때쯤 완자를 꺼낸 소년은 국자로 완자를 두들겨 껍질 부분에 금이 가도록 했다.

소년의 기이한 행동에 당황한 장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완자는 왜…….”

“이렇게 하면 속까지 더 잘 익고 겉도 더 바삭해진단다.”

국자로 두드린 완자는 다시 기름에 넣고 짙은 갈색이 돌 때까지 튀긴다.

다 튀겨진 완자를 기름 망에 건진 소년은 접시에 담아 상에 올리는 대신 아이들에게 젓가락을 들고 모이게 했다.

“굳이 설거짓거리 늘리지 말고, 이대로 먹자꾸나. 원래 주방에서 바쁠 땐 다들 이렇게 먹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먹는 게 제일 맛있지. 전도 부칠 때 프라이팬 주위 어슬렁대다가 주워 먹는 게 제일 맛있는 것처럼.

방금 튀겨낸 뜨끈뜨끈한 튀김을 입에 넣으며 소년은 마음속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단혜림에게 용서를 빌었다.

‘먼저 먹어서 미안합니다, 단 호위. 그래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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