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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19화 (219/314)

환관의 요리사 219화 외전 13화

노릇노릇하게 익은 바삭한 껍질과 은은한 소금기가 밴 살코기로 손가락과 입술에 윤을 낸 다음, 후식으로는 산뜻한 물앵두 화채가 나왔다.

투명한 유리 사발에 담긴 다홍빛 화채를 본 태감은 반색하며 물었다.

“물앵두로구나. 아직 여름도 아닌데 벌써 물앵두가 나왔나?”

“저도 신기해서 한번 사 왔습니다만, 역시 일찍 여물어서인지 단맛이 덜하더군요.”

“그래도 목구멍에 번질거리는 닭기름을 씻어주기에는 충분할 것 같구나.”

우물물에서 차게 식혔는지 유리 사발에는 훈훈한 방 안의 공기가 이슬이 되어 맺혀 있었다.

노란색이 살짝 섞인 붉은색. 금방이라도 연약한 과피를 찢고 즙이 터질 것처럼 탱글탱글한 물앵두 화채를 본 이들의 목울대가 움찔거린다.

침 삼키는 소리.

소년은 느릿한 동작으로 은 국자를 들어 화채를 휘저었다.

황혼이 내려앉은 수면에 파문이 번지고, 은근한 물앵두의 단내가 코끝을 간질인다.

알알이 빨간 앵두가 은 국자에 담겨 반짝인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태감은 그 이상 간절할 수 없는 침묵으로 소년을 재촉했다.

소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드시지요. 아, 앵두를 떠먹을 숟가락이 필요하겠군요.”

태감은 말 대신 행동으로 숟가락이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닭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입술 사이로 왈칵 흘러들어온 화채의 서늘함은 몸서리칠 만큼 청량했다.

혀로 살짝 문댈 때마다 툭툭 터지는 물앵두의 달큼한 과즙.

그 신선한 달콤함 사이로 태감은 낯선 과실의 신맛을 느꼈다.

앵두의 맛은 아니었다. 조금 더 선명한 붉은색의 과일이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짙은 선홍색의. 혀끝에 맴도는 흐릿한 느낌에 골몰하던 태감은 미심쩍다는 투로 소년에게 물었다.

“혹시, 석류인가.”

“역시, 알아맞히시는군요. 예. 단맛을 보충하기 위해서 지난겨울에 담가 둔 석류주를 조금 넣었습니다.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시오. 취하십니다.”

“취할 수밖에 없구나. 이리 달콤하니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취하실 거면,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취하십쇼,”

태감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는 옆자리에 있는 단혜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화채를 홀짝이던 단혜림은 매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쩔 수 없이 잔을 내려놓은 태감은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단 호위와 열심히 골몰해 보았지만…… 크흠, 그것이.”

“예. 답이 나오질 않았지요?”

뚜렷한 확증도 없이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미소가 걸린 소년의 표정에 태감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보기 드문 그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즐겁게 관찰하던 소년은 화채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요. 자칫 잘못하면 여러 사람 목이 날아갈 일인데, 함부로 결정했다가 엄한 사람 목을 날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홍문처럼 큰 도시라면 도시를 다스리는 태수와 그 휘하 속관(屬官)이 있지. 호환 같은 민간에서 대처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응당 태수가 나설 일이다. 그리고 태수가 어찌하지 못할 일이라면 조정에 안건이 올라 여부가 결정되겠지. 군을 파견할 것인가. 아니면 호랑이의 목에 현상금을 걸 것인가. 무능한 태수를 경질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능은 작은 죄이나, 무능을 숨기는 것은 큰 죄지요.”

말 그대로 목이 날아갈 죄지요.

목 언저리에서 손을 까딱거리는 소년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태감은 담백한 어조로 긍정했다.

“그래. 단순히 호환을 해결하지 못한 거라면 태수 직을 내놓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나, 호환을 해결하지 못해 도시가 망해가는데도 제 무능이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 조정의 눈을 가리고 자신의 실책을 숨긴 일은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효수해야 할 큰 죄이지.”

하지만 말끝을 흐린 태감은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직 볼에 젖살이 남은 앳된 사내아이의 얼굴에선 황제의 모습이 묻어났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태감은 자신의 얼굴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년은 황족이었고, 왕이었다. 태감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직 사례 태감이고 동창 제독이었다면. 네가 아직 후궁의 상호 오운이었다면. 난 망설임 없이 태수를 찾아갔을 것이다. 만약 사정이 있다면 해결했을 것이고, 죄가 있다면 벌하였겠지. 하지만.”

소년은 그 의미를 깨닫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예, 지금은 왕이지요.”

그는 왕이었으며,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이었다. 만약 황제가 변을 당한다면 그의 뒤를 이어 황좌에 오를 권리와 의무를 진.

태감은 그 끔찍한 가정을 상상하기도 싫다는 투로, 그러나 흥분으로 말이 거세지지 않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할지라도 태수는 황제가 임명한 관리다. 그의 무능함에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은 곧 황제 폐하의 책임이란 말이지.”

“그것을 제가 해결하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은 아니지요.”

“그래, 보기 좋지 않지. 좋지 않은 일이고말고. 황제 폐하의 부덕으로 벌어진 일은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해결되어야만 민심을 바로잡을 수 있다. 만약 이 일이 황제 폐하가 아닌 숙친왕 진연운의 이름으로 해결된다면.”

아직 반석 위에 오르지 못한 황제 폐하의 권위가 흔들림은 물론, 지금껏 명분이 없어 숨죽여온 이들에게 빌미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

이어진 태감의 말에 소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렇게까지 일이 커질까요?”

“명분은 많다. 황제가 부덕하여 나라가 어지러우니 올바른 황제를 세워 나라를 바로잡겠다. 그리고.”

“나이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황제 폐하를 옹립한 우리가 나라를 통치하겠다. 황제 폐하께서 국정을 보실 나이가 되면 그때 물러나겠다. 참, 그렇게 양심적인 도둑놈이 과연 있을지 궁금하군요.”

소년은 스스로 말하고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권력자가 있을 리가.

문득 소년은 염증과도 같은 그리움을 느꼈다.

다리를 절뚝이며 후궁의 담장 아래를 걷던 환관 시절.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자신의 목을 걸고 얼마든지 책임지겠다 약속할 수 있었던 시절.

목숨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있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쉰 소년은 문득 침묵하고 있는 자신의 호위무사를 떠올렸다.

자신의 무심함에 혀를 차며 소년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단혜림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선은,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네.”

“예?”

“도시의 태수를 처벌하는 것은 훗날로 미루어도 될 문제지. 급한 것은 호랑이 아닌가.”

그녀의 어조가 고저 없이 평온했기에 소년은 더욱더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절제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무사의 호승심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자리에서 내려왔음에도 여전히 백성들을 생각하는 위정자의 책임감이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소년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간단한 일이요. 호랑이를 사냥하면 될 일이지.”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갈 듯 사나운 미소를 짓는 단혜림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 * *

이튿날. 느지막한 점심쯤 소년과 태감, 그리고 단혜림은 빌린 장원을 나섰다.

정보수집을 위해 나선 것이었기에 단혜림은 이목을 끄는 것을 피하고자 칼을 숨긴 상태였다.

소년은 큰 장검을 마치 단검 다루듯 숨긴 그녀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어디에 칼을 숨기신 겁니까?”

“등허리 쪽. 변변치 않은 잡기술이지.”

그리 탐탁지 않다는 투로 대답하는 단혜림을 보며 식은땀을 흘린 소년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변명했다.

“커흠, 물론 단 호위의 실력을 믿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야밤에 산속으로 호랑이를 잡으러 가는 것은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하여…….”

“변명할 필요 없네.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니.”

단조롭게 대답한 단혜림은 자신의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사람은 보통 밤에 산길을 타지 않지. 아무리 밤눈이 밝은 이라도. 반대로 호랑이는 밤에 사냥을 나서는 야행성 동물이지.”

그런데도 인명피해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호랑이가 밤이 아닌 낮에 활동한다는 뜻이지.

그러니 호랑이를 잡으려면 밤이 아닌 낮에 움직였어야 했네.

자신이 문제시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다고 말하려던 소년은 문득 섬뜩한 예감을 받고는 단혜림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것은. 호랑이가…….”

“잠깐. 낯익은 사람이 있구나.”

태감의 말에 소년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는 태감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낯익은 이가 주점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첫날 그들과 마주쳤던 이였다. 궁색한 차림새로 주점 앞을 떠나질 못하는 중년인을 보며 소년은 품에서 전낭을 꺼내 태감에게 건네었다.

“보아하니 술 한잔이 간절해 보이는군요. 가서 술이나 한잔 살까요?”

“그러자꾸나. 이야기도 들어볼 겸.”

중년인에게 다가간 태감은 헛기침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본 중년인은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태감을 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군가 했네. 아직도 떠나지 않은 거요? 뭐 볼 것이 있다고.”

“하하, 아직 여장이 꾸려지지 않아서 체류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 한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사지요.”

“술? 커흠……. 뭐, 나야 좋지만. 염치없이 얻어먹기도 좀 그래서.”

머뭇거리는 중년인에게 태감은 더없이 사근사근한 어조로 제안했다.

“사해가 동도라 하지 않습니까. 좋은 인연을 만나 제가 사고 싶어 그러니 괘념치 마십시오. 정 부담스러우시면 그래, 도시 사정이라도 좀 들려주십시오.”

아무리 궁해도 술 마실 돈은 있는지 주점 안은 취객들로 북적거렸다.

간신히 빈 탁자 하나를 찾아 앉은 태감은 간단한 안줏거리와 함께 술을 항아리째 주문하여 점소이와 중년인을 놀라게 했다.

“탁주도 아니고 청주를 항아리째 주문하다니, 돈깨나 있으신가 보오?”

“대단치는 않지만 인색하게 굴 정도는 아닙니다.”

“그, 잘 마시겠소.”

태감과 소년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잔 두잔, 술이 들어가며 불콰하게 취한 사내는 맨정신으로는 말할 수 없었던 도시의 속사정을 모조리 폭로했다.

“그러니까, 그 호랑이가 그렇게 대단하단 말입니까? 놀라운 일이군요.”

“놀랍지, 놀랍고말고. 벌써 그놈 입으로 들어간 사냥꾼만 두손 두발 다 써도 세기 어려울 지경이오. 거기에 오가는 상인이며 도시 사람까지 다 세면 족히 일백은 넘을 거요.”

“끔찍하군요. 상황이 이런데 도대체 태수는 뭘 하고 있단 말입니까.”

“태수? 그 개잡놈 이야긴 꺼내지도 마시오. 그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은…….”

중년인은 속에 쌓인 것이 많은지 한참 동안 씨근덕거렸다.

거의 흐느낌으로 변한 중년인의 중얼거림에 소년은 실망한 표정으로 태감을 바라보았다.

결국, 맞지 않기를 기대했던 그들의 예상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태감은 목을 가다듬고는 되물었다.

“그 태수라는 작자가 어찌했길래 그러십니까.”

“사냥꾼들이 줄줄이 잡아먹히고 상인들의 왕래도 끊어지자 결국 태수 그 작자가 나서기는 했소. 무려 관병을 오십이나 끌고 의기양양해서는 산으로 향했지. 하지만 돌아왔을 때는 혼자였소. 오십이나 되는 관병을 호랑이 아가리에 처넣고는 뻔뻔하게도 혼자 살아 돌아왔지.”

“그렇다면 조정에 지원군을 요청해야 할 일 아닙니까.”

“하, 그 뻔뻔한 놈이? 그랬다가는 제 목이 날아갈 것이 뻔한데 행여나 그러겠소.”

속이 탄다는 듯 연거푸 술을 들이켠 중년인은 이를 갈았다.

오갈 데 없는 분노로 흐려진 그 눈이 향하는 곳을 바라본 태감은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웠다.

“그놈은 이제 제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관저에 틀어박혀 있소. 차라리 그날 호랑이한테 잡아 먹히기라도 했으면…….”

“하지만 다음 태수가 임명되면 지금까지의 죄목이 낱낱이 밝혀질 텐데요? 그걸 알면서도 틀어박혀만 있단 말씀입니까?”

“그 속을 누가 알겠소. 뭐, 높으신 분하고 연줄이라도 있든지 하겠지. 하여간 황제 폐하께서도 무심하시지. 그런 천하의 잡놈을 태수로 앉히시고는 돌아보지도 않으시니…….”

사내의 한탄에 태감은 무거운 표정으로 병을 기울였다.

중년인의 원망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태감 또한 마찬가지였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말없이 술잔을 들어 올리던 태감은 바깥에서 들여오는 달음박질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다급한 발소리는 주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사내가 헐레벌떡 주점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턱까지 숨이 차올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던 사내는 간신히 찬물 한 대접을 얻어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호랑이가, 호랑이가 또 나타났네, 호랑이가 또 사람을 물어 죽였어!”

기우뚱대던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태감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소년과 단혜림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온 사내에게 다가섰다.

“어딥니까, 위치는.”

“어, 그. 그것이.”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소년의 눈동자에 버벅거린 사내는 떠듬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 길목에 시체가 있었는데.”

뒤를 이어 날아든 질문은 없었다.

제 가슴께에나 올법한 어린아이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내를 내버려 둔 채 소년과 단혜림은 주점을 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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