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77화 (177/314)

환관의 요리사 177화

“난 처음부터 믿고 있었다.”

“얼씨구.”

태감의 뻔뻔한 말에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홍엽비와 부여비가 그럴 사람들이 아니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예, 예. 그러시겠지요. 아무렴.”

들어주기도 귀찮다는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한 소년은 태감의 식탁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쏘가리 튀김을 올렸다.

하늘엔 천당이 있고, 땅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 말로 유명한 소주의 명물. 송서계어(松鼠桂鱼)였다.

소년은 다람쥐 모양이 나도록 곱게 칼집을 넣어 튀긴 쏘가리 위로 새콤달콤한 당초를 끼얹었다.

눈앞에서 요리가 완성되는 것을 보며 태감은 군침을 삼켰다. 기름이 튀는 소리. 바삭한 튀김옷에 당초가 젖어 드는 소리. 소년이 그 위로 기름에 슬쩍 튀겨낸 잣을 한 움큼 뿌렸다.

잣의 고소한 향기가 상큼한 당초 향기에 섞여들자 태감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젓가락을 들었다.

성미 급하게 구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아직 내오지 못한 요리들을 차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생선 요리도 참 별미란 말이지. 가끔 먹으면.”

“가끔은?”

“그래, 가끔은.”

역시 식탁의 주인은 고기지.

바삭바삭한 생선튀김을 집어 들면서도 태감의 시선은 소년이 내오고 있는 연근 족발탕에 꽂혀 있었다.

그래. 역시 고기지. 식탁 정 중앙에 내려앉는 족발탕을 쫓으며 태감은 신중하게 당초가 묻지 않은 튀김을 골라 집어 들었다.

“우선은, 당초가 배지 않은 순수한 튀김 맛부터 볼까.”

아삭아삭한 튀김은 끈적한 당초가 없었기에 그 순수한 식감이 더욱 돋보였다.

오동통하고 탄력 있는 살점은 달콤하고 즙이 많았으며 비린내나 흙내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은은한 소금기가 부각하는 달큰한 감칠맛. 은은하게 느껴지는 톡 쏘는 후추 향.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된 요리구나. 담백하고 부드럽지만 탄탄한 살점 아래로는 은근한 지방의 감칠맛이 스며들어 있어.”

그렇다면, 당초와 어울린다면 어떨까. 태감은 긴장된 표정으로 가장 크고 당초가 넉넉하게 묻은 살점을 집어 들었다.

쏘가리 튀김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된 작품이었다. 거기에 맛이 진한 당초를 더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오히려 작품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가필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과 기대감으로 떨리는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뜨겁고 끈적한 당초가 착 감겨든 튀김은 아직 바삭한 식감이 남아 있었다.

코끝을 톡 치고 지나가는 새큼함과 산뜻한 단맛. 태감은 입을 반쯤 벌려 뜨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하아…….”

달아오른 숨을 토해내는 태감의 양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앵두빛 입술에 묻은 당초를 핥으며 태감은 감격에 젖은 눈동자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큼직한 쏘가리 한 마리가 전부 그의 것이었다.

“강렬한 당초의 풍미에 흰살생선의 섬세함이 가려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것도 계산 못 하면 그게 요리삽니까? 얼치기지?”

당초의 새콤달콤함과 쏘가리의 담백함은 마치 톱니바퀴를 짜 맞춘 것처럼 정교하게 서로 맞물려 있었다.

탄력 있고 맛이 진한 흰살생선과 산뜻하고 순한 당초. 얼핏 보면 강렬하고 자극적일 것 같았지만, 입안에 번지는 송서계어의 맛은 보드랍고도 순했다.

거기에 튀김에는 즐거운 식사를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가시 또한 없었다. 가시를 신경 쓰지 않고 생선 살을 입에 양껏 욱여넣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도 보람찬 일인가.

태감은 욕심껏 튀김을 집어 들었다. 하나, 둘, 셋. 세 개의 튀김을 한꺼번에 입에 집어넣자 입안이 튀김으로 가득 차올랐다.

뜨거운 생선 살을 씹을 때마다 뜨거운 김이 스며 나와 입안을 달군다.

하-후-하-후-

입을 벌린 태감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포실포실한 생선 살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만족감은 뜨거움조차 감수하게 했다.

연근족발탕. 연우민저제(蓮藕焖猪蹄)를 국자로 휘저으며 족발과 연근을 건져내던 소년은 지나가는 투로 태감에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됩니까. 두 분은.”

믿으시는 겁니까? 다시?

소년의 말에 태감은 씁쓸하다는 듯이 웃었다. 발그레한 입술이 그리는 나른한 호선에선 어딘가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럴 수는 없지.”

“그러면.”

“의심하고, 감시해야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관계가 변하는 일은 없을 거다.

태감의 말에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아군을, 동료를, 친한 친구를 의심하는 것. 늘어지던 한숨을 내쉬던 소년은 고개를 들어 태감을 보았다.

근심 따윈 없다는 듯이 송서계어를 탐닉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못 해먹을 일입니다. 참.”

“그래, 참 못 할 짓이지.”

뭐, 그것도 얼마 안 남았다만. 마지막 살점까지 살뜰하게 당초를 듬뿍 찍어 먹은 태감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쏘가리의 머리를 들여다보았다.

“머리도 못 먹을 건 없는데, 뭐, 굳이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먹을 것도 많은데 굳이 먹을 필요는 없겠지.”

연근이 듬뿍 들어간 족발탕은 국물은 뽀얀 흰색이었으며 향기는 구수했다. 입맛을 다시며 사기 숟가락을 들어 올린 태감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그 총은 어떻게 되었느냐?”

“예? 아아. 그거요.”

일단은, 잠정적 개발 중단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미적지근한 소년의 말에 태감은 웃음을 터뜨렸다.

“애매하구나. 부여비가 그렇게 미온적인 결론을 내릴 사람이 아닐 텐데.”

“원래는 확실하게 백지로 돌릴까 했는데.”

홍엽비 님께서 반대하시더군요.

그 말에 태감은 홍엽비라면 그럴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엽비. 그녀는 대장군의 여식이었다.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병기를 그리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개발될 병기라면,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개발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선 제국도 같은 힘이 있어야겠지요.”

“타당한 설득이군.”

“그래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다음, 황제 폐하께 전해드린다고 하더군요. 선택은 폐하께서 하시겠지요.”

“폐하의 어깨가 또 무거워지겠구나.”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군주의 책임인데.

국물에서 족발을 건져 도마 위에 올린 소년은 먹기 좋은 크기로 족발을 토막 치며 말했다.

“그 대신, 지금까지의 노력을 수포로 돌려버린 책임을 져야겠지요.”

“뭐로 보상해줄 생각이냐?”

“새로운 영감을 드려야지요. 새롭게 연구에 몰두하실 수 있도록. 이번엔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는 연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연회도 열어드려야죠. 태감은 새로운 연구보다는 연회 쪽을 더 궁금해했다.

“어떤 연회를 생각 중이냐?”

“뭐, 대단한 건 아닌데. 야시장 분위기를 좀 내 볼 생각입니다. 여러 가지 재료들을 죽 늘어놓고 재료를 골라 오시면 즉석에서 요리를 만들어 드리는 거죠. 제법 재밌겠지요?”

“그건…… 정말 재밌겠구나.”

부럽다는 듯이 빤히 보는 태감의 시선에 소년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태감님은 다녀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야시장. 궁에 매이신 몸도 아니고.”

“가면을 쓰고?”

“가면을 벗으면. 아, 그랬지.”

그럼 한 번도 가보신 적 없습니까? 야시장?

소년의 직설적인 질문에 태감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불쌍하다는 듯 그를 흘겨보며 한숨을 쉬었다.

“거, 적당히 핑계 대고 오시던가요.”

* * *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화사한 연등이 걸린다. 서난궁의 내원. 크게 피운 모닥불 주위로 시녀들이 모여들었다.

북적거리는 시녀들의 틈바구니에서 난화비와 부여비, 홍엽비는 얼떨떨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화비 님, 아니! 거기 예쁜 아가씨! 오늘은 새우가 싱싱해요!”

“오징어 사려! 복건성에서 막 들여온 물 좋은 오징어가 한 마리를 사시면 한 마리가 더!”

“부여비 님, 아니, 거기 참한 아가씨, 이것 좀 보고 가세요. 신선한 느타리버섯에 표고, 꾀꼬리버섯도 있어요!”

“홍엽비 님이 아니라 귀여운 아가씨! 돼지고기 좀 사 가세요! 기름지고 살집 두툼한 돼지고기!”

연등 아래로 늘어선 노점에선 상인처럼 분장한 시녀들이 그녀들을 향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시녀들에게 대나무 바구니를 받아든 난화비는 당혹스럽다는 듯 소년을 보았다.

“오상호 님?”

“허허, 그냥 연회만 준비하기에는 좀 지루하여, 서난궁의 시녀분들께 도움을 구해 야시장 분위기를 좀 연출해 봤습니다.”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소년의 짓궂은 질문에 난화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놀라움과 함께 선명한 환희에 젖어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소년은 속으로 성공을 확신했다.

“처음이에요. 이런 분위기는.”

“저도, 경사의 명물로 야시장이 있다고 듣기만 했지…….”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야시장.”

야시장이란 이렇게 활기가 넘치고, 즐겁고. 떠들썩한 곳이었군요.

답답한 규중에 평생 매어 살아야 하는 규수들에게 이런 소란스럽고 활력 넘치는 경험은 처음일 것이다. 내원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흥분감에 발을 동동 구르는 세 비를 보며 소년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만약 이번 연회가 괜찮으셨다면, 다음 다과회도 이런 형식으로 준비해볼 생각입니다.”

“다과회를요?”

“예, 다른 비 분들도 참석하시는 만큼 규모도 더 커지겠지요.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하고, 회장의 규모도 키우면 진짜 야시장 같을 겁니다.”

지금은 작은 내원에서 소꿉놀이하듯이 어설프게 기분만 내는 정도지만. 규모를 키우면 등도 새로 주문하고, 가판대도 따로 제작해 진짜 노점을 차려야지요.

꿀에 절인 사과처럼 달콤하고 감미로운 소년의 설명에 비들은 매혹되었다.

“분명, 즐거울 겁니다.”

“즐겁겠지요. 분명히.”

“후궁은 답답한 장소 아닙니까. 늘 책잡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고, 마음껏 웃을 수도 없지요. 자수나 그림 같은 조신한 취미 거리나 만지작거리는 숨 막히는 일상에, 가끔은 일탈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기분전환도 되고, 또 우정도 쌓이겠지요.

소년의 말에 난화비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부여비와 홍엽비를 돌아보았다. 늘 우아하게 경직된 미소만을 보여주던 둘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웃고 있었다.

그 나이 때에 어울리는 미소였다. 나도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까?

난화비는 소년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자신 또한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 기대돼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당장에라도 친구들과 손을 잡고 시장을 구경하고 싶다는 듯이. 웃고, 떠들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내려두고 즐기러 떠나기 전, 난화비는 그녀들을 위해 노력해준 소년을 위한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상호 님.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커흠, 저야 뭐. 오늘 연회는 부여비 님과 홍엽비 님 덕분이니, 감사는 그분들께 전해주십시오.”

헛기침한 소년은 존귀한 황후 후보자들을 향해 호객행위를 하는 시녀들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서난궁의 시녀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참, 다들 열정적이시더군요.”

“죄송해요. 혹시 저희 아이들이 너무 무례했다거나…….”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즐거웠습니다. 다들 열의가 넘쳐서, 저까지 기분이 들뜨더군요.”

노점상이라는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한 시녀들은 코밑에 숯을 칠하고 얼굴에 주름을 그리는 등의 익살스러운 분장을 통해 완벽한 노점상으로 거듭났다.

그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지 않았다면 오늘 연회의 재미는 반감되었으리라.

축제는 준비하는 과정 또한 축제 일부라며 즐겁게 어울려준 일등공신들을 바라보며 소년은 다짐했다. 반드시 성대한 뒤풀이를 대접하겠노라고.

“자, 홍엽비 님과 부여비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보시지요.”

“오상호 님. 다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몽롱한 눈으로 연등과 그 아래의 소란스러운 축제를 바라보며 난화비는 소년에게 재차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남은 감사는 연회가 끝난 후에 받겠습니다.”

난화비는 더 이상 자신을 절제하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며 안달이 난 부여비와 홍엽비를 보며 난화비는 대나무 바구니를 품에 안았다.

“뭐부터 먹어볼까요?”

“역시 겨울이니만큼 살이 꽉 차고 신선한 해산물은 어떨까요?”

“전 매운…… 아니, 저도 해산물 좋아해요.”

그럼 우선은 해산물부터 골라볼까요?

눈웃음을 지은 그녀는 가판대에 신선한 조개며 새우 따위를 늘어놓은 노점상을 향해 다가갔다.

“어서 옵쇼!”

“애화구나?”

“어흠. 난화비 님.”

“아하하, 미안해. 그럼 노점상 아저씨? 오늘은 뭐가 물이 좋아요?”

“아이고, 잘 오셨습니다! 오늘은 통통한 새우도 좋고, 오늘 막 올라온 신선한 전복도 좋고! 이 오징어 좀 보십시오! 반짝반짝 빛나지요?”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한 시녀는 평소 후궁에선 절대로 쓸 수 없는 비속어와 사투리를 섞어가며 난화비의 혼을 쏙 빼놓았다.

“지금 사시면 오징어에 전복도 세 마리 덤으로 드릴게! 아니,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안 되겠네. 홍합에 가막조개에 대합도!”

“어머어머, 이렇게 팔아도 남는 게 있어요?”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오늘만 밑지고 파는겨!”

대나무 광주리에 해산물을 잔뜩 담아주는 그녀의 시녀를 보며 난화비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코밑에 숯 칠을 하고 노점상으로 분장한 그녀의 시녀는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넘은 앳된 소녀였다. 어머나, 이 예쁜 얼굴에 이렇게 숯 칠을 하고. 어쩜.

묵직해진 바구니를 받아들며 난화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애화야. 고마워. 잘 먹을게.”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살짝, 나직하게 속삭이는 난화비의 말에 애화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난화비 님. 맛있게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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