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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83화 (83/314)

환관의 요리사 83화

순간 소년의 시선 속에선 생긋 웃고 있는 부여비의 모습이 터무니없이 멀어졌다.

그녀의 다소곳하게 모은 얇고 백자 같은 어깨너머로 보이는 좁은 서재는 아득한 지평선이 되었고 허공에 부유하는 먼지를 빛나게 하는 창가의 햇살은 장대한 극광이 되어 소년의 아둔하고 딱딱한 정신을 비웃었다.

범속한 이는 알 수 없는 세계. 자신의 멍청함을 한탄해야 하는 그로서는 그저 한없이 올려다보아야만 하는 영역.

저 너머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부여비의 시선에 소년은 한없이 움츠렸다.

천재. 눈앞에 있는 이는 틀림없이 세기의 재녀였다.

소년은 너무 떨려서 오히려 고요해진 심장을 부여잡으며 부여비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너무 멍청해서 기밀을 주저리주저리 떠들거나 했습니까?”

“어머? 설마요. 물론 훌륭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양하게 들려주셨지만. 양 태감님께 폐가 될만한 말은 없었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아차렸을까요?”

소년은 혹시 자신이 무의식중에 중요한 정보소스를 흘린 것이 아닌지를 의심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했었지? 일상적인 따분함을 날리기 위한 가벼운 잡담, 시시콜콜한 음식에 관한 역사 이야기, 어디에도 손잡고 안양비에 대적해 보자는 대승적인 뜻은 없었다.

복잡하게 눈알을 굴리는 소년을 보며 부여비는 먼지를 털어내듯 가볍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세상사 시름은 모두 다 모인 것 같은 이 후궁에서도 웃는 아이들.

어린 나인들에게 시선이 미친 그녀는 소년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방금 전, 안경을 쓰고 있을 때와 같은 활기차고 풋풋한 미소였으나 소년은 그것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문인가요?”

“소문. 네. 그렇네요.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안양비 님도, 난화비 님도…… 홍엽비 님은…… 아마 안 하시겠지만.”

대단하다는 안양비도 결국 움직일수 있는 돈과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초법적 기관인 동창이 안과 밖을 물 샐 틈 없이 감시하고 있는 후궁에서 정보를 모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소문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니까.

하지만 안양비는 사람이 많았다.

소문을 물어을 사람도, 그것을 분류할 사람도. 난화비 역시 그녀가 총애하는 시녀들이 그런 역할을 하리라.

하지만. 부여비는? 강가의 모래에서 사금을 걸러내는 것 같은 아득한 작업을 그녀는 누가 도와줬을까? 최소한 태감의 정보망에는 그녀가 그정도로 신뢰하는 시녀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소년은 말없이 가배를 홀짝거리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머, 저도 소문을 전해 들을 시녀 한둘 정도는 있어요?”

“그야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는…….”

소문을 듣고, 거기서 쓸만한 정보를 취합하는 것은 얼마나 아득한 일인가. 그 일에는 절대적으로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권력자들은 정보기관을 만들어 집단지성의 힘을 빌리는 것 아닌가.

고작 개인의 두뇌가 집단의 이성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정보취합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그 존재의 실증이 눈앞에 있었다.

부여비는 페이스트리가 바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입에 삼켰다.

바삭, 바삭. 바스러지는 그 촉감을 즐기며 부여비는 눈을 감고 잠깐의 여유를 즐겼다.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공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고, 뭘 눈치첸 거냐고 물을 수 없었다. 상대는 황후 후보, 아무리 편하게 대하게 해주고 있다 한들 범할 수 있는 무례에는 한계선이 있었다.

그럼 이대로 좋다고 할까? 아 아주 참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잘해봅시다 하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릴까?

소년에겐 그만한 권한이 없었다.

결정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태감의 일. 그의 의무였다.

그렇기에 소년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이대로 그녀에게 압도당한 채 꼬리를 말고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억지를 써서라도 그녀의 밑바닥을 볼 것인가.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슬슬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군요.”

“아직은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아니요.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년의 말을 저녁을 준비해야 하니 서둘러 돌아가야겠다는 뜻으로 이해한 부여비는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말없이 그를 보내주려 했다.

하지만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제가 부여비 님의 식사를 책임지게 해주십시오.”

예상 밖의 제안에 그녀는 가만히 고개 숙인 소년을 응시했다. 그것이 무슨 의도인지, 소년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궁리하던 그녀는 이내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소년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부여비는 그의 눈을 보지 못했다. 새카만 눈동자 속에서 끓어 오르는 흉측한 결의를.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 요리할 것을 결의한 요리사의 눈동자는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 * *

소년을 배척했던 남양궁의 나인들과 학구열에 불타 소년에게 들러붙던 서난궁의 나인들을 경험한 이래 소년은 궁의 나인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족하다는 뜻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마음을 다잡은 소년을 기다리던 동각궁의 나인들은 너무나도 선선히 소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주방 나인들은 통솔하는 위치의 선임 나인이 대표로 소년에게 주방의 구조와 식재 창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필요하신 재료는 말씀하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혹시 잔심부름을 시키실 아이가 필요하신가요?”

“아, 괜찮습니다.”

“네. 그럼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정중하게 대하는 태도에서 소년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맛보았다. 이거지. 이 사무적인,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대처. 이 거리감.

너무 적대적이거나, 너무 싹싹하거나의 사이에서 고통받던 소년에게 그녀들의 사무적인 대처는 작은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멀찍이 서서 그를 지켜보는 이 중 누구하나 그에게 관심 있어 보이는 이가 없었다. 그저 필요하면 가기 위해 대기 한다는 표정에서는 약간 지루함 마저 느껴졌다.

나인들의 성향은 곳 궁의 주인인 비의 성향을 대변하는 것이다. 유약한 성품이었던 홍엽비의 나인들이 지나치게 방만하게 굴고 밝고 온화했던 난화비의 나인들이 발랄하고 활기찼던 것처럼.

등각궁의 나인들은 절제되어 있었고 필요한 만큼 정중했다.

이는 곳 부여비의 성품이 그러하다는 뜻이었다. 모자라지 않게 대접하고 과하지 않게 배려한다. 소년은 마음속으로 부여비에 대한 평가가 상향조정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사람은 종이에 적힌 글귀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태감은 난화비를 높게 쳐 그녀를 황후로 추대했지만, 소년은 부여비의 성품 또한 황후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마 부여비는 자리를 줘도 싫다고 할 것 같지만.

권력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짧은 시간 그녀와 대화를 나눈 소년이 판단하기에 부여비는 전형적인 학자였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그것을 독야청청(獨也靑靑)하다고 해야 할지 태만하다고 해야 할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좋은 차와 좋은 책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구는 그녀에게 권력을 쥐여주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니 난화비 님께 걸겠다 한 걸까. 직접 나서기는 귀찮고, 그렇다고 안양비가 황후 자리에 오르면 대번에 목이 날아갈 팔자이니.

광동식 차슈나 오리구이를 만드는 커다란 화덕을 청소하며 소년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되새겼다.

투명한 수정알이 반짝이는 안경을 쓴 그녀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때면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녀가 모르는 세계, 모르는 이야기는 후궁에 매인 여인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

후궁에 매인 것뿐만이 아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규수는 평생 가문에 묶이고 집에 묶인다.

만약 그녀가 난화비처럼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면 어떨까. 자신의 발로 제국을 넘어 드넓은 세계를 눈에 담을 수 있는 신분이었다면 그녀는 과연 책을 선택했을까?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인 법이다. 직접 본 풍경은 백 권의 책에 쓰인 미사여구로도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소년은 간편한 차림으로 말 위에 올라 사막을 유랑하는 부여비를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뻐꾹. 뻐꾹. 뻐꾹.

도마 앞에서 칼을 꺼내려던 소년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건물 안에서 듣기에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뻐꾸기 소리였다.

소년은 천장을 길게 가로 지는 대들보 위에 올라앉아 열심히 뻐꾸기 소리를 열창하는 장소를 보며 소년은 고전적이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수신호에 개편이 필요함을 느꼈다. 모스부호라도 만들어야 하나?

“그냥 내려와요.”

“예입.”

장소가 폴짝 뛰어내려 고양이처럼 가볍게 착지했다. 충격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경쾌한 동작이었다.

소년이 감탄의 손뼉을 치자 쑥스러워하며 고양이처럼 손으로 볼을 비볐다.

“마침 잘 왔네요. 부여비 님의 상을 차리면서 식재료값은 연좌궁으로 청구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사후승낙은 좀 그렇잖아요? 여기 청구서 좀 전해주세요.”

장소에게 종이쪽지를 넘기자 멀리서 보고 있던 선임 나인이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어, 그러실 필요는…….”

“하하. 제대로 값을 치러야 값진 접대 아니겠습니까? 태감님의 정성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억지로 밀어붙이자 어떻게든 납득해 주었다. 소년은 이제 무시당해 살짝 볼을 부풀리고 있는 장소에게 다가갔다.

“육포 먹을래요?”

“와 육포!”

오는 길에 살짝 출출했는지 장소가 기쁘게 육포를 입에 넣었다. 귀여운 손주에게 고봉밥을 떠주는 기분으로 육포 주머니를 챙겨주었다.

근데 그럴 때가 아닐 텐데? 소년은 일부러 장소가 흥미 있어 할만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끌었다. 장소가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한참 후였다.

“여전히 눈치채는 게 늦네요.”

“으으…… 아무튼, 태감님이 어쩔 생각이냐고 물으셨어요.”

소년은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남을 이해시킬 만한 말재주가 있을 리 없으니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하는 것이 태감으로서도 판단하기 좋을 것이다.

소년은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한번 부여비 님의 속을 떠보겠습니다.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는지 장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년은 전후 사정을 설명할 단어를 좀 더 첨가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언어를 재가공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장소는 소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뇨, 부여비 님의 식사를 차리는건 상관없다고 하셨어요. 태감님이 내 식사는 어쩔거냐!!! 고 하시던데요.”

“……그 양반은 이런 날 어디 가서 적당히 때우고 올 것이지…….”

피곤한 가정주부 같은 말을 내뱉으며 소년은 연좌궁이 있을 방향을 쏘아보았다.

마치 눈앞에 태감이 있는 것처럼.

혀를 판 소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밤에나 돌아갈 테니 야식이라도 먹을 거면 기다리라고 하십쇼. 거참 바빠죽겠는데…….”

“헤헤…… 좀 순화해서 전달할게요.”

장소에게 주전부리를 조금 더 안겨준 후 소년이 본격적으로 조리에 들어갔다. 빛나는 오철칼이 도마 위를 질주하자 닭과 돼지와 생선의 뼈가 튀어 올랐고 아궁이에선 초열지옥처럼 큰불이 솟아올랐다. 무시무시한 솜씨를 자랑하는 소년에게 동각궁나인들의 시선이 모였다.

처음엔 그래도 남의 궁에 와서 요리할 정도는 된다는 인정의 시선이 점차 존경으로 변하는 것은 그리 긴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선도 시간이 지날수록 경외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을 진심으로 탄복하게 만든것은 소년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었다.

여염집 식탁도 아니고 후궁에서 단 다섯뿐인 황후 후보자의 식탁을 혼자서 차리는 것은 나인들의 상식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올라가는 음식이 한둘이 아니고 그음식 하나하나에는 전부 보기 좋은 장식이 곁들여져야 했다.

실제로 동각궁의 주방에는 오직 장식만을 담당하는 나인이 둘이나 될 정도였다. 하지만 소년은 조리와 공예, 두 가지를 모두 하고 있었다.

불 앞에서 풍로로 화력을 키우는 동시에 손으로는 무로 흰 목련을 조각하고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화덕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거위에 달콤짭짤한 양념장을 끼얹는다.

그러면서도 눈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육수를 보고 있었다.

삼면육비(三面六臂)의 아수라도 저 정도는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과 같은, 아니, 보통 사람보다 못한 조건인데도 소년은 총 열세 명이나 되는 주방 나인들을 초라하게 만들 만한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그 솜씨와 기세에 압도 된 나인들은 혹시나 작은 숨소리라도 들려 소년을 방해할까 조심하며 거장의 묘기를 감상하는 구경꾼에 어울리는 자세를 취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자신들보다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선배의 솜씨를 어깨너머로 배우려는 열의가 느껴졌다. 소년은 그들의 진지한 태도에 기꺼움을 느꼈다.

조금만 보여줄까. 아주 조금만, 질리지 않도록.

일순간, 기세가 변한다. 뜨거운 불앞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목덜미를 적시던 땀이 차갑게 식어버릴 만큼, 멀리 떨어진 그녀들조차 피부로 느껴질 만큼. 소년의 분위기가 변했다.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신기루처럼 일렁거렸다. 늦여름 기온에 화덕과 아궁이에선 큰불이 솟아 주방 안은 찜통 같았으나 소름 끼칠 만큼 온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그 의미를 알아차린 것은 다른 나인들을 통솔하는 선임 나인 단 한 명이었다.

아득하고 적막한 세계. 결국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노력으론 부족하다고. 깎아내고 대가를 지불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한 광기의 경계선 앞에서 선임 나인은 도저히 발을 뗄 수 없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요리사의 심연이었다.

참을 수 없는 향기가 피어올랐다.

방금 소년이 혼합한 육수의 냄새였다.

공들여 끓여낸 닭 육수와 엄선된 버섯 육수. 그 두 가지가 농후하게 졸아들어 후각을 파고들었다.

시간도 좋지 않았다. 이제 막 허기가 느껴지기 시작할 오후 무렵. 영혼을 중독시키는 치명적인 향기는 나인의 본분과 직업윤리를 마비시키고 오염시켰다.

나인 중 누군가가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누가 낸 소리였을까.

혹시나? 선임 나인, 반금련(盼錦聯)은 추태를 부린 것을 걱정할 집중력마저 쥐어짜 솥에서 끓어오르는 잔향을 음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한 불에서 은근하게 졸아드는 육수의 향이 스멀스멀 발끝부터 기어올랐다. 엄격한 교육으로 단련된 동각궁의 나인들이 하나둘 욕망에 무너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제지하면서도 반금련은 자신 또한 욕망의 포로가 되고 말 것 같은 달콤한 유혹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육수가 졸아들면 졸아들수록, 진해지는 농도만큼 나인들의 자제력 또한 시험받았다.

육수가 만족스러운 맛에 도달하자 소년이 물에 불린 무언가를 탕에 넣었다. 그러고는 심장 언저리를 부여잡은 채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반금련을 손짓으로 불렀다.

경이적인 자제력으로 평정심을 회복한 그녀가 정중하게 소년에게 물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아아, 별건 아니고. 맛 좀 보시라고요.”

악마적인 시련이었다.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참아온 여인의 인내심을 단칼에 끊어버리는 마귀의 소행이었다.

소년은 천진한 얼굴로 혹시 제비집 싫어하시나? 하고 물어 그녀의 복장을 터지게 했다.

투명하고 몽글몽글하게 탕 속에 담가진 제비집, 그리고 극상의 탕. 소년이 준비한 계이회관연(雞栮檜官燕)앞에서 반금련은 그간 선임 나인으로서 쌓아온 체면과 책임감 따위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등 뒤에서 질시의 시선을 보내오는 후배들에게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며 그녀는 사기 숟가락을 들었다.

“뭐, 후궁에서 요리하시는 분이니 제비집 정도야 질리게 드시고 다뤄보셨겠지만…… 괜한 참견이었으려나?”

“예? 아뇨! 꼭 마시고 싶어요!”

“허허, 그럼 드셔보세요. 넉넉하게 끓여서…… 그리고 제비집이 또 피부에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넉살 좋게 웃으며 맛보기치고는 명백히 많은 양으로 떠낸 연와탕이 반금련의 앞에 놓였다.

진득한 향기를 품은 수증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녀는 무심코 혼절할 것만 같아 다릿심이 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윽한 향기, 맑고 투명한 연갈색탕은 의외로 점도가 있었다. 그 위로 투명하고 뭉글뭉글한 제비집의 윤기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이 쩍 달라붙을 만큼 농후한 육수 속에서 오돌토돌한 제비집이 씹혔다.

진하게 우려낸 닭 육수와 향긋한 버섯 육수의 화합 속에서 혀 위를 춤추던 제비집은 짧은 인사말도 없이 스르륵 미끄러져 사라졌다.

가슴에 공허한 흔적이 남을 것만 같은 이별. 하지만 그 허무감 속에서 자아를 찾기도 전에 간사한 혀는 아직 남은 연와탕을 원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후배들과 한입씩 나눠 먹을 수 있을 거야. 한입씩 돌리면…… 한입…….

아. 모르겠다.

“허허, 천천히 드세요.”

입으로는 다정한 말을 내뱉으며 소년은 멀리 서 있는 나인들을 보았다.

연와탕이 줄어들수록 나라 잃은 허망한 표정으로 변해가는 그녀들을 보며 소년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분란의 씨앗이 훌륭하게 발아하는것을 보며 소년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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