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82화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네.
어쩔 수 없는 실망감을 숨기고 부여비는 나른한 표정으로 연좌궁의 상호를 맞이했다.
그녀를 오랜만에 설레게 만든 남자는, 아니. 아직 남자라고 부를 수도 없을 나이인 소년은 참으로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굽은 허리에 절뚝거리는 모습, 왜소한 어깨와 그늘진 얼굴은 추레했다. 그녀에게 말 한번 붙여보려 쩔쩔맸던 샌님들처럼 숫기 없어 보이는 모습에 부여비의 관심은 대번에 그녀가 치워둔 기행문으로 향했다.
별 볼 일 없는 이에게 시간을 낭비하기에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녀는 적당히 말 상대를 한 후에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소년에게 고개를 들 것을 명했다.
그 눈.
그 눈동자.
고개를 든 소년의 눈동자를 응시한 부여비는 그녀가 너무나도 경솔하게 단정 지은 평가를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달인의 노회함이 깃든 눈동자는 그녀에게 막연한 기대감과 좌불안석의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그녀의 기억 속으로 그녀의 삶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들이 떠올랐다. 저런 눈을 한 이들은 하나같이 그러했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오성으로 세상 모르는 것이 없고 무서운 것도 없던 그녀에게 존경심이라는 단어를 알려준 이들.
두뇌로는 넘을 수 없는 세월의 경험이라는 산을 쌓아온 이들.
소년의 눈이 실로 그러했다. 세월의 먼지를 마시며 구르고 닮아버린 하얗게 센 청춘의 공허함이.
이제는 새로운 일을 앞에 두고서도 기대감과 흥미 대신 난처한 쓴웃음을 지으며 점잖게 사양할 나이가 된이의 서글픔이.
자신의 분야에서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아진 사람의 여유가.
젊은이들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기꺼울 나이가 되어 세월의 물결 속으로 물러난 이의 시선을 보며 부여비는 혼란에 빠졌다.
자신과 비교하기는 커녕 뒤에서 있는 어린 시녀들과 견주어도 어린 나이일 소년이 어찌 저런 눈을 하고 있는 걸까?
우묵한 눈으로 부여비를 올려다보던 소년이 다시금 고개를 숙이자 부여비는 그제야 소년에게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진귀한 차가 들어와 부여비 님께 진상하고자 합니다.”
“후후, 제국 차 문화의 판도를 바꿀 물건인가요?”
“그것은 부여비 님의 코와 입으로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소년은 시녀를 시켜 미리 맡겨둔 종이봉투를 가져오라 일렀다. 금사를 박아넣은 최고급 종이로 만든 봉투를 비단으로 만든 띠로 봉해져 있었다.
그 속에서는 기이하게도 콩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져온 것은 차가 아니었나? 의아해하는 부여비에게 시녀가 봉투를 가져왔다.
“한번 향을 맡아보시지요.”
“……봉투를 풀어보렴.”
시녀가 조심스럽게 띠를 풀러 봉투를 열고 그 속을 확인했다. 그 안에 무언가 위험한 것이 없는지 조심스럽게 살핀 시녀는 한참 동안 봉투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한참 동안 봉투 안에서 향을 맡는 시녀를 부여비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시녀는 귓불까지 벌건 색으로 물들인 채 고개를 떨구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 시녀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던 부여비는 피식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보아하니 무척 매력적이었나 보군요.”
“젊은 친구에게는 조금 자극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려.”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어린 소년이 시녀를 젊다 표현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부여비는 그 말이 그에게 퍽 잘어울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에 관한 담화를 나누는 대신 부여비는 시녀를 매료시켰던 향기를 직접 즐겨보기 위해 봉투 안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콩? 콩인가요?”
“예, 콩입니다. 가배(咖啡)라고 하지요.”
“분명 제가 듣기로는 차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원론적이고 보수적인 부여비의 말에 소년은 쓰게 웃음 지으며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꽤나 길어질지도 모르는 설득을 위해 목을 풀어준 소년은 장광설을 늘어놓을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물론 제국인들이 생각하는 차의 정의는 차나무의 잎과 그것을 가공한 물건에 한정되겠지요. 명칭상 분류하자면 차(茶)는 본래 차나무를 뜻하는 바이니 본래는 그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차를 우려낸 찻물 또한 습관적으로 차라 부르지요. 그러니 관습적으로 사람들이 우려낸물 또한 차라 부르게 되었으니 비록 대용차(代用茶)라는 이름을 붙여야겠지만 이 또한 훌륭한 차의 한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여비가 들어보니 소년의 말은 제법 그럴듯했다. 말에 깊은 울림이 있고 조리가 있으며 그녀가 평소에 모르고 관심 있었던 분야에 해박한 듯해 부여비는 조금 더 소년을 자극해 보았다.
“그렇다면 대용차(代用茶)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찻잎을 우려낸 것이 아닌 다른 재료들을 우려내어 음용할 수 있는 모든 음료입니다. 본래는 탕(湯)이라 부르는 것이 옳고 실제로 산매탕(酸梅湯), 습조탕(濕棗湯) 등 약용하는 음료들은 지금도 탕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지요. 관습적으로 민간에서 차라 부르는 대용차들을 열거하자면 진피를 끓인 진피차, 오미자차, 생강차 등은 물론 곡식을 볶아 끓이는 보리차, 메밀차 등이…….”
“잠깐만요, 보리차라고요? 곡식을 차로 음용한단 말입니까?”
본디 화자의 말을 중간에 끊고 질문하는 것은 청자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며 평소였다면 부여비도 부끄러워 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혀 몰랐던 새로운 상식을 접하게 된 부여비의 호기심은 부끄러음을 누르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소년은 마치 무릎에 앉힌 손녀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따사로운 어조로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부여비 님께서는 안휘성에서 오셨지요? 안휘성은 예로부터 명차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 이지요. 황산모봉(黄山毛峰)에 태평후괴(太平猴魁), 육안과편(六安瓜片)과 기문홍차(祁門红茶)까지 십 대 명차 중무려 네 개나 생산되는 곳이니 대용차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하지만 찻잎이 나지 않고 유통도 어려운 북방에서는 이런 종류의 대용차가 다양합니다. 보리차는 많이 마셔도 몸에 해가 되지 않고 열을 내리며 식욕부진과 위장의 허약 증세를 좋게 하며 피부도 윤택하게 한다고 합니다. 특히 차가운 보리차에 설탕이나 꿀을 가미하여 마시면 숙취에 큰 효과가 있다고 하지요.”
“잠시만요, 뭔가 적을 것을 좀 가져오렴. 네, 그리고요?”
“예…… 메밀차는…….”
그녀는 좋은 학생이었다. 배우려는 열의가 있었으며 말하는 내내 화자가 심심하지 않도록 추임새를 넣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분명 학생 시절에 학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했으리라.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의제에서 탈피하여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로까지 화제가 넘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포스카(posca)라고 부르는 식초를 탄 음료를 휴대했다 합니다. 실제로 서역의 경전에 보면 그들의 구원자가 십자가를 메고 언덕을 오를 때 군병들이 신 포도주를 주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신 포도주가 바로 포스카라 부르는 음료임을 알 수 있지요.”
“신 음료요? 먹기 괴롭지 않았을까요?”
“물론 익숙해지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하지만 신 음료는 그냥 맹물보다 갈증을 해소하는데 효과적인 것은 물론 유사시에는 식사를 대신하며 굶주림을 해소하는데도 효과적이지요. 식초는 시어진 술로 만드는데 술은 상당한 열량을 가지고 있어 보급이 차단되었을 때 최소한의 식사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서방의 경우 석회질이 함유된 물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전생의 로마 병사들이 먹었던 음료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기록에 의하면 고대의 서역인들은 당시 가룸(Garum), 혹은 리쿠아멘(Liquamen)이라는 일종의 어장(魚醬)을 즐겨 사용했던 걸로 추정됩니다. 이는 고대의 미식가 마르쿠스 가비우스아피키우스의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하지만 값비싼 식재료였기 때문에 보통 시민들이나 빈민들은 그보다 저렴한 알레크(allec)라는 가룸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모은 것이라는군요.”
“아피키우스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습니다만…… 드문드문 남은 기록을 보면 대단한 호사를 누리다 죽은 것은 확실하겠더군요. 돼지의 간을 기름지게 만들기 위해 무화과를 먹여 돼지를 살찌운 이야기나 최상의 재료를 얻기 위해 직접 배를 타고 항해에 나섰지만, 산지의 재료가 마음에 들지 않아 땅에 발 한 번 디디지 않고 배를 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니 말입니다.
최후에는 남은 재산으로는 도저히 이전의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미식가에 관한 이야기까지.
소년은 말하면 말할 수록 부여비에게 말려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부여비의 반짝거리는 눈을 마주하고 나서는 도저히 화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만약 이것이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의도한 것이라면 소년은 알면서도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단해요! 절개를 지킨 것이군요?’
“글쎄요…… 절개를 지켰다 해야 할지…… 구차한 꼴 보지 않고 자결한 것은 높이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럼 그 시대에는 어떤 요리를 먹었나요?”
“글쎄요…… 저도 책으로만 보아 확실한지는 알 수 없지만…… 잠시만요. 부여비 님. 우선 이야기를 이어 하기 전에 목을 축일 차 한잔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아! 제가 너무 무신경했군요. 어서 차를…….”
“예, 차 말입니다.”
소년이 은근한 눈빛으로 탁자 한구석에서 쓸쓸하게 놓인 채로 방치된 봉투를 가리키자 부여비는 그제야 아쉽다는 듯이 봉투를 가져와 코를 들이밀었다.
기존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혹적인 향기, 거기에 소년은 부여비를 사로잡을 만한 매혹적인 이야기를 더했다.
“이 가배는 저 머나먼 서역의 사막의 나라에서 온 겁니다. 저는 가본 적 없지만 제 지인이 그쪽 출신이라 자주 이야기를 듣고는 했지만. 나무도 꽃도 풀 한 포기 없는 흰 모래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데 바람결에 따라 모래가 쓸려나가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 질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밤이 되면 창백한 달빛에 푸르스름하게 물든 모래 산의 능선에 아른거리는 그림자는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 있다고들 하더군요.”
부여비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 광대한 세상의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중독적이었다.
소년은 사막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천천히 커피콩을 갈았고 천 필터를 적셔 핸드드립을 내릴 준비를 했다.
조심스럽게 메마른 원두가 적셔지고 한 방울 두 방울 매혹적인 액체가 떨어지며 풍성한 향기가 접견실 안쪽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부여비는 소년에게 질문하는 것도 잠시 잊고 그 향기를 쫓았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의자를 바싹 끌어당기는 부여비를 보며 조심스럽게 우려낸 가배를 상에 올렸다.
그 새카만 색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사약과 같아 제국인들에게는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부여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잔을 들어 올려 코앞까지 가져왔다.
기미를 보는 시녀가 다가왔지만, 손짓으로 제지한 그녀는 뜨거운 김과 함께 피어오르는 뭉근한 향기를 즐겼다.
“조심하십시오. 보통의 차와는 달리 가배는 무척 맛이 씁니다. 우선은 한 모금 가볍게 마셔보시고 그 다음에 설탕으로 단맛을 내시는 것이…….”
더 이상 참지 못한 부여비가 소년의 말을 끊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큰일이다, 처음 먹는 사람이면 엄청 쓸 텐데.
소년은 시급히 준비해온 과자를 가져오라고 시녀를 보낸 후 찻잔을 움켜쥔 채로 굳어버린 부여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군요…….”
“예?”
“쌉싸름하군요.”
“예? 예, 역시 쓰시죠. 원래 가배가 좀 그렇습니다. 그래도 설탕을 좀 넣으시면 훨씬 마시기 수월하실……”
“아니요. 쓴 게 아니라. 쌉싸름하다고요.”
같은 뜻 아닙니까?
소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다시 한번 부여비에게 설탕을 권했지만, 그녀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으며 잔을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마치 감로수로 목을 축이듯이 조금씩, 소중히 아껴 마시는 그녀의 모습에 소년은 혹시나 해 되물었다.
“입에 맞으십니까?”
“네. 아주요! 첫 쓴맛이 강렬해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 안쪽으로 다양한 맛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겠어요. 약간의 신맛과 구수한 맛, 그리고 이 향기. 들숨과 날숨을 타고 전신세맥으로 뻗어나가는 듯한 풍부한 향기는…….”
안경이 콧잔등에서 미끄러지는 것도 무시한 채 열변을 토하는 부여비는 소년을 떠보기 위해 억지로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발갛게 상기된 뺨과 미끄러진 안경,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연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만큼 순진했다.
소년은 무심코 의혹이 고개를 드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그가 구워온 과자를 권했다.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신뢰받기 위해서는 먼저 신뢰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 어떤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 순결한 선의로 얼굴을 꾸몄다.
“이것은?”
“소취파피(酥脆派皮)라고 하는 구운과자입니다.”
“호호, 바삭바삭 잘 부스러지는 과자인가요? 딱 이름 그대로군요.”
부여비가 집어 든 것은 달콤한 팥소를 넣어 구운 것이었다.
중지 손가락 정도 길이에 도톰한 직사각형 모양의 과자는 겉에 계란물을 발라 구워 노릇노릇한 황금색이었다.
과자의 고운 결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던 부여비는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쪽 손을 아래에 받치고 과자를 입으로 가져갔다.
과연 이름대로 과자는 부여비의 하얀 앞니에 낙엽 밟는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와 혀 위에 착 달라붙는 기름기, 그리고 그 안쪽의 묵직한 팥소가 자리 잡았을 때 부여비는 무심코 쥐고 있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입안을 깨끗하게 씻어내듯이 공들여 한 모금을 마신 그녀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듯이 소년에게 말했다.
“이것이었군요?”
순순히 실토하라는 듯이 눈을 내리까는 부여비의 시선에 소년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의 표시였다.
소년은 무엇을 물어보든지 대답하겠다는 조건 없는 수용의 태도를 보였다.
“예, 그렇습니다.”
“무시무시한 조합이에요. 아마 둘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매력이 반감되 있겠죠?”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거죠.”
“쌉싸름하고 향긋한 가배와 기름지고 달콤한 과자. 쓴 가배를 마시면 달콤한 과자를 찾게 되고 달고 기름진 과자를 먹게 되면 필연적으로 입안을 깔끔하게 해줄 가배를 찾게 되죠. 정교하게 고안된 톱니바퀴네요. 그것도 악의적인.”
“허어? 전 그저 맛있는 음식을 제국인들에게 공급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우아한 가면을 쓰고 선량한 척해도 천성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순박한 미소를 짓던 소년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껏함에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흉소를 앞에 두고 부여비는 허리를 곧게 펴고 그시선을 마주했다.
“그런가요? 정말 훌륭한 소신이군요. 그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베풀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 정말 그뿐인가요?”
“하하, 저도 사람인데 어찌 그리 순진무구한 생각만을 하겠습니까? 물론 약간의 사익을 추구하기야 하지요. 하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물건을 공급한다면 사람들에게도 좋고 저도 욕먹을 일 없으니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저 돈인가요?”
소년의 순박했던 미소는 완전히 깨져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꼬리 안쪽으로는 맹수와 같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들거리는 흥소.
당장에라도 사람의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은 귀신이 고상한 척 찻잔을 들었다.
“그저 돈이지요. 저 같은 천한 종자에게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같은 기댈 곳 없는 자들이야 늘 내일이 두려운 법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 치고는 뒤에 서신 분이 또 상당하실 텐데요.”
부여비는 넌지시 연좌궁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던 소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큰일 하시는 분께 도움을 드리지는 못할망정 어찌 폐를 끼치겠습니까. 제 밥그릇은 제가 챙겨야지요.”
“호호, 그래도 양 태감님이 그리 매정한 분은 아니시잖아요?”
“저야 그저 그분의 온정에 매달려있을 뿐이지요.”
부여비의 질문에 앓는 척을 하며 소년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부여비는 여전히 씁쓰름한 가배의 맛에 매료되어 있는 듯 황홀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표정 관리가 기가 막혔다.
‘이보쇼 태감 나으리, 정치 감각은 별로일 거라고 했잖소.’
돌아가면 한동안은 절간 밥을 먹게 해주겠노라 다짐하는 소년에게 부여비가 다시금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왔다.
태감의 의중을 듣기 전에는 대답할 수 없는 수위의 질문들이었기에 간신히 받아넘기며 숨을 고르는 소년에게 부여비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난화비 님이신가요?”
“예?”
“하긴, 안양비 님은 너무 무섭죠.”
이미 단정 지었다는 듯이 말하는 부여비에게 당황한 소년은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니냐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이대로 단정 지어 버리면 무시무시한 정치적 실책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부여비가 한발 앞서 소년의 맥을 끊었다.
안경을 벗고 이제 막 피어난 여름꽃처럼 화사하게 웃는 그녀는 더 이상 책과 지식에 목마른 예가인이 아닌 후궁의 오상비(五祥妃), 황후 후보자인 부여비였다.
“좋아요. 저도 난화비 님께 걸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