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내를 살찌우는 것.2021.08.05.
비상구가 어둠에 잠겼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 순간, 남편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의 모든 것들이 태령을 자극해왔다. 귓가를 스치는 고른 숨소리. 취할 것처럼 코끝을 파고드는 묵직한 체향. 허리에 조심히 올리고 있는 커다란 손의 온기. 이래서 어둠이 싫다. 뭘 해도 가려줄 것만 같아서, 시꺼먼 욕심을 불러일으키니까. 더 엉큼한 욕심쟁이가 되기 전에 빛을 밝혀야 했다. 그런데 태령보다 남편이 먼저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센서가 작동하면서 다시 비상구가 환해졌다.
“오늘 뇌물은 키스.”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여와 태령을 긴장시킨 남편은 다시 천천히 멀어졌다.
“……로 받고 싶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이상하게도 아쉬운 건 태령이었다. 키스할 것처럼 분위기 다 잡아놓고선, 이게 끝이라니. 마치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대신 퇴근해서 나랑 저녁 먹으러 갑시다.”
깊숙이 들여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아직 열감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 눈으로 밥을 먹자는 남편을 태령을 조금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킨십 뇌물이라면서요. 정말 그거면 돼요?”
“뭐, 이번은.”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태령에게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서로의 코끝이 닿을 거리에서 눈을 맞추고 씨익, 짓궂게 웃는다.
“아쉬워하는 얼굴인데, 다시 키스로 바꿀까요?”
“누가요? 아니요! 됐어요!”
발끈하듯 작게 쏘아붙인 태령은 반사적으로 벽에 등을 붙였다. 혹시라도 또 불이 꺼져서 어둠이 찾아올까 봐.
“뇌물이라도 일방적으로 받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 못 해요.”
태령의 손에 쇼핑백을 쥐여준 남편이 비상계단에 앉아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자꾸만 예상에서 엇나가는 남편을 경계하며 태령은 조심히 옆에 앉았다.
“내 앞에서 풀어볼래요.”
쇼핑백 끈만 만지작거리는 태령을 남편이 재촉했다.
“얼른.”
하는 수 없이 쇼핑백을 열어본 태령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고급스러운 더스트 백 옆에 초록색 요구르트와 빨대가 보여서. 너무 치사해, 천 원으로 사람 마음 이렇게 흔드는 거. 태령이 가만히 보고만 있자 움직인 건 남편이었다.
“태령 씨가 날 바로 쫓아낼 것 같아서.”
쇼핑백 안에서 요구르트를 꺼내서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뇌물 좀 사 왔어요.”
태령은 말없이 요구르트를 빨아 마셨다. 하나를 다 마시고 그 옆으로 빨대를 옮기고 다 마시고 계속. 달달하고 시큼한 이 맛이, 가슴 안의 뜨거운 응어리를 밀어냈으면 해서.
“이제 선물 좀 확인해주시지?”
조금은 불퉁한 남편의 음성에 태령은 다 마신 요구르트를 내려놓았다. 더스트 백 안에 브리프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뜻밖의 선물에 태령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왜 이걸 샀어요?”
차라리 별 의미 없는, 누구나 쉽게 선물할 액세서리였으면 했다. 그런데 요구르트도 그렇고, 브리프케이스도 그렇고. 이 남잔 왜 자꾸 내 마음을 파고들지. 정답을 알려준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그런데도 얄미울 만큼 이 남자는 늘 성공한다.
“태령 씨 손이 제일 많이 가는 가방이니까.”
무심한 듯하면서도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출근길에 항상 함께했던, 핸드백이나 클러치를 들어도, 늘 제 손에 들려 있던걸.
“내가 준 선물을 태령 씨가 자주 들어줬으면 해서.”
브리프케이스 안엔 진경과 강 관장과 메일을 주고받을 때 이용하는 노트북이 있었다. 예전에는 김 비서를 믿지 못해서 맡기지 못했지만 지금은 습관이었다. 태령의 침묵에 그가 긴장감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들어요?”
태령은 대답 대신 손으로 가만히 가방의 표면을 쓸었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가죽의 재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선물을 받아본 게 언제였을까. 진경조차 우연히 한 번 생일을 챙겨준 후 다시는 챙기지 않았다. 자신이 질색했으니까. 누군가의 호의가 담긴 선물이, 대가 없는 물건이 어릴 적부터 싫고 부담스러웠다. 음식, 옷, 혹은 집안의 집기들. 혹은 교복, 신발, 문제집 등등.
‘불쌍하니까 그냥 주는 거지. 요즘 세상에 버리는 것도 돈 내야 하는데.’
‘봤어? 기껏 챙겨줘도 애가 고마워할 줄을 몰라. 제 엄마 잡아먹고 태어난 애라서 그런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결해.’
앞에선 사람 좋은 척 챙겨주면서 뒤에선 결국 동정하고 경멸하고. 어린 나이에 쓰라리게 경험으로 배운 교훈이었다. 타인의 호의는 바라지도 말고 받지도 말고 누구도 믿지 말자고. 선물을 준 적도 없지만 받은 적도 없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일부터 이 가방으로 들고 다닐게요.”
이 계약이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갈 때 태령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 것이었던 건 없었고 이노패션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챙겨갈 게 방금 하나 생겼다. 7년 가까이 쓴 가방이니, 바꿀 때가 되긴 했으니까.
“저는 강준 씨에게 뭘 선물…… 앗!”
남편이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이마를 튕긴 것이다. 이마를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너무 놀란 태령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의는 그냥 호의로 받아들입시다.”
“…….”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난 너무 어려워. 어려워서 미치겠어. 근데 자꾸만 당신이 직진해오니까, 어려워도 해보고 싶어져. 작은 욕심도 부리면서 용기도 내보고 싶고.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집어삼키는 태령의 시야로 남편의 커다란 손이 밀려들었다.
“밥 먹으러 갑시다.”
이 손을 내가 잡아도 될까.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태령은 조심히 손끝을 잡았다.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될 것 같아서. 그런데 남편의 긴 손가락이 가는 손가락 사이로 매끄럽게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손깍지를 끼고선 태령을 일으켜 세웠다.
“이왕 잡는 거, 제대로 잡아야죠.”
씨익 웃는 남편의 미소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뭐지, 이 기분은. 부드러운 깃털이 가슴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 자신이 얻은 독일에서 한 달이라는 자유는 평생을 반납해야 하는 대가였다. 하지만 알리샤는 한신의 안주인 노릇을 할 자신이 없었다. 24시간 내내 말조심, 행동조심, 조신하고 우아한 척 구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결국 알리샤는 이노그룹 부회장인 아빠 영국에게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낳기 싫으면 5년만 버티면 된다면서요. 근데 왜 갑자기 말이 바뀌어요? 날 평생 결혼에 묶으려는 건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잖아요!”
발악했다가 울었다가 하소연했다가. 그걸 영국은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물론 알리샤도 안다. 생긴 것만 멀끔하지 우유부단한 아버지란 걸.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후론 아예 엄마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는 걸.
“난 내 몫만 챙겨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한신 안주인도 되기 싫고, 재벌가 사모님도 싫다구요!”
한신의 후계자와 맞선을 보았을 때는 잘해볼까 생각도 했었다. 여자라면 영혼을 바쳐서라도 갖고 싶은 남자였으니까. 풍기는 페로몬도 강렬했지만 여자를 사로잡는 특유의 우아한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경수에게 늘 들었던 것처럼, 바늘의 첨단조차 뚫지 못할 그 완벽함도 좋았다.
“한신 후계자는 날 미라처럼 천천히 말라 죽게 할 거야! 그러고도 남을 남자라구요!”
하지만 한신의 후계자가 그 완벽한 성격으로 복수를 꿈꾼다면. 상상만으로도 섬뜩했다.
“나랑 걔가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사람 바뀐 거 금방 눈치챌 거예요. 파내다 보면 결혼식부터 대타 세운 것도 알아낼 거고. 그럼 그 대단한 한신가에서 가만있겠어요? 그걸 또 할아버지가 알면요? 아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깔끔하게 5년으로 끝내요. 네?”
조 여사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이노그룹 회장인 할아버지뿐이었다. 한신과의 결혼을 조 여사가 무리하게 밀어붙인 것도 모두 유 회장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유 회장은 손녀딸이 바뀐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장남인데도 딸만 하나 있는 무능력한 영국은 경영 승계권에서 자꾸 밀려났다. 그러니 조 여사가 머리를 굴릴 수밖에. 드디어 영국이 입을 열었다.
[남자 하나 제대로 못 휘어잡는 게 뭐 자랑이라고 투정이야. 이건 네 엄마를 안 닮았어.]
“아빠!”
[네 엄마가 옳아. 힘 하나 없는 부회장이란 타이틀보단 알짜배기 한신 계열사 하나 맡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장남으로서 지금은 이노그룹의 부회장이지만 영국은 그 자리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유 회장이 아들만 둘인 둘째에게 조금씩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으니까.
[넌 어떻게든 아들만 하나 낳아. 그럼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하마.]
끊긴 전화를 보는 알리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났다. 이제 정말 남은 희망은 그 아이였다. 차라리 그 아이가 서강준과 사랑에 빠졌으면. 그래서 나 대신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유태령이란 이름을 영원히 가져가 버렸으면. 그 아이라면 잘 버텨낼 것이다. 조신하고 우아하고 현명하고 간사하게. *** 한식만 잘 먹는 줄 알았는데 태령은 지중해 음식도 잘 먹었다. 사사로운 욕망을 접고 저녁 식사를 요구한 게 뿌듯할 만큼. 포크를 차분히 놀리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수줍은 듯 아내는 살포시 웃는다.
“이 레스토랑 유명한 곳인가 봐요.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인데 입맛에 너무 잘 맞아요.”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아내는 맛있는 걸 먹여줄 때만 예쁘게 웃어주는 것 같다. 삼시 세끼가 아니라 다섯 끼도 사줄 수 있지만, 먹어야 사주지.
“예약하려면 최소 이주는 대기를 해야 하는 맛집은 맞아요.”
태연한 척 굴고 있지만 사실 강준은 불쾌하고 심란했다. 자꾸만 백화점에서 보았던 래트리버 같은 남자가 떠올라서. 그 남자는 아내와 어떤 사이일까. 얼마나 친밀하고 애틋하길래 그렇게 걱정을 하는지. 친근한 건지 썸인 건지, 연애를 한 건지 아니면 사랑을 한 건지. 스스로도 놀랐다. 자신이 이렇게 속 좁고 상상력이 풍부한 놈일 줄은. 물론 사랑이 100% 잘못했다. 31년을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살아온 자신을 속 좁은 질투쟁이로 만들어 놨으니.
“설마 강준 씨가 이주 전에 예약해놓은 거예요?”
“경진이 후배가 여기 사장이에요.”
지금껏 딱히 절제할 일도 없고 폭주할 일도 없어서 평탄히 살아왔다. 하지만 절제가 사라진 자신은 포악하고 잔인한 포식자라는 걸 안다. 그래서 끝까지 아내를 믿고 기다려주고 싶었다. 아내의 과거가 어떻든, 그 남자와 어떤 관계였든. 이 여자에게 믿음을 얻고 사랑을 받는다면. 사랑하는 여자를 가진 남자의 여유로 그 포식자를 컨트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때 아내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강준에게 포크를 들이밀었다.
“강준 씨도 한번 먹어봐요.”
먹고 싶지 않은데. 강준은 저염식을 선호했고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즐겼다. 솔직히 말하면 미각의 즐거움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팔라펠이란 음식인데 여기 건 튀기지 않고 구웠나 봐요. 요거트 소스에 찍어 먹으니까 맛이 더 환상이에요.”
그래도 강준이 망설이자 아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 번 정도는 먹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 혼자만 열심히 먹으니까 민망해요.”
조금은 토라진 듯한 말투에 강준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딱히 먹고 싶진 않지만 아내가 원한다는데.
“어때요?”
“꽤 맛있어요.”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갈색의 동글동글한 음식이 또다시 포크에 찍혀 다가왔다.
“그럼 하나 더 먹어요.”
그냥 사실대로 말할 걸 그랬나 후회해보지만 이미 포크는 눈앞에 있다. 굳이 먹어야 한다면 먹겠지만, 이건 물어봐야겠다.
“내 질문에 하나만 대답해주면 이것까지 먹을게요.”
“뭔데요?”
강준은 잠시 뜸을 들였다.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질문 중 하나라고 친구들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결혼식 때랑 지금 몸무게가 어떻게 됩니까?”
태령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요?”
“계산할 게 좀 있어서.”
느닷없는 질문인 걸 알지만 강준은 지금 진지하다 못해 심각했다.
“제 몸무게로 계산할 게 뭘까요?”
“당장 말을 못 해주지만 그런 게 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태령은 곧 대답해주었다.
“결혼 전엔 50킬로, 지금은 45킬로 정도예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준은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저 작은 몸에서 빠질 살이 어디 있다고 5킬로나 빠지냐고.
“이번 주에 1킬로는 더 빠진 것 같구요.”
태연히 아내가 덧붙인 말에 강준은 입안이 썼다. 그 1킬로는 정말 자신의 탓 같아서. 뜨거웠던 그 밤. 유리처럼 고이 모셔도 모자랄 아내를 새벽 내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어삼켰으니.
“음식 더 시켜줄게요.”
강준은 벨을 눌러 웨이터에게 음식들을 더 주문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은 치밀한 계산에 들어간 상태였다. 아내를 살찌우는 것. 지금 강준에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아내를 걱정하는 게 싫었다. 댕댕이 같은 남자가 말한 주세희가 제 아내가 아니라고 해도. 그 밤, 살짝 힘만 줘도 부서질 것 같던 아내의 가녀린 몸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대할 걸 그랬다고 다음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도. 우리의 두 번째 밤을 위해서도 아내를 살찌워야 할 것 같았다. 일거이득, 꿩 먹고 알 먹고.
“강준 씨.”
“…….”
“강준 씨?”
대답조차 없는 남편 때문에 이제 심란한 건 태령이었다. 도대체 무슨 계산을 하길래. 사람이 불러도 대답도 없이 저렇게 심각한 건지. 물론 태령이 알 리가 없었다. 남편이 자신을 잡아먹을 생각에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