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스킨십 뇌물.2021.08.01.
그레이스 백화점 별관 VIP 주차장.
“느닷없는 연락에도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한 매너로 강준이 맞이하는 여자는 강 관장이었다.
“나야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젊고 잘생긴 서 사장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
개인적인 만남은 처음인데도 강준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강 관장은 성격이 좋아 보였다.
“제게 귀한 시간 내주신 만큼 확실하게 대접하겠습니다.”
“근데 아내한테 선물할 백을 고르는 거면 나보단 김 여사랑 오는 게 낫지 않아?”
강준은 아내의 선물을 고르는 걸 도와달라고 강 관장에게 부탁을 했다. 물론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지만, 그건 나중에.
“아내가 유일하게 가깝게 지내는 분이 강 관장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타일도 제 아내와 비슷하시니 선물도 잘 골라주실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담담히 대답하며 강준이 내미는 팔을 강 관장은 재밌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지인의 아들들이나 젊은 남자들은 자신을 대할 때 대부분 모 아니면 도였다. 깍듯이 대하지만 거리를 두거나 설렁설렁 대하거나. 그런데 강준은 달랐다. 외국에 오래 있어서 그러나. 여자를 기분 좋게 해주는 매너가 몸에 배어 있었다. 윗사람으로 깍듯하게 대하면서도 여자로서도 존중해주는 것 같았다. 잘생긴 남자에게 대우받는 걸 싫어하는 여잔 없을 테니까. 강 관장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남보다 못한 부부 사이처럼 굴더니, 마음이 그새 바뀌었나 봐?”
“제 아내 같은 여자를 만나면 어떤 남자라도 마음이 바뀔 겁니다.”
강준의 진심이었다. 감히 어떤 남자가 그 여자 앞에서 버틸까.
“유 사장이랑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말은 칭찬으로 들을게. 서 사장도 알지? 본인 아내가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패피인 거.”
“그건 모르겠지만 뭘 입어도 예쁜 건 압니다.”
팔불출 같은 대답에 강 관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두 사람이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자 전담 퍼스널 쇼퍼가 그들을 맞이했다.
“오늘은 우리끼리 조용히 쇼핑할 테니 물러가요.”
퍼스널 쇼퍼를 물리는 강 관장을 강준이 대신 깍듯하게 모셨다. 누가 보면 모자 사이로 착각할 정도였다.
“서 사장이 에스코트해주니 뭔가 어깨가 으쓱으쓱해지는데?”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설마, 달려와 주려고?”
“아내에게 중요한 분은 저한테도 중요하니까요.”
무심한 듯 나직한 어투가 진실성이 있어서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물론 이 말투가 싸늘해지면 잘 벼른 칼처럼 섬뜩해질 것도 강 관장은 잘 알고 있었다. 불쌍한 그 아이에겐 그럴 일이 없기를.
“그래, 봐둔 스타일은 있고?”
“브리프케이스를 선물해주고 싶습니다.”
강 관장의 말대로 아내는 패션센스가 남달랐다. 수많은 액세서리와 백, 힐을 잘도 골라서 매치했다. 하지만 항상 가지고 다니는 브리프케이스는 한 종류였다. 자연스럽게 해진 가죽만 봐도 아내가 얼마나 그 가방을 들었는지 알 정도였다. 그래서 아내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떠올리게 되었다.
“브리프케이스라면 샤닐이 유명하지.”
샤닐 매장엔 젊은 남자 손님 한 명뿐이었다. 조용히 쇼핑하겠다고 했는데도 연락을 받았는지 매장 매니저가 그들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하지만 강준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매니저에게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조용히 쇼핑하고 갈 생각이니 볼일 보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강 관장의 의사를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관장님?”
“나야 괜찮지. 이렇게 쇼핑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고.”
강 관장이 직원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하는 사이 강준은 매장을 둘러보았다. 매장에 있던 젊은 남자의 통화내용이 적나라하게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진경아, 주세희 말이야.”
천천히 돌아선 강준은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큰 키, 비율 좋은 호리호리한 몸, 꽤 귀여운 동안 페이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의 남자가 묘하게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강준이 쳐다보는 걸 알 리 없는 남자는 통화를 이어가며 걸음을 옮겼다.
“야! 나 세희 걱정되어서 이러는 거거든?”
이름 하나로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런데도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감히 나는 아직 입에 담지 못하는 그 이름을 다른 남자에게서 듣는다는 게.
“얘가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니까? 나의 주세희가 삐쩍 말라 있었어.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때마침 고개를 튼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강준은 피하는 대신 더 노골적으로 빤히 응시했다. 굳이 피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으니까. 보고 있자니 눈빛에 시퍼런 날이 섰다. 그냥 거슬리고 싫었다. 주세희를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저 남자가.
“서 사장, 난 이게 제일 유 사장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어때?”
천천히 고개를 틀면서 강준은 그제야 알았다. 저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며칠 전 아내를 쫓던 사냥꾼이었다. 3층 계단 위에서 꽤 오랫동안 둘의 키스를 무례하게 구경했던.
“그럼 이걸로 하죠.”
우아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태연히 대답하고 있지만 강준은 지금 불쾌했다. 주세희란 이름의 아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지금 당장이라도 뒷조사를 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아내는 저 남자와 깊은 관계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게 저 남자 신상에 이로울 테니까. *** 쇼핑을 끝낸 후 점심 식사는 백화점 식당가의 한정식집에서 이루어졌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끝낸 강 관장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비건인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 정도 준비도 없이 먼저 식사를 청할 만큼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한신의 후계자가 왜 최고의 신랑감이었는지 강 관장은 알 것 같았다. 외모 좋고 능력 좋고 매너 좋고, 매력적이고. 곁을 허락하지 않아서 그렇지, 자신이 호감 있는 상대에겐 너그러운 남자였다. 젊었다면 차이더라도 대시해보고 싶을 만큼.
“선물도 샀고 식사 대접도 했고. 이제 날 만나려고 한 진짜 이유를 말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눈치채셨습니까?”
강준 또한 굳이 발뺌하려 들지 않았다.
“나이는 괜히 먹는 게 아니라니까? 눈치 하나로 이 바닥에서 살아남았는데.”
여유롭게 웃는 강 관장은 문득 궁금해졌다. 아내에게 푹 빠진 게 분명한 한신의 후계자가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진실을 알아도 지금처럼 아내를 아껴줄 수 있을지. 어쩌면 무심히 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관장이 아는 정·재계 남자들은 대부분 사랑보다 명예였다. 그렇다면 한신의 후계자는 어떨까.
“어디 말해봐요, 한번 들어나 보게.”
*** 한신 자동차 사장 집무실. 톡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긴 손가락 끝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어렸다. 남자가 했던 말이 귓가에서 모래알처럼 거슬리고.
‘얘가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니까? 나의 주세희가 삐쩍 말라 있었어.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아내의 모습이 시야에 차오른다. 훅 불면 날아갈 것처럼 여리여리한 실루엣이. 뜨거웠던 첫날밤, 부서질까 봐 맘껏 안지도 못했던 나긋나긋한 몸이.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점점 더 몸집을 부풀린다. 그 남자와 아내가 꽤 친밀한 사이일 것 같다는. 강준으로선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려운 것도, 무서운 것도, 불안한 적도 없었는데.
“연인 사이는 아니겠지.”
상상만으로 기분이 더러워졌다. 머릿속이 바싹 타들어가면서 텁텁한 재가 날리는 것처럼.
“확실히 많이 말랐고.”
자신의 눈에도 천천히 말라가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결혼식 때보다 공항에서 재회했을 때가. 재회했던 공항에서보다 바로 어제, 지금이.
“다 내 잘못이고.”
인정하고 나니 가슴은 저릿하고 입안은 쓰다. 조 여사만으로도 벅찰 텐데, 자신까지 아내의 피를 마르게 했다. 밖에선 조 여사가, 집에선 자신이. 아내가 숨도 못 쉬도록 조여댔으니. 떠올릴수록 미안하고 후회되고, 그래서 아내가 더 보고 싶고.
“싹싹 빌어야겠네.”
강준의 시선이 소파에 던져 놓았던 쇼핑백으로 향했다. 저 정도면 핑계는 충분한 것 같고.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윤 실장이 들어왔다.
“50분 후 투자사 대표들과의 저녁 만찬이 있습니다. 차가 막힐지 모르니 미리 출발하시죠, 사장님.”
강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녁 만찬 스케줄 생략하고, 이노패션으로 갑시다.”
“예에? 하지만…….”
“내가 저녁을 같이 안 하면 투자 철회하겠다고 할까 봐 걱정됩니까?”
“그건 아니지만.”
윤 실장은 말끝을 흐렸다. 저녁 식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눌 대화가 중요한 거잖아요.
“그럼 뭐가 문제지?”
하지만 상사의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에 윤 실장은 오늘도 제 살길을 찾기로 했다.
“문제없습니다. 그곳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사모님께 미리 연락을…….”
“김 비서에게 연락해서 위치만 확인해요. 단, 아내가 모르게.”
“예에?”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아내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할 생각이라.”
강준은 명품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을 들어보였다. 가겠다고 미리 알리면 도망칠 아내가 훤했다. 그러니 들이닥칠 수밖에. 아군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 회의실에 들어선 태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긴급회의를 요청했다는 전략기획팀 대신 남편인 강준이 있었다. 자신을 속인 김 비서를 노려보자 불쌍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싹싹 빈다. 제 입장 좀 이해해주세요. 저는 절대 을이랍니다, 사장님. 결국 태령은 한숨을 내쉬며 나가보라고 손짓을 보냈다.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남자를 김 비서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문이 닫히자 태령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김 비서 좀 곤란하게 하지 마요.”
“내가 온다고 하면 태령 씨가 도망칠까 봐.”
태령은 눈앞의 남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 이제 도망 안 가요. 난 예정대로 내 자리로 돌아갈 테고, 그럼 당신을 볼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러니까 볼 수 있을 때 실컷 볼 거야.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뭐예요?”
“확인할 것도 있고.”
가까이 다가선 남편에게서 번지는 체향이 짙다.
“줄 것도 있어서.”
무심히 쇼핑백을 내미는 손과 달리 남편의 짙은 눈빛은 태령의 입술을 보고 있었다.
“태령 씨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브리프케이스 하나 샀는데.”
팔도 길면서 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건데. 사람 숨도 못 쉬게. 아슬한 몸의 간극 때문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태령의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뜨거워지고 몸에서 야릇한 열감이 번진다. 이게 모두 남편 탓이다. 온몸의 세포에 올올이 숨을 불어넣고 각인을 새겨넣은 건 남편이었으니까. 적막이 내려앉은 회의실에서 서로의 숨소리만이 들린다. 너무 가까운 몸의 거리, 건조한 눈동자에서 번지는 열기, 노골적인 눈의 각도. 머릿속에서 빨간 경고등이 들어왔다. 지금 너무 위험하다고. 태령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최대한 차분히 물었다.
“이거 받으면 바로 갈 건가요?”
얼굴 봤으니까, 이제 제발 가줘요.
“나 진짜 그냥 보낼 거예요?”
그때 갑자기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임원들이 들이닥쳤다. 시선이 쏠리자 태령은 남편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쇼핑백을 다시 내밀었다.
“이런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요.”
마치 연인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다행스럽게도 눈치가 빠른 남편은 느릿한 손길로 다시 쇼핑백을 받았다.
“그럼 다른 선물을 준비하도록 할게요. 태령 씨가 용서해줄 때까지.”
“강준 씨.”
“그럼 오늘은 이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준은 정말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그제야 태령은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임원들을 다시 보았다.
“퇴근 시간 아닌가요.”
“아, 급하게 회의할 게 있어서. 10분이면 끝납니다.”
“회사 규율에 어긋나니 빨리 퇴근하도록 해요.”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태령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빨리 눈치를 채고 약속을 지켜준 남편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쌀쌀맞게 대할 필요까지 없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말이 어떻게 들어갈지 모르니 작은 것 하나라도 조심해야 했다. 태령이 결혼했다는 걸 모른다고 해도 임원들 중 몇몇은 조 여사의 사람이었다. 외모 설명만으로도 남편임을 조 여사는 충분히 알아차릴 테니까.
“진짜 갔을까.”
남편은 갔고 무시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보고 싶다. 남편이 산 선물이 뭘지도 궁금했다.
“전화해 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비상계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허리를 휘감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얼마나 놀랐는지 비명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깜빡거리는 시야에 꽉 차오르는 건 남편인 강준이었다.
“……아직 안 갔어요?”
속삭이듯 묻자 그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선물 아직 안 줬잖아요.”
그 미소에 태령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태령 씨한테 받을 것도 있고.”
“무슨…….”
오렌지빛 조명에 물든 남편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허리를 기울인 그가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며 속삭여왔다.
“연기 해줬으니까.”
그런데 맙소사, 타이밍마저 남편의 편이었다.
“스킨십 뇌물 받아야죠.”
더 이상의 움직임을 감지 못한 비상구의 빛이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