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Redial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해가 뜨고 지는 곳에서 살았다. 해는 동산에서 나와 동산으로 들어갔다. 어느 때는 우리 집 너머에서 해가 떴고 또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 우리 집 너머로 해가 졌다. 동네 꼬마들은 얼굴이 시꺼멓게 타서 언덕을 뛰어다니며 골목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좁은 골목들은 꼬마들이 숨기에 적당했다.
가끔 눈알이 새하얗게 변한 할아버지가 허공을 보며 시끄럽다고 소리치면 아이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도망갔다. 바짝 마른 꼬마들은 어른들이 없는 판자촌에서 그렇게 놀았다. 그 꼬마들에게도 약육강식이라는 게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아귀처럼 물어뜯었다.
나는 남을 물어뜯을 재주 같은 건 없었다. 해가 우리 집에서 떠오르면 집에서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기어 나와 뒷산으로 도망갔다. 뒷산에는 나무도 있고 흙바닥도 있었으며 또 다람쥐와 벌레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구경하며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땅거미가 지고 해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나 또한 주린 배를 약수로 채우고 돌아갔다. 가끔 뒷산으로 나가지 않아도 될 때는 시멘트로 포장된 바닥에 석회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내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지 않은 날에는 안방에서 잠을 자거나 티브이를 봤던 거 같다. 그렇지 않으면 집을 나가거나. 엄마는 항상 나를 껴안고 잠들었다가 아버지가 오면 나를 장롱 속에 숨겼다. 나프탈렌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엄마는 비명을 질렀고 아버지가 떠나면 멍이 들어서 우는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뒷집 애는 집에 혼자 남겨져 있다가 나프탈렌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나에게 나프탈렌은 죽음과 비명의 냄새였다.
새 학기에도 나프탈렌 냄새는 내게서 떠나갈 줄을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좀벌레가 생겨서 옷을 새로 사느니 나프탈렌 냄새를 풍기는 게 나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게 무슨 냄새냐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섬유유연제를 쓸 수 없어서 뻣뻣한 와이셔츠를 입었다. 너저분하지는 않았다. 가난한 건 괜찮지만 너저분하게 다니는 건 질색이다. 좋은 옷을 입을 수는 없어도 깔끔하게는 다니고 싶었다. 유일한 내 자존심이었다.
“도하야.”
먼저 옷을 다 갈아입은 지현성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친구였다. 계속 같은 동네에 살던 지현성과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다. 계속 떠돌아다니던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정착을 했다.
여기는 내가 살던 데 중 가장 좋은 곳이었다.
정착할 때도 있었지만 가끔 상황이 안 좋으면 여관에서 하루하루를 전전했다. 일 년도 채 안 되는 도피 생활이었지만 난 그때가 끔찍했다.
고시원에 살았을 때는 조금만 소리를 내도 문을 두드려 대는 옆방 고시생 때문에 숨이 막혔다. 물론 고시원이 공부하기 위해서 오는 곳인 건 나도 알았다. 하지만 그때 난 겨우 여섯 살이었고 5평 남짓한 곳에서 세 식구가 사는 건 거의 죽는 것보다 조금 나은 일이었다.
고시원이 최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장 나빴던 건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다가 비닐하우스에서 몇 주 살았을 때였다. 너무 춥고 괴로웠다. 남의 비닐하우스였기 때문에 새벽이 되면 도망치듯이 비닐하우스를 나왔고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몰래 숨어들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천국 같은 삶이다. 비가 와도 물이 새지 않는 집이 우리 집이라는 걸 알았을 때 엄마와 서로를 붙들고 펑펑 울었다. 드디어 집이 생겼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행복은 잠깐이었다. 아빠는 여기에 이사 온 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행복해서 나왔던 눈물이 고통으로 바뀐 건 금방이었다. 가장 천국 같았던 집이 지옥으로 변했다.
비닐하우스에 살았어도 그때는 서로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었다. 여기가 최악이니까 나아질 거라고. 그러면서 서로를 다독였다. 뭐가 아빠를 변화시켰는지는 모른다. 나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유가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나와 엄마를 때린 건 정당하지 않으니까.
* * *
지현성을 처음 만난 건 아빠에게 얻어맞은 채로 집을 뛰쳐나왔을 때였다. 여름이었고 밖은 햇볕으로 뜨거웠다. 아빠는 술을 마시고 나와 엄마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엄마는 울면서 나를 밖으로 내보냈고 나는 어디로 가지도 못한 채 집 앞에서 울었다. 맨발로 나오느라 부드러운 발바닥에 작은 돌이 박혀서 너무 아팠다. 울면서 집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건 지현성이었다.
“너 뭐야?”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지현성은 나를 보고 멀뚱하게 서 있었다. 까맣게 타서 비쩍 말라 있는 지현성을 보고 저건 뭔데 말을 거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울분과 악에 차 있었으니까.
나는 말없이 씩씩대기만 했다. 어디로 갈 용기도 없으면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대로 사라졌던 지현성은 집에서 크림빵 하나를 가져와 내 입에 물렸다. 나는 얼굴에 멍이 들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봉지를 뜯고 크림빵을 허겁지겁 먹었다. 수치심도 없는 계절이었다.
그 뒤로 지현성과 급격하게 친해졌다. 나는 지현성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현성네 집은 우리 집보다 밑에 있었다. 우리 집은 거의 꼭대기였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지현성과 어머니가 사는 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지현성의 어머니는 산 밑 수산물 시장에서 일했다. 성실하신 분이었지만 빚이 좀 있어서 아직도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분이었다.
지현성과 돌아다니며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명랑하고 생기가 넘치는 분이었다. 항상 나를 가엽게 여겨서 없는 살림에 내게 이런저런 주전부리를 챙겨 주시곤 했다. 그러셨던 분이 병으로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을까.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날 장례식장도 제대로 차릴 돈이 없었던 현성이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장례식장을 지킨 건 나와 현성이 둘이었다. 손님이라고는 달동네 아줌마 두엇이 다였던 그곳에서 밤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화장을 하고 유골함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왔다. 그게 어떤 형태든.
초봄 날씨는 매우 쌀쌀했다. 겨울도 지나고 4월이 되었건만 꽃샘추위 때문에 추워서 발을 동동 굴렀다. 대문을 열쇠로 잠그자 지현성이 내 허리를 끌어안고 냄새를 맡았다.
“저리 가. 좀.”
“비누 냄새 좋다.”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는데도 뭐가 좋은지 씩 웃었다.
“나프탈렌 냄새만 나는데 뭔 비누 냄새야.”
“같은 비누 쓰니까 알지.”
지현성과는 동거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우리 집에서 도망가기 전에도 항상 지현성은 나와 살고 싶어 했다. 어릴 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지만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알 수 있었다. 지현성이 내 옷을 가지고 자위를 하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크게 충격을 먹어서 한동안 지현성과 말을 섞지도 못했다. 더럽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아이들이 끼워 주지 않아서 반에서 겉돌았던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성에 대해서 무지한 편이었다. 반에서 큰 소리로 ‘섹스, 섹스.’거리고 자신의 성기를 자랑하며 음담패설을 하는 반 애들 덕분에 대충은 알았지만 자세히는 몰랐다. 좀 늦돼서 몽정도 아직 시작하지 않은 나이였던 것도 한몫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내 옷을 가지고 자위를 하는 걸 보니 역겹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지현성이 호모라는 생각이 든 건 두 번째였다. 지현성은 자신의 자위가 들킨 뒤로 전전긍긍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자와 사귈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지현성을 피하는 게 내게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지현성은 내 유일한 친구였고 형제였다. 학교에서는 내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 은인이었다. 지현성의 헌신과 희생으로 나는 겨우 살고 있었다. 그런 지현성을 저버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혼란이 더 먼저였던 거 같다.
그때는 같은 반도 아니라 지현성이 내게 더더욱 말을 걸기 힘들었다. 지현성이 집 앞에 서 있을까 봐 새벽같이 집을 나섰고 종이 치면 가장 먼저 학교를 뛰쳐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현성은 꽤나 바른 생활을 유지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쫓아올 도리가 없었다.
‘서도하.’
‘…….’
하필 그날은 내가 조금 늦었던 거 같다. 같은 반 애한테 잡혀서 안내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같은 반 애는 너만 안 냈다고 투덜거리면서 나를 재촉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꼭 지현성이 나를 붙잡을 거 같아서.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고 교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지현성에게 붙잡혔다.
‘나 좀 봐 봐.’
‘난 할 말 없어.’
‘도하야.’
애달프게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했던 건 그동안 지현성이 나를 형처럼 아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현성을 정말 좋아했다. 지현성이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지현성을 피하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몇 번이고 지현성을 찾아가기 위한 충동을 억눌렀을 정도였다. 지현성은 내 유일한 친구였고 엄마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현성을 따라가는 동안 내 손에는 땀이 찼다. 지현성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지현성은 사람들이 없는 골목에 서서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어디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내가 미안해.’
‘…….’
‘잘못했어. 그니까 나 무시하지 마…….’
나는 그 길로 지현성을 용서해 줬다. 그렇지만 지현성과의 사이가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현성은 여전히 나에게 잘해 주었지만 깊은 곳에서 불안이 뇌관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지현성이 하는 짓은 모두 구애에 기반했다. 어린 내게 크림빵을 물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수컷으로서 내 곁에 있고 싶던 것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지현성을 허락했다.
지현성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열한 건 알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나한테 기회가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아.’
나를 껴안고 울면서 말하는 지현성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현성은 자신이 비열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비열한 건 나였다. 너무 외롭고 무서워서 지현성을 이용했다. 도저히 혼자서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냥 나는 말없이 지현성의 등을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지현성이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지현성은 내 아빠에게서 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우리 집에 살게 되었다. 일을 하느라 집에 못 들어올 때가 있었지만 동거는 맞았다. 어쨌든 지현성이 어릴 때부터 내게 크면 같이 살자고 하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호모 커플 입장!”
반에 들어설 때부터 시비였다. 반 애들이 나와 지현성을 두고 호모 커플이라고 부른 지는 꽤 오래되었다. 지현성이 나를 비호하면서 나를 괴롭힐 수 없게 되자 어떻게든 깎아내리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었다. 어릴 때는 비웃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실이 되어서 제대로 반박도 못 하겠다는 게 우스운 지점이었다.
사방을 노려보는 지현성의 어깨를 쳐서 주의를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다. 딱 2년만 참으면 된다. 좋은 대학교에 가면 내게 따라붙은 꼬리표들도 대부분 없어질 것이다. 지현성은 이런 나에게 자신이 대학교 학비를 대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지현성은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자퇴를 고민했던 지현성이 학교를 계속 다니는 건 전적으로 나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거지새끼라는 이유였다. 그게 무슨 상관인지는 몰랐지만 감히 가난한 인간이 부자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학부모 참관을 하면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수군거리는 걸 못 들은 척해야 했다.
‘쟤가 그 달동네…….’
‘이래서 공립이란…….’
달동네에서 계단과 골목을 돌아다니던 아이들과 여기 애들의 차이점은 돈이 있고 없고 뿐이었다. 둘 다 저급했고 둘 다 아귀 같았다. 약한 놈은 귀신같이 눈치챘다. 평범한 얼굴을 한 아이들은 평범한 얼굴로 나를 괴롭혔다.
지현성은 그걸 알고 학교에 계속 나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키가 180㎝가 넘게 될 때까지 계속 그랬다. 처음에는 지현성도 비슷비슷한 덩치였기 때문에 다들 무시하고 계속 괴롭혔지만 지현성은 끝까지 달려들었다. 다들 코피가 줄줄 흐르고 나서야 울면서 자기 엄마를 불렀다.
졸렬한 일이었다. 나와 지현성에게는 불러도 와 줄 엄마가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를 붙들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 흔한 집 전화도 없는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이후로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우리의 결속은 단단했다. 지현성은 나와 언제나 함께하는 미래를 꿈꿨고 엄마가 나를 떠난 이후로 지현성은 나에게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오. 강선의 너도 우리 반?”
“전에 말했지 않았냐?”
“안 말했거든?”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유명한 애였다. 강선의를 모르는 애는 우리 학교에 없었다. 만약 얼굴은 몰라도 분명 이름은 들어 봤을 게 분명했다. 유명 기업 회장의 손자였으니까. 저 애를 본 학부모들은 종종 이 학교에서 자신의 자식들이 같이 다니게 된 건 행운이라고 말했다.
어느 공립 학교에서 대기업 손자와 같이 학교에 다니는 행운을 누릴 거라고 생각할까.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은 자식들을 사립 특수 목적 학교나 외국의 국제 학교로 보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비평준화 명문 학교로 입학시키곤 했으니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나도 이미 강선의를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신입생 대표 선서를 하던 애였다. 멀리서도 강선의의 흰 얼굴이 보였다. 옆자리 여자애들이 수군거렸다.
쟤가 그렇게 잘생겼대.
처음엔 듣고 흘렸던 거 같다. 남자애가 잘생긴 건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만남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그때 나는 체육 시간에 발목을 삐어서 절뚝거리며 양호실에 가고 있었다. 지현성은 다른 반으로 배치되어서 이럴 때 나를 부축해 줄 수 없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괴롭힘은 끈질겨서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면서 체육관에서 나왔다. 체육관과 양호실이 있는 본관은 꽤 떨어져 있었다. 다리를 절면서 계단을 겨우 올랐다. 아직도 본관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였다.
“너 어디 아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지쳐서 헉헉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강선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흰 얼굴과 높은 콧대였다. 아직 설익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이미 어른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조형부터 달랐다. 특별한 얼굴이었다.
옆에서 속삭이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쟤가 그렇게 잘생겼대.’ 그런 말이 도는 게 당연했다. 강선의가 나를 붙들었다.
“양호실까지 부축해 줄까?”
“너…….”
“아, 맞아. 나 1학년 4반 강선의야. 명찰 파란색 보이지? 양호실까지만 데려다줄게.”
낯선 친절함이다. 원래 이런 성격인가? 미소를 짓자 차가워 보이던 인상이 부드러워져 드디어 또래처럼 보였다. 강선의의 손이 내 겨드랑이로 들어왔다. 내가 움츠리자 강선의가 ‘가만히 있어.’라고 속삭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얼떨결에 강선의에게 부축당하며 양호실로 끌려갔다. 힘의 차이가 꽤 있어서 부축이 아니라 거의 실려 가는 수준이었다.
“이름이 서도하? 체육 하다 다쳤어?”
“응.”
“애들 야박하네. 엄청 심한 거 같은데 데려다주지 않고.”
양호실에 간 선생님은 발목이 제대로 삔 거 같으니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강선의는 양호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가 ‘아, 심부름.’이라는 단어를 내뱉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내게 이상한 울렁임을 남기고는.
강선의의 말은 맞았다. 나는 반깁스를 하고 몇 달간 목발을 짚어야 했다. 나중에 강선의를 만나면 감사 인사를 해야지. 괜히 거울을 보고 어색하지 않게 고맙다는 흉내를 냈다.
그다음 강선의를 만난 건 이 주 정도 뒤였다. 복도에서 강선의는 친구들과 떠들며 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걸 보고 나는 목발을 붙든 채 긴장했다. 인사를 해야 하나 싶어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동안 강선의는 제 친구들과 사라졌다. 나를 모르는 눈치였다. 애써 준비한 인사 하나가 사라졌다.
이 정도가 강선의와의 얽힌 전부였다. 심심풀이도 되지 못하는 기억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본 강선의는 뒷자리에 앉아서 다른 애들과 떠들고 있었다. 껄렁하게 책상에 걸터앉은 것과는 다르게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앞의 애가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돌리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강선의의 외모는 여전했다. 조금 더 남자다워진 것 같기도 했다. 흰 얼굴에 옅은 색소의 머리칼이 이마를 덮었다. 잠깐 웃으면 같은 반 남자애들도 가끔 감탄하고는 했다. 분명히 펜대밖에는 쥐어보지 않았을 손에는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저런 애는 나프탈렌 냄새 같은 건 모르겠지.
홀린 듯이 강선의를 훑다가 나는 혼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못된 짓이라도 한 듯이 심장이 쿵쾅거린다. 저렇게 생겼었나? 대표 선서를 했을 때는 잠이 모자라서 반쯤 졸고 있었다. 옆에서 대표가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관심 밖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다행히 지현성은 뒷자리에서 자고 있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수치심을 가지고 교과서를 꺼냈다.
* * *
때때로 강선의를 훔쳐봤다.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계속 그 애의 얼굴을 훔쳤다.
억지로 앞자리에 앉으면 적어도 강선의를 쳐다보지는 않게 되어서 일부러 자리 배정을 할 때 선생님께 앞자리에 앉고 싶다며 부탁을 했다. 병이었다. 왜 이러지. 같은 반이 된 이후로 강선의와 말도 섞지 않았다. 그 후로 강선의와 엮인 거라곤 강선의가 반장 선거에 나왔을 때 손으로 쪽지를 가리고 강선의에게 투표한 일밖에는 없었다.
당선된 강선의가 웃는 모습을 보고 나도 기분이 좋았던 거 같다. 모르겠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강선의와 나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잘 웃고 아이들과 잘 친해졌다. 대부분은 강선의를 좋아했다. 내가 봐도 그럴만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성격도 괜찮았고 자기가 재벌집 자식인 걸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른 애들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그 애가 재벌인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평소에 걸치고 다니는 옷이나 신발들도 이 동네 애들이라면 흔히 살 수 있는 스포츠 브랜드였다.
그 애가 수성이었다면 나는 명왕성이었다. 태양의 빛이 거의 닿지 않는 태양계의 맨 끝 작고 추운 행성. 그 생각을 하고 얼마 뒤에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당하였다는 뉴스를 봤다.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그날도 편의점에서 일하던 때였다. 점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는 걸 싫어했지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적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한적한 곳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다들 근처의 마트로 향했지 당최 편의점엔 들르지 않았다. 이곳을 선택한 건 학교 애들과 만나기 싫어서였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꼭 좋은 대학을 가서 다른 애들을 우습게 여기겠다는 생각은 미래를 향한 약속이었지 현재를 바꿔 주진 못했다. 지현성도 없는 상황에서 학교 애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했다. 문제없이 계속해서 아르바이트하고 싶었다.
봄이라고 하지만 쌀쌀한 날씨에 자꾸만 팔을 쓸어내렸다. 교과서를 펴 놓고 고개만 숙여서 복습했다. 누군가는 구질구질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공부가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정말 구질구질한 건 그냥 이대로 주저앉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살아남아서 아빠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지금 고통스러워도 나중에는 웃을 수 있다는 말을 나는 십자가처럼 모시고 살았다.
딸랑.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교과서에 박고 있던 코를 빼고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어.”
짧은 감탄이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너 우리 반이잖아.”
“…….”
“맞지?”
강선의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몸이 굳었다. 강선의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잘생긴 얼굴과 마주한 순간부터 나는 언어들을 잃어버렸다. 유실된 단어들이 신나게 떨어져 내렸다.
“신기하다.”
강선의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목을 겨우 뺀 자라처럼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반장. 살 거 있으면 사고 말해.”
최대한 무뚝뚝하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에 귀가 뜨거웠다. 나는 한 번도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 가난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도 지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지진, 해일, 폭우, 가뭄. 가난은 내게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다. 운이 나빠서 맞닥뜨린 자연재해였다.
그러나 어쩐지 그날만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냥 그랬다. 강선의에게 가난의 단면이 드러났다는 것이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참기 어려웠다. 어차피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강선의는 부자였다. 그냥 부자도 아니고 재벌 3세. 드라마에나 나올 단어였다. 옆에서 살아 숨 쉰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 글자. 너무 다른 조각들이라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집엔 TV도 없었다. 먹고 살기 바쁜데 송신료를 낼 깜냥이 될 리가 만무했다.
고개를 숙이고 교과서의 글자만 반복해 읽었다. 검은 글자들이 너울거리며 춤췄다. 그림과 함께 자리한 글자들은 내 눈이 닿는 대로 허물어졌다.
빨리 가라……. 빨리 가……. 강선의와 대화하는 걸 꿈꿔 왔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냥 나는 평범하게 인사나 하고 싶었는데.
도대체 왜 이런 욕심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강선의가 이름 그대로 내게 선의 한번 보였을 뿐이었다. 그냥 어쩌다가 불쌍한 애한테 말 걸어서 양호실에 옮겨 준 것뿐인데. 강선의는 기억도 하지 못할 게 뻔했다. 지금도 가만히 음료수 코너를 보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손톱의 거스러미를 떼어 내며 강선의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강선의는 계산대 위로 오렌지 주스 하나와 생수 하나를 올려놨다. 가까이 서자 섬유유연제 향기가 느껴진다. 섬유유연제와 나프탈렌. 누가 봐도 섞일 수 없다.
“너 여기서 일해?”
바코드를 찍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응.”
“와, 여기 우리 동네인데. 여기 오면 너 보는 거야?”
“있으면. 2400원이야. 비닐봉투는?”
퉁명스러웠을 게 분명했다. 강선의는 무안하지도 않는지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무해해 보이는 얼굴이다.
“비닐봉투 필요 없어. 영수증은 버려 줘.”
“응.”
카드를 집어넣고 포스기를 만졌다. 강선의의 시선이 집요하게 나를 쫓았다. 내가 카드를 돌려주자 강선의는 생수만 들었다.
“주스도 가져가야지.”
“너 마셔.”
강선의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반 친구 만나서 주는 선물이야.”
그 말에 부끄러워지는 것은 내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사실 별일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반 친구에게 베푸는 걸 좋아하는 애가 음료수 하나를 사 줬을 뿐이었다. 고작 1700원짜리였다. 내게는 큰돈이었지만 벌써 주식이 몇백 억 어치가 있다는 애한테는 아무것도 아닐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난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맞다. 나는 강선의에게 유난했다. 평소였다면, 강선의만 아니었다면 고맙다고 받아먹었을 음료수였다. 괜한 자존심이 나를 난도질했다. 얼굴이 티가 나게 굳었을 것이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필요 없어.”
내 반응에 당황했는지 강선의가 황급하게 설명했다.
“생수만 사고 나가려고 했는데 너 보여서 산 거야. 나 원래 음료수 잘 안 마셔. 너 안 마시면 버려.”
강선의가 떠밀 듯이 음료수를 내게 안겼다. 차가운 유리병의 감촉이 손에서 느껴졌다. 딱딱한 금속 뚜껑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정말 필요 없는데…….”
거절하는 말투가 이미 누그러졌다. 강선의는 내 망설임을 빠르게 눈치챘다.
“일하면 목마르잖아.”
“…….”
“마셔. 얼른.”
강선의의 눈길에 나는 주스 뚜껑을 땄다. 정말 오랜만에 마셔 보는 주스다. 음료수 같은 건 사치였기 때문에 급식에서 딸려 나오는 작은 컵 음료수가 유일한 내 기쁨이었던 때였다. 작은 것들이 모두 사치였고 보물 같았던 청소년기다. 입에 한 모금 머금자마자 신 내음이 올라온다. 마지못해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
“아냐. 수고해!”
짧은 인사를 남긴 강선의가 생수를 가지고 문밖을 나서려다가 돌아봤다. 아직 나는 오렌지 주스를 불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쥐고 있었다.
“너.”
가만한 시선이다. 옅은 색소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왜?”
“발목은 다 나았네?”
입술이 시원하게 올라간다. 눈이 둥글게 휘어지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내일 봐.”
눈꺼풀이 떨렸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줄 알았는데. 해일이 몰려온다. 무력하다. 거대한 것이 나를 집어삼키고 땅에 내던졌다. 몰아치는 감정의 파도에 나는 깎여 나가는 바위처럼 몸을 떨었다. 내 일부를 내어주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매대에 기대다가 결국 주저앉았다. 차가운 오렌지 주스를 놓을 수 없다.
그날 나는 주스 값을 너무 비싸게 치렀다. 단돈 1700원이 없어서 너무 많이 계산해 주었다. 왜 그랬어. 왜. 나는 떠나 버린 강선의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무시하지. 나를 무시하고 가 버리지. 하필 나를 부축해서, 하필 나를 기억해서,
가난한 내게서 가져갈 게 그렇게 없었니…….
* * *
떠돌아다니는 짐승들은 너무나 가엾다. 사람들은 값싼 동정으로 먹을 걸 챙겨 주지만 책임져 주지는 않는다. 밥을 챙겨 준다고 만나면 반갑다고 울어대는 짐승들을 보면서 어린 왕자를 떠올랐다. 어린 왕자는 장미를 책임져야 한다고 떠났지만 남겨진 여우는 어떻게 됐는지 나는 당최 몰랐다. 독사에게 물려서 죽어 가면서 여우의 생각은 했을까? 그걸 보는 여우의 마음은 짐작이나 했을까?
“도하……. 미술에는 관심 없니?”
아크릴화를 그리는 시간이었다. 학교 재정 지원이 퍽 괜찮은지 비싼 아크릴 물감을 귀한 줄 모르는 애들에게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신나서 물감을 짜댔다. 매끄러운 아크릴 물감 표면을 만지면서 천천히 나눠 준 팔레트에 물감을 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감을 짤 때는 가슴이 떨렸다. 사비로는 살 수 없는 도구다. 내 물건도 아닌데 조금씩 짜내면서 색들을 섞었다. 조금씩 물감이 닳아 갈 때마다 내 마음도 닳아 가는 것 같았다.
내가 그리는 꼴을 보던 미술 선생님이 진지하게 미술 진로에 관해서 물어봤다. 미술 선생님이 보기에도 전망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미술 선생님의 질문에 붓질을 멈추고 얌전하게 눈을 깔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요.”
“어머…….”
젊은 미술 선생은 내 말에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에서 미술 전공을 지향하는 아이들 몇이 내 그림을 훔쳐보았다. 나도 내가 잘 그린다는 건 안다. 어린 시절 석회석으로 아스팔트 바닥에 그림을 그렸을 때부터 내 유일한 취미였다.
어디 가서 그림을 배워 본 적 없지만 어떻게 그려야 할지 그냥 알았다. 스케치북에 서툰 손놀림으로 지현성의 얼굴을 그려 주면 지현성은 꽤 기뻐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스케치북이 떨어졌다 싶으면 내게 선물로 스케치북을 사 주곤 했다. 어쩌면, 우리 집이 부유했다면 나는 미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미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예체능은 너무 사치스러운 과목이었다. 공부만으로도 벅찼다. 가난하면 대학은 꼭 장학금을 타야 하는 때였다.
“괜찮아요.”
“그래.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알았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나를 달래려고 들었다. 매너리즘에 빠져서 대충 대답했다. 돈이 극단적으로 없을 때는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나는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으로 감사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애써 무시하면서 붓을 움직였다. 아크릴 냄새가 나를 어지럽혔다. 캔버스 사이로 강선의가 친구들하고 떠들면서 붓질을 하는 게 보인다. 엉망진창이다. 유일하게 걔가 못하는 일이었다.
역시나 똑같다. 그날 이후로도 가끔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를 했지만 강선의는 모든 반 애들에게 인사를 하는 애였다. 친절하고 잘생긴 반장.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운동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똑똑하기도 해서 오렌지 주스 하나로 값을 제대로 받아 낼 줄 아는 애였다.
오직 나만 빈 오렌지 주스 병을 애지중지하면서 내 방에 숨겨 놨을 뿐이었다. 아무도 모를 걸 아는데 죄책감에 몇 날 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어쩌다가 그 병을 본 지현성이 ‘빈 병을 왜 여기다가 놔.’ 하면서 핀잔을 줬다. 재활용 수거함에 넣어 버리면 되는 유리병인데 멍청하게 미련이 남아서.
집으로 돌아와 스케치북을 펼쳤다. 지현성이 준 스케치북이었다. 도대체 내가 뭐 하는 짓일까. 하지만 이건 그냥 그림일 뿐이다. 나는 어차피 지현성과 계속 같이 살 예정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아빠를 피해서 지현성과 같이 사는 게 내 미래였다.
4B 연필을 커터 칼로 깎아 내면서 내 죄책감도 깎아 냈다. 목재가 얇게 깎아져 나풀나풀 날아간다. 하나, 이건 아무 사심도 없는 일이야. 하나, 강선의가 모델을 해도 될 만큼 잘생겨서일 뿐이고. 하나, 새로운 사람을 그려 보기 위해서…….
“아.”
커터 칼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붉은 핏방울이 올라온다. 입속에 넣자 짭짤한 피의 맛이 혀끝에 닿았다. 나를 질책하는 맛이다.
“정말 바보 같다. 나…….”
한숨 같은 말과 함께 좌식 책상에 몸을 엎드렸다. 아무것도 아닌 친절에 절절매는 내가 이상스럽고 한심해서 그냥 슬펐다. 그렇게 친절이 고팠을까 해서. 정말 걔는 내가 아무것도 아닐 텐데 방구석에서 강선의만 생각했다.
닥친 일이 너무 버거운데. 지금도 이렇게 엎드려 있을 게 아니었다. 일분일초가 내게는 금이었다. 돈을 벌든지 공부를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했다. 가난이 자꾸만 나를 짓누른다. 지금 내가 손가락으로 누르면 죽여 버릴 수 있는 개미들처럼 가난 앞에서 나는 작고 연약했다.
뜯어진 장판 위로 개미 몇 마리만 부산스럽게 내 옆을 지나갔다. 너무나 무력했다.
* * *
강선의가 반 애들과 두루두루 친한 것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반의 양아치들이 강선의 앞에서 내 욕을 할 때마다 강선의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화제를 돌리면서 그 애들과 노는 걸 보면 내 마음은 조금씩 말라 죽어 갔다.
그래. 어차피 안 될 일이었어. 강선의는 순수하게 착한 애는 아니었다. 가끔 욕도 하고 껄렁하게 앉아서 아이들과 투덕거렸다. 착하고 멋있는 강선의는 내 머릿속에만 있는 존재였다. 반장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서 좋아한 건 나였다. 내가 나쁘고 멍청했다.
꿈을 꾸면 강선의가 나왔다. 나를 호모 새끼라고 경멸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구역질이 나왔다.
학교가 끝나고 나는 미술실로 향했다. 어릴 때처럼 머리가 복잡해지자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미술 선생님은 내게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말했다. 물감 몇 개는 써도 괜찮다고. 얄팍한 동정일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싸구려 동정이라도 좋았다. 가진 것이 없는 나는 뭐든 필요했다.
미술실에 앉아서 아직 환한 바깥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 풍경화였다. 여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는 아이들이 공을 들고 뛰고 있었다. 대부분은 집에 갔고 또 일부는 피시방에 갈 것이다. 이 나이 대 남자애들은 다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아르바이트에 가겠지.
한참 그림을 그리는 동안 미술실로 지현성이 찾아왔다. 미술실에 가겠다고 미리 일러 둔 탓이었다. 얌전하게 미술실 문을 닫고 들어온 지현성이 내 옆에 섰다.
“그림 그리다 갈 거야?”
“응.”
“그럼 나 아르바이트 갈게.”
“응. 알았어.”
“어. 하고 빨리 아르바이트 가. 사장 승질 낸다며.”
지현성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대강 대답을 했다. 그림 그리는 나를 지켜보던 지현성이 내 옆에 놓인 다 쓴 스케치북을 들었다.
“이건 다 쓴 스케치북이야? 나 본다?”
“알았어.”
그 말을 하고 나무를 그리다가 순간 몸이 굳었다. 거기에 뭐가 있더라.
맞아. 강선의.
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미 스케치북은 몇 장 뒤로 넘어간 뒤였다. 지현성이 내가 그린 그림을 구경하고 있었다.
“현성아 그거…….”
자리에서 일어나 스케치북을 뺏으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도화지를 넘기던 지현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이거 뭐야.”
숨이 멎었다. 봤구나.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현성의 숨이 거칠어졌다. 커다란 손이 스케치북에서 신경질적으로 그림을 뜯어냈다.
“이거 뭐냐고.”
“…….”
“얠, 왜 그려?”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그냥 그렸다고? 그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건 나도 지현성도 알 수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해? 뭐 잘못했어?”
“…….”
“제발 대답하라고!”
지현성의 소리가 미술실 안을 울렸다. 내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뻔뻔한 표정을 하지 못했다는 건 명백했다. 지현성은 스케치북과 내 태도와 표정에서 모든 것을 순식간에 읽어 냈다.
지현성이 그림을 갈기갈기 찢었다. 내 그림을 마음대로 찢는데도 혼나는 아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현성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조용한 미술실에 종이 찢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강선의의 얼굴이 찢겨 나갈수록 내 마음도 찢겨 나갔다.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인 걸 안다. 차라리 지현성을 좋아했으면 좋았을걸. 지현성을 좋아할걸……. 지현성은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허튼짓하지 마.”
나는 고개를 떨궜다. 지현성의 눈을 더는 바라볼 수 없었다.
“나하고 헤어지고 싶어?”
그리고 네 아빠랑 살래?
지현성은 더 말하지 않았지만 내포한 뜻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현성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엄마가 떠나고 나는 혼자 버틸 수 없었다. 엄마가 사라진 이후로 뿌리 없는 나무같이 자꾸만 쓰러졌다. 쓰러져서 혼자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지현성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지현성이 없어진다면 아무한테도 기댈 수 없었다. 분명 고통과 비명, 나프탈렌 냄새만 가득한 삶일 게 분명했다. 이루어질 수도 없는 마음 때문에 지현성과 헤어질 수는 없다.
“아니…….”
종이를 모두 찢은 지현성은 미술실을 나섰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왜 나는 혼자 살지도 못할까. 바보같이……. 오늘 아르바이트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샜다. 소리 없이 나오던 눈물은 대성통곡으로 바뀌었다. 그냥 모든 게 서러웠다. 내가 아르바이트에 가야 하는 것도, 지현성 없이 살 수 없는 것도, 가난한 것도,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것도 모두 다.
가장 참을 수 없는 일은 강선의에게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겁한 채로 살 것이다. 강선의의 옆에서 언젠가 내게 눈길 한 번 주겠지라는 희망 한 가닥만 가지고. 지현성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도 강선의와 이야기하고 싶은 내가 너무 미웠다. 왜 이러지? 왜 사람은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을까. 그냥 모든 감정을 거세시키고 살고 싶었다. 모든 건 이 불결한 감정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그냥 죽고만 싶었다. 아무도 없는 미술실에서 몸을 끌어안고 울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멍청하게 울었다.
“어……. 미술실 잠가야 하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엉망인 얼굴을 들었다. 멍청한 얼굴의 강선의가 서 있었다.
강선의는 무슨 일인지 그 이후로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지현성에게 약속한 게 있던 터라 강선의의 호감이 부담스러웠다. 갑자기 왜 나에게 말을 거는지 알 수 없었다. 우는 게 그렇게 꼴사나웠나? 괜한 생각이 들어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집에서 거울을 한동안 들여다본 적도 있었다.
어떤 흥미 본위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강선의가 말을 거는 순간부터 그 애에게 대답해 주고 싶었다. 무슨 말이든 무슨 질문이든 상관없었다. 그냥 네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손톱 거스러미를 뜯었다. 대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건데. 지현성을 배신하는 짓은 절대로 안 할 예정이었다. 그럴 배짱도 전무했고. 지현성이 내게 화를 내는 것은 이해했다. 지현성은 나를 위해서 희생했으니까. 나를 위해서 같이 살아 주고 돈을 벌고 있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혼자 살 수 없으니까. 다시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주제 파악을 해야지. 서도하.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미칠 것 같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하고 싶었다. 이브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건 바로 그런 까닭일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제어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오늘 저녁 맛없는데 나가서 먹자.”
“그래? 좋아. 담 넘자.”
책상에 껄렁껄렁 앉아 있는 강선의에게 같은 반 애 하나가 어깨를 툭 쳤다. 그 말에 남자애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야, 나도 가자.”
“오늘 저녁 뭔데?”
“시금치 된장국에 시금치나물?”
“와 미친 시금치를 무슨 국에도 넣고 나물로도 해. 존나 알뜰하네.”
투덜거림과 함께 뭐 먹을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고등학생들이란 그런 존재였다. 오늘 하나 먹을 거에 목숨 거는 종족들. 야자를 하려면 배가 고프니 더 그런 경향이 있었다. 나는 야자를 하지 않았지만 저녁은 꼭 먹고 들어갔다. 요즘은 세상 좋아져서 나 같은 애들에게 급식은 공짜로 지원해 줬다.
“도하야. 너도 갈 거지?”
원래 그랬다는 듯이 강선의가 내 어깨에 팔을 걸었다. 강선의가 팔을 걸친 어깨에 온갖 신경이 쏠렸다. 남고생답지 않은 섬유유연제 향기와 두꺼운 팔. 심장이 빠르게 뛰어오른다. 내가 고개를 들고 강선의를 쳐다보자 부드럽게 웃었다.
“응? 가자.”
강선의의 말대로 가고 싶었다. ‘그래.’라는 이 한 마디를 뱉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렇지만 음식값을 낼 돈이 없었다. 강선의는 자꾸만, 자꾸만 나와 자신의 계급 차를 인식시켰다. 가난하다는 게 비참한 적이 없었는데 자꾸 나를 자기의 바운더리로 끌어들였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강선의가 내 허리를 간질였다.
“빨리 말해. 간다구. 야! 도하가 가면 오늘 내가 쏜다!”
강선의의 말에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내 이름을 불렀다.
“뭐? 서도하. 안 일어나고 뭐 해!”
“갈 거지? 응? 갈 거지?”
“손 떼! 알았어. 알았으니까, 야!”
목소리를 높이면서 강선의를 밀쳤지만, 여전히 웃는 낯이다. 붙어 오는 강선의의 손길에 내 심장이 빠르게 내달렸다. 배덕한 감정이다. 지현성이 이걸 본다면 배신감에 치를 떨 것을 알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아무 걱정 없이 웃는 잘생긴 얼굴에 이미 나 자신을 너무 많이 빼앗긴 까닭이었다.
* * *
“현성아, 현성아……!”
강선의의 얼굴을 그려 주는 걸 현장에서 들키자마자 미술실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다. 지현성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현성!”
내 팔목을 거칠게 잡아끄는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파, 아프다고! 개새끼야!”
욕하고 나서야 지현성은 팔을 놓아주었다. 시선이 나를 불태워 죽일 것처럼 사납다.
“너.”
지현성 머리를 쓸어 올렸다. 화를 못 참고 시근덕거리다가 내뱉는다.
“허튼짓하지 말랬잖아.”
“야.”
쥐 잡듯이 잡을 것 같은 태도에 나도 이를 악물었다. 강선의에게 마음을 품는 게 잘못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강선의와 그 애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을 뿐이었다. 둘이서만 저녁을 먹은 것도 딱 한 번이었다.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면…….
비열한 생각이었지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대거리를 하기 직전, 거친 숨을 내쉬던 지현성이 애원했다.
“내가 이 정도 부탁도 못 해?”
애절한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내게 분노를 쏟아낼 것 같던 지현성이 선택한 건 비굴한 부탁이었다.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은 태도에 나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내가…… 억지를 부려서 사귄 거지만, 그래도 괜찮았잖아. 너도 나 안 싫어하잖아. 걔는 너하고 계속 있어 줄 수 없어. 나는 계속 네 옆에 있을 거고.”
지현성의 사나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이거로는 안 될까?”
싸울 것 같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나는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가라앉았다.
지현성의 말이 맞았다. 반박할 수가 없다.
“미안해.”
“…….”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이야.”
차분한 내 대답에 지현성이 나를 끌어안았다. 지현성의 체온이 나를 덥혔지만 마음 한구석은 아랫목처럼 춥고 싸늘했다.
강선의를 끊어 내는 건 혹독했다. 강선의를 끊어 낸다는 건 그 무리 전체를 끊어 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게 농담 따먹기를 건네던 애들과도 말을 하지 않았으니 걔들이 나를 또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고 두 번째는 화를 냈으며 세 번째는 욕을 했다.
호의적이었던 반 분위기는 싸늘하게 변했다. 직접적인 가해와 욕설을 막아 준 건 강선의가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왜 내가 자신과 말을 안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정말 바보 같은 새끼였다.
난 강선의한테 항상 빚만 지고 있었다.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내 집까지 따라와서 나를 지켜 주고 싶다고 한 날에는 밤새 울었다. 걔한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가난보다 더 극심한 무력감이었다. 자꾸만 받기만 하는 건, 그걸 내 마음으로 지불하는 건 나를 죽게 만드는 일이었다.
한 푼도 갚지 못하고 받기만 하는 내게 질린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빠한테 맞고 난 다음 전화한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지현성이 나를 모욕하는 걸 봤을 때부터?
강선의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지 이틀째였다. 강선의의 친구들 아무도 강선의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강선의가 원래 없던 것처럼 저들끼리 모여서 낄낄댔을 뿐이었다. 다만 나를 보고 뒤에서 욕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반은 떠들썩했다.
차마 걔들한테 물어보지 못하고 교무실로 향했다. 쭈뼛쭈뼛하며 앞에 선 나를 보고 안경을 쓴 선생님이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이니. 도하야.”
“반장……. 왜 결석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놀랍다는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선의가 아무 말 없었니?”
“네.”
불안한 예감이 나를 덮친다.
“선의 전학 갔어. 너하고 꽤 친하고 지내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래. 싸웠어?”
의례적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반으로 달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3층에 있는 교무실에서부터 5층에 있는 교실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물함 앞에서 놀고 있던 남자애 중 하나에게 달려들었다.
“혹시, 혹시 핸드폰 빌려줄 수 있어?”
무슨 생각으로 말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말 한 번 걸지 않았던 애를 다급하게 잡고 빌었다. 같은 반 애는 내 기세에 눌려서 어벙하게 눈을 깜빡였다.
“핸드폰, 핸드폰 좀 빌려줘.”
“어……. 어. 있어. 잠깐만 기다려”
그 애가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이 끔찍하게 길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핸드폰을 열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번호를 눌렀다.
기계음이 들렸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로…….
내가 기억을 잘못한 게 분명했다. 다시 번호를 눌렀다. 하나, 하나, 다시 누르고 맞는지 계속 살폈다. 손이 떨린다. 반장이 내게 말도 없이 떠날 리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겠지. 전화를 걸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야 했다. 그러면 나는 용서할 거고 때때로 강선의에게 전화를 걸면 된다.
걸 수만 있다면 된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고, 다시 받지 않았다. 싸늘한 기계음만 들려왔다. 그 짓거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핸드폰을 빌려준 애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야……. 왜 울어…….”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왜?
정말로 나를 떠난 건가?
강선의와 뭔가 해 보겠다는 건 아니었다. 걔는 나중에 걔만큼이나 예쁜 여자애와 사귈 거였고 나는 부외자로 존재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대학에 가면 어차피 소원해질 것이고 나는 가끔 연락하며 잘 지낸다는 소식이나마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강선의는 그런 기회조차 앗아 갔다. 날 쓰레기 버리듯이 버리고 떠났다. 지현성의 말이 생각난다.
‘쟤가 우리하고 공립 고등학교에서 시시덕거린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갈 거 같아? 걔들은 다른 세상 사람이야. 우린 그냥……. 그냥 재밌었던 거지들이고!’
정말 강선의는 내가 재밌었던 거지들이었을까? 나하고 있던 시간은 뭐지?
“괜찮아?”
어쩐지 걱정스럽다는 얼굴이다. 나를 호모 새끼라고 욕했으면서 우스웠다. 모든 게 우스웠다. 무슨 기대를 했었을까 나는. 주제 파악한다고 했으면서 왜……. 그깟 마음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계속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냈다. 앞이 흐려져서 앞에 있는 애의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미, 미안해. 핸드폰 비, 빌려줘서 고마워.”
“야! 어디 가!”
그대로 학교를 뛰쳐나왔다. 학교에 있을 수 없었다. 강선의가 계속 생각나서, 그 생각에 목이 졸려서 죽을 거만 같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몸이 아팠다. 어디가 아팠는지 모르겠다. 그냥 울면서 아무것도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학교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정말 난 그 정도였을까? 전화번호 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로?
어떻게 한마디도 없이 나를 떠날 수가 있어.
원망 끝에는 애원이었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 줘. 제발……. 몸을 껴안고 벌벌 떨면서 울었다. 나쁜 자식. 나쁜 새끼. 넌 거짓말쟁이야. 같이 있어 준댔으면서.
버려진 약속만 잡고 떠나 간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한 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엄마는 나를 버리고 떠나서 영영 연락하지 않았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더 괴로웠다. 머리를 들 수도 없이 맥이 풀린 것처럼 울었다. 내 몸의 수분을 다 짜내서 수증기로 네게 닿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단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서도하. 일어나서 죽 먹어.”
“흐…….”
지현성이 뭐라고 말했지만 도저히 반응할 수 없었다. 그냥 고통스러웠다. 비닐하우스에 살았어도, 고시원을 전전하고 아빠한테 맞아도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지는 못했다. 오직 삶의 의지만 불태우게 했을 뿐이다. 꼭 잘돼서 복수할 거라고. 아무도 다시는 나를 이렇게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라고.
볼링공에 맞은 핀들처럼 허물어졌다. 처음 맞추기가 어려울 뿐이지 맞추기만 한다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무리들이다. 무너져서 다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너를 다시 보지 못한다면 도대체 왜 살아야만 하지.
이렇게 떠날 거면 왜 나한테 말을 걸었어.
반장한테 하고 싶은 말은 그거뿐이었다. 먼저 함부로 헤집어 놓고는 왜 나를 떠났어……. 개미집 헤집듯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고통스러운 것은 별개였다.
몸이 벌벌 떨리고 어지럽다. 정말로 아무것도 입에 넣을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박고 숨 쉬면서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떠난 자리를 보면 정말 가 버렸다고 실감할 거 같아서. 내가 걔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거 같아서.
“서도하.”
억센 손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강한 힘에 의해서 억지로 일어났다. 지현성이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굴을 가렸다.
“눈물 그쳐.”
“흐, 흐으. 놔.”
눈물 때문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멈춰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놓, 놓고 가면, 알아서 먹, 먹을게에…….”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현성은 떠나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눈물 그치고 이거 먹으라고.”
“알아서 한다고.”
“서도하!”
지현성이 어깨를 잡고 나를 흔들었다.
“이거 놔!”
내가 뿌리치자 매서운 눈이 나를 노려봤다.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잠시 동안 침묵만이 우리 사이를 흘렀다. 겨우 진정한 지현성이 입을 열었다.
“그 새끼 때문에 그래?”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뭐 하긴 나 너하고 사귀는 중이야. 다른 새끼 때문에 네가 이러는 꼴을 봐야 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나는 지금 어떻겠어. 네가 걔 하나 전학 간 거로 이렇게 울고불고하면서 학교도 안 가고 밥도 안 처먹는데 그걸 보는 나는 어떻겠냐고!”
“…….”
“네가 날 그런 쪽으로 안 좋아하는 건 알아. 근데……. 근데……. 난 아무것도 아니야?”
대답하지 못했다. 지현성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나하고 강선의는 아무 사이도 아니고 정작 애인은 지현성이었다. 단지 친구에게 버려진 거로 나는 너무 과민반응하고 있었다. 비참한 얼굴을 한 지현성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해 줄 말이 없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구겨진 이불만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다. 쥐 오줌으로 얼룩덜룩한 이불이 내 눈물로 덧그려졌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거의 먹지도 못해서 몸무게가 5㎏은 빠진 상태였다. 무단결석을 끝내고 학교에 나가자 비쩍 마른 내 얼굴을 본 선생님은 한숨을 쉬었다.
“널 혼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선생님.”
“힘든 일이라도 있니?”
많아요. 선생님. 너무 많아요. 강선의가 전학을 간 뒤로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어요…….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내 입가에서 어물거렸다. 그렇지만 나는 그 모든 단어를 한 마디로 일축할 뿐이었다.
“아니요.”
학교에는 어찌 나갔지만 출석부에는 대차게 빗금을 그은 뒤였다. 지현성은 그날 이후로 더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혼자 버텨야만 했다.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멍하게 수업을 듣다가 아르바이트를 갔다. 시험은 당연히 죽을 쒔다. 놀란 담임과 상담까지 해도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 달을 그렇게 보내다가 박민재가 떠올랐다. 맞다. 다른 애들도 있었지만 박민재와는 유독 친하게 지냈던 거로 기억했다. 나에게는 전화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지만 박민재에게는 알려 줬을 가능성이 컸다.
“저기.”
박민재에게 말을 거는 건 큰 용기가 필요했다. 반에서 크게 아이들을 괴롭히지는 않지만 건들기 어려운 애가 한둘쯤은 있는 법이다. 예전에는 강선의였고 강선의가 사라진 지금 박민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남자애들 사이에서 왕처럼 낄낄대고 있던 박민재는 내 부름에 시선을 올렸다.
“뭐. 왜?”
“혹시 강선의 전화번호 알아?”
박민재의 표정이 슬슬 굳어 갔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뭐야?”
“강선의랑 친구잖아 너.”
“그런데?”
박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협적인 몸짓이었다.
“선의 전화번호 좀 알려 달라고…….”
“너 잠깐 나와 봐.”
강한 힘이 내 팔목을 쥐었다. 다들 놀란 표정으로 박민재에게 끌려 나가는 나를 지켜보았다.
“야! 놔!”
박민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5층 복도에 있는 빈 교실로 데려갔다. 빈 교실에 들어가 문을 닫은 박민재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한번 해 봐.”
무섭다. 안 그래도 키가 큰 박민재는 운동을 해서 힘이 나보다 셌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강선의와 함께 있을 때 장난기 많고 재미있던 친구는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비수처럼 나를 찔렀다.
“친구였잖아. 우리.”
결국 이 말을 꺼냈다. 예전 강선의가 있었을 때 잠깐 친하게 지냈던 걸 운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하!”
그 말을 듣자마자 헛웃음을 친 박민재가 옆에 있는 책상을 찼다.
“씨발 존나 웃기네.”
숨이 가빠 온다. 너무 근접한 폭력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다져 온 폭력이 근처에 있자 장롱 속에 숨어 있던 어린애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박민재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화풀이를 끝내더니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친구 좋지.”
박민재가 나를 비웃었다.
“너 좋을 때만 친구잖아. 안 그래? 걔 전화번호 몰라? 네가 그따위로 구니까 짜증 나서 안 알려 줬나 보네.”
“…….”
“네 성질 지랄 맞잖아. 네 잘난 서방이나 찾아가.”
이어지는 폭언에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보였겠구나. 내가 좋을 때만 선의를 찾는다고……. 박민재가 나간 교실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도 그래서 나를 떠났구나.
내가 좋을 때만 너를 찾아서, 이기적으로 굴어서 정말로 나를 떠났구나. 이제야 나는 현실을 인정했다. 나는 강선의를 잃었다.
* * *
“어디 가?”
하교하고 아르바이트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지현성이었다. 팔짱을 끼고 나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추궁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냐고.”
“아르바이트.”
“편의점 잘렸잖아.”
“새로 구했어.”
숨 막히는 대화였다. 지현성은 내가 강선의와 따로 연락하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작 강선의는 전화번호도 알려 주지 않고 떠났는데.
지현성은 의처증에 걸린 남편처럼 굴었다. 내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정신을 차린 것을 어떤 신호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해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서로 싸우고 소리 지르는 일의 연속이었다. 지현성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가는 것도 못마땅해하고 학교에 가는 것도 싫어했다. 집에만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너 검정고시 보면 안 돼?”
“뭐?”
황당한 말에 되묻자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말했다.
“너 똑똑하잖아. 굳이 학교 가야 되는 거야?”
“학원도 못 다니는데 학교는 가야지. 나 혼자서는 공부 못 해.”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와 지현성은 지난한 싸움을 반복했다. 결국 지긋지긋해진 내가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 이러는데! 너 미쳤어?”
그 말을 끝으로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바닥을 뒹굴고 있고 지현성은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것을 훔치자 붉은 피가 손에 한가득 흘러넘쳤다.
“나는…….”
지현성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널 때리려던 게 아니라…….”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지현성이 탁상 위에 올려놨던 핸드폰을 낚아채고 집을 나왔다. 망설임은 없었다. 티셔츠로 코에서 흐른 피를 닦았다. 얼굴은 그나마 깨끗해졌지만 티셔츠는 피로 엉망이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대로 달동네를 내려가서 시내로 향했다. 정처 없이 밤거리를 헤매는 나를 누군가가 데려갔다.
그 뒤로 별다른 일은 없었다. 나는 이 남자 저 남자를 떠돌아다녔다. 정박하지 못하는 배처럼, 떠돌아다니는 들개처럼. 이 남자는 이래서 나를 버렸고, 저 남자는 이래서 내가 뛰쳐나왔다. 모두 내 아빠였고 아니면 지현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때렸고 누군가는 내가 밖에 나가기면 하면 소리 질렀다.
‘걸레 새끼가 주제를 모르고!’
내가 너무 아파서 섹스를 할 수 없다고 하자 남자가 소리친 말이었다. 걸레. 그 말이 딱 맞았다. 나는 먹을 것과 잘 곳을 구걸하기 위해서 남자와 잤다. 애인이라는 말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나는 남창 새끼가 맞았다.
중졸의 삶은 생각보다 순탄하지 않았다. 간단한 카페 아르바이트에서조차도 나를 잘 쓰려고 하지 않았다. 항상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맞이하던 사장들은 내 학력을 듣자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게 너는 미래에 남자한테 몸이나 굴리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어디서 개소리를 하냐고 욕을 하고는 침을 뱉을 게 분명했다.
육체노동을 해 본 적도 있지만 금방 그만둬야 했다. 나와 같이 사는 남자들은 내가 고된 노동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걸 싫어했다. 자신이 집에 귀가했을 때 마중 나오지 않고 곯아떨어져 있다는 게 이유였다.
몇 번째 애인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여간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은 남자는 내가 굳이 아르바이트하려고 하자 몸싸움 끝에 내가 모은 돈을 모두 가져갔다. 그 와중에 검정고시를 봐서 합격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만나는 남자마다 다 그런 꼴이었다. 이쯤 되면 아마도 내 잘못인 게 분명했다. 여러 남자를 전전하다가 겨우 돈을 모아서 월세를 얻었지만 인생이 무력했다.
만났던 남자 하나가 내 명의로 돈을 빌렸다고 했을 때는 놀랍지도 않았다. 나를 찾아온 어깨들에게 그 말을 듣고는 ‘아 인생이 꼬이면 이렇게 꼬이는구나’ 하고 감탄했을 뿐이었다.
누군지 물어보자 짐작했던 놈이 맞았다. 불안하다면서 주민등록증과 도장을 빼앗아 갔던 남자였다. 나름 친절하게 내게 말한 돈은 이미 이자가 쌓여 있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양심이 있었는지 갚아 나가다가 몇 달 전부터 갚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깨들이 말한 돈은 내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라 실감도 나지 않았다.
갚을 수 없다는 실랑이 끝에 몇 대 얻어맞고는 거실에 드러누웠다. 얼굴에 멍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아르바이트 나갈 생각하는 내가 우스웠을 뿐이었다.
역시나 가게에 나와서 맞은 얼굴을 보고 사장이 한숨을 쉬었다. 해고하겠다는 말은 안 해서 다행이었다. 여기가 아니면 나는 또 갈 곳이 없었다. 냉정해 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점장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쌈박질?”
“아니요…….”
“그래. 뭐, 도하 씨가 그럴 사람 아닌 건 나도 알지. 성실하잖아.”
“폐 안 되게 잘 할게요.”
“그래요. 근데 파스는 붙이고. 서비스하는 사람이 얼굴은 간수해야지? 멍 희미해질 때까지 카운터는 보지 마.”
싫은 말 몇 번으로 무마가 된다면 나쁘지 않았다. 허리를 몇 번 숙이고 커피 머신 앞으로 향했다. 돈을 어떻게 모아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보증금도 겨우 모았는데……. 이젠 숙식이 되는 공장이라도 찾아봐야 할까.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영지와 민석이는 내 얼굴을 보고 많이 놀란 눈치였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열여덟 살 이래로 붕 뜬 느낌을 자꾸만 받는다. 세상에서 유리되어서 꼭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무감각하고 무던해진다. 빚이 생긴 게 실감이 안 나서 그런지, 아니면 쉴 새 없이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하니까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다. 평탄한 세상이었다. 무채색의 화면을 보는 것 같이 감흥 없는 삶이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건너 있는 회사에서 온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문을 입력하고 나머지 입력을 하기 위해 시선을 올렸다.
“아, 저는…….”
아.
숨이 막힐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아니야. 아닐 거야. 내 망상인 게 틀림없어.
강선의가 너무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고 원망스러워서 그 환상을 보는 게 틀림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건 강선의였다. 예전 내가 기억하던 소년의 얼굴과 다르게 완전한 성인 남성의 얼굴이다. 이를 악물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잘살고 있나 보네. 역시 나 같은 건 생각도 않았지. 평생 만나지 않았으면 생각도 안 하고 살았겠지.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 따뜻한 아메리카노 3잔, 카페라떼 3잔 맞으신가요?”
일해야 한다. 강선의를 의식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주문을 받고 아무렇지 않은 척, 강선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심한 표정을 짓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계산하고 떠나는 강선의를 쳐다보지도 않고 영수증을 넘겨준 뒤 다른 주문을 받았다.
“오빠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영지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응, 왜?”
“지금 커스텀 잘못하시고 계세요.”
“어?”
분명히 모카 라떼였는데 바닐라 시럽을 넣고 있었다. 황망한 얼굴로 커피 컵을 바라보자 영지가 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섰다.
“오빤 설거지 해야겠다. 지금 좀 아픈 거 같으니까 커스텀 제가 하고 단순 노동이나 하세요.”
“어, 어……. 진짜 미안해.”
“설거지하고 주부 습진이나 걸리세요. 설거지가 젤 힘든데.”
영지가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만드는 걸 보다가 싱크대로 향했다. 컵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무 생각하지 말자. 나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든 사람을 지금까지 그리워한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종일 설거지를 하다가 나오니 온몸이 무거웠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아렸다. 안 힘든 아르바이트가 어디 있겠냐마는 오늘따라 더 피로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친 몸으로 카페를 나섰을 때 강선의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강선의는 끈질기게도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나온 강선의에게 모르는 사람이라고 발뺌을 하고 도망치고는 겨우 집으로 향했다. 정말 꿈같은 일이다. 지금보다 어릴 때는 강선의가 다시 한번 내게 전화를 할 줄 알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지현성의 핸드폰을 훔쳐 달아났던 건 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한 해가 지날수록 내 희망은 사라지고 무덤같이 추운 외로움에 모든 마음을 죽여 나갔다.
이제 와서 나타나다니.
허망했다. 지금의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어리기라도 했던 거 같다. 사채업자에게 맞아서 생긴 멍 자국도 아직 흐리게 남아 있었다. 비쩍 마른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있는 거울 속에서 나를 노려봤다. 가난과 병에 찌든 남자다.
괴로움과 슬픔밖에 남지 않은 얼굴로 몸을 팔며 지낸 남자였다.
이 생각이 머리에 자리 잡으니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섭다.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나를 잡으러 왔을까.
떠날 때 말이라도 해 주지, 아니면 한 달쯤 뒤에 방문이라도, 아니면 일 년 뒤에라도 언뜻 생각나서 전화라도 해 주지…….
날 보기 전까지 기억도 못 했을 거면서. 붙잡는 걸 뿌리쳤으니 자존심 때문에 다시 안 오겠지.
거기서 강선의를 다시 만날 걸 알았다면 카페에 취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계속, 몇 날 며칠을 그 카페에서만 일했을 것이다. 강선의가 올 때까지 나를 봐 줄 때까지…….
미련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는 머저리인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선의가 보고 싶었으므로.
* * *
비관적인 예상과 다르게 강선의는 다시 카페를 찾았다. 끈질기게 나를 찾아와서 과거의 기억을 건드렸다.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고통과 행복이 혼재한 나날이었다. 꿈같기도 했고 벌을 받는 것 같기도 했다. 더는 오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오늘은 또 오지 않을까 하는 기다림의 나날.
내가 과분한 행복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때 영지는 점점 심각한 얼굴을 했다. 강선의가 상처를 보자며 내 팔을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영지가 오해할 만했다. 난 강선의의 관심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이러다가 다시 떠날 거라는, 재회했다는 행복 속의 진실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강선의 앞에서는 항상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증오와 원망 속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변태 새끼 아니에요?”
강선의가 돌아가고 영지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경멸이 뒤섞인 얼굴에 내가 애써 변명을 했다.
“그런 애 아니야.”
“아니 진짜 미친놈 같은데. 확실해요?”
“응. 회사 어디 다니는지 봤잖아.”
옆에서 민석이가 끼어들었다.
“형, 진짜 저 새끼 좀 이상해요. 멀쩡하게 생겼죠. 저도 알아요. 아니, 존나 잘생겼고 대기업 다니는 거 아는데, 누가 동창을 그렇게…….”
경멸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서렸다. 말을 삼키던 민석이가 결국 아무도 말하지 않던 그 단어를 내뱉었다.
“진짜 호모임.”
진짜 호모 앞에서 다들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어쩐지 찔린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둘이서 심각한 얼굴로 떠들었다.
“진짜, 진짜 호모 같은데.”
“어……. 나 오늘 손 만지는 거 보고 경찰 부를 뻔했잖아. 스토커 아냐? 우리 도하 오빠가 좀 예쁘장하게 생긴 쪽이긴 하지. 근데 그렇다고…….”
내가 고개를 들고 그쪽을 쳐다보자 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내 쪽으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뒷정리하다가 그 둘의 대화에 결국 끼어들었다.
“그러지 마.”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내가, 내가 걔 좋아해.”
“아…….”
“걘 그런 애 아니야. 그냥 내가 불쌍해서 그런 거야.”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내 사정을 대강 알고 있는 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하 오빠. 진짜 미안해요. 민석이 하고 저하고 그냥 걱정돼서 그랬어요. 요즘 세상 흉흉해서 스토커 많잖아요. 게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해해.”
착한 애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가난하고 사실상 고아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나를 깔보기 시작했다.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애들이었다. 강선의를 변명하기 위해서 게이라는 것까지 알려 줬으니 마음이 불편할 게 분명했다. 착한 애들을 민망하게 한 것 같아서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진짜 호모’ 앞에서 강선의가 오해를 받게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가슴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고요한 물처럼 차고 어둡다. 예전에 강선의가 나를 버렸다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다. 식사 한 번으로 끝내자. 내가 먼저 버리는 거다. 더는 강선의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핸드폰을 들고 전화할 용기는 없어서 자판을 눌렀다.
[다음 주 월요일 저녁ㅇ -00:10]
자판을 누르는 손이 벌벌 떨려서 전송을 눌러 버렸다. 심장이 쿵 떨어진다. 황급하게 문자를 이어 보냈다.
[저녁에 시간 돼 6시 –00:12]
[나 서도하. -00:13]
* * *
강선의와 끝내겠다고 결심한 것과 다르게 식사를 하는 내내 나는 들떠 있었다. 식사 따위가 뭐라고 평소에 마시지도 않던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자제할 수 없었다. 감정은 분 단위로 바뀌었다. 강선의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가도 다정한 말씨를 들으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속이 울렁거린다. 내 마음도 모르는 채 애정을 나눠주는 강선의 앞에서 웃고 있는 내가 비참해 죽을 것 같았다. 강선의 앞에선 꼭 열여덟 살이 된 것 같았다. 가난과 비관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걸 믿었던 그 시절. 미래를 몰랐기 때문에 어설프게 사랑했던 그때.
그때처럼 강선의가 다정하게 나를 흠집 낼 걸 너무 잘 알았던 나는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고 강선의는 그대로 호텔 방을 나섰다.
최악의 크리스마스다.
강선의에게 쏟아낸 말들은 부당한 비난이었다. 강선의는 내게 자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적이 없었다. 강선의는 그냥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너무 반가웠을 따름이었고 내가 한 말들은……. 오히려 내 소망에 가까웠다. 조소를 참을 수가 없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하룻밤이라도 구걸하고 싶어서.
순간의 충동으로 잠깐의 추억을 가질 기회마저도 잃어버렸다. 니트를 벗은 그대로 내 무릎 위에 올려진 담요를 바라보았다. 고급 호텔 방 안은 옷을 벗었어도 따뜻했다. 단칸방과는 전혀 다르다.
한참 침대에 멍하게 앉아 있다가 탁상 위의 선물 꾸러미로 눈이 향했다. 조심스럽게 가져와서 포장을 뜯었다. 상자 안에 놓인 핸드크림과 장갑이 보였다.
그 밑으로 쪽지 하나가 있었다.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직도 이거 좋아해?
그리고 쪽지 뒤에는 캐릭터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다. 지금은 팔지도 않는 스티커였다. 고등학교 때 내 필통에 매일 하나씩 붙여 주던.
“나 스티커 안 좋아해. 멍청아…….”
나는 피식피식 웃다가 쪽지를 손안에 꽉 쥐었다. 강선의는 아직도 자기가 주는 스티커를 필통에 붙였던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너무 어렸던 날이었다. 어린 줄도 몰랐지만 정말 어리고 어리석었던 그때. 강선의는 아직도 내게 스티커를 잔뜩 붙여 주고 싶어 했고 나는 여전히 스티커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모르는 척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스물여덟이다. 웃으면서 이야기할 사이가 아니었다. 어린 날의 강선의는 내 전화를 받지도 않았고 전화를 하지도 않았다. 강선의가 보여 준 약간의 동정에 망설이는 것은 내 감정의 잔해 때문일 것이다.
다음 날 아르바이트가 있는 걸 알면서도 밤새 잘 수가 없었다. 뜬눈으로 장갑과 핸드크림을 든 채 호텔 체크아웃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방 안에 있었다.
강선의를 더 볼 수 있을까? 불안감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아침마다 오던 메시지는 더 이상 도착하지 않았으며 카페에도 강선의는 오지 않았다. 매일매일 왔으면서. 내가 오지 말라고 해도 가끔 와서 얼굴이라도 봤으면서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강선의와 같이 왔던 여자만 매번 동료를 바꿔 가면서 커피를 사러 나왔다. 정말로 다시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넋이 나간 듯한 내 모습에 영지하고 민석이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내가 어떤 꼴로 살았는지 안 뒤로 실망한 게 분명했다. 왜 몸을 팔았다고 했고 지현성과 같이 산다고 했을까. 진짜라도 숨겼어야지. 모르는 척 구걸이라도 해 볼걸.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불쌍하지도 않느냐면서. 뒤늦은 후회를 해 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강선의가 연락할 때까지 기계적으로 일만 하고 있었다. 이자를 갚으라는 독촉은 날아오고 월세도 빠듯한데 나는 정신머리 없이 아무 사이도 아닌 옛날 동창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도 카운터 앞에 강선의와 같이 왔던 여자가 서자 나는 며칠간의 기다림을 참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다가, 또 망설이다가 계산을 끝낸 여자를 불렀다.
“저기요.”
여자는 피곤한 얼굴로 돌아봤다.
“네?”
“저…….”
“무슨 일이시죠?”
냉정한 악센트였다. 짜증이 섞인 말에 내가 말을 망설이자 여자가 최대한 신경질을 참으며 이야기했다.
“저 바쁜데 할 말 없으시면 가 볼게요.”
“저, 그. 강선의 씨.”
여자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 대리님? 네.”
“강선의 씨 회사 나왔나요?”
바보 같은 질문이다. 여자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연히 나왔죠. 동창으로 아는데 연락해 보세요.”
“…….”
“바빠서 이만.”
여자의 말이 당연한 걸 아는데도 서러웠다.
전화를 안 받으면 어떡하죠?
강선의는 내 전화를 딱 한 번밖에 받지 않았다. 아빠에게 맞았던 밤, 그 하루 빼고는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 한 번이 내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는 듯.
전화번호를 또 바꾸지 않았을까 불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집에 가면 나는 강선의의 전화번호가 떠 있는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전화할까.
그렇지만 안 받으면 어떡하지.
내가 또 갑자기 싫어진 거면 어떡하지.
희망적인 생각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연락할 거였으면 다시 했을 것이다.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 핸드폰만 부여잡았다.
결국 벨은 울리지 않는다.
저녁에 호프집 아르바이트가 있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열여덟 살로 돌아가 있었다. 강선의는 또 나를 버리고 가 버렸고 학교에 나가지 못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저녁도 거른 채 이불만 뒤집어쓰고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아르바이트를 말도 없이 빠지자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선의에게서만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체념과 인정의 순간은 고통스럽다. 다시 한번 겪는 혹독한 이별이었다. 식사할 기력도 없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가 현관을 뒤흔들었다. 쾅쾅대는 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밖으로 나서니 전에 왔던 어깨들이었다.
“다시 보지?”
“돈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야.”
덩치 큰 남자가 내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럼 이 집에는 어떻게 사냐? 응? 남의 돈을 썼으면 갚아야지.”
나는 말없이 가만히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남자 둘은 내 단칸방을 구둣발로 들어와서 뒤집어 돈 될 만한 걸 찾아냈다. 서랍을 모두 꺼내고 옷가지를 집어 던졌다. 통장을 찾아내는 것을 보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사는 게 엉망진창이다.
지현성이 나를 때렸을 때처럼, 이번에는 삶이 나를 때렸다. 이번에는 코트도 없이 맨발이었고 겨울이라는 것만이 그때와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핸드폰 하나만을 쥔 채로 맨발로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니는 남자를, 사람들은 슬금슬금 피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새해를 맞이하는 상품들이 잔뜩 걸렸다. 화려한 네온사인 사이를 걸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나를 다들 구경했다. 몇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은 것 같다.
멀리서 큰 타워 위로 불꽃이 쏟아진다.
새해맞이 불꽃이다.
행복한 얼굴의 연인들이 걷던 것을 잠깐 멈추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불꽃을 구경한다.
덜덜 떨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도 없다. 그냥 걸을 뿐이다. 발바닥에서는 이미 돌과 유리 조각이 박혀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무작정 걸었다. 이미 내 삶의 목적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걷다 보니 강선의가 다니는 회사가 보였다.
중간중간 불빛이 켜져 있는 건물은 마치 등대 같기도 하다. 외롭게 바다를 헤치는 배를 부르는 등대.
아니면 나방을 부르는 호롱불이거나.
나는 타 죽을 걸 알면서도 가까이 향했다. 혹시라도 강선의가 있을까 싶어서 떠날 수가 없었다. 먼발치에서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다. 십 년 동안 그리워했던 얼굴이다.
경멸로 얼룩진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 그냥 멀리서 보고 싶다.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이다.
근처를 서성이다가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느끼고는 들쥐처럼 쫓겨 공원으로 향했다. 너무 춥다. 무언가가 떨어진다. 눈이었다.
눈이 어깨 위로 쌓이기 시작했다. 올해 첫눈이 상처 난 내 발등 위로 떨어진다. 강선의가 너무 보고 싶었다. 정말 딱 한 번 보고 싶었다. 마지막을 직감한 순간부터 쭉.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안 돼. 안 될 거야. 전화를 받지 않을 거야. 눈물이 자꾸만 나온다. 그래도 보고 싶어. 정말로…….
다시 머릿속에 문신처럼 새겨 버린 전화번호 하나를 상기했다. 자꾸만 번호가 틀린다. 겁먹은 손가락이 자꾸만 다른 숫자를 눌러 댔다.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숨을 골랐다. 통화를 누르기까지는 너무나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겨우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싸늘한 신호음이 귓가에 울린다. 너무 무섭다. 너무 무서워서 죽을 거 같다.
아직도 강선의가 전화를 받지 않던 그때를 기억한다. 전화번호를 또 바꿨으면 어떡하지. 내가 또 싫어진 거면 어떡하지. 공포가 잔잔한 물처럼 차오른다. 눈물이 날 거 같다. 또 안 받으면 난.
제발, 받아라. 제발 받아…….
바람이 분다. 손끝이 공포에 부르트고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던 그때,
신호음이 멈추고.
―안녕. 도하야.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
Redial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