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rth
연말의 사무실은 어수선하다. 연말이라는 이름하에 여러 일들이 들이닥치는 터라 다들 정신이 없으면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연말 결산 전에 있는 크리스마스는 직장인들의 마음까지 들뜨게 하는 법이다. 그 전에 야근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지금, 프로젝트 막바지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대리님. 커피 사러 갈 건데. 드실 건가요?”
옆자리의 미영 씨가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와 퀭한 얼굴로 질문을 했다. 2시 반. 식사를 하고 식곤증에 몸서리칠 시간이다. 나도 버티려고 했지만 중간중간 졸려서 눈을 비비며 겨우겨우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저도 가죠.”
“안 그러셔도 되는데?”
말하다가 삑사리가 났는지 말끝이 올라갔다.
“저도 너무 졸려서요.”
코트 걸치면서 자리에 일어났다. 미영 씨는 파일을 저장하더니 금세 일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문을 받았다. 나도 주문을 받으려고 하자 미영 씨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 됐어요. 제가 할 수 있는데 뭐.”
머쓱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것도 뭐해서 미영 씨가 주문을 받는 동안 책상 정리를 하는 체했다. 약간 퉁명스러운 말투로 들릴 수 있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주변에서 알려 줄 만큼 미영 씨는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일은 잘하지만 여자가 쌀쌀맞고 퉁명스러워서 고분고분한 맛이 없어. 담배를 피우러 갔을 때 부장이 내게 언급한 미영 씨에 대한 평가였다. 같이 담배를 피우며 적당히 웃어넘겼다. 덧붙일 말도 없었다. 나는 부장의 은근한 수작질보다 내가 본 것만 믿는 사람이었다.
사내 카페도 있었지만 잠도 깰 겸 건물 바로 앞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신호등 하나 건너 있는 카페는 우리 부서 사람들이 식후에 운동이라고 말하며 왕래하는 곳이었다. 개인 카페였는데 공간도 꽤 크고 인테리어도 세련됐다. 알바생들을 장기 고용해서인지 커피 맛도 일정한 게 제일 큰 장점이었다.
회전문이 돌아가고 밖의 공기가 코끝에 닿자마자 한기가 들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추위가 찾아오진 않았지만 정신이 들기에는 충분했다.
“아, 아직 따뜻하네요.”
니트에 얇은 코트를 걸친 미영 씨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단발로 자른 지 얼마 안 돼서 성가셔하는 모습이었다.
“다음 주부터 한파가 온대요.”
“이제 패딩 꺼내야겠네요. 이번 겨울은 진짜 춥다던데. 으휴.”
서로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카페로 향했다. 신호등이 바뀌고 주변 회사를 상대하느라 고급스럽게 꾸민 카페가 드러났다.
“어서 오세요.”
모자를 쓴 아르바이트생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카드를 꺼내느라 신경이 지갑에 쏠려 있었다. 잠깐 지갑에 넣었는데 다른 카드하고 섞였는지 보이질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따뜻한 아메리카노 3잔, 카페라떼 3잔……. 대리님은?”
“아, 저는…….”
카드는 지갑도 아니고 뒷주머니에 있었다. 멍청함을 탓하며 카드를 꺼내 들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나이가 나와 같을 게 분명한 아르바이트생은 포스기를 누르다가 순간 행동을 멈췄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먼저 움직인 건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 따뜻한 아메리카노 3잔, 카페라떼 3잔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미영 씨가 답하고는 옆으로 빠졌다. 얼른 계산하라는 눈치였다. 나는 카드를 건네는 동안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을 무례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았다. 아르바이트생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카드를 받아 냈다.
나는 저 얼굴을 안다.
뺨에 흐릿하게 멍 자국이 남아 있는 저 얼굴을 알고 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까지 식곤증에 어지럽던 기분은 날아갔다. 카드를 돌려받은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보다 못한 미영 씨가 내게 눈치를 줬다.
“대리님. 뭐 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뒤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저씨가 나를 노려보며 계산대로 다가갔다. 성질 급한 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걔인가? 정말?
“무슨 일이에요? 아는 사람이에요?”
미영 씨의 질문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네……. 동창이에요.”
동창이라고 말하는 혀끝이 떨린다.
“정말로요? 대리님보다 네댓 살은 어려 보이는데. 진짜 동안이다.”
미영 씨가 뭐라고 더 말을 했지만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정말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 기억 속의 얼굴에게 말이다.
* * *
“야, 강선의. 수업 끝났다. 좀 일어나!”
“아……. 진짜 짜증 나게…….”
뒤에서 내 등을 미친 듯이 두드려 대는 놈은 박민재였다. 공부하다가 늦게 잠들어서 국어인 1교시는 패스하기로 마음먹고 엎드려 잤다. 집에서 과외를 붙여 준 덕에 공립 학교의 수업은 반쯤 자습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도 딱히 내게 이래라저래라 눈치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이며 친한 척을 했으면 했지.
모자란 잠을 채우고 2교시까지 눈을 붙이려고 했는데 1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박민재는 촐싹거리면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왜!”
“저 호모 새끼들 봐.”
박민재가 턱으로 가리킨 사람은 반에서 유명한 애들이었다. 정확히는 교내 우리 학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애들이었다. 호모 새끼. 대부분 낄낄거리면서 그 둘을 그렇게 불렀다. 아니면 거지.
공립이긴 했지만 이 고등학교는 부유한 애들이 주로 오는 학교였다. 학군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어서 오는 애들의 부모는 대부분 의사, 교수, 변호사 등 선망받는 직업들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저 둘은 특이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거지라는 말이 어울리게 정말로 돈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애들을 보고 처음으로 가난의 존재를 알았다. 그러니까 적당히 못사는 서민이 아니라 뼛속 깊이 느껴지는 가난. 그 애들은 기초 수급자였고, 심지어 수학여행도 자기 돈으로 못 가는 애들이었다. 누군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해 보았지만 실제로 그런 애들을 본 건 처음이었다.
가난을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목격하는 건 다른 일이다.
박민재가 가리킨 둘은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낡은 MP3에 연결된 이어폰을 각자 나눠 끼고 있었다. 뭐가 재밌는지 둘이서 속살거린다. 호모라고 소문난 게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이유는 알 만했다. 저 둘은 세상에 자기들밖에 없다는 듯이 굴었다. 초반에 친해져 보려던 애들도 굳건한 방어에 나가떨어지고 뒤에서 씹고 있었다. 아이들의 입 안에서 두 사람은 껌보다 더 너덜너덜하게 굴러다녔다.
“진짜 뻔뻔하다. 연애질을 당당하게 하네. 토할 거 같아.”
“신경 쓰지 마. 뭐, 저런 거 가지고 그러냐.”
내가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을 주자 박민재가 김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 예. 관대하신 선의마마 말씀 받들어야죠.”
“까부냐?”
박민재의 옆구리를 찌르자 박민재가 웃으면서 몸으로 나를 밀어냈다.
“아니? 아닌데? 야, 오늘 끝나고 피시방 가자.”
살살 꾀는 게 악마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다음 교시 교과서를 꺼냈다. 좀 떠들다 보니 잠은 깼다.
“오늘 말고 내일. 오늘 특강 잡혔어.”
“아, 진짜 독해.”
“안 간다는 것도 아닌데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
“흑흑. 오빠 미워.”
우는 척하는 꼴이 가상했다. 달라붙는 박민재를 꾹꾹 누르며 그 애들 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애를.
* * *
회사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책상을 두드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저번 달에 갔을 때만 해도 걔를 못 봤는데. 언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거지?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고 화면 위의 글씨를 읽어도 소용없었다. 일이 진척이 안 되고 계속 그 자리였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장님.”
“왜?”
서류의 같은 페이지를 몇십 분 동안 노려보던 부장이 내 물음에 놀라서 쳐다보았다.
“반차 쓰겠습니다.”
“이 시간에? 어디 아프나?”
“네.”
대답이 저절로 차갑게 나갔다. 지금 나는 다른 생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부장은 처음 보는 내 모습에 당황했는지 버벅거리다가 알겠다고 답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트를 챙기고 자리를 정리했다.
“강 대리님 벌써 가세요?”
미영 씨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수고하세요.”
아버지 회사를 다니며 좋은 점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마음대로 반차를 쓰고 상사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아무도 터치를 못했다. 그렇다고 정말 마음대로 군 적은 없었다. 같은 사무실을 다니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굴려고 노력했다. 이미 내 존재만으로도 그 사람들에게는 민폐겠지만 말이다.
이번이 내 첫 돌발 행동이었다. 사무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도로 아미타불이다. 간이 작은 부장이 내일 내 눈치를 볼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 내 차에 시동을 걸고 카페로 향했다. 어차피 퇴근했는데 두 번 발걸음하기 싫어서였다. 유리창을 통해서 카페 안을 보니 아직 그 애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차를 카페 바로 앞에 주차해 놓고 계속 카페를 바라보았다. 그 애가 일을 끝나고 마칠 때까지. 무슨 생각인지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 휩싸여서 충동적으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자동차에 앉아서 계속 고민을 했다. 내가 왜 걔를 기다리는 거지? 반차까지 쓰면서 나올 이유를 찾느라 분주했다. 그 애가 나올까 봐 핸드폰도 제대로 못 보고 카페의 유리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자동차 핸들을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신경질적으로 옆자리에 있던 생수를 들이켰다.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녁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각자 회사의 회전문에서 밀려 나오고 각자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 애가 나온 것도 그쯤이었다. 눈에 띄게 낡은 점퍼를 입고 사복을 입은 상태로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모자를 깊게 눌러썼지만,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대로 운전석에서 뛰쳐나와 그 애를 잡았다.
“서도하.”
“으악!”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지는 걸 단단히 붙잡았다. 붙잡은 순간 깜짝 놀랐다. 스물여덟 먹은 남자답지 않게 너무 가벼웠다. 겨우겨우 일으켜 세우자 도하가 금세 떨어져 나갔다. 금방 빈손을 쥐었다 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누구…….”
도하의 눈이 점점 커졌다. 나를 알아본 게 분명했다. 내가 멋쩍게 대답했다.
“나야. 강선의.”
도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파리한 입술이었다. 입술에 꽂힌 시선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참 나를 바라보던 도하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람 잘못 보신 거 같아요.”
“도하야.”
“신호 바뀌어서 가 봐야 해요. 죄송합니다.”
내 뒤를 흘낏 본 도하가 뛰쳐나갔다. 초록불이 깜빡이는 건널목을 도하는 단숨에 건넜다. 나 또한 쫓아가려고 했지만 빨간불이 된 건 순간이었다. 바로 차들이 빵빵대면서 나를 위협했다. 쏜살같이 사라지는 도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슴을 놓친 사냥꾼이 된 기분이었다.
다음 날 사무실에 앉아서도 머릿속은 어제 그 일로 가득 차 있었다. 도하가 나를 알아본 게 분명했다. 잠깐 잊고 있던 게 놀라울 만큼 고등학교 때의 도하가 눈앞에 선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내가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을 넣어 놓은 박스를 꺼내 들었다. 애지중지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여러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릴 때 사랑하던 구슬들과 로봇, 공룡 인형 그리고…….
코팅된 종이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뜯어진 도화지는 그 모양 그대로 소중하게 잘려 있었다. 도화지 위에는 연필로 그려진 내 얼굴이 있었다. 누가 봐도 잘 그린 얼굴이다. 내 눈가가 떨렸다.
도화지를 뒤집으니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자가 보인다.
멍청한 강선의
서도하 그림
혀를 깨물고 싶었다. 순식간에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건드려 주기를 기다린 미모사처럼. 도하가 살던 집부터 도하가 틀린 모의고사 수학 문제, 사소한 습관들과 닳아 버린 와이셔츠의 소매까지…….
체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멀미가 나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몇 번 꾹꾹 눌러 봤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스케치북을 본 순간부터 자꾸만 도하 생각이 났다. 어젯밤부터 시작해서 회사를 와서도 말썽이었다. 자꾸 도하의 뺨에 남아 있는 멍 자국이 신경 쓰여서 참을 수 없었다. 아침 회사에 도착하기 전에 약국에 들러 멍에 좋은 연고까지 사 왔다. 연고는 내 가방 속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렇게 오전을 죽이고 나서 내가 할 일은 명료해졌다. 점심을 먹고 식곤증에 다들 졸도해 있을 무렵 내가 일어나서 외쳤다.
“커피 드실 분?”
이번에는 나 혼자 회사를 나왔다. 미영 씨는 식곤증이 아니라 일 때문에 졸도하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내게 빨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대령하라는 재촉을 하고는 다시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는 사람은 우리 사무실에서 나와 미영 씨뿐이었다. 회사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에 몸을 잠깐 떨었다. 주문을 되새기며 카페로 향했다. 주머니 속에는 연고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체온 때문에 이미 따끈하게 데워진 상태였다.
비장한 모습으로 카페의 문을 열었다. 역시나 있다. 도하는 무심한 얼굴로 포스기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당황한 표정이 얼굴에 서렸다가 사라진다. 뒤에서 음료를 만들고 있는 동료를 흘낏 봤다가 이내 마음을 먹곤 나를 바라본다.
“어서 오세요.”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 나는 계산대에 몸을 바싹 붙이고 주문을 읊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랑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
도하는 눈을 내리깔고 포스기를 두드렸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요?”
“그리고…….”
긴장으로 인해서 혀가 바싹 굳었다. 딱딱한 북어 대가리인 양. 용기 없는 머저리같이.
“이거.”
주머니 속에서 체온으로 따끈따끈해진 연고를 내밀었다. 도하의 시선이 연고에 닿았다.
“멍들어서…….”
아, 머저리 같으니. 멍청한 새끼. 속에서 열불이 났다. 멍들어서? 멍들어서가 도대체 뭐야. 회사에서 칭찬받던 PPT 발표 스킬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딴 건 없었는데 회장 아들이라고 고평가를 받은 게 아닌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어제 왜 도망갔는지, 왜 나를 모른 척했는지, 볼에 있는 멍은 왜 생겼는지. 물어볼 말이 너무 많았는데 멍청이같이 내뱉은 말은 멍들어서였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도하는 그런 내 멍청한 말을 듣고 연고를 빤히 바라보았다. 입술이 단단하게 닫혔다. 싸늘한 얼굴이었다.
“손님. 계산은 카드로 하실 건가요?”
“네? 네.”
영수증과 카드를 돌려받았다. 연고는 그대로 계산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것도 가져가세요.”
“…….”
“신경 쓰지 마시고요.”
내가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저 정말 모르세요? 서도하 맞잖아요.”
“몰라요. 가져가세요. 다음 분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싸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본 뒤에 미소를 띠며 뒷사람을 불렀다. 나는 강제로 도하에게서 밀려났다. 허망한 기분이었다.
구질구질한 짓이다. 나는 또 카페 앞에 왔다. 계속 내가 커피 셔틀을 자청하자 다들 약간 불편한 기색이더니 시간이 지나자 한둘씩 먼저 신청을 해 왔다. 도하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카페로 향했다. 건네는 말은 한결같았다.
오늘 날씨가 춥네요. 어젠 잘 들어갔어요?
영락없는 스토커다. 도하 옆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내가 올 때마다 경멸스러운 눈빛을 보였지만 나는 꿋꿋했다. 나로서도 이상할 노릇이다. 어떤 사람에게도 이 정도로 끈질기게 군 적이 없었다. 도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를 대하려고 했다. 며칠이나 흘렀을까. 지긋지긋하게 카페에 찾아갔을 무렵이었다.
“저기요.”
오늘도 비슷비슷한 주문을 끝마치는데 도하가 속삭이듯이 나를 불렀다.
“네?”
반가움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뒤에서 스태프들이 나와 도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만 말 거세요.”
“왜요? 그냥 인사인데. 커피 사면서 안부 물어볼 수는 있는 거잖아요.”
“전 손님 모르니까……. 그냥 가시라고요.”
“여기 앞이 제 회사인데.”
내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빨리 주문을 끝내라는 한국인들의 제스처였다. 뻔뻔한 나와 다르게 수치를 아는 도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도하 아니라는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
“도하야. 나 몰라?”
계산대에 몸을 기대고 도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하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깐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옅게 들릴 뿐이다. 뒤에서 다시 한번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도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알았으니까……. 제발 가.”
작은 목소리였다.
“반장.”
반장. 그 호칭이 들리자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왔다. 도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제발 가라고 나를 재촉했다. 그제야 이 긴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뒤에 있던 여자는 별꼴이라는 듯이 나를 흘겨보고는 카드를 꺼내 들고 빠른 목소리로 주문을 마쳤다.
커피들을 받기 전에 미리 준비해 놓은 메모지를 꺼냈다. 볼펜으로 빠르게 내 전화번호를 휘갈겼다.
“저기요.”
“네?”
아르바이트생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했다. 멀쩡하게 생겨서 남자 스토킹이나 하고 있으니.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메모를 건넸다.
“이거, 도하한테 주세요.”
“도하…… 오빠요?”
“네.”
아르바이트생이 메모지를 받지 않고 망설였다. 아무래도 스토커로 단단히 찍힌 게 분명했다.
“아는 사이 맞아요.”
“아……. 네……. 그럼 누가 드렸다고…….”
메모지를 받으면서도 꺼림칙한 기색은 떨쳐내지 못했는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반장이 줬다고 해 주세요.”
* * *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마지막 날이었다. 다들 비명을 지르면서 학교를 빠져나갔다. 야자도 없이 학교가 일찍 끝나는 몇 안 되는 날이라 다들 신이 나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채점한 시험지를 가방에 밀어 넣은 뒤 반을 빠져나갔다. 어쩌다 보니 반장을 하게 되어서 귀찮은 잔심부름이 많았다. 담임의 과목이 화학이라 과학실에서 뭘 가져오라는 심부름이었다. 뭐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부름이 끝나면 피시방에 갈 예정이었다. 내 친구들은 이미 피시방으로 달려 나간 뒤였다. 배신자 새끼들. 아마 이런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교무실에서 특별실 열쇠 뭉치를 가지고 별관 3층으로 향했다.
학교는 본관, 별관, 체육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특별실들은 모두 별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별관 3층에는 과학실이 두 개, 미술실이 하나였다. 복도를 가로질러서 미술실 옆을 지나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귀신 소리 같기도 한 작은 소리는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분명히 미술실을 잠갔을 텐데.
쓰지 않는 교실들은 모두 자물쇠를 채워 놓고 있었다. 뭐지?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이 자리했다. 남들 같았으면 도망을 갔을 게 뻔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주제에 183㎝에 육박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내게는 미술실 열쇠마저 있었다. 괜한 성실함에 힘입어 미술실을 잠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조용하게 열고 안을 둘러보자 남자애 하나가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어깨가 들썩인다. 울고 있었다. 그걸 보고 배려심은 물론이고 눈치도 없었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 미술실 잠가야 하는데…….”
내뱉자마자 깨달았다. 멍청한 말이다.
내 목소리가 흐느낌밖에 없던 미술실 안을 가로질렀다. 남자애가 고개를 들었다. 서도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섬세하지 못한 남자 고등학생이었지만 그 얼굴은 어쩐지 나까지 서럽게 만들었다. 서도하는 눈물을 애써 훔치려고 노력했다.
“알, 알았어. 갈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가.”
울음을 억지로 멈추려고 노력하던 서도하는 다시 흐느끼다가 결국 통곡을 했다. 눈물이 줄줄 흘러서 흰 얼굴을 더럽혔다. 나도 모르게 도하에게 다가갔다. 도하는 계속해서 울었다. 서럽게, 서러워서 죽어 버릴 것처럼. 얼굴뿐만 아니라 책상도 엉망이었다. 책상 위에는 종이가 갈기갈기 찢어져서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고 도하의 눈물과 콧물이 더해져 한층 난잡했다.
“가라고…….”
죽어 가는 살쾡이처럼 도하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사나운 소리를 들어 본 건 처음이었다. 도하가 가라고 했지만 청개구리 같은 내가 그럴 리 없었다. 도하가 우는 걸 어찌할 줄 모르고 바라보다가 종잇조각을 하나 두 개 맞춰 보았다. 몇 번 맞추지 않아도 뭐가 그려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네?”
생각만 하려 했던 게 소리로 빠져나왔다.
“가!”
도하가 겁먹은 듯이 소리치며 종이를 쓸어 모아 바닥을 내던졌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나는 놀라서 도하 옆에 멍하게 서 있었다. 도하의 어깨가 들썩였다. 책상에 겨우 몸을 기대서 새끼 사슴처럼 몸을 벌벌 떨면서 울어 재꼈다.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던 나는 도하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옆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얼굴을 왜 그렸는지 묻지도 못하고. 그 서러운 울음이 도하의 속으로 갈무리될 때까지. 계속.
* * *
예상했던 대로 도하는 연락하지 않았다. 번호를 준 건 순전히 내가 그러고 싶어서였다. 자기만족에 가까웠다. 도하가 그렇게 강하게 부정을 했지만 계속해서 카페에 찾아간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초조함이 극에 달해서 몇 번이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탕비실에서 종이컵에 커피 믹스를 타 먹으면서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평소에 핸드폰을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사람이 있든 말든 탕비실 과자를 주머니에 꽂아 넣는 것으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횡령을 실행한 미영 씨가 내게 핀잔을 주었다.
“강 대리님. 정신 사나워요.”
“그래요? 죄송해요.”
미영 씨의 말에 핸드폰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팔짱을 낀 미영 씨가 다시 한번 말했다.
“네. 종이컵 완전 작살났네.”
그 말에 종이컵을 보니 불안감에 깨문 자국으로 종이컵 말단이 남아나지 않았다.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종이컵은 정말로 소생할 수 없어 보였다.
“아, 이런…….”
“텀블러 하나 사세요. 이갈이하시는 거 같은데 종이 낭비하지 마시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내가 미영 씨와 똑같이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미영 씨는 제 회사에서 횡령하시는 거 같은데.”
“와, 강 대리님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다니. 완전 대박이다.”
“더 대박은 뭔지 아세요? 내년에 나 과장이야.”
“와……. 낙하산…….”
미영 씨는 머리를 짚고는 비틀거리는 척을 했다. 서로를 노려보다가 동시에 입꼬리를 올렸다.
“담배 타임 갈까요?”
“좋죠.”
옥상에 올라와서 찬 바람 때문에 몸을 떨면서 미영 씨가 투덜거리며 담뱃갑을 꺼냈다.
“진짜 너무한다. 무슨 1년마다 승진을 해.”
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꼬우면 미영 씨도 오너 자식 하세요.”
“진짜 싫다…….”
미영 씨가 눈을 흘기며 담배를 물었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미영 씨에게 불을 가져다 댔다.
“오너 자식이 불붙여 주는 당신은?”
“아, 됐네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짜증 냈으면서 순순히 담배를 문 상태로 라이터에 가져다 댔다. 미영 씨와 친해진 건 1년 전 연말 회식 때부터였다. 알고 보니 동문이었던 미영 씨는 나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선의 씨. 유명했잖아요. 물론 여기서도.’
그 말에 빙그레 웃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 때도, 이 회사에서도 나는 유명인사다.
나보다 빨리 졸업해서 이 기업에 입사한 미영 씨는 당시만 해도 사원인 나와 다르게 대리였다. 지금은 나도 대리고 내년엔 과장이지만.
성격도 잘 맞고 죽도 잘 맞아서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친해졌다. 내가 오너 자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영 씨는 나를 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의 씨라고 불렀는데 실수로 내가 미영 씨의 컵을 하나 깨트려 먹은 이후로 거리감을 주려고 강 대리님이라고 부르는 중이었다.
“줄 잘 탄 거로 이 쓰린 마음 다스릴게요. 과장님.”
“내년이라니까요.”
“진짜 싫어. 불합리하다고.”
미영 씨의 투덜거림을 웃어넘기면서 나 또한 담배를 물었다. 공기가 차다. 코끝이 시렸다. 한참 서로 말없이 담배만 피우다가 미영 씨가 말을 걸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뭐가요?”
“뭐, 기다려요? 계속 불안한 거 같던데.”
“아.”
입김인지 담배 연기인지 모를 게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초조한 티를 너무 낸 모양이긴 했다.
“그냥 뭐.”
“애인? 애인 생겼어요?”
그 말에 차마 답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다.
“진짜로?”
미영 씨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애인은 아니고.”
“대박. 짝사랑?”
나는 답변을 회피했다. 아직 남은 담배를 비벼서 껐다.
“갑시다. 일해야죠.”
“어쩜 좋아. 웬일이야. 강선의 씨가 짝사랑이라니. 짝사랑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거 같은데.”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보니 배알이 꼴렸다.
“가자니까요?”
“아. 그래요! 아이고. 당연하죠. 누구 말씀이신데.”
그러면서도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를 흘낏흘낏 보면서 계속 웃음을 흘리던 미영 씨 때문에 문을 열기 전에 한 소리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기 전에…… 그냥 여기서 다 웃으세요.”
“아하하하하하!”
“와, 승진은 하는데 사랑은 못 하네.”
“그만 좀 하세요…….”
그 이후로 계속 이런 식이었다. 미영 씨는 내 고민 해결을 해 준다며 저녁을 사라고 삼겹살집으로 끌고 들어왔다. 돈 많은 새끼가 돈 좀 쓰라는데, 데려가는 곳이 항상 딱히 비싼 곳은 아니었다. 나름의 배려인 모양이었다.
고기를 뒤집으며 콧노래를 부르던 미영 씨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내게 탕비실에서 훔쳐 온 과자를 쥐여 주었다.
“먹고 힘내세요. 파이팅!”
격려가 아니라 기쁨의 환호성이었다. 과자와 함께 이마를 싸쥐었다. 진짜 눈치는 귀신같아서. 이래서 일을 잘하는 거겠지만.
“근데 진짜 왜요? 그 사람이 어떤데요?”
“그냥 뭐…….”
얼버무리려다가 결국 답했다.
“연락이 없어서요.”
“왜? 왜 없지? 밀당 아닌가?”
“밀당할 것도 없어요. 그냥 제가 들이댄 거라.”
“와우. 선의 씨가요? 강선의 씨 정도면 대한민국 탑급 아닌가? 난 처음에 배우 왜 안 하나 했는데 기업 오너 아들내미래서 인정했잖아요.”
“아, 됐네요.”
낯 뜨거운 칭찬에 얼굴을 찡그렸다.
“나 빈말 안 하는데?”
“근데 연락이 없는걸요.”
미영 씨가 눈을 굴렸다.
“싫어해서인가?”
“그럴까요?”
너무 자신 없게 되묻자 미영 씨가 당황한 듯이 과자를 하나 더 쥐여 주었다.
“아니, 아니요. 선의 씨를 누가 싫어하겠어요…….”
“걔가요…….”
“너무 상심하진 마시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다운되었다. 다들 소주를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데 나와 미영 씨만 조용하게 고기를 씹어 넘길 뿐이었다.
“아니 뭐……. 사람이 취향이 다양할 순 있겠지만……. 그래도 선의 씨는 보편적으로 잘 먹히는 얼굴이 아닌가……. 도대체 누군데요? 어디서 만난 누군데 선의 씨를 찼어요?”
“고등학교 동창이요.”
“와 대박. 우연히 다시 만난 거예요? 그리고 이제 와서 좋아진 거?”
“아뇨. 그때도, 그러니까…….”
갑자기 목이 멘다.
“첫사랑이에요.”
첫사랑이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힘이 들었다. 미영 씨가 감탄을 흘렸다.
“와. 순정이네.”
“딱히.”
순정인가? 미영 씨의 말을 부정하면서도 자신은 없었다. 분명히 나는 도하를 잊고 지냈던 적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내가 고등학교 때 도하를 어떻게 생각했든지 간에 한동안 도하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순정이라는 말이 가슴속에서 돌부리처럼 걸렸다. 자꾸만 덜그럭거린다.
“순정이 따로 있어요? 계속 좋아하면 순정이지.”
미영 씨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소주만 마셨다. 평소에는 달던 술이 너무 썼다. 순정이라는 말은 너무 깨끗했다. 술기운과 함께 수치심이 올라온다.
“근데 왜 그러지? 그때 못되게 굴었나 봐. 선의 씨가.”
“그랬을까요?”
시간이 지나서 약간 내려온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고등학교 때라…….
“그랬던 거 같네요.”
* * *
그날 이후로 나는 눈으로 도하를 계속해서 좇았다. 신경 쓰여서 죽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걔는 왜 울었을까. 그리고 그 그림은 뭐였을까. 왜 다 찢어진 거지.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놀거나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들으면서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꾸만 눈에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항상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는 눈으로 교과서만 보는 그 애에게 말이 걸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관찰하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알아냈다. 와이셔츠는 닳아 있었지만 깨끗했고 쉬는 시간에는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었다. 성적은 꽤 상위권이고 선생님들은 도하를 성실하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도하의 옆에는 그놈이 있었다.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항상 도하의 곁에 붙어 다니던 그놈이 없었다. 도하와 다르게 그놈은 학교를 자기 꼴릴 때만 나와서 잠만 자다가 가곤 했다. 아마 오늘은 그놈이 없는 날인 것 같았다.
도하는 혼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그놈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 도하에게 다가갔다. 도하는 내가 곁에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자신의 근처에 온 방문자의 목적이 자신인 걸 알아채지 못했거나.
도하의 책상 앞 의자에 앉아서 도하가 눈치챌 때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도하가 보고 있는 수학 교과서를 툭툭 쳤다. 10분이라는 짧은 쉬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수신호에 놀란 도하가 나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이어폰을 뺐다.
“야.”
내가 생각해도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갔다.
“나 네 옆에 있다가 담임 심부름 못 해서 혼난 건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시비였다. 그렇지만 당시 나는 도하에게 말을 걸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누가 옆에 있으래?”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대화를 끝낼 순 없었다. 나는 그때 질문하지 못했던 말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아니……. 네가 내 얼굴 그렸잖아.”
도하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파리한 입술이 순간적으로 붉어지기를 반복했다. 홀린 듯이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흰 얼굴에서 검은 먹으로 그려진 듯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너 아니야.”
“맞던데?”
도하가 나를 노려보았다. 항상 얌전한 얼굴이었는데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아니라고.”
“나…… 아니야?”
도하가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자 확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였는데? 그렇지만 도하는 완강했다. 싸늘한 얼굴을 보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래. 반장. 너 아니야. 됐지? 그니까 나 숙제하게 해 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다시 숙제에 몰두했다. 그날은 그렇게 쫓겨났지만 그 후로 나는 도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오늘 숙제는 해 왔냐는 등의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처음엔 귀찮아하던 도하는 곧 내게 꼬박꼬박 답을 해 주기 시작했다. 가끔은 내 어이없는 농담에 깔깔대면서 웃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나는 도하에 대해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도하는 교복 와이셔츠와 체육복을 자주 빨았다. 문제집은 교사용이라 답이 밑에 달려 있었다. 혈액형은 O형이고 가끔 습관적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혼자 깜짝 놀라곤 한다.
“야.”
내 부름에 도하가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얼굴이다.
그 오리같이 삐죽 내민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꼬집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매점 빵에 들어 있던 스티커를 꺼내 도하의 손등에 붙였다.
“뭐 하는 거야?”
비명 같은 소리가 도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스티커.”
내가 씩 웃자 도하가 나를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미친놈아. 이걸 왜 나한테 붙여.”
“너 가지라고.”
“그럼 그냥 주지 이걸 손등에…….”
아깝다는 듯이 손등에 붙은 스티커를 보던 도하가 떼어 냈다. 그러고는 귀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철제 필통에 붙였다.
“너 이 캐릭터 좋아해?”
내 물음에 도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대답은 없지만 충분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도하에게 매일 스티커를 하나씩 선물했다. 나는 매점 빵을 좋아하지 않아서 노난 건 내 친구들이었다.
“야, 요즘 마음씨 곱게 쓴다?”
박민재가 빵을 들고 싱글벙글 웃었다.
“스티커만 줘.”
“엉. 잠만.”
빵을 입 안에 양껏 밀어 넣은 박민재가 웅얼거렸다. 캐릭터 스티커는 그렇게 내 주머니에 하나씩 쌓이고 도하의 철제 필통에도 하나씩 늘어났다. 맛대가리 없는 빵이라 스티커만 빼서 다른 매점 간식을 들고 도하에게 건네는 식이다.
이번에도 나는 타이밍을 재다가 잠깐 심호흡을 하고 도하에게 다가갔다.
“서도하. 쪽지 잘 봤어?”
“물어보지 마. 알아서 뭐 하게.”
내 친근한 물음에 도하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지만 전과는 다르게 벽이 많이 무너진 상태였다.
“아니. 궁금할 수도 있지. 너무 까칠하네.”
내가 상처 입었다는 말투를 하면 도하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도하가 좋았다. 방어적이지만 끝내 모질지는 않다. 남자애들 사이에서 유독 얼굴이 하얗고 예뻤던 도하가 괴롭힘의 표적이 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친한 척을 했던 거 같다.
내가 도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 이후로 괴롭힘이 확실하게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내심 뿌듯하기도 했을 것이다. 우월감이 섞이기도 했고. 정말 유치했다. 어린애라서 다행이었지 꼴불견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다. 도하에게 카페에서 말을 건 이후로 나는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 가슴 한편이 찔려 왔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나도 그랬다. 가진 게 저돌성밖에 없던 나는, 다시 그놈이 학교에 나오기 전까지 유예를 두고 도하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 * *
연락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카페로 찾아갔다. 연락하지 않는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법이다.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선택지를 생각하자 자신감이 조금 사라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금 포기한다면 이대로 끝이었다. 십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었다. 카페로 들어가자 도하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도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서 오세요.”
“왜 연락 안 했어?”
다짜고짜 내 용건부터 말했다. 마침 내 뒤에는 손님이 없었다. 도하도 그걸 깨달았는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피할 수 없었다.
“바빴어. 이거 끝나고 아르바이트 있거든.”
“어떤 거?”
“주문부터 말해 줘. 만들어야지.”
“그럼 대답해 줄 거야?”
“호프집 서빙이야.”
도하의 말을 듣고 그제야 커피를 주문했다. 평소와 비슷한 목록들이었다. 도하는 포스기에 주문을 입력하고 결제한 뒤 다른 스태프에게 말을 했다.
“잠깐만 이야기해도 될까? 손님 오기 전에 돌아올게.”
친근한 말투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친해진 모양이었다. 도하의 말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를 하고 질투한다는 걸 깨닫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스태프가 나를 보고 삐딱하게 물었다.
“커피 좀 오래 걸려도 되죠?”
“네.”
“그럼 말씀 나누세요. 자꾸 이러지 마시고.”
한숨과 함께 스태프의 손이 바빠졌다. 도하는 앞치마를 벗고 계산대 뒤에서 나오더니 나를 테이블로 끌고 갔다. 구석진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서 손이 시린지 창백하고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을 자꾸만 매만졌다. 사시나무처럼 가늘고 안쓰러웠다. 신경이 쓰인다. 도하의 행동 하나하나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연락 왜 안 했어?”
“내가 할 이유라도 있어?”
도하가 이발할 때를 약간 놓친 듯한 머리를 넘겼다. 머리가 덥수룩했는데도 마치 원래 그런 스타일을 원했던 것처럼 어울렸다. 도하는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왜 아는 척했는지도 모르겠어. 반장. 우리가 아는 척할 사이는 아니잖아.”
그 말에 내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였다.
“그냥 아는 척하고 싶었어.”
“…….”
“그러면 안 돼?”
“안 돼.”
단호한 음성이었다.
“왜? 그냥 인사는 할 수 있잖아.”
도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입꼬리가 빈정대듯이 올라간다. 싸늘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무 구질구질하게 살아서 그래. 그냥 좀 모르는 척해 줘. 대기업 다니고 부자인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비렁뱅이거든. 동창 눈에 안 보이고 싶은 내 마음 좀 이해해 줘라. 넌 그때나 지금이나 눈치도 없고 배려도 없네.”
그 말에 숨이 막힌다. 변명을 해 보려고 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맞다. 나는 눈치도 배려도 없는 새끼였다. 지금 도하에게 아는 척하는 것도 정말 가증스러울 정도로. 내게 쏘아붙인 도하가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무언가가 내 눈에 띄었다.
“됐지? 갈게. 이제 아는 척하지 말아 줘.”
“너. 이거 뭐야.”
도하의 팔목을 낚아챘다. 와이셔츠 소매 사이로 시퍼런 멍 자국이 보였다. 도하가 자신의 팔목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거 놔.”
“이거 뭐냐고.”
“아파!”
도하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나와 도하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도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 애는 자꾸만 소매를 내렸다. 자신의 팔목에 있는 멍이 너무나도 부끄러운 눈치였다.
“함부로 나 잡지 마.”
“너 팔목 왜 그래? 왜 멍들었어?”
도하의 가슴이 들썩였다. 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누가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저 손자국 같은 멍의 출처는 뻔했다. 도하는 시선을 돌렸고 나는 수많은 단어를 속으로 삼켰다.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 같다.
“진짜 넌…….”
도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모른 척하는 법을 모르는구나.”
그 말이 가시처럼 찌른다. 과외 없이도 전교권에 들었던 도하는 여전히 영리했다. 도하 앞에서 나는 한심한 새끼다.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나 떨구고 싶지?”
“…….”
“그럼……. 그냥 저녁 한 번만 먹어 줘. 내가 살게.”
손목을 내게서 숨긴 도하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쏘아봤다. 최대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한 번이면 돼?”
아니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그래 버리면 정말로 나는 스토커 신세였다.
“그래.”
“……알았어. 시간 보고 연락할게. 그 전화번호면 되지?”
“응.”
“앞으로 오진 말고.”
“그냥 커피 심부름 오는 거야.”
“다른 사람 보내.”
냉담하게 말한 도하는 더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 커피가 나온 것도 그 순간이었다. 우리 둘을 방해하기 위해 세상이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애처로운 얼굴로 도하를 바라보았지만 그 애는 단호했다.
* * *
“강선의 너 쟤하고 왜 놀아?”
박민재가 내 등을 툭 치며 물었다. 다음 교시에 영어 단어 시험이라 급하게 단어장을 외우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
“요즘 서도하하고 왜 노냐고.”
“그냥. 안 될 이유 있어?”
단어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
“아니. 원래 관심 없었잖아.”
“내 맘이지.”
“아휴. 그래. 잘났어. 근데 어떻게 꼬셨냐? 원래 존나 도도했잖아. 학기 초에 뭔 말을 해도 씹던데.”
계속되는 말에 단어장을 내려놓았다. 박민재가 흥미로운 눈으로 도하와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도하는 오늘도 혼자였다.
“말 거니까 대답하던데? 네가 싸가지 없어서 아니야?”
“와 말하는 꼬라지 봐. 개상처 받았음.”
“반장의 미덕이지.”
어깨를 으쓱하자 박민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도하한테 치대게 된 이후로 반의 분위기는 꽤 누그러졌다. 거기에는 그놈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도 포함되었다. 내가 도하를 억지로 끌고 와서 급식을 먹거나 이동 수업 때 같이 앉기 시작하자 꺼리던 것도 잊어버리고 다들 잘 어울려 놀았다. 이 나이 대 애들은 나를 포함해서 다들 단순했다. 이유 없이 아주 나빠질 수도 있었지만 좋아질 수도 있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와도 같았다.
“야, 서도하.”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다.
“서도하!”
내가 소리치자 도하가 깜짝 놀라서 뒤돌아봤다.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얼굴이 새빨개진다. 내가 씩 웃었다.
“큰 소리로 부르지 마.”
도하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호되게 혼냈다. 개의치 않고 도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럼 작은 소리로 부를 때 대답하든지. 야, 영어 단어 외웠어?”
“외웠어.”
“와. 언제?”
“헐. 서도하 너 단어 다 외웠냐?”
박민재도 다가와서 도하의 옆에 앉았다. 도하가 안절부절못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웃기게도 도하는 박민재를 무서워했다. 허당도 저런 허당이 없는데 말이다. 물론 뒤에서 도하의 소문을 입에 올리며 비웃은 죄가 있기는 했다. 그걸 다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박민재는 도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덕분에 도하가 내게 더 의지했지만. 박민재가 말을 건 순간부터 도하의 몸이 내게 쏠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심 웃었다.
“어.”
“대박. 너 반에서 몇 등 해?”
“2등.”
“와…….”
박민재가 순수하게 감탄을 하며 나를 찔렀다.
“야, 쟤가 네 자리 뺏는 거 아냐?”
“웃기지 마. 내 성적은 돈을 발랐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박민재가 도하에게 달라붙었다.
“야. 쟤가 저런다니까. 서도하. 이래도 내가 더 싸가지 없어? 어? 그래서 대답 안 해 준 거야? 저 새끼 존나 재수 없잖아.”
도하가 바짝 얼어붙었다. 박민재는 머리가 비어서 아무 생각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도하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도하가 구해 달라는 듯이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제야 내가 박민재를 떼어 냈다.
“박민재. 좀 떨어져. 이러니까 네가 미움받지.”
“뭐 진짜?”
우는 척을 하면서 떨어져 나간 박민재는 게시판을 보더니 갑작스럽게 튀어 올랐다.
“악!”
“뭐야. 왜 발작이야!”
박민재의 샤우팅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이미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간 박민재는 비명 같은 말을 남기고 튀어갔다.
“씨발. 나 국사 숙제 안 했어!”
“음. 저런…….”
여전히 굳어 있는 도하를 보고 눈웃음을 쳤다. 국사는 숙제를 안 해 온 가여운 고등학생에게 과중한 깜지를 부여해 주기로 소문이 난 과목이었다. 그 효과는 대단해서 국사의 평균 점수는 다른 과목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
“좀 정신없지? 미안.”
“쟤보고 좀……. 치대지 말라고 해.”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박민재가 닿았던 어깨를 문지르며 도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쟨 왜 저렇게 사람을 만져?”
박민재에게는 딱히 의미 없는 스킨십이었지만 도하는 아니었나 보다.
“하하. 쟤가 좀 거머리 같아. 알았어. 말할게.”
의자에 거꾸로 앉아 기대서 도하의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교과서에는 도하의 얼굴만큼이나 바른 글씨로 필기가 돼 있었다. 나는 더듬더듬 교과서 위의 문자들을 매만졌다. 마치 도하가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더듬으면 만져질 것처럼.
“저기 있잖아.”
속으로 말을 고르고 고르다 나온 말이었다. 마치 얼뜨기 같은 말에 말하고서도 머쓱했다. 도하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지 무심하게 대답했다.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을래?”
“응?”
도하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제도 같이 나가서 먹었잖아. 뭘 그렇게 심각하게 물어봐.”
“아니.”
답답해서 도하의 생각을 정정했다.
“우리 둘만.”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도하가 잠깐 멈칫했다.
“애들이랑 같이 말고. 둘이 가자.”
“난…….”
망설이는 도하의 팔목을 끌고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맛있는 거 사 줄게. 애들 많으면 피곤하단 말야.”
“아, 알았어. 이거 좀 놔.”
도하가 황급하게 손목을 뿌리쳤다. 찌푸려진 미간을 보면서도 나는 허락을 얻어 냈다며 좋다고 웃었다.
도하와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된 그날은 종일 기분이 좋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민재는 ‘저 새끼 오늘 조증이냐.’며 내게 욕을 퍼부었다. 그런 욕설마저 기꺼웠으니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 기쁨의 근원도 모르는 채 도하를 건드리지 못해 안달을 냈으니 도하의 시선에서는 어처구니없었을 것이다.
밥은 특별할 건 없었다. 평소에 애들이랑 갔던 음식점을 둘이서 간 것뿐이었다. 내가 혼자 들떠서 말을 걸면 도하는 답을 해 줬고 음식도 자기처럼 조용하게 먹었다. 한창때의 남자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빠르게 음식을 해치웠고 도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까지 계산하니까 도하는 난색을 보였다.
“밥도 네가 샀는데 아이스크림까지…….”
“얼마 안 해.”
더 거부하기 전에 껍질을 까서 도하에게 내밀며 씩 웃었다.
“나 애들 밥까지 다 계산하는 거 봤잖아.”
도하가 부담될까 봐 같이 밥을 먹으러 가면 같은 무리 애들 것까지 모두 계산을 했는데 지금 와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아, 서도하 부자 친구 둬서 좋겠다.”
도하가 내 말을 듣더니 어깨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누가 달라고 했어?”
“아니, 장난, 장난.”
나는 가볍게 낄낄대면서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이스크림 같은 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달콤한 크림과 초콜릿 코팅 때문에 혀가 아린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시간 남았으니까 좀 앉았다 가자.”
너무 빨리 식사를 마쳐서 아쉬운 나머지 가벼운 제안을 하자 의외로 도하는 순순히 허락했다. 공부하러 가야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행운에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와 도하는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른 저녁,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공원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들과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들, 노인들. 고등학교에 처박혀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풍경이었다. 집에 돈깨나 있다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도하는 벤치에 기댄 채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 딱딱한 얼굴과 다르게 긴장이 풀린 게 여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근데 맨날 무슨 노래 듣는 거야?”
“어, 어?”
내 질문을 예상치 못했는지 도하가 당황한 듯이 말을 더듬었다.
“그냥……. 노래지.”
“가수 누구?”
“유명하긴 한데……. 옛날 사람이야. 넌 모를 수도 있고.”
“누구?”
말을 안 해 주고 자꾸 빙빙 돌리자 더 궁금해졌다. 오히려 그런 태도에 더 관심이 가서 캐묻게 된다. 도하도 자신이 실수한 걸 알았는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 대답해 줬다.
“김광석.”
어디서 들어봤던 사람이다. 잘 몰라서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자 금방 이름이 뜬다.
“옛날 사람이네.”
“그렇다고 했잖아.”
도하의 얼굴이 붉어졌다. 석양 때문인지 부끄러워서인지 모를 만큼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왜 그래? 노래 잘 부르는 사람 같은데?”
“너무 예전 사람이라……. 막 그러잖아. 트로트 들으면 애인데 이상하다고 하고.”
도하가 투덜거렸다. 몇 번 누군가에게 놀림을 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도하 옆에 바투 붙어 앉았다.
“나도 들을래.”
“응?”
“MP3. 주머니에 있잖아.”
몇 번 망설이던 도하가 주머니에서 MP3를 꺼내고 이어폰을 건넸다.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다. 갑자기 도하의 옆에서 같이 노래를 듣던 그놈이 생각난다. 알 수 없는 승리감에 당황해서 이어폰을 황급하게 꽂았다.
“듣고 별로여도 놀리지 마. 솔직히 지금도 후회 중이야.”
“안 그래.”
빠른 대답에 피식 웃은 도하는 노래를 틀었다.
하모니카와 기타 소리가 왼쪽 귀에 울린다. 남자의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무 말 없이 둘이서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들었다. 바싹 긴장한 채로 도하를 훔쳐봤다. 도하는 흰 목을 드러낸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깨진 콘크리트 사이로 난 잡초가 바람에 흔들렸다. 내 손에서는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이 열기를 못 견디고 줄줄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짧고 뾰족해서 아직도 시간에 찔린 것 같다.
노래 한 곡이 끝나고 도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어폰을 가져갔다.
“그냥 이런 노래야.”
“왜? 좋은데.”
거짓말이다. 사실 무슨 노래인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됐어.”
피식 웃은 도하는 아무렇게나 MP3를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야.”
“왜.”
여전히 퉁명스러운 답변이다. 나는 그게 쑥스러워서임을 이제 안다. 나는 서두를 어떻게 떼야 할지 고민했다.
“너 어쩌다가 그림 잘 그린 거야?”
“어쩌다가 잘 그린 거야는 뭐야?”
어이없다는 표정에 나도 내가 질문을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도하에게 할 말은 큰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고 계속 말을 빙빙 돌리게 됐다.
“아니. 넌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니까…….”
“공부는 네가 더 잘하지. 그림은……. 그냥 좋아해서 계속 그리다 보니까 잘 그리게 된 거지 뭐.”
“학원도 안 다니고?”
학원 이야기를 꺼내고 내가 도하의 눈치를 봤다. 도하는 학원을 다닐 형편이 안 되지.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를 도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뭔데 그래?”
“그…….”
시계를 본 도하가 답답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이제 가야 해. 곧 종 친다.”
타이머가 생기자 내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전에 미술실에서 내 얼굴 아니라고 했지.”
미술실에서 도하가 울던 일은 우리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금지된 화제였다.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는 알았다. 도하는 그때 쓰러질 듯이 울었다. 가장 나약했던 순간이다. 아무도 자신의 그런 순간을 언급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도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미간에 주름이 진다. 석양이 드리워진 흰 얼굴. 그것마저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게 뭐?”
말을 꺼내기 전부터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럼 이번엔 나 그려 주면 안 돼?”
* * *
도하가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나도 정신이 없었다. 도하가 일하는 카페에 간 것도 어떻게든 만들어 낸 틈이었다. 다들 크리스마스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는 집념으로 사무실 안에는 마우스 소리와 타자 소리가 가득했다.
일하는 와중에도 도하의 멍이 신경 쓰였다. 물어볼 걸 그랬나? 하지만 도하는 내게 경계심이 심한 상태였다. 여전히 비렁뱅이라니. 그리고 그 멍. 그래. 처음 봤을 때도 얼굴에 멍 자국이 남아 있었지. 가슴이 서늘하다. 들이닥치는 일거리가 도하에 관한 생각을 겨우 밀어냈다.
회사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12시쯤 집에 가서 곯아떨어졌다. 진짜 이렇게 일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나중에 사람을 더 뽑아야겠어. 이건 미친 짓이야.
미영 씨도 내 멱살을 잡고 울었다. ‘나중에 꼭 사람 더 뽑아 주세요. 어차피 선의 씨는 부자잖아. 사람이 나누고 살아야지. 과장 된다고 욕 안 할게요. 회장까지 빨리 해 먹어 주세요.’ 회장은 형이 될 예정인 건 사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거기에 생각이 못 미칠 만큼 힘든 모양이었다. 사실을 정정해 주는 대신 건의하겠다는 말로 짧게 대꾸했다.
집에 돌아가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로 야근 끝이었다. 다행히 아직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다. 크리스마스가 언제지? 다음 주쯤인데. 머리가 굴러가지를 않았다. 씻어야지. 씻어야 하는데…….
정말로 이건 사람 할 짓이 아니다. 내일은 아침 수영을 오랜만에 빼먹어야 할 판이었다. 새벽 6시에 수영을 갔다가 9시까지 출근하곤 했는데 쌓인 피로 때문에 5시에 일어나기 글렀다. 정신이 혼미했다.
윙. 쓰러진 내 옆으로 핸드폰이 작게 울렸다. 가만히 천장만 바라보다가 핸드폰 화면을 켰다.
[다음 주 월요일 저녁ㅇ -00:10]
비몽사몽한 상태로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뭐지?
[저녁에 시간 돼 6시 –00:12]
[나 서도하. -00:13]
도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도하라고? 그 말을 보자마자 달력을 들추어 봤다. 다음 주 월요일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크리스마스 전에 일 끝내기 잘했다. 정말로 최고다. 강선의!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니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찼다. 혹시나 메시지를 안 본 줄 알까 봐 빠르게 문자를 입력했다.
[알았어 어디서 만나면 돼? -00:14]
답장이 올 때까지 초조했다. 핸드폰을 붙들고 기도하듯이 침대 위에 무릎 꿇고 앉았다.
[너희 회사 앞. -00:16]
[그래 도하야 잘 자 -00:16]
핸드폰을 계속 들여다봤지만 그 이후로 답장이 없었다. 아, 어디로 가야 하지. 크리스마스이브라 모든 식당의 예약이 꽉 차 있을 게 뻔했지만 나는 좋은 곳으로 도하를 데려가고 싶었다. 룸이 낫겠지.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바로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약속 때문에 연락드립니다…….]
약속의 날이 되자 퇴근하기 몇 분 전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핸드폰 화면을 켰다 끄면서 시계를 보길 반복했다. 얼마나 정신이 사나웠는지 옆에 있던 미영 씨가 나를 끌고 탕비실로 들어가서 한 소리했다.
“가만히 좀 있으시죠?”
미영 씨의 말을 무시하고 다급하게 내 말부터 했다.
“저 걔 만나요. 오늘.”
“그 첫사랑?”
“네.”
“크리스마스이브에?”
“물론.”
“와. 대박 출세했네.”
입술을 깨물면서 웃음을 참았다. 도하가 나하고 만나 준다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미영 씨 또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분이 선의 씨 싫어하신다면서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였죠.”
약속이 잡히니 자신감이 약간 생겨났다. 밥 한 끼는 미끼였다. 한 번 만나면 그걸로 어떻게든 수천 가지 이유를 만들어서 물고 늘어질 자신이 있었다.
“어쩐지 오늘 좀 빼입고 왔더라.”
“저 오늘 괜찮아요?”
“네. 저는 무슨 패션 위크 온 줄 알았어.”
미영 씨의 과장된 칭찬을 받으면서 다시 얼굴을 점검했다. 최대한 잘생긴 얼굴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도 너무 핸드폰만 보지 마세요. 다들 욕할라.”
“뭐. 그러라고 하죠.”
“아이고.”
미영 씨가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먼저 탕비실 밖으로 나갔다. 가슴이 떨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 건 장갑과 보습 크림이었다. 도하의 마르고 파리한 손을 본 뒤로 정한 일이었다.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손은 터서 엉망이었다. 너무 아파 보였다. 더 좋은 선물을 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경계가 심한데 무조건 비싼 선물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도하를 만나면 나는 다정스럽게 인사를 하고 최대한 도하를 편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슬쩍 안부를 묻고는 어떻게 지냈는지 캐내야지. 그놈하고 아직도 연락하고 지낸다고 하면……. 연락을 끊게 하기는 무리라도 어떻게든 내가 도움을 줄 예정이었다. 어떻게든.
도하는 말만 하면 된다. 내 앞에서 울어도 좋고 화를 내도 좋다. 도움을 청하면 뭐든 해 줄 수 있었다. 부탁하지 않아도 뭐든 해 줄 수 있다. 정말로 어떤 것이든 괜찮다. 그럴 만한 능력을 이제는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무력한 고등학생 같은 게 아니었다. 도하가 울던 날 옆에서 서 있기만 하던.
비싼 선물은 그 뒤에 쥐여 주어도 된다. 집이든 뭐든 상관없다. 졸부 같은 생각이지만 진심이었다.
계획은 머릿속에 잘 들어가 있었다. 이제 도하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나와서 도하를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도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신호등 건너편에 있는 도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숨기려고 해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
“도하야.”
“오랜만이야.”
도하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인사를 건넨다. 약간 길던 머리가 바싹 깎여 있었다. 점퍼에 목도리를 두른 도하는 추워 보였다. 겨울을 버티기에는 바지도 너무 얄팍했다. 귀가 빨개진 것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다가 빨리 차로 가면 된다는 걸 깨닫고는 도하를 잡아끌었다.
“내 차로 가자. 히터 틀어 놨어.”
“그럼 차에 있지 왜 밖에 있었어.”
“너 기다리려고.”
내 말에 도하가 미묘한 얼굴을 했다. 이상한 말을 했나? 머쓱해서 얼굴을 더듬었다. 도하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슬쩍 밀었다.
“그래. 가자. 앞장서.”
미리 시트를 덥혀 놓은 게 유효했는지 도하는 한결 편안한 얼굴을 했다. 좋아. 잘해 보자고. 어떻게든 도하한테 점수를 따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마음을 다잡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런 내 계획은 금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도하의 안부를 묻고 일은 잘했는지, 오늘 피곤하지 않았는지 등을 묻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다가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카페에 가지 못했다는 걸 시작으로 내 근황을 줄줄이 늘어놨을 때부터가 문제였다.
원래 이렇게까지 수다스럽지 않았는데 도하를 옆에 두고 운전을 하니 들뜬 상태였다.
“너 여전히 김광석 좋아해? 노래 틀어 줄까?”
노래를 틀기 위해서 미리 골라 놓았는데 깜빡 잊었다. 도하가 내 차에 탔다는 데 신이 난 탓이었다. 허둥지둥하면서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노래를 틀었다. 도하가 좋아하던 하모니카 소리가 내장 스피커를 타고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까지 꼬박꼬박 답을 해 주던 도하에게서 답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마침 신호에 걸려 차가 섰다.
“도하야?”
도하는 내 부름에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냥 앞을 보고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박이다가 한숨 쉬듯 입술을 약간 벌렸다. 그러곤 시선을 내리깐다.
“이 노래 이제 별로야?”
불안한 마음이 차오른다. 가만히 굳어 있던 도하가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미세하게 움직였다.
“네가 그거 트니까…….”
희미한 미소가 입술에 어린다.
“진짜 안 어울려. 멍청아.”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이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도하가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방금까지 아무 말이나 지껄이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하의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더라? 노래 때문에 그런 건 아닐 테고 무언가 말실수한 게 분명했다.
너무 멍청한 말을 했던 걸까, 아니면 성급하게 판단하고 지껄였을까. 갑작스럽게 후회가 됐다. 도하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속으로 자학을 시작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거지? 평소에 알던 내가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일은 저질러진 이후였다.
“내가 너무 말이 많지?”
침묵을 못 이기고 다시 입을 열었다가 후회했다. 아, 이 말을 할 바에는 정말 입을 다물었어야 했는데. 초조하다. 룸미러로 힐끗 도하의 반응을 살폈다.
아, 웃고 있다. 눈이 반달처럼 휘어진다.
젠장. 미치겠네. 광대를 올리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아니. 괜찮아.”
도하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어설픈 농담을 몇 마디 더 했다. 도하는 다시 내 말을 잘 받아 줬다. 조금 삐걱거렸지만 좋다. 매우 좋았다. 분위기도 풀어졌고 나쁘지 않았다. 운전하면서 뒷좌석에 있는 선물 가방을 흘낏 바라보았다. 이대로 잘 대화하고 밥을 먹은 뒤에 선물만 주면 정말 괜찮은 하루가 될 게 분명했다.
* * *
도하가 미간을 찌푸리고 팔짱을 끼면서 나를 노려봤다. 시간이 갈수록 내 인내심도 동이 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좀 마.”
“노력하고 있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 이래?”
그려 달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도하에게 나를 그려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할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 물어본 것이었다. 도하가 거절해도 상처를 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하는 내 말을 듣고 딱 한 번 눈을 깜빡이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건 나였다.
‘정말 그려 주겠다고?’
‘그래. 뭘 말하나 했네. 종 쳤으니까 이제 가. 수업 시작한다.’
승낙을 들었음에도 얼떨떨해서 꿈인 줄만 알았다. 날 그려 주겠다고? 길고양이를 길들이면 이런 기분인 걸까? 가슴이 들떠서 진정되지 않았다. 실실 웃어 대자 수업을 하고 있던 선생님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영어 단어 시험은 당연히 백 점을 맞았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 분명했다. 들뜬 기분에 수업 내내 도하의 까만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웠다.
“먼저 그려 달라고 한 건 너잖아.”
보충 수업까지 끝난 다음에 야자를 째고 같이 미술실에 앉아 있었다. 미술실 청소를 담당한 애한테 열쇠를 빌려서 대신 잠가 준다고 말한 덕이었다. 커튼을 치고 앉아서 우리는 서로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진짜 가만히 못 있겠어.”
가만히 있으니까 미칠 것 같았다. 내 절절한 고백에 연필을 들고 있던 도하가 한숨을 쉬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 같은 한숨에 변명을 이었다.
“진짜 미치겠다니까.”
“진짜 미치겠는 건 나거든?”
도하가 눈을 치켜떴다. 미안…….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신기할 정도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도하를 바라보는 건 잘할 수 있었다. 도하는 놀라울 정도로 예뻤으니까. 여자같이 예쁘다는 말은 아니었다. 도하는 남자애였고 남자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도하는 속눈썹이 너무 길었다. 도하가 잠깐 눈을 내리깔면 속눈썹이 차양처럼 내려와 그늘을 만들었다. 그걸 홀린 듯이 바라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 외에도 가지런한 눈썹이나 눈썹 사이의 흰 미간, 얇은 입술까지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쌍꺼풀진 눈이 나를 바라보면 뱃속이 술렁거렸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자꾸 몸이 흔들린 것은. 거미줄 그네를 타는 코끼리도 아닌데 몸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그런 내 모습을 도하가 지적하면 자꾸 웃음이 나와서 입술을 깨무느라 고생을 했다.
왜 이렇게 산만한지 모를 일이다.
“책이라도 읽을래? 그냥 공부해 봐.”
머리를 싸매던 도하가 제안했다. 공부? 공부할 때 나라면 그만한 모범생이 없긴 했다. 고액 과외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공부를 안 했다면 전교 등수가 그렇게 높을 수가 없었다. 모의고사도 마찬가지로, 내 성적은 서울 국립대를 노릴 정도로 상위권이었다.
“그럼 내 얼굴은 어떻게 그려? 나 책에 얼굴 거의 박고 공부하는데.”
“아는데…….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그려 볼게.”
도하가 비장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별것도 아닌데 서로 진지했다.
“어떻게 알았어? 나 뒷자리라 못 보지 않나?”
순수한 의문이었다. 나야 도하를 매일 관찰하다시피 하지만 도하가 내게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기 때문에 든 궁금증이었다. 도하는 내 말에 입을 다물더니 우물쭈물 대답했다.
“……화장실 가다가 봤어. 책에 코 박을 거 같기에.”
“진짜?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대수롭지 않게 답하면서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냈다. 뭘 공부하면 좋을까. 집중하는 데에는 수학만큼 좋은 게 없었다. 영어는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을 받아서인지 너무 쉬워서 공부할 게 없었다. 다시 정신이 산만해질 게 뻔했다.
“그럼 나 공부할 테니까 잘 그려 줘. 근데 미안하다. 너 공부할 시간 뺏고.”
“대신 네가 저녁밥 사 줬잖아.”
“그건 그래. 나 밥 셔틀로 써. 돈 많아. 내일도 사 줄 수 있어.”
씩 웃자 도하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도하의 반응에 머쓱해진 나는 전에 풀던 곳이나 펼쳤다. 오답 노트를 볼까 하다가 한 번 본 문제는 재미가 없어서 새로운 문제를 살폈다. 공부에 집중하는 건 금방이었다. 도하가 나를 바라보는 것도 잊은 채 문제를 풀었다.
얼마나 풀었을까. 야자 1교시가 끝났는지 본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종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도하는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연필을 움직이는 손길이 세심했다. 나도 모르게 도하가 그림 그리는 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든 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뭐 해?”
“종 쳤어.”
미술실 시계를 가리켰다. 도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크기를 더 키웠다.
“벌써? 근데 거의 다 그렸어. 조금만 참아 봐.”
“나 지금 봐도 돼?”
“아니. 앉아 있어.”
짐승 조련하듯이 단호한 손짓이었다. 시무룩해져서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도하를 구경했다.
“나 이제 움직여도 돼?”
“응.”
그림에 집중하느라 도하는 내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앉아 있으라고 했지만 이젠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도하에게 다가갔다. 도하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마지막으로 그림을 매만지고 있었다. 도화지에 그려진 내 얼굴은 낯설었다. 거울을 보는 것도 아니고 도하가 보는 내 얼굴이었으니까.
도화지 속의 내 얼굴은 퍽 우수에 차 보였다. 가만히 공부하는 모습이어서 그런지 평소 웃고 다니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점심시간에 축구나 하려고 튀어 나가는 남고생인데 도하의 그림 속 나는 성실한 모범생 같았다.
“잘 그렸다.”
“야!”
내가 감탄을 하자 삐끗했는지 연필이 튕겨 나왔다. 도하가 나를 퍽퍽 쳤다.
“소리 좀 내고 오라고!”
“아니 오지 말라고 하니까…….”
“소리! 내고! 와! 이거 어떻게 할 거야?”
그림 속 뺨에 난 긁힌 자국을 도하가 가리켰다.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몰라도 연필로 음영을 만들어 그린 그림이라 다시 그리는 데 짜증이 날 만했다.
“그냥 줘. 진짜 고마워.”
“아니야. 밥값은 해야지.”
도하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지우개를 들려는 걸 내가 말렸다.
“밥값보다 더한 거 같은데.”
헤실헤실 웃으면서 스케치북을 들어 올리자 도하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아? 이거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고…….”
“진짜 괜찮아. 너 미대 가도 되겠다. 나 아는 애들은 배워서 이 정도 그리던데. 나 이거 찢어서 줘. 코팅해서 보관해야지. 네 이름도 써 줘.”
“내 이름은 왜?”
“누가 그려 줬는지 기억해야지.”
스케치북을 뒤집어서 도하에게 들이밀었다. 도하는 꺼려 하는 기색이었으나 내가 끈질기게 스케치북을 들이밀자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
멍청한 강선의
서도하 그림
그걸 보고도 나는 좋다고 웃었다. 정말로 좋았기 때문이었다. 강제로 뜯어내긴 했지만 도하가 준 첫 선물이었다. 도하는 스케치북에서 도화지를 살살 뜯어냈다. 잘 뜯어지던 종이는 마지막에 가서 귀퉁이가 찢어졌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자조적인 말에 놀라서 도화지를 뺏어 들었다.
“왜 그래? 잘 그려 놓고서.”
“그냥. 마지막엔 볼에 연필 자국도 남고, 도화지도 뜯어지고.”
“원래 핸드메이드가 그런 거지 뭐.”
우울한 기색인 도하를 어르면서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어두운 얼굴의 도하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진짜 바보 같다.”
“나?”
도하가 앉은 의자 옆에 쭈그려 앉아서 도하를 올려다봤다. 불쌍한 척을 있는 대로 하니 도하의 입에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어린아이가 색칠한 그림처럼.
“그래. 멍청아. 넌 뭐가 좋냐?”
“네가 선물 줬잖아.”
웃으면서 도하의 손등을 건드렸다. 손은 부르터 있었다.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내 손과는 달랐다. 나도 모르게 손을 더듬었다. 도하가 손을 숨기려고 하자 내가 손을 잡아끌었다.
“넌 징그럽게 남자 손을 왜 만져.”
질색하면서 쳐내자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남자 손을 왜 만지지?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서 대꾸도 못 하고 도하의 무릎에 손을 올리고 침묵했다. 조용한 미술실의 바닥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왜 자꾸 도하에게 말을 걸고 싶고, 놀고 싶고, 웃는 얼굴을 보고 싶고 또 손을 만지고 싶을까.
“모르겠어. 그냥 그러고 싶어서. 불쾌했으면 미안.”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사과했다. 도하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가방을 챙겼다.
“이제 가야겠다. 아르바이트 있어서.”
“아. 맞아. 너 아르바이트하지?”
“응. 그리고 집에서 걱정하니까…….”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는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도하도 말해 줄 기색은 아니었다.
“나 가방 정리하고 같이 나가자. 별관 무섭잖아.”
“그래.”
도하가 책상 위에 걸터앉아 나를 기다리고 나는 천천히 가방을 정리했다. 도화지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넣었다. 무슨 예감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냥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염원은 곧바로 깨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문이 열렸다.
“서도하 여기서 뭐 해.”
* * *
“나 안 들어갈래.”
도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빨리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미 꽉 찬 스케줄을 비집고 예약한 곳이었다. 음식은 물론 분위기도 괜찮은 곳이었다.
“왜 그래?”
“…….”
“뭐, 마음에 안 들어? 못 먹는 거라도 있어?”
눈높이를 맞추면서 도하에게 질문했지만 도하는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여기 정말 괜찮아. 와 봤던 데야. 음식 맛있어.”
계속 침묵을 지키던 도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내 꼴을 봐.”
“네가 왜?”
도하의 말에 도하를 훑어봤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오늘도 잘생기고 예쁘고……. 온갖 찬사를 다 붙일 수 있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너무 추워 보인다는 것? 도하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가장 문제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도하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 낡은 점퍼에 청바지야. 여기 이러고 와도 돼?”
“응. 돼. 왜 안 돼?”
그런 고민일 줄은 몰랐다. 정말로 괜찮은데. 식당이 사람들이 밥 먹으러 오는 곳이지 식당에서 어떤 옷을 입을 필요라도 있나? 평소하고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오늘은 특히나 차려입은 남녀가 많다는 점이었다.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지금도 도하와 내가 서 있는 통로를 지나 잘 차려입은 커플들이 지나갔다.
“너 오늘 괜찮아. 정말인데. 옷, 옷이 걸리면 사 줄까?”
“네가 옷을 왜 사 줘.”
도하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혀를 깨물고 싶었다. 씨발. 그러게 내가 옷을 사 준다는 말이 왜 나왔을까. 평소에 잘 안 하던 온갖 욕이 목구멍에 걸렸다. 진짜. 미치겠다. 괜찮았다고 생각했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진짜 죽고 싶다.
“아니야. 실언했어. 미안해. 다른 데로 가자.”
룸까지 예약했지만 도하가 싫다는 데 더 강요할 수는 없었다. 노쇼 비용은 드리면 될 일이었다. 애써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가 좋아? 너 좋아하는 데로 가자.”
도하는 움직이지 않고 레스토랑 입구를 계속 바라보며 손을 매만졌다. 마른 손가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처럼 서로 얽혔다.
“예약한 거지?”
“그러긴 했는데……. 괜찮아. 너 불편한데 가고 싶지 않아.”
“아냐. 내가 괜한 고집 부렸네. 이런 데는 처음이라 놀라서 그랬어.”
그렇게 말하는 도하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먼저 입구로 향하던 도하는 내가 따라가지 않고 뒤에 서 있자 나를 재촉했다.
“뭐해? 네가 안내해야지.”
그저 그냥.
“그래. 들어가자.”
내가 모든 걸 망친 게 아닌가 싶어서.
식당으로 들어가자 지배인분께서 직접 나와 인사를 해 주셨다. 종종 뵙는 분이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룸으로 향했다. 그동안 최대한 내 몸으로 도하를 가렸다. 내 동행인에게 무례한 시선을 보내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도하가 불편해할 것 같았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도하는 자리에 앉아서 점퍼를 벗었다. 니트 사이로 드러나는 목과 팔목이 너무 가늘었다. 팔목의 멍은 거의 다 나았는지 짙은 자국만 좀 남아 있었다.
“어떤 거 먹을래? 여기 생선도 맛있고 소도 맛있어.”
“네가 알아서 해 줘.”
도하를 훔쳐보다가 메뉴판을 확인하고 사람을 불렀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이미 메뉴는 선정이 되어 있었다. 맛있는 거 먹여서 보내야지. 비쩍 말라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자주 만나서 이렇게 밥 먹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계속 들었다. 도하가 나를 좀 더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지냈어?”
어떻게 지냈냐는 말을 묻는 것도 어려웠다. 내가 없던 시간을 낱낱이 알고 싶었지만 도하의 태도는 미지근했다.
“그냥 뭐. 아르바이트하고…….”
“지금은 뭐해? 혹시 학교 쉬고 있어? 아니면 졸업?”
보통 군대를 갔다 오고 늦장을 부리면 아직 학교를 다닐 나이였다. 도하가 아르바이트하는 걸 보면 쉬거나 졸업 중 하나인데 아무래도 집안 사정상 휴학에 가까워 보였다.
“아니.”
“…….”
“대학은 안 갔어.”
대수롭지 않은 말에 숨이 막혔다. 도하는 공부를 잘했다. 모의고사는 내신보다 조금 모자랐지만 충분히 서울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만한 성적이었다. 사실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도하는 나보다 훨씬 잘했을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좋은 애였고 똑똑했으니까.
도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학에 대한 화제를 이었다.
“너는 원하던 대학 갔지?”
“응…….”
“잘됐네.”
도하가 고개를 기울이고 슬쩍 웃었다. 긴 속눈썹이 웃음을 그늘지게 했다.
“그럴 줄 알았어.”
모르겠다. 도하에게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차에선 아무렇게나 나오던 말이 이번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위로도 할 수 없고 그저 가슴이 응어리졌다.
왜 대학 이야기를 꺼냈을까. 내가 도하의 역린을 건드린 것만 같았다. 도하는 괜찮은 얼굴이었지만 나는 죄책감에 죽고 싶었다.
“차 따라 줄게.”
주전자를 들어서 차를 따라 건넸다. 도하가 창백한 손으로 잔을 잡았다.
“고마워.”
“마셔. 춥다.”
따뜻한 국화차가 잔에 차올랐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꿎은 차만 계속 비웠다. 침묵을 깨운 것은 종업원이었다. 음식이 들어오면서 나와 도하는 다시 조금씩 이야기를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엔 뭐 해?”
“내일 저녁에 아르바이트 있어. 다들 쉬어서 대타로 나가.”
“너는 안 쉬어? 그날 만날 사람 없어?”
“없어. 그냥 뭘 해야 머리가 안 복잡해서.”
도하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되물었다.
“넌?”
“나? 나 뭐?”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났다. 그 모습에 도하는 웃지 않았다.
“넌 누구 만나는 사람 없어?”
“어? 없지. 당연히.”
도하의 질문에 황급하게 답했다.
“아무도 없어. 나 인기 없거든. 하하!”
“그래.”
애써 웃어 보였지만 전혀 들어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인기 없다는 소리는 안 해야 했었나. 어색하게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술 시킬까? 술 마실래?”
“시켜.”
한 번도 도하가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이 기회였다. 언제 도하하고 술을 마셔 보겠는가. 술을 시키고 도하에게 따라 주었다. 도하는 한 모금 입에 대나 싶더니 말았다.
“그래서 밥은 왜 먹자고 한 거야?”
“그냥. 근황도 알고 싶고.”
식탁 밑에서 두 손을 붙들었다. 이번엔 말실수하지 말자. 나는 도하의 눈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
“네가 보고 싶었어.”
“아, 그래.”
도하의 반응은 바깥의 바람처럼 차가웠다. 그에 굴하지 않고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 보고 난 다음에……. 집에서 네가 그려 준 그림 찾았어. 나 그려 줬었는데 기억나? 분가했는데 가지고 나왔거든. 네 글씨랑 보고 나니까. 무작정 네가 보고 싶더라. 그래서 그랬어.”
말실수하지 말자고 방금 다짐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명히 도하가 보기에도 붉게 달아올랐을 게 분명했다.
“알았어. 더 안 말해도 돼.”
도하가 살짝 웃었다. 도하는 오늘따라 자주 웃었다. 너무 자주 웃어서 속이 메었다. 마지막이라도 될 것처럼 웃으니까, 차라리 울었으면 달래주기라도 하는데 그냥 웃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참 겉도는 이야기를 했다.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도하가 술 한 잔을 비우고 콧등이 조금 붉어졌을 때 그제야 나는 질문 하나를 꺼냈다.
“아직도 걔하고 친해?”
“누구?”
자꾸 웃던 도하가 입매를 굳혔다.
“현성이?”
도하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그놈. 지현성.
도하는 입술을 달싹이면서 눈을 깜박였다. 입술이 웃는 모양인지 우는 모양인지 몇 번을 반복했다.
그러고는 눈까지 접고 끝내 웃는다.
“현성이랑 같이 살아.”
“…….”
“아직도.”
* * *
미술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지현성이었다. 지현성은 도하와 같이 있으면서 벽을 세우던 놈이었다. 도하가 아무하고도 말할 수 없게. 무뚝뚝한 얼굴과 큰 키가 다른 애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그 때문에 다른 애들이 뒤에서 욕할지언정 앞에선 아무 말도 못 했다.
지현성과 같이 있는 동안 도하는 그걸로 충분해 보였다. 도하는 때때로 지현성을 보고 웃었고 지현성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이 호모라는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소문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사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욕할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미술실에 들어온 지현성은 차가운 눈으로 나와 도하를 쏘아보았다. 마치 불륜 현장이라도 잡은 듯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쟤랑 뭐 하냐고.”
“현성아.”
도하 또한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얼굴이 얼룩져 있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어.”
“야, 친구끼리 놀던 거야. 너 왜 그래?”
심각한 분위기에 당황해서 지현성에게 다가가 변명을 했다.
“넌 빠져.”
지현성이 내게 다가와 으르렁댔다. 반에서 나와 비슷한 키를 가진 건 지현성뿐이었다. 예민하고 공격적인 반응에 순간적으로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친구하고 놀았다는 것만으로 이런 적대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도하는 그대로 지현성에게 끌려 나갔다. 어떤 액션을 취할 수도 없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술실에 혼자 남겨진 나는 황당한 얼굴로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부터 지현성은 꼬박꼬박 학교에 나왔다. 도하는 수치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 얼굴을 보고서 도저히 도하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도하와 나의 사이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너무 멀어져서 사이에 강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무런 소통도 할 수 없었다.
“와, 남편 오셨네.”
옆에서 빈정거리는 박민재를 보고도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그렇게 보였으니까.
“쟤 진짜 웃긴다. 지현성 없을 땐 너하고 놀더니 오니까 말도 안 섞네.”
“그러지 마. 이유가 있겠지.”
“왜? 짜증 나서 그래. 아니, 씨발. 우리가 무슨, 뭐, 놀다가 버리는 장난감이야? 아니, 친했잖아. 내 착각이야? 밥도 먹고 인사도 하고 놀기도 하면 친한 거지. 지 친구 왔으면 인사라도 받아 주면 되는데 갑자기 왜 쌩까?”
박민재는 분한지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씩씩거리면서 책상을 차는데 다른 애들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양아치같이 굴지 말고.”
“반장님은 화가 없으셔서 좋으시겠어요. 절이라도 들어가지 그러냐.”
박민재가 쏘아붙이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정작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건 나였다. 갑작스러운 단절에 너무 억울해서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 보려고 했지만 도하에게 연락처를 받지 못했다는 게 생각난 순간 머리를 쥐어뜯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미치겠다, 진짜.”
책상에 고개를 묻고 앓다가 누운 상태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까만 뒤통수가 보인다. 그 옆에는 지현성도 있다. 내 머릿속에서 도하의 옆자리에는 지현성 대신 내가 자리 잡았다. 지현성 대신 이어폰을 나눠 끼고 서로 웃고 있었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벼락에 맞은 듯이 몸을 떨었다. 내가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도하를 좋아했다.
도하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되는 일이 없었다. 지현성은 계속 붙어 있었고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같이 일어났다. 호시탐탐 도하를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건 뒤통수뿐이었다. 도하는 나하고 보냈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내가 도하를 좋아한 것과 별개로 나와 도하는 퍽 친하게 지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박민재가 도하의 배신에 펄펄 뛸 만큼. 칼로 베어 내듯이 사람을 잘라 내는 태도에 내 팔이 잘린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자존심에 나도 도하를 모른 척해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도저히 도하를 좋아하는 마음을 빼낼 수가 없어서.
침대에 누우면 찢어진 도화지 사이에서 도하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이 나를 뒤척이게 했다. 그때 왜 울었을까. 그걸 물어볼걸. 그게 아니라면 그때 도하를 위로라도 해 줄걸. 후회로 점철된 사고였다. 도하에 대해서는 계속 후회만 하게 됐다. 좀 더 잘해 줄걸.
이 생각은 결국 도하의 뒤를 쫓는 거로 나타났다. 후회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자. 담임 선생님께 오늘은 야자를 짼다고 말하고는 보충까지 쨌다. 도하는 보충 수업을 듣지 않았다. 이것도 돈 문제였다.
지현성은 먼저 가방을 챙겨서 어깨에 걸친 채 도하를 기다렸다. 둘이 교실을 나가는 걸 보고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박민재. 나 간다.”
“어? 왜? 야! 나도 같이 가.”
박민재가 떨치고 일어나서 소리 질렀다. 급하게 가방을 챙기느라 유인물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놓치면 안 된다.
“나 피시방 안 가.”
“그럼 어디 가.”
“몸 안 좋아서.”
“진짜? 야. 빨리 가. 유인물 챙겨 줘?”
“그럼 고맙고.”
“어. 그래 형님이 챙겨 줄게. 낼 봐.”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는 박민재까지 속이고 교실을 뛰쳐나왔다. 왜 쫓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안 하면 이제 도하와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한참 뒤에서 쫓아가느라 몇 번이고 놓칠 뻔했지만 끝까지 따라붙었다. 둘은 40분을 꼬박 걸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점점 갈수록 높은 빌딩들과 아파트는 사라지고 슬레이트들이 낡은 이를 드러내며 붙어 있는 동네로 들어섰다.
새마을 운동의 향수가 아직 남아 있는 동네엔 사람이 살 수 없어 보이는 건물들이 언덕의 능선을 따라서 따개비처럼 붙어 있었다. 걸어 들어갈수록 불안감에 휩싸였다. 여기에 도하가 사는 건가? 정말로?
도하가 가난하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로 피상적인 이미지였다. 아무리 도하가 돈이 없어서 낡은 교복이 번들거릴 때까지 입고 있다고 해도 도하는 학교에 있었고 딱 그 정도의 가난만 보였다. 늙은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눈을 번뜩였다. 지나가면서 나를 보는 남자 어른들의 시선이 음산했다.
젠가에서 블록을 꺼내듯이 딱 도하만 여기서 꺼내 오고 싶었다.
도하와 지현성은 골목을 지나서 한 집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집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보였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서 둘이 들어간 곳을 숨죽여서 지켜봤다. 저기가 도하의 집이라고? 지현성은? 지현성은 왜 저기로 들어간 거야?
골목에 앉아 있다가 시간이 지나고 지현성이 빠져나오는 걸 보고 안도했다. 같이 사는 건 아니겠지?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만 했다. 멍청한 새끼 같지만 그랬다. 지현성이 집을 나서고 도둑처럼 도하네 집 대문 앞을 서성였다. 철창 사이로 낡은 벽돌들이 켜켜이 쌓인 것이 보였다.
용기 내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초인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고 대문을 두드렸다. 퉁퉁퉁. 둔탁한 철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교복 재킷을 벗어 던진 도하가 밖으로 나왔다. 철창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도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도하가 뭐라고 내게 화를 내기 전에 철창을 잡고 변명부터 시작했다.
“네가 제대로 말을 안 해 주니까…….”
“…….”
“그래서 왔어. 네가 보고 싶어서.”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씩 웃었다. 도하는 아무 말 없이 좁은 마당을 서성였다. 한참 안절부절못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떻게 왔어.”
“뒤에서 너 따라왔어.”
“여기를?”
“응.”
“40분 동안? 미쳤어?”
좁은 골목이 도하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할 말이 없어서 딴청을 피웠다. 도하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진짜 환장한다. 그렇게 안 봤는데 또라이 아냐.”
“그건 아니고…….”
“웃기지 마. 너 집에 갈 수는 있어?”
그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곧게 뻗은 내리막길이 보였다.
“저거 따라가면 어떻게 내려가지 않을까? 큰길로 나가서 택시 보이면 택시 타고 집 가면 돼서.”
“그래. 잘났다.”
도하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멋쩍은 웃음을 짓자 도하가 한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들어와.”
철문을 열어 준 도하는 몇 가지 변명을 덧붙였다.
“우리 집 별거 없어.”
“괜찮아. 네 집이잖아.”
“진짜 보여 주기 싫은데, 보고 놀라지 마.”
이렇게 말하는 도하는 울 것 같았다. 그걸 보고 계속 다짐을 했다. 뭘 보든 놀라지 말아야지. 이 다짐은 들어가자마자 깨질 뻔했다. 현관의 장판이 찢어져서 테이프가 얼룩덜룩하게 붙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벽지는 면마다 색이 달랐는데 그마저도 너덜너덜한 데다가 쥐 오줌 색으로 변색돼 있었고 곰팡이가 구석마다 자리했다. 방은 부엌 겸 거실과 작은 방 하나라는 간략한 구조였다. 식탁도 없이 개다리소반이 벽에 세워져 있었다.
더 환장하겠는 건 화장실이었다. 손을 씻으러 들어가니 세면대가 없었다. 화장실에 있는 수도로 고무호스에서 물을 받아 세숫대야에 씻는 식이었다. 온수와 냉수가 없이 그냥 손잡이를 돌려서 물이 나오는 형태의 수도이기에 따뜻한 물은 나오지 않냐고 묻자 도하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우리는 물……. 주전자로 덥혀서 써. 덥혀 줄까?”
“아니야! 괜찮아.”
말을 하는 것마다 지뢰였다. 서울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집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저지른 짓이었다. 도하가 부끄러운 얼굴로 내민 수건은 딱딱한 것도 딱딱한 것이었지만 귀퉁이가 찢어지고 얼룩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집에서 지내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안 그래도 도하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헛소리를 해서 여기서 더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
“집에 뭐는 없고. 라면이라도 먹고 갈래?”
“어. 나 라면 좋아해.”
도하가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생수 대신 수돗물을 받는 걸 보고 움찔했지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태연하게 있자, 강선의. 티 내면 넌 머저리야. 도하는 봉지를 들고 망설이더니 라면 두 개를 꺼내 넣었다. 나는 바닥에 앉아서 도하가 라면을 끓이는 걸 구경했다.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던 도하는 짧게 신음성을 냈다.
“나 윗옷만 갈아입을게.”
“왜?”
“셔츠에 라면 국물 튀면 안 돼서.”
도하는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방으로 갔다. 순식간에 도하의 흰 어깨와 가슴이 보였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스트립쇼에 놀라 도하가 티셔츠를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가만히 굳어 있었다.
“뭐 해?”
“아니, 아니. 나 뭐 할 거 없어?”
“없어. 그냥 가만히 있어. 너 우리 집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도하의 말대로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개다리소반을 펼쳐 놨다. 라면을 끓여서 가져온 도하는 국자로 퍼서 내게 한 그릇을 줬다.
“먹어. 먹은 다음엔 집 가. 나도 알바 가야 해.”
“알았어. 근데 요즘 왜 나 피해?”
라면을 막 입에 넣고 있던 도하는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했다.
“물, 물 줄까? 어디 있어?”
“가만히, 있어, 좀!”
숨이 넘어갈 거 같으면서도 할 말은 다 한 도하는 한참 있다가 겨우 제 호흡을 찾았다.
“진짜 넌 눈치도 없고 배려도 없다.”
난생처음 들어 본 폭언에 입을 다물었다. 너무 제멋대로 행동했나? 일단 도하의 뒤를 쫓아온 것부터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
“학교에서 나 모르는 척해.”
“왜? 학교 밖에선 아는 척해도 돼?”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학교에서 모른 척하라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밖에서는 된다는 건가?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질문을 늘어놓았다. 마치 아무 집이나 초인종을 두드려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방문 보험 판매원 같았다.
“지현성 때문이야? 걔가 뭔데?”
“걘…….”
도하가 입을 달싹였다. 끝내 내민 대답은 내 성에 차지 않았다.
“친구야.”
“난?”
내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나는 친구 아니야?”
“원래 아니었잖아.”
차가운 말에 몸을 굳혔다.
“너하고 박민재……. 뒤에서 나 호모라고 비웃은 거 알아. 거지라고 비웃은 것도 알고. 솔직히 이제 와서 나하고 친하게 지내려는 이유를 모르겠어.”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도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하의 눈가가 붉었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걸 참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거 먹고 가. 그리고 네 친구들하고 놀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말없이 라면 그릇만 바라보았다. 내가 먹지 않는 사이에 라면은 불어 올랐다. 기름기 어린 국물 사이로 면발이 뒤엉켜 있었다.
말을 마친 도하는 꾸역꾸역 면발을 입에 넣었다. 즐거웠던 기분은 사라졌다. 도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민재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았지만 한패가 맞았다. 도하의 뒷담이나 들으면서 웃고 있었으니까.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뻔뻔하게 도하에게 말을 걸 생각을 했지? 몸이 떨렸다. 형편없는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미안해……. 네가 어떻게 생각할 줄은 모르겠는데. 정말…….”
“나 거지인 것도 맞고 호모 새끼도 맞아.”
도하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사과 같은 거 필요 없어. 사실이니까.”
도하가 남자를 좋아하는 걸 이런 상황에서 알 필요는 없었는데. 기쁨이 찾아오기 무섭게 모든 것을 쓸고 절망감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나는 도하에게 고백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 마음대로 지를 수는 있어도 내가 정말로 도하를 생각한다면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다 불어 터진 라면을 배 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체할 게 분명했지만 미련하게 먹었다.
집에 돌아가서 배탈이 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집에 상주하는 가정부가 약을 가져다주었지만 먹지 않고 침대를 쥐어뜯었다. 눈물이 났다. 배가 너무 아파서였다.
그 후로 나는 도하를 모른 척했다. 적어도 앞에선 그랬다. 수업 시간에 몰래 도하를 훔쳐보는 일이 있더라도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배려였다. 그날도 다름없었다. 친구들하고 장난을 치며 웃다가 몰래 도하를 봤다. 그러다가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저 새끼들 또 호모짓 하네.”
지현성이 책상을 가까이 붙이고 도하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애들 서너 명이 그런 둘을 보고 비웃다가 종이를 찢어 던졌다.
“야, 야. 호모!”
도하와 지현성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건 나였다.
“그만하지?”
“어? 선의야…….”
종이를 던지며 놀던 애가 나를 보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빈정거리는 말투가 나왔다.
“너희는 남 괴롭히는 게 재밌나 보네? 인생 패배자처럼.”
반 전체가 싸늘하게 굳었다. 성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씨발. 혼잣말로 욕하면서 머리를 책상에 박았다.
“야. 왜 그래?”
“말 걸지 마.”
“이 새끼 존나 예민하네…….”
심상치 않은 걸 느꼈는지 박민재도 몇 번 말을 걸더니 입을 다물었다. 눈치를 보던 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갔다. 반은 계속 조용했다. 모르겠다. 기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했다.
내 지랄에 도하와 지현성을 괴롭히는 애들은 없어졌다. 너무 쉬워서 토할 거 같았다. 그날은 도하를 보지 않았다.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면 참지 못하고 도하에게 말을 걸 것만 같아서였다.
지현성은 한동안 학교에 꼬박 나오더니 점점 빈도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내 내가 도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걸 확인하자 다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본래도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 놈이었다. 책상에 엎드려서 혼자 공부를 하는 도하를 봤다. 민재는 내 시선을 알았지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민재에게 먹을 걸 사 주면서 화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였다. 민재는 누군가에겐 나빴지만 내게는 좋은 친구였다. 내 성질을 받아 주고 나하고도 잘 놀아 줬다. 어쩌면 내가 왜 이러는지 눈치를 챘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약속을 깨트린 건 도하가 멍을 달고 온 날이었다. 마스크를 쓴 도하의 눈은 시퍼렇게 부어 있었다. 보자마자 약속이고 수업이고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도하의 손목을 잡고 교실을 나섰다. 다른 애들의 시선이 꽂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거 놔. 반장.”
“…….”
“야!”
도하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돌진하는 무소처럼 도하를 끌고 인적 없는 곳으로 갔다. 빈 교실이었다.
“너 뭐 하는 짓이야.”
“너 멍들었어.”
내 목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들어도 그랬다. 도하가 멍이 든 걸 본 순간부터 나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누가 때린 거야. 화가 나서 흥분에 차 있던 도하는 내가 벌벌 떠는 걸 보고 잠잠해졌다. 도하의 손목을 잡았던 기세는 빈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사라졌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눈이 퉁퉁 부었잖아.”
내가 헐떡였다. 목소리가 떨렸다.
“너……. 멍들었다고. 어떻게 무시해.”
“…….”
“내가 어떻게 그래…….”
도하의 앞에 서서 이를 악물었다. 뭐 잘했다고 울려고 그래. 도하도 울지 않는데. 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애써 복받치는 눈물을 찍어 죽였다.
“네가 어떻게 못 해 주는 일이야.”
“왜? 뭐든 해 줄 수 있어 말만 하면…….”
“아빠가 때린 거야.”
“뭐?”
도하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사람만 좋던 아버지는 보증을 잘못 서서 이제 사람도 좋지 못하게 되었다고. 어머니는 야반도주를 하고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가끔 집에 들어와서 엄마와 닮은 자신을 때린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도하를 보면서 어떻게 불행은, 불행은 늘 같은 사람만 찾아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행이 아무리 눈먼 장님이라도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가장 취약한 사람만 할퀴고 지나갔다. 모든 게 도하의 불행이었다. 아버지, 돈, 학교 심지어 나의 존재까지도.
“미성년자라서 못 벗어나. 현성이는 그래서……. 그래서 붙어 다니는 거야. 현성이도 욕하지 마. 걔 돈 벌어야 해서 학교 못 나오는데 나 때문에 들러 주는 거야. 자퇴하려다가도 나 때문에 안 했어.”
“걔하고 사귀어?”
도하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답은 없었지만 이미 나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코끝이 시큰했다.
“그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면 안 될까? 걔가 맨날 올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오늘처럼 멍들면 어떻게 해.”
꿋꿋하게 주장을 피력하는 나를 보고 도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울 거 같기도 했고 또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속죄하는 거로 생각해 줘. 내가 잘못 많이 했잖아.”
“…….”
“내가 이거라도 하게 해 줘.”
* * *
지현성과 같이 산다는 말에 더 물을 말은 없었다. 지현성은 도하의 애인이었고 나는 아니었으니까. 도하의 멍은……. 왜 생긴 걸까? 도하는 스물여덟이었다. 도하의 발목을 잡는 아버지에게서도 벗어날 수 있는 나이었다. 또 어떤 불행이 찾아왔지? 지현성도 옆에 있는데. 혹시 지현성이 때리는 걸까?
묻고 싶은 말들은 내 가슴에 묻어 둔 채로 의미 없는 말들을 떠들었다. 도하는 장단을 맞춰 주며 술을 마셨다. 도하가 술을 잘 마시는 줄 몰랐는데 끊임없이 들어갔다.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도하의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을 때였다.
“도하야.”
“……왜?”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도하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술 그만 마셔. 너 취한 거 같아.”
도하는 자기의 팔에 기대서 웅얼거렸다.
“오랜만에 너 만나서, 좋아서…….”
“뭐?”
도하의 말에 순간 딱딱하게 굳어 되물었다. 정말 ‘좋다.’고 말한 게 맞나?
“나 만난 거 좋아?”
“…….”
“도하야?”
다시 한번 그 말을 들어 보려고 했지만 실실 웃던 도하는 내 말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이야. 선의야…….”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망부석처럼 도하를 보고 있다가 슬며시 도하의 팔을 건드렸다.
“도하야?”
너무 살짝 건드렸나 싶어서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도하야. 취했어?”
답이 없다. 취해서 잠든 게 분명했다. 도하가 깨기를 기다렸지만 한참 뒤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술 주전자를 열어 보니 바닥이 보였다. 방심한 사이에 술을 모두 마신 게 분명했다. 난감한 얼굴로 도하를 바라보다가 일단 도하의 팔에 점퍼를 끼워 넣었다. 옷을 다 입혔는데도 불구하고 도하는 잠들어 있었다.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점퍼에서 핸드폰을 찾아 봤지만 핸드폰은 나오지 않았다. 얇은 지갑만 자리 잡고 있었다. 지갑을 열어 보니 흔한 카드도 없이 천 원짜리 몇 장과 만 원짜리 하나만 잡혔다. 그대로 접어서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도하를 업었다. 생각보다 너무 가벼워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순식간에 도하를 무겁게 만들 마법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하의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가슴이 약간 떨렸지만 지현성을 기억해 냈다. 괜한 짓거리 하지 말자. 마음을 다잡으면서 가게를 나왔다.
나는 술에 입술만 적신 수준이었지만 도하를 태우고 음주 운전은 할 수 없었다. 이런 데에는 엄격한 편이었다. 차를 포기하고 도하에게 줄 선물을 들고서 근처 호텔로 향했다. 번화가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아주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도하를 재우기에는 충분한 곳이었다.
키로 호텔 방 문을 여는 것도 꽤 힘들었다. 방을 열면서 몸을 흔들자 도하가 뒤척였다. 깼나 싶었는데 다시 내게 몸을 기댄다.
침대에 도하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신을 벗겼다. 오늘은 이걸로 됐다. 도하의 근황도 알았고 지현성이 계속 옆에 있는 것도 알았다. 도하의 겉옷을 벗겨서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선물은 탁자 위에 올려 두고 호텔에 비치된 메모지와 펜을 꺼내 들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강선의.
글씨를 다 쓰고 난 다음 도하를 바라보았다. 집에 가야 하는데. 나는 떠나지 못했다. 서서 계속 도하를 바라보다가 결국 침대 옆에 앉았다. 자는 도하는 천사 같았다. 비록 입술과 손이 부르트고 손목에는 멍이 남아 있지만.
제발 나한테 도와 달라는 한 마디만…….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도하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애인이 못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냥 형제로 태어나서, 좋은 형이나 동생이 되어서, 도하에게 불행의 한 자락도 보여 주지 않을 수만 있다면…….
너무 가까이 다가간 탓일까. 잠깐 뒤척이는 듯하던 도하가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도하를 보던 그대로 굳어서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여긴 어디야.”
잠긴 목소리가 도하의 목을 긁으며 나왔다. 빛이 너무 밝은지 눈을 몇 번이고 껌벅였다.
“여기? 호텔이야. 너 잠들어서.”
“호텔?”
도하가 몸을 반쯤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하가 잠깐 잠에서 깼으니 이제 가는 게 맞았다.
“응. 너 좀 취한 거 같으니까. 자고 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말을 하는데 도하가 니트를 벗어 던졌다. 당황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도하야.”
“…….”
“도하야. 왜 그래.”
“왜?”
메마른 시선이 내게 꽂혔다.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타고 달렸다. 심장이 쥐어짜지는 것 같다.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거린다. 도하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이러고 싶어서 밥 먹자는 거 아니었어?”
“아니야.”
목이 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 어떤 행동이 이런 오해를 하게 했지?
“전에는 밥 주고 그림 샀으니까. 이번엔 나하고 자고 싶은 줄 알았지.”
“…….”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도하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내 상상 속에서 도하는 나를 좋아했다. 나를 좋아해서 내게 입을 맞추고 껴안았다. 이렇게 메마르고 지친 눈을 하지 않았다.
“내가 뭐 하고 살았냐고 물어봤지? 몸 팔았어. 왜? 이젠 좀 달라 보여?”
도하가 웃었다.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웃통을 벗은 채 도하는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마치 내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도하의 목이 희게 빛났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하에게 다가갔다. 손을 올리자 몸을 움찔거린다. 나는 담요를 끌어다가 도하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최대한 도하의 몸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추우니까 이불 덮고 자.”
“야. 강선의.”
도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탁자 위의 디지털시계가 12시 5분을 가리켰다.
“선물도 가져가.”
“…….”
“도하야. 메리 크리스마스.”
도하의 뒷말은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룸을 나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모르겠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도하에게 진정한 선의가 될 수 없었고, 나는 나 자신으로 도하 앞에 서기가 너무 어려웠다.
차라리 도하가 내게 매달려서 돈을 요구했으면 기꺼이 줬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도하가 자기 자신을 찌르는 것을 볼 순 없었다. 그건 능력 밖이었다. 차라리 나를 때리고 욕했으면 나았을 텐데. 괴로웠다. 비틀거리며 호텔 밖을 나왔다. 프런트에서 대리를 불러 드릴까요? 하고 물어봤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 나왔다. 바람이 차다. 뺨을 매섭게 때린다.
왜 잘 살 거라고 생각했을까.
도하의 모든 걸 알았으면서, 불행이 어떻게 도하의 인생에 붙어 있는지 알았으면서 나는 좋게만 생각했다. 도하가 잘 지내기를, 잘 지낼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겠지.
* * *
“저 새끼 말을 믿어?”
지현성이 나를 노려보며 도하에게 말했다. 어색한 자리였다. 도하와 나, 지현성의 조합은 누가 봐도 고개를 저을 게 분명했다. 지현성은 내게 상당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인사를 했을 때 당황할 정도였다.
도하는 내게 지현성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당황했지만 애써 괜찮은 척을 할 수 있었다. 도하가 내게서 다른 이상한 사심은 느끼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지현성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내 사심을 알아챈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내가 자기 둥지의 새끼를 빼앗아 가는 매라도 되는 양 예민하게 굴었다.
“반장한테 그러지 마.”
“뭘 그러지 마? 애들하고 몰려다니면서 대장 노릇하는 새끼한테?”
“대장 노릇이라니.”
도하가 지현성의 말을 정정해 주려고 했지만 지현성은 들어 먹지를 않았다.
“틀려? 다들 네 기분 맞추려고 설설 기잖아. 왜. 나도 그렇게 해 줄까?”
지현성의 신랄한 말에 나도 얼굴을 굳혔다.
“내가 언제 그랬어?”
“네가 안 그랬어도 회장님 손자니 어련히 기겠지.”
“그럼 너도 회장님 손자 하든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자 지현성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도하가 나와 지현성을 떨어트리며 말렸다.
“그만해. 반장은 그냥 나 도와준다고 한 거야.”
“그니까 그게 웃긴다는 건데.”
“현성아.”
도하가 이름을 부르자 지현성은 자신의 분을 삭였다. 그 모습에 나 또한 치밀어 오르던 화를 잃어버렸다. 도하와 지현성에겐 어떤 유대가 있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도하가 지현성의 팔목을 잡자 순한 양처럼 변한다. 난감한 얼굴을 하고 도하가 내게 말했다.
“현성이하고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알았어.”
애써 미소 지으며 도하를 보냈다. 지현성과 나가는 도하를 보자 마음 한구석이 빈 느낌이었다. 도하를 좋아한다는 걸 알기도 전에 안 될 관계였다. 한참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서 나도 쫓아 나갔다. 둘은 바로 옆 골목에 있었다. 골목에 들어가지 않아도 목소리가 들렸다. 지현성이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새끼가 너한테 진심일 거 같아? 지금은 진심일 수도 있겠지. 나중에는? 걘 성호 기업 회장 손자야. 쟤가 우리하고 공립 고등학교에서 시시덕거린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갈 거 같아? 걔들은 다른 세상 사람이야. 우린 그냥……. 그냥 재밌었던 거지들이고!”
지현성이 도하에게 소리쳤다. 도하는 담담하게 지현성의 신랄한 말들을 듣고 있었다. 한참 침묵하던 도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나 주제 파악 잘해.”
“…….”
“너도 알잖아.”
나는 자리를 떠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산 커피와 음료들에 든 얼음들이 녹아 가고 있었다. 속절없이,
녹아내렸고 내 마음도 녹아내리는 빙하처럼 떠돌아다녔다.
돌아온 지현성은 싸늘한 눈을 했지만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날로 나는 도하의 애인에게서 공식적으로 도하를 따라다닐 수 있는 권리를 얻어 냈다.
아빠의 폭력에서 도하를 지켜 주기 위해 도하를 따라다니겠다는 순진한 발상은 고등학생이여서 할 수 있었고 또, 도하의 응달 밖에 서 있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현성의 경멸은 여기서 나왔었는지도 모른다.
지현성이 학교를 빠지자 내가 도하와 함께 하교했다. 하교하면서 도하는 지현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다.
학교에서 왕따당하던 도하와 같이 다녀 준 일, 도하의 아빠에게 대들어 대신 맞았던 일, 키가 커진 지현성 때문에 도하의 아버지가 욕을 하고 집을 나간 일…….
나는 침착하게 도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일에 일일이 질투를 하면 내 꼴만 우스워졌다. 뭘 질투할 건데? 도하를 먼저 만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현재는 도하의 아빠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지현성이 도하의 집에서 자고 가는 일도 있다고 했다. 반동거 상태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도하를 인정사정없이 때리는 도하의 아버지가 역겨웠고 그 소리를 듣고 불순한 상상을 한 내게 구역질이 났다.
야자를 쨌기 때문에 도하의 집으로 올라가서 상을 펴고 문제집을 꺼냈다. 도하가 물을 가져다줬다.
“보리차가 있었는데 다 떨어졌어.”
“상관없어. 너도 공부해. 나 챙기지 말고.”
내가 자리를 가리키자 도하도 주섬주섬 문제집을 꺼낸다. 중고를 사들인 터라 도하가 그리지 않은 게 분명한 낙서가 가득했다. 도하는 개의치 않고 문제집을 풀었다. 한참 도하를 바라보다가 이럴 시간이 아닌 걸 깨닫고 나도 문제를 풀었다.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먼저 알아챈 건 도하였다. 몸을 바싹 굳히고는 보이지 않는 밖을 쳐다봤다. 도하의 반응에 내가 일어나서 현관문 앞에 섰다.
“도하야.”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지현성이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라면을 가져온 지현성은 나를 싸늘한 얼굴로 보고는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누구보다 익숙한 몸짓으로 라면을 찬장에 넣은 다음 도하에게 다가가 앉았다.
“공부해?”
“응.”
지현성이 도하를 뒤에서부터 한 팔로 끌어안더니 도하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도하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흘낏 쳐다봤다.
“하지 마.”
“왜? 애인이잖아.”
그 말을 하던 지현성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지현성의 도발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짧게 깎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도하가 남자를 좋아하는 걸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도하는 내 눈치를 봤지만 스킨십 자체는 익숙해 보였다.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고개를 먼저 돌리는 건 나였다.
“지현성 왔으니 나는 갈게.”
“나 아르바이트 가야 해. 같이 가.”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일어나자 도하가 같이 일어났다. 지현성의 눈이 따라붙었다.
“한 시간 뒤잖아. 도하야.”
“데려다주게.”
도하가 무심하게 말하자 지현성은 아무 말 없이 도하를 쳐다보았다. 미묘한 기류가 도하와 지현성 사이에 흘렀다.
“쟤를 왜 데려다줘? 어차피 길 다 알잖아.”
“어둡잖아.”
“웃기지 마. 나보다 쟤가 중요한 거네.”
“그게 아니고.”
도하가 나를 힐끔 훔쳐보면서 지현성을 달랬다. 그 꼴을 더는 보고 있기 힘들었다.
“나 갈게.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가방을 챙긴 다음 신을 대충 구겨 신고 밖으로 나왔다. 선의야! 도하가 소리쳐 부르는 게 들렸지만 더 있을 수 없었다. 도하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벌이는 애정 행각을 보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도하의 잘못은 아니었다. 내가 문제였다.
지현성의 경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보란 듯이 애정 행각을 하는 건 참을 만했다. 그러나 도하의 곤란한 얼굴을 볼수록 충동이 커졌다. 당장 지현성의 팔을 잡고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도하의 마른 어깨를 끌어안은 팔을 뿌리치고 도하를 끌고 오고 싶었다.
모든 건 내 상상에서만 일어났다. 어쨌든 도하는 내게 지현성이 괴롭히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지현성은 도하의 애인이었다. 적어도 사랑싸움처럼 보이긴 했다.
불안한 감정을 느끼게 된 건 둘의 싸움 때문이었다. 둘은 사소한 일로 자주 싸웠다. 문제는 제대로 된 다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지는 건 도하였다. 지현성은 도하의 행동 하나하나를 꼬투리 잡으며 의처증 걸린 남편처럼 굴었다. 이 모든 변화가 나 때문에 생긴 것임을, 나는 알았다. 지현성은 나와 도하가 같이 있을 때마다 광분했고 폭력적으로 변했으니까.
도하와 지현성이 약간씩 어긋나고 있는 게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미묘한 균열이었다. 도하의 불안은 극에 달았다. 내가 같이 있을 때마다 시계를 봤다. 지현성이 언제 돌아오는지 시간을 체크하며 내 눈치를 봤다. 결국 내가 문제였다.
나는 패배를 선언했다.
“도하야.”
내 말에 도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늘도 문제집을 펼쳐 놓은 채였다.
“너희 아버지 한동안 안 오실 거 같지?”
그 애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부드럽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나도 한동안 안 필요할 거 같은데. 그렇지?”
“반장.”
도하가 짧게 나를 불렀다. 무언가 직감한 얼굴이었다.
“힘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성적 때문에. 나 이번에 등수 조금 떨어졌잖아. 한 달 정도만 지현성한테 부탁해도 될 거 같네.”
내 말에 도하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사이에도 몇 번이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도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내가 씩 웃었다.
“좋아. 잘 지내. 모의고사 성적 올려서 다시 돌아올게.”
“알았어. 고마웠어.”
“아니야.”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도하는 앉은 그 상태로 내가 하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잘 있어.”
밖으로 나가서 신발을 제대로 신었다. 불 켜진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언덕을 내려갔다. 한 달이라고 했지만 나와 도하 둘 다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학교에서 인사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도하와 나는 여느 반 친구들처럼 아침에 보면 인사를 하고 서로의 생활을 했다. 밤에는 도하 생각에 잠들지 못했다. 괜찮을까? 내가 없는 사이에 도하의 아빠가 찾아오면 어떡하지?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도하는 집에 전화기도 없었고 핸드폰도 없었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서 도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 내 최선이었다.
연락을 받은 건 새벽 2시였다.
그날도 쉽게 잠들지 못해서 뒤척이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다. 평소라면 끊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홀린 듯이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흐……. 하…….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불안감에 휩싸여 다시 한번 물었다.
“누구세요? 도하야?”
―반장.
“도하야. 어떻게 전화했어.”
―우리, 집으로 와 줄래?
도하의 말에 나는 당장 일어났다. 집에서 어딜 가냐고 물어봤지만 잠깐 급한 일이 있어서 친구를 보러 간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문제였지만 자주 집에 안 계셨고 어머니는 성적만 잘 나오면 상관없다는 방임주의였다. 날쌘 매처럼 집을 뛰쳐나가서 택시를 불렀다. 새벽 택시는 빠른 속도로 도하의 집으로 향했다. 언덕이 가팔랐지만 달리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도하밖에 없었다.
불 꺼진 도하의 집은 손쉽게 열렸다. 집 안은 엉망이었다. 물건들이 박살 나 있었고 도하는 보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도하가 혹시 어떻게 됐을까 봐. 벌벌 떨면서 도하를 찾았다.
“도하야!”
작은 방에 있던 도하는 바닥에 누워서 숨만 쉬고 있었다. 이미 멍이 팔뚝과 광대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눈만 껌벅이던 도하가 나를 보고 살짝 웃었다. 코에서 피가 질질 흘렀다. 도하의 흰 티셔츠가 피로 엉망이었다.
“왔어?”
“너무, 너무 늦어서 미안해.”
내가 도하 앞에 꿇어앉았다. 목소리가 떨렸다.
“어, 어떻게 하지? 경찰에 신고하면 돼? 약은? 약은 어디 있어?”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있어.”
붙어 있겠다고 맹세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 패배 선언을 했을까. 도하가 맞는 것보다 낫잖아. 다 내 탓이다. 내가 머저리인 탓이다. 나는 기도하듯이 도하의 손을 잡았다. 도하는 어지러운 듯이 눈을 찡그렸다가 일어났다.
“병원 가야지.”
“아냐. 괜찮아. 이 정도면. 오랜만이어서 너무 놀라 가지고 연락했어. 별로 안 아파.”
도하가 미소를 짓다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아프지 않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어서 내 일을 봐주는 비서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누르려고 했다. 도하는 내 핸드폰을 잡고 가렸다.
“정말 괜찮아.”
“병원은 어떻게 하고. 지금 가야지.”
“내일 가면 돼. 걱정 마.”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도하가 달랬다.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건 도하인데 내가 패닉 상태라 제대로 도하를 봐 주지 못했다. 일단 화장실에서 휴지를 꺼내서 도하의 코를 닦아 주었다. 엉망이 된 도하의 얼굴을 닦아 주면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휴지가 온통 붉은 피로 얼룩졌다.
“머리는 안 어지럽고?”
“응.”
“다행이다…….”
긴장이 풀려서 내가 엎드렸다. 도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신을 믿진 않지만 도하를 위해서라면 기도라도 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고 도하를 올려다봤다. 도하가 웃자 나도 따라 웃었다. 뭐가 좋았는지 모르겠다.
“너 핸드폰 있었어?”
“아니. 이거 현성이 핸드폰.”
그 말에 얼굴을 굳힐 뻔했다. 나는 핸드폰 그냥 사 줄 수 있는데. 통신비도 내줄 수 있는데. 이런 생각들을 애써 끌어 내리며 웃던 찰나였다. 우당탕하는 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렸다.
“도하야!”
지현성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지현성이 도하의 얼굴을 만졌다.
“그 씹새끼 왔으면 연락을 해야지!”
“괜찮아.”
도하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도하가 제대로 앉았다. 도하의 상태를 살펴본 지현성이 분노를 내게 돌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근데 넌 왜 여기 있어.”
지현성의 으르렁거림에 도하가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연락했어.”
“네가? 어떻게?”
지현성이 어리둥절해서 도하를 쳐다보았다. 피를 흘려 백지장 같던 얼굴이 순간 희게 질렸다. 이내 이유를 알아챈 지현성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거 나한테 연락하라고 준 거잖아. 너 쟤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도하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우리 셋 사이를 흘렀다.
“나 부르라고 준 핸드폰이잖아.”
“그냥 생각나서…….”
도하가 황급하게 변명을 했다.
“웃기지 마. 저 새끼한테 다리 벌리고 싶은 건 아니고?”
지현성의 말에 스프링처럼 일어섰다.
“지현성 너 미쳤어?”
지현성의 말에 내가 몸이 떨렸다. 어떻게 저딴 말을 하지? 도하는 자기 애인이었다. 내 애인 같은 게 아니라 지현성 자기의 애인. 애인한테 어떻게 저렇게 말을 해? 내가 놀라움과 분노에 몸을 떠는 것과 다르게 도하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지현성이 나를 밀쳤다.
“넌 빠져.”
“빠지긴 뭘 빠져.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내가 도하 앞에 서서 보호하듯이 몸으로 가렸다. 지현성이 어떤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든 상관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나하고 도하 일이야.”
“너하고 도하? 넌 사귀는 사람한테 그딴 말 지껄이냐?”
지현성이 이를 갈았다. 내 말에 정신이 돌아온 표정이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가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숨을 내쉬었다.
“씨발!”
지현성이 발로 벽을 걷어차고 나갔다. 지현성의 발길질에 벽이 움푹 파였다. 너무 손쉬웠다. 놀라서 멍하게 바라보는데 도하는 익숙한 눈치였다. 다만 숨을 거칠게 헐떡였을 뿐이었다. 분명히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오른 게 보였는데 절대로 울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으면서도.
가슴이 부풀었다가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도하의 어깨를 안아 주고 싶었지만……. 나는 도하의 애인이 아니었다. 도하의 애인은 도하를 두고 떠나 버렸다. 왜 나는 도하한테 아무것도 아닌 걸까? 왜 도하를 안고 흔들어 줄 수 없는 걸까?
“도하야. 괜찮아?”
“너도 가.”
죽을 것같이 가느다란 목소리가 도하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난…….”
“난 괜찮아.”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도하는 내 등을 밀었다.
“빨리 나가.”
“…….”
“혼자 있고 싶어. 제발. 부탁이야.”
머뭇거림과 함께 짧은 인사가 덧붙는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
도하의 팔에는 아무 힘도 없었지만 버틸 수 없었다. 도하는 내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서 나를 내보내는 게 분명했으므로.
끝까지 도하의 어깨를 감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열고 나오니 지현성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도하한테 그렇게 말하니 속 편하냐?”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빈정거리자 지현성이 이를 드러냈다.
“너 오기 전에는 나하고 도하 사이 괜찮았어. 네가 끼어들고 이 지랄 난 거야.”
“도하가 참아 준 건지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지현성이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근데 네가 그딴 말할 주제는 아닌 거 같다.”
지현성이 담배 연기를 뱉었다.
“도하 흔들지 말고 꺼져.”
“…….”
“너 전학 가는 거 알아. 씨발 새끼야.”
지현성의 말에 몸이 굳었다.
“어떻게 알았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이었다. 언젠가 도하에게 말해야겠지 하고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전학이 결정된 건 얼마 전이었다. 회장이셨던 할아버지가 쓰러지시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교육 방침대로 공립 고등학교에 더 이상 나를 두고 싶지 않아 했다.
아버지가 선택한 곳은 기숙사가 있는 사립 특수 목적 고등학교였다. TO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내 성적과 아버지의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전학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고 싶지 않다고 해도 아버지는 완강했다.
“교무실에서 말하는 거 들었어.”
“…….”
“비열한 새끼. 도하한테 연락하지 마.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넌 새 친구들하고 잘 노셔.”
지현성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결국 도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계속 곁에 있어 주지도 못할 거면서 진흙탕의 미꾸라지처럼 도하를 흔들어 댔다. 도하에게는 나보다는 지현성이 있는 게 나았다. 가끔 연락하는 친구로나마 남고 싶었지만 지현성의 말대로 나 때문에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면 더는 참견하지 않는 게 맞았다.
“도하한테 안부 전해 줘.”
지현성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걸로 대답은 끝났다.
나는 도하를 떠났다. 도하의 소식은 들으려고 한다면 들을 수 있었지만 나는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러나 도하를 본 순간 내가 성공했다고 믿었던 것들이 모두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이다. 너무 차갑다. 아직 한파가 찾아오지도 않았건만 나는 추위에 벌벌 떨었다. 내가 두고 온 과거들이 나를 거세게 후려쳤다. 몸이 으슬으슬 아프다 싶더니 결국 독감에 걸려서 일어나지 못했다. 성장통을 앓는 것보다 더했다. 왜냐면 이건 벌이니까. 분수도 모르고 깝죽대며 여기저기 쑤셔 댄 벌이니까.
나를 원망하는 도하의 눈동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파서 누워 있는 내내 핸드폰을 부여잡고 도하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무서웠다. 도하가 혹시라도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도하에게 끈질기게 찾아가던 나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몸이 아프니까 용기 또한 병이 든 것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내내 누워서 보내고 회사로 돌아가자 다들 퀭한 얼굴들이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위해 몸을 불사른 표정들이었다.
“선의 씨, 크리스마스는 그분하고 잘 보내셨어요?”
미영 씨가 발랄하게 묻는 것을 애매한 미소를 띠며 답변을 피했다.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더 묻지 않고 미영 씨는 조용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너무 최악이어서 의례적인 답변도 힘들었다.
일에 집중을 하나도 못 한 채로 버벅거리다가 결국 담배를 들고 나왔다. 오너 자식이라고 근태 하나는 제대로 엉망이었다. 조소 뒤에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네. 아저씨.”
어릴 때부터 나를 봐주던 박 비서님이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돌봐 주신 분이라 이분은 계속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저번에 도하를 만나기 위한 식당 예약도 박 비서님이 해 준 것이었다.
―어쩐 일이에요. 도련님?
도련님이라는 말은 참 스스럽다.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도하를 만난 뒤로 나는 도련님이라는 단어가 낯설고 창피스러웠다.
도하를 잊는 데 성공했지만 내 삶은 도하가 지배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에 박 비서님이 아버지 명령으로 나를 찾아오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내가 재벌 3세라는 걸 몰랐다. 나는 눈치껏 남들이 입는 옷을 입었고 남들이 먹는 걸 먹었으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들이 사는 5평 남짓한 자취방에 거주했다.
내가 재벌 3세인 걸 알고 난 동기들은 뒤에서 나를 위선자라고 욕했고 형과 누나는 별종이라고 비웃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 도하를 잊고 난 다음에도 관성처럼. ‘가짜 가난 놀이’를 그만둔 것은 회사에 입사하고 난 뒤였다.
그렇게라도 하면 도하한테 가까워질 줄이라도 알았나 보지. 스물여덟이 된 나는 스물 초반 애송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저…….”
―네. 말씀하세요.
입가를 매만지다가 말을 내뱉었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셔츠 안을 파고든다.
“뒷조사 좀 해 주세요.”
―뒷조사요?
박 비서님께 부탁하는 일이라고 해 봤자 식당 예약이 고작이었던 내가 한 부탁에 박 비서님은 약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평생 비서 일을 해 오던 프로답게 곧 놀란 기색을 지우고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누구를 해 드릴까요?
“서도하라고.”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동창이에요.”
* * *
박 비서님께 뭔가를 부탁하면 참 쉽고 빠르게 해결이 됐다. 며칠 만에 박 비서님은 본가에서 보낸 음식들과 함께 집으로 찾아왔다.
“회장님께서 얼굴 한번 보라고 하셔서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옛날보다 주름이 많이 늘어 있었다.
“아버지가 웬일이시래요. 들어오세요. 아저씨.”
“감사합니다.”
능숙하게 냉장고를 채우는 박 비서님을 보면서 식탁 의자에 앉았다. 대학 입학 전까지만 해도 자주 봤었는데 내가 분가를 한 뒤로는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대강 정리를 끝내고 집에 좀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한 뒤에, 박 비서님은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부탁하신 겁니다. 얼굴 보는 김에 프린트해 왔어요.”
그가 건넨 서류 봉투는 얄팍했다.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뒷조사라고 하기에는 서류 봉투 안에는 종이 몇 장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며칠 만에 종이 몇 장으로 도하의 지난 십 년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세상이 불공평하고 그 원리가 도하와 내게 적용이 된다는 건.
불행과 행운은 주사위 게임이다. 그냥 주사위를 통 안에 넣어서 흔들면 누구는 일이 나오고 누구는 육이 나오는 식이다. 도하가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고 내가 특별히 잘난 것도 아니다. 누군가 연속으로 육을 받으면 누군가는 연속으로 일을 받는 게 확률상 맞는 일이겠지.
그니까 그게 왜 도하였는지 묻고 싶었다. 나는 고난이 영혼을 성장시킨다는 속설을 믿지 않는다. 아픔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아프지 않아도 성장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누구나 사랑만 주고 싶은 법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지금도 가난한, 이름 모를 사람들과 제 3세계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동기들의 말처럼 위선자가 맞다. 나는 그냥 왜, 하필, 도대체,
도하한테 드리워진 부사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박 비서님께 문득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세요?”
“고등학교 때 한참 붙어 다니셨잖아요.”
“그거 말고요.”
난감한 얼굴을 한 박 비서님이 애매하게 웃었다.
“그냥 언젠가 다시 보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요.”
그때 얼이 빠져 있던 걸 박 비서님은 알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열여덟 살의 바보같이 들뜨고 행복했던 나를. 얼굴을 찡그리지도 미소를 짓지도 못한 채 서류 봉투만 노려보다가 결국 마주 웃는 걸 택했다.
“감사합니다.”
박 비서님이 돌아가고 서류 봉투를 쥔 채 한참을 고민했다. 도하의 입이 아니라 그냥, 종이 몇 장으로 인생을 들여다보고 아는 척을 하는 게 옳은 일일까? 나는 한숨을 쉬다가 또 망설이다가, 고작 열 장으로 요약되는 인생을 들여다보았다. 얄팍하다.
도하의 삶인지 내 마음인지 모를 것이 얇고 하찮다. 나는 천천히 검은 글자들을 읽어 내렸다. 고등학교는 졸업했을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도하는 검정고시를 치렀다. 내가 떠난 뒤로 한 달 뒤에 도하는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집을 나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얼마 안 있어서 낯선 사람의 집에서 얹혀살면서 돈을 벌었다. 차라리 그 사람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도하는 번 돈을 얹혀살던 사람에게 빼앗기고 맨몸으로 나왔다. 고시원에 들어가 살다가 또 누군가에게 얹혀살다가를 반복하면서 보증금을 겨우 모아 단칸방을 얻었다. 그리고 몇 달 전 같이 살던 남자가 자신의 명의로 사채를 빌렸다는 걸 알게 된다.
단조로운 반복과 고단하고 무던한 삶. 행복하기에는 너무 짧고 간헐적인, 거칠고 척박한 호흡 같은.
모르겠다. 도하의 삶을 들여다보면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길을 잃은 기분이다.
도하에게 연락해서 당장이라도 이 집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런데 뭐라고 하지? 네가 너무 불쌍해서 데려오고 싶다고? 네 빚 따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널 도와주고 싶다고?
구차하고 구질구질하다. 도하와 같이 살던 남자들도 그 비슷한 말들을 했을 걸 생각하면 그 말을 하느니 죽어 버릴 것이다. 도하가 혼자 사는 걸 알면서도 연락을 망설이는 이유는 도하가 내게 지현성과 같이 산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임에도 굳이 같이 산다고 한 건 나를 밀어내려고 한 이야기가 분명했기에.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사랑을 고백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과 잘 거냐고 물어보던 도하가 잊히지 않는다.
내가 도하를 망쳤다. 나 때문이다. 왜 나는 독하게 도하를 끊었을까. 지현성의 말 같은 건 무시할걸. 도하를 욕심내지 말걸. 그냥 친구로 남을걸.
연락을 끊으면 도하가 행복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온할 줄 알았다. 내 판단이 도하를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야속하게 회사에 가야 했다. 들뜬 사무실의 분위기를 내내 알지 못하다가 달력을 보고 12월 31일이라는 걸 알았다. 도하와 만난 지 딱 일주일이 되던 때였다.
괜히 야근을 자처했다. 다들 이상한 눈으로 봤지만 나를 괴롭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밖이 어둑해지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창밖을 보자 무언가가 나풀거렸다.
첫눈이다.
1년의 마지막 날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12시 타종을 앞두고 사람들이 첫눈의 기쁨을 서로 나눴다.
홀린 것처럼 핸드폰을 열었다. 전화번호부에는 도하의 이름이 있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린다. 도하에게 할 말을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도하가 나를 밀어내도 상관없다. 그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무리 나를 밀어내고 원망하고 욕을 해도…….
화면을 들여다보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도하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 버튼을 슬라이드 했다. 몇 번 반복했지만 제대로 전화를 받을 수 있게 된 건 다섯 번 정도 시도한 뒤였다. 통화가 연결되고 숨소리가 들렸다.
“안녕. 도하야.”
울지 않으려고 애쓰며 인사를 건넸다. 도하는 아무 말도 없이 숨소리만 흘려보냈다.
―나 너희 회사 근처 공원이야.
“뭐?”
나는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너, 거기 왜 있어. 아니, 내가 갈 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 도하야.”
―…….
“아니야. 끊지 마. 도하야. 내가 갈게. 전화 들고 있어.”
급하게 문을 잠그고 회사를 뛰쳐나왔다. ID카드를 가져다 대는데 인식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발을 동동 굴렀다. 회사 근처 공원이라면 딱 한 군데가 있었다. 빌딩 숲 사이에서 조경을 위해 서울시에서 만든 작은 공간이었다.
공원에서 도하를 발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여전히 나와 도하는 통화 중이었다. 도하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핸드폰 안에서 들렸다. 눈이 마주쳤다.
“너 신발 어디 갔어.”
도하는 맨발이었다. 눈을 밟은 발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신발을 벗어서 도하에게 신기려고 했다.
“도하야. 발 너무 차. 이거라도 신어.”
“왜 연락 안 해?”
도하가 나를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이젠 나한테 실망했어?”
“실망을 내가 왜 해. 안 했어. 그니까 제발 이거 신자. 발이 너무 차.”
내가 무릎 꿇고 애원했다. 도하는 뿌리를 내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도하를 들어서 벤치에 앉히고 맨발에 내 구두를 신겼다. 도하 대신 내가 맨발이 됐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도하는 가만히 앉아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했다.
“나한테 실망했어?”
“아니야. 도하야.”
“실망해서 없어졌잖아……. 너……. 사라질 거야?”
“무슨 소리야. 나 어디 안 가.”
“너 갔잖아. 나 버리고 가 버렸잖아.”
도하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벌벌 떨었다. 추위에 몸서리치는 표정이었다. 북쪽에서 눈 폭풍이라도 몰아닥치는 것처럼 추워했다.
“네가 날 놓고 갔잖아. 먼저 떠난 건 너면서……. 네가, 날…….”
도하가 헐떡였다.
“또 가는 거야?”
깨달음이 나를 후려쳤다. 도하는 지금 열여덟 살을 헤매고 있었다. 내가 도하를 버리고 간 그때. 도하는 추위에 질린 게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서 떨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데. 네가 말도 없이 떠난 이후로……. 나는 학교를 못 나갔어. 너무 아파서. 아파서 죽고 싶었어. 개새끼야…….”
도하가 내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나는 도하가 때리는 대로 맞아 줬다. 도하의 주먹질은 형편없었다.
“미안해.”
“개새끼.”
“내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연신 사과만 반복했다. 울음 섞인 소리가 나를 후려쳤다.
“네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안 오잖아. 반 애한테 핸드폰을 빌려서 전화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알아보니까 전화번호를, 흐, 바꿨다고……. 난 핸드폰도 없는데……. 왜 그랬어. 나한테 왜…….”
“…….”
“왜 나를, 떠났어…….”
“내가 멍청해서 떠나도 괜찮을 줄 알았어.”
“…….”
“넌 지현성이랑 사귀고 있었으니까, 내가 오면서 걔하고 사이가 벌어져서 내가 방해물 같았어. 내가 없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어. 지현성이 널 지켜 주고 있었으니까. 널 껴안을 애는 걔니까…….”
하고 싶은 말들이 주체 없이 흘러나왔다. 멈출 수가 없었다.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하듯이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네가 미술실에서 울고 있었을 때……. 그때부터 난 네 애인이 되고 싶었어. 네가 밤에 울면 같이 옆에 누워서 안아 주고 싶었고 네가 다치면 내가 대신 화내고 소리 지르고 싶었어. 널 때리던 사람들이 나를 때리는 사람들이었어.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그냥 그러고 싶었어…….”
횡설수설하면서 도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정말로 널 좋아해……. 정말로……. 네가 아픈 게 너무 싫어. 날 좋아해 달라는 말은 안 할게. 그냥 날 이용해 줘. 네 버팀목이 되게 해 줘. 정말이야…….”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모르겠다. 도하의 가슴이 들썩였다.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다.
“내가…….”
도하가 입을 열자 도하의 목소리를 들으려 숨소리도 멈췄다. 도하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정말로 나는 상관없었다. 도하가 주정뱅이든 눈이 없든 다리가 아프든 목소리를 떨든지 간에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든지 상관없어……? 내가 뭘 하고 살았고 몸은 어떻게 굴렸고…….”
“제발…….”
도하가 자학하는 말을 꺼낼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도하가 알아주지? 어떻게 해야 도하가 아프지 않지? 나 때문인가? 정신이 없었다. 도하가 저렇게 말하는 걸 멈추고 싶었다.
“그러지 마……. 네가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상관없어. 고등학교 때부터 쭉 좋아했어. 널 교실에서 처음 보던 순간부터 좋아했어. 네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뭐든 네가 살기 위해서잖아. 그냥 살아남으려고 그런 거잖아. 널 떠나서 미안해. 다 내 탓이야. 널 버린 내 탓이야. 네 말대로 내가 널 버렸잖아. 나는, 나는 그러니까……. 단지…….”
“…….”
“널 사랑할 뿐이야…….”
도하의 가슴이 더 들썩였다. 이를 앙다물고 볼이 벌게졌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도하는 울지 않았다. 그 모습도 너무나 애처로워서.
손톱 밑을 송곳으로 저미는 것 같다. 도하를 잠시나마 잊었던 순간이 나를 찌른다. 모든 게 괴로워 몸서리쳐졌다. 도하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도하를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뺨이 바람에 내리 찍혀서 벌겋게 달아오를 때였다. 어느 순간, 가만히 고독한 겨울나무처럼 서 있던 도하가 움직였다. 느릿한 몸짓이었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도하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도하는 멈추지 않았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겁먹은 들짐승처럼, 아침을 깨우는 태양보다 천천히,
도하의 손이 내 허리 위로 올라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막 태어난 것처럼,
나는 그렇게 울었다.
Rebirt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