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화끈 열이 오르고 말았다. 뺨이 발그레해졌다.
남자답게, 강하게 자신을 안아 주었던 그. 그러면서도 한없이 배려해 주었다. 더없이 소중하게 안아 주었다. 바로 그 남자가 지금 옆에 잠들어 있었다.
벗은 등.
자잘하게 근육이 박힌 그 넓은 등이 보였다.
‘엎드려 자는 거 봐. 애같이….’
하얀 시트가 허리 바로 위까지 덮여 있다. 그녀 쪽으로 돌려져 있는 얼굴. 귀공자 같은 외모, 깎아 놓은 듯 시원한 콧날과 턱 선이 아름답다. 웬만한 여자보다 더 긴 속눈썹이 가지런히 아래로 감겨 있었다.
지하는 손 뻗어 만지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으며 마주 보고 누워 그의 얼굴을 실컷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침실에선 처음 자 보는 것 같다.
그의 향기.
시원한 스킨 냄새가 은은하게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너무도 익숙해진 그의 체향. 없어지면 견디기 힘들 것 같다.
어젯밤 몇 번이고 자신의 입술에 포개지던 그의 입술. 그 선이 멋진 굴곡을 그리고 있었다. 청결한 머리카락을 흩트린 채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위험한 남자.
그렇게 혼을 쏙 빼놓듯 키스의 비를 퍼부으면 난 어쩌라고.
그와 함께 나누었던 밤이 너무도 소중했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아낄 수 있는지, 얼마나 부드러울 수 있는지 어젯밤 지하는 그를 통해 느꼈다.
이 감각, 이 마음을 그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하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뭔가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운 감각에 그녀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입술을 건드리고 있는 촉촉한 무언가. 동시에 조심스레 뺨을 쓸어 주는 손길.
커다란 손.
바로 시류의 것이었다. 잠이 바로 저만치 달아났다. 이미 깨어 있었지만 지하는 너무도 기분 좋은 감각에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꿈에서 반응하듯 그의 입맞춤에 응했다.
부드럽게 섞이는 입술, 따뜻한 혀.
그의 손이 슬립의 가느다란 어깨 끈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어깨로 쏟아지는 키스의 비.
잠든 척 시침 떼는 걸 알고 있음인지 아니면 그냥 힘이 들어간 건지, 그가 약간 심술궂게 쇄골에 이를 세웠다. 살짝 깨물렸다. 그래도 지하는 보란 듯 깨지 않았다. 숨결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납작한 배를 지나고 더 아래로 내려가자 지하가 눈을 번쩍 떴다.
“자, 잠깐…!”
하지만 그 순간 양쪽 손목이 잡혀 침대에 눌려졌다.
시류가 지하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위험한 남자.
사람 잡을 미소.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졌다.
지하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가 먼저였다. 입술이 막혀 하려던 말이 모조리 그의 입술 안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다시 키스가 시작되었다. 아니, 부끄럽고 두근거리는 어젯밤으로… 돌아갔다.
***
경희는 난데없이 지하에게 불려 와 주방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하가 뜬금없이 하는 말이 의아했다.
“오늘 아침에도 남편한테 밥 얻어먹었어요.”
“아…. 네에. 잘하셨어요.”
“잘하셨어요, 할 게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대체 어떤 반응을 바라는 건지?
“상무님도 바쁘신 분인데 다시 도우미 아주머니를 부를까요? 진작 그러시지. 대체 왜 내보내신 건지 사모님께서도 걱정이 크세요.”
“아뇨. 안 부를 거예요. 난 내 영역에 다른 사람이 침범하는 거 싫어요. 특히 주방!”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오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특히 주방!’이라고 했잖아요. 청소는 내가 하기 귀찮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럼 청소 아줌마도 끊어 버릴까?”
“에고, 아가씨. 그렇게 이것저것 가리실 때가 아니세요. 아, 새 신부가 살림 못하는 거 들킬까 봐 걱정되세요? 그런 거 걱정하지 마세요. 애초에 살림하실 타입도 아니신데. 다 아시고 사모님께서도 전혀 안 가르치신 거 아니겠어요?”
지하는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이 비서님, 요즘 촉이 좀 떨어지죠? 내 말은 요리 선생 붙여 달란 거잖아요.”
“네? 어머, 세상에! 정말 요리를 배우시게요?”
얼마나 놀라는지 감정이 상해 지하가 쏘아보자 경희가 바로 시침을 뗐다.
아무튼 그날 바로 경희가 수소문을 해 지하는 요리 선생을 불러 하루에 세 시간씩 수업을 받았다.
“나도 할 수 있거든?”
다행히 선생님의 칭찬도 받고 실력도 나날이 향상되어 갔다.
“정말 잘하시네요. 칼질이 아주….”
놀러 왔던 경희도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주어 지하는 더욱 으쓱해졌다.
“상무님껜 실력 발휘하셨어요?”
“아직. 하지만 조만간 보여 줄 생각이에요. 아마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질걸요?”
뿌듯한 지하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자 경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참, 그때 가방 건은 잘 처리되셨어요?”
“네? 아… 네! 그럼요.”
“어머, 다행이네요.”
“좀 힘들긴 했지만,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아주 소중하게 귀하게 잘 지켜낼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웃었다. 달보드레한 미소.
경희는 그 미소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요 근래 들어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정웅의 건강이 악화된 후 늘 슬픈 얼굴만 본 것 같았는데.
‘아마도 상무님의 영향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경희였다.
그날 저녁, 지하는 시류가 퇴근하자마자 소매를 쥐곤 주방으로 끌고 갔다. 의아한 얼굴로 따라갔던 시류가 주방을 보자 더욱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노란색 에이프런을 두르고 있었는데, 싱크대 위에 온갖 야채들이 놓여 있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육회비빔밥이랑 시원한 바지락으로 만든 맑은 조개탕이에요. 비빔밥 재료는 소고기랑 애호박이랑 콩나물, 표고버섯, 노란 파프리카, 당근, 미나리. 맞죠?”
큭.
시류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더니.
“제가 할게요.”
“아뇨? 바쁜 사람한테 얻어먹는 것도 염치가 있죠. 그래서 매일 몰래 배웠어요. 나 요리 수업 받고 있었거든요.”
“아….”
사실 시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지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신이 먼저 알고 있었다. 물론 경희가 물어보기도 전에 재깍재깍 보고하는 경향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녀가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을 때 시류는 좀 뜨악했었다. 괜히 덤벙대다가 다칠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그녀가 애쓰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요리 같은 거야 자신이 하면 되는 건데.
하지만 야무지게 재료를 준비해 놓고 저렇게 들뜬 얼굴로 좋아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행복하면 자신도 행복하다.
“자, 채 썰게요.”
그러더니 그녀가 정갈하게 채를 썰기 시작했다.
딱딱딱딱.
도마 소리가 경쾌했다.
“짜잔! 어때요?”
애호박 하나를 썰어 놓고서 엄청난 작업을 한 듯 매우 뿌듯해했다. 초롱초롱 칭찬을 바라는 표정으로 들여다본다. 당연히 칭찬해야지! 하듯.
하긴, 배운 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데 그 짧은 시간에 꽤 놀라울 정도의 발전이긴 했다. 팬 사용법도 모르던 처음에 비하면….
“잘하셨습니다.”
“그쵸? 내가 봐도 채썰기는 하산해도 될 거 같아요.”
시류가 은은하게 웃었다.
“자, 그럼 그 담부턴 강 상무님이 하세요.”
“네?”
“채썰기까지 배웠거든요. 그 담은 아직 진도가 안 나가서요. 그니까 나머진 강 상무님이 해야죠.”
시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재킷을 벗고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곤 손을 씻었다. 투덜거리는 잔소리 하나 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그가 지하는 새삼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사람이 참, 인자하단 말이지.
“그래도 채썰기까진 내가 한 거예요!”
사랑스러운 건 사랑스러운 거고, 당부는 잊지 않았다.
요즘은 요리하는 남자가 대세라던가? 하긴, 그런 거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허리 아래로 단정하게 에이프런을 두르고서 능숙하게 요리 재료를 손보는 시류는 멋있었다.
늘 딱딱한 모습, 혹은 일하는 모습만 봐서인지 주방에 선 그가 신선하다고 해야 하나? 팬을 다룰 때 둥둥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자연스럽게 불거지는 팔뚝 근육이라든지, 섬세한 손가락이라든지, 한 손을 허리에 얹고서 인덕션 앞에 서 있는 키 큰 뒷모습이라든지, 그 넓은 등 같은 게 말할 수 없이 섹시했다.
하얀 셔츠, 긴 다리, 깔끔한 흑발, 각진 어깨, 그런 것들이 정말이지 구경할 맛이 났다.
“아… 진짜 육회비빔밥이네요.”
잠시 후, 깔끔하게 요리를 완성한 시류가 먹음직스러운 비빔밥을 지하의 앞에 놓아 주었다. 개운해 보이는 맑은 바지락탕도 그렇고.
“좀 더 빨리 배울게요. 담번엔 완성까지 쭉 한 번에 할 수 있게.”
“전 당신이, 이 집 주방에 훈기를 돌게 해 주는 것 자체로도 좋습니다.”
아… 뭐야. 감동적이게.
“진짜 접대성 멘트 잘해.”
지하가 괜스레 투덜거렸다.
“그렇게 좋은 소리만 하지 말아요. 실력이 안 늘거든요. 강 상무님은 보살이에요? 왜 칭찬만 해요? 육회비빔밥 한다더니 애호박만 썰었으면 ‘으이그!’ 하는 게 보통이지.”
“흠, 그런가. 그렇군요.”
애초에 ‘지적질’ 할 마음도 없다, 저 남자는. 저렇게 오냐오냐, 다 받아 주면 버릇 나빠지는데.
“그러는 당신은 왜 굳이 살림을 배우려 드세요? 그냥 편하게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되는데. 편하고 싶은 게 보통일 텐데.”
“흠, 그런가. 그렇군요.”
그래서 지하도 똑같이 복수해 주었다. 시류가 한 방 먹은 얼굴을 했다.
피식.
지하가 웃었다.
쿡.
시류도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지하와 시류는 함께 설거지를 했다. 물론 서투른 지하를 위해 시류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고무장갑을 낀 시류의 모습에 결국 지하가 빵 터지고 말았다.
“진짜 안 어울리거든요. 강시류 상무가 빨간 고무장갑이라니.”
“왜요? 이거 편합니다.”
“아우, 뭐야? 그런 눈에 띄는 웃겨 빠진 걸 할 것 같지 않았단 말이에요, 내 말은.”
시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거 쓰고 설거지했었는데 못 보셨어요?”
“에이, 그동안은 내가 전혀 관심 없었잖아요. 뭘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절레절레.
“근데 진짜 빨간 고무 미친 듯 안 어울려.”
여전히 마구 웃고 있는 그녀. 그 미소가 한없이 반짝거려 시류가 웃는 지하의 입술에 쪽 키스했다.
지하가 멈칫했다.
이번엔 좀 더 길게 키스했다. 그의 진지한 입맞춤에 빨간 고무장갑의 존재 같은 건 이미 웃음버섯으로서의 효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개수대로 쏴아 떨어지는 물을 잠가야 한단 것도 잊은 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시류가 고무장갑을 벗었다. 그녀의 목을 양손으로 감싼 채 더욱 짙은 입맞춤을 이어 갔다. 싱크대에 허리를 기댄 채 지하의 몸이 점점 뒤로 기울어졌다. 시류의 호흡도 점점 거칠어졌다.
결국 그가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뒤로 손을 뻗어 수도꼭지를 꾹 눌렀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졌다.
지하가 그런 그의 뺨을 감쌌다. 애틋한 눈으로 그를 아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들었지? 서주아 돌아온 거.”
왜 이런 순간에 재욱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걸까? 행복이 커져 가면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그런 말을 믿고 겁이 나서는 아닐까?
“인터뷰에서 공공연하게 자기 연인에 대해 거론하는 거 알아, 몰라? 그거 강시류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두 사람은 현재 진행형이야. 넌 그 사이에 낀 수단일 뿐이고. 네 결혼, 눈속임이란 거 모르는 사람 없어. 강시류는 널 사랑하지도 않아.”
바보 같은 남자.
그건 남이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본인 당사자뿐.
사실 불안한 건 이유가 있었다. 어제 우연히 보게 된 그의 휴대폰.
그가 샤워하러 들어갔을 때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었다. 별생각 없이 화면을 흘끗 보고 지나쳤지만 결국 다시 돌아가서 들여다봤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서주아였다.
지하는 물끄러미 그 폰을 쳐다보았다.
받진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뭔가를 알고 싶지 않다.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할 것 같단, 그런 직감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진동이 끊어지자 왜 그 순간 그런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하는 통화 목록을 열어 보았다.
“나도 어쩔 수 없구나. 강시류를 안 믿고 있….”
중얼거리던 지하가 멈칫했다. 통화 목록에 뜬 번호들. 군데군데 수십 통씩 연달아 찍혀 있는 건 똑같은 번호였다. 바로 서주아의 번호. 그 모든 게 다 부재중 표시가 되어 있었다.
거절한 건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류는 그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걸려 온 주아의 전화를 한 통도 받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의심한 걸 반성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스스로 지켜본 것 같아서.
‘난 설마 이 사람을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사람으로 본 건가?’
그게 맞다면, 자신은 세 치 혀를 굴리는 남자에게 마음껏 속은 게 된다. 자신의 자존감도, 강시류란 남자의 인격도 한꺼번에 진창에 빠뜨리는 그런 짓을 해 버릴 뻔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참 미안했다.
두 손으로 시류의 뺨을 만지고 있던 지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나, 무슨 옷 입고 있어요?”
그녀는 민트색 블라우스와 검은 진 차림이다. 머리를 높게 묶고 향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바닐라 향기. 연하게 화장을 하고 있고, 입술은 반짝거린다. 코끝의 작은 점이 예쁘다. 손톱은 깔끔하게 손질해 투명한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다. 가느다란 목걸이가 반짝거리고, 팔찌는 언젠가 그가 준 생일 선물이다. 시류는 하나하나 새기듯 지하를 바라보았다.
“알겠죠? 이 옷 입은 사람이 나예요. 내가 걸치고 있는 거, 내가 잘하는 헤어스타일, 내가 좋아하는 향수, 나 이렇게 입고 이렇게 화장하고 이렇게 생겼으니까 똑똑히 기억해요. 알았죠? 이게 나예요.”
시류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차분하게 내리감았다.
경고인가. 아니, 그녀만의 당당함이라고 생각한다. 헷갈리지 말라는 무언의 권고. 헷갈릴 것도 없는데.
하지만 그녀의 불안을 이해한다. 재욱이 했던 말들 중, 제발 지하에게 하지 말기를 바랐던 말들이 있었다. 바로 주아에 대한 이야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부 그날 재욱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알고들 있겠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언젠가는 지하에게 진실 그대로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아니, 절대 떠올리기 싫은 그 과거의 악마를 털어놓을 수 있을까? 자신 안에 숨어 있는 무서운 피의 기억을….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피가 묻은 이 손으로 그녀를 안을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안았다. 사는 내내 겨울이었던 자신. 내가 그녀의 봄을 빼앗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부디 내 과거로 인해 아프지 않기를….
“눈을 감아도 기억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시류의 모든 게 무장해제 되는 순간이었다.
“안아도, 되겠습니까?”
움찔.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면 어쩌잔 건지.
“뭐, 살짝 안는 것 정돈….”
얼굴을 붉히는 지하를 꽉 안아 버렸다. 강한 팔의 힘이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하지만 그 압박이 너무도 기쁘다.
심장이 조여 온다. 두근두근.
공기의 움직임이 변해 가는 걸 느꼈다.
시류가 그녀를 원하는 마음으로 키스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더 그녀가 필요하다. 시류가 그녀를 덜렁 안아 들었다. 지하의 다리가 시류의 허리를 둥글게 감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서로에게 쏟아부었다.
사랑을 나누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지하는 새벽녘 식은땀을 흘리며 깨고 말았다. 비명을 삼킨 채 가슴을 꾹 누르며 옆에서 잠든 시류를 돌아보았다. 온몸이 젖어 있었다.
악몽을 꿨다.
요즘엔 전혀 꾸지 않던 그 악몽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왜….”
이제 전처럼 그의 과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겠다고 결정했으니 이 남자를 믿고 보호해 주고 감싸 줄 것이다. 마음의 핸들을 그렇게 잡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내 남자를 공격하겠는가. 내 마음을 내가 아니면 누가 공격하겠는가? 사람에게 참견을 받는 것도 싫은데 이깟 꿈 따위라니.
그럼에도 불안했다. 자신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 때문에.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다음 날, 주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
지하는 커피숍에서 주아와 앉아 있었다.
실력 있는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
언론에서 부추기는 게 허튼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에스닉(ethnic) 패턴의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가슴 위로 차분하게 드리운 채 앉아 있는 그녀는 우아했다.
눈은 올라간 고양이 눈 같고 얼굴은 지하만큼이나 하얬다. 반짝이는 입술의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결 좋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겼다. 그 하얀 손가락에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반지가 끼어 있었다.
지하도 만남이 만남인지라 꽤 신경을 쓰고 나왔다. 다만 평상시와 달리 기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좀 센 소재를 선택했다. 퍼프 니트와 레더 스커트를 입고, 레트로풍의 스틸레토 힐을 신었다.
지하는 힐을 까딱거리며 팔짱을 낀 채 주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물론 주아도 전혀 물러섬 없이 지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두 여자는 그렇게 한 치도 밀림 없이 막상막하로 꾸민 모습으로 서로를 꼼꼼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그 조금도 물러나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지하는 이미 주아를 적으로 간주했다.
“일부러 전화까지 주고, 안 그래도 한번 만나야지 싶었는데.”
“그런가요?”
“내 번혼 어떻게 알았나요?”
“재욱이한테 물어봤어요. 기꺼이 알려 주더군요.”
지하가 피식 웃었다.
이 바보 같은 남자.
“그나저나 절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름 정돈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요. 정식으로 인사하죠. 강시류 상무의 아내인 한지하예요.”
원 펀치.
주아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뭘 벌써 그 정도 갖고.
지하가 차갑게 조소를 띠었다. 적어도 결혼 전 자신과 이런저런 소문이 있는 남자의 아내에게 먼저 전화할 정도면 저것도 제정신은 아닌 거다. 좋은 이유는 아니겠지. 그러니 먼저 치고 들어가야겠단 생각밖에 안 들었다.
“서주아예요. 시류 오빠완 오랜 인연이 있죠. 아내인 한지하 씨보다 더.”
저럴 줄 알았지. 아니나 다를까, 서주아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더 깊은 인연을 주장하고 있다 이건가?
네가 아주 나한테 죽여 달라고 용을 쓰는구나?
“차암, 매너라고는 없네요, 서주아 씨. 지금 한 말, 가정을 이루고 있는 한 남자의 아내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보다 나이도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어린 사람한테 우습게 보일 행동을 함부로 하면 안 되죠.”
“듣던 대로 시원시원하네요. 부족할 거 없이 태어나서 거칠 것 없이 자랐으니 당당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나보다 어리다면 예의는 좀 갖추는 게 어때요?”
“예의는 갖추어도 될 상대에게만 갖추는 거라고 교육받아서요. 날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가요?”
“글쎄요, 시류 오빠에 대해 말해 둘 게 있어서?”
“친동생도 아니면서, 그 호칭 좀 듣기 싫네요. 말끝마다 오빠, 오빠.”
“아무리 한지하 씨가 시류 오빠 부인이라고 해도 나완 관계없으니까요. 당신의 남편이기 이전에 내 오빠였으니까.”
지하의 이마에 살짝 핏대가 섰다.
원 펀치 날리고 한 방 먹었다.
내 오빠라….
주아가 차분하게 홍차를 들어 마시곤 내려놓았다.
“그래서. 언제 끝낼 건가요?”
“뭘요?”
“그 결혼.”
지하는 어이가 없었다. 기막힌 소리를 들어서 잠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한참을 이리 갸웃, 저리 갸웃 하다가 지하가 되물었다.
“굳이 끝내야 하나요?”
주아가 피식 웃었다.
“놓지 않겠단 소리로 들리는군요.”
지하는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 말했다.
“생각보다 더 기막힌 소릴 들어서 지금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 중인데. 이봐요, 주아 언니. 어쨌거나 제 남편이랑 연관 있는 거 같으니까 언니라고 불러 줄게요. 아무튼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동생한테 이러면 안 되죠. 지금 제정신이에요?”
“시류 오빤 나한테서 벗어나려고 당신 이용하는 것뿐이에요.”
지하가 아무리 선동해도 주아는 차분했다. 오히려 뭔가를 꾹꾹 눌러 참듯 붉어진 눈으로 진지하게, 아니, 절실하게 말을 이었다.
“시류 오빠가 사랑하는 건 나예요. 다만,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걸 드러내지 못한 것뿐.”
“…죄책감?”
“나 입양됐어요. 아홉 살에 기관에 맡겨졌다가 양부모님을 만났죠. 좋으신 양부모님 밑에서 사랑, 지원 다 받으면서 컸죠. 잘 풀린 케이스라고 할까요? 재능도 알아봐 주시고, 늦게 시작한 바이올린으로 이렇게까지 성공했으니까.”
난데없는 고백 타임에 지하는 멈칫했다.
“그래서요?”
“입양되기 전….”
“내가 왜 지금 언니의 슬픈 얘기를 들어야 하는 건데요?”
“입양되기 전, 나에게 있어 가족은 악마 같은 아버지뿐이었어요. 아니, 짐승 같은.”
지하가 멈칫했다.
“일이라곤 한 적 없이 가족을 괴롭히던 사람. 가족이라곤 엄마와 나뿐이었지만, 엄마도 결국 아버지 때문에 병을 얻어 죽었죠. 그때부터였어요. 엄마한테 가하던 폭행을 나한테 하기 시작한 건.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았어요. 처음엔 술 취했을 때만, 그러다 점점 취하지 않았을 때도…. 얼굴을 맞고, 팔에 멍이 들고, 살이 찢어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어린애한테. 그런 사람이었어요, 내 아버진.”
지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서, 적인데도 눈물이 날 뻔했다.
가정 폭력, 아동 학대, 말만 들어 봤을 뿐 지하가 알고 있는 세상엔 없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주아에게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이입되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눈물이 꽉 차오르는 그때 주아가 말을 이었다.
“나랑 똑같은 사람이 있었어요. 동네 오빠였죠. 그 오빠도 내 아버지와 똑같은 아버지를 갖고 있었어요. 늘 술 취한 자기 아버지한테 맞고 학대당하고, 진짜 말썽꾸러기에 학교에선 말 못 할 정도의 문제아였죠. 머리는 좋은데 환경이 지옥이었죠. 늘 싸우고 때리고 자기보다 덩치 큰 오빠들하고도 싸워서 이 부러뜨리고, 팔 부러뜨리고….”
지하가 저도 모르게 굳어 버렸다.
“하지만 나한테만은 다정했어요. 내 사정을 아니까. 그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그 오빠가 있어서 굶지 않았죠. 아버지한테 맞아서 꼼짝도 못 하는 날 업고 병원에도 달려갔어요. 친구들한테 놀림받으면 나서서 구해 주고, 때려 주고, 혼내고, 지켜 줬어요. 어느 땐 내가 말짱한 날이면 그 오빠가 눈에, 목에, 팔에 멍이 들어서 오곤 했어요. 그 오빠 아버지도 악마였으니까. 우린 악마의 자식들이었어요.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지하의 얼굴이 덜덜 떨렸다.
“서, 설마….”
“시루, 그 오빠 이름이었죠. 지금은 모두 강시류라고 알고 있는.”
“……!”
“지하 씬 아무것도 모르고 있죠? 아마 그 어느 것 하나 상상할 수조차 없을 거예요.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옥이었는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그래서 그 오빠가 나한테 얼마나 빛이었는지, 태양이었는지.”
“그래서…. 지금 와서 그 사람을 돌려받겠단 건가요?”
“아니, 그는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어요.”
“도대체….”
“날 위해 악마를 죽여 줬으니까.”
순간 지하의 눈이 파동 쳤다. 그녀는 잠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지, 지금 무슨….”
“그날은 또 이유 없이 맞았어요. 다시 생각해 봐도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설거지도 다 했고, 방 청소도 다 했고, 빨래도 다 했는데. 아… 비가 왔었지.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난 또 맞았죠. 시루 오빨 부르며 마당까지 도망 나온 날 쫓아와서까지 때리더군요. 그것도 모자랐는지 어느 순간 부엌칼을 갖고 나오더군요. 너랑 나랑 같이 죽자고. 그때 오빠가 왔어요. 그 악마를 말렸지만, 우린 더 맞았어요. 어린 게 벌써 남자애랑 희희덕거린다고, 창녀나 될 거라고.”
“자, 잠깐만….”
“아빠가 오빠한테 달려들었어요. 그런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니 아빠 배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빨간 피가. 오빠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어요. 그건 실수였어요. 아마도 피하려다가 아빠를 찌른 거였겠죠.”
지하는 굳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쿵쿵.
단지 심장이 뛰는 소리만 겨우 들렸다.
“날 위해 아버질 죽여 줬어요.”
“아….”
“알겠어요? 그 사람이 사랑하는 건 나예요. 다른 사람일 수가 없어요. 당신과 결혼한 건, 당신 아버지에게 은혜 갚고 싶어서일 뿐이에요. 그건 그 사람한테도, 당신한테도 너무 끔찍하잖아.”
주아가 눈시울이 붉어져서 간절하게 사정하듯 말했다.
결국 지하의 눈에서 눈물이 툭 터졌다.
시류가 살인한 이유. 그게 내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늘 궁금했었다. 아무리 예전 일이라고 해도,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살인이란 걸 할 수 있었을까? 단지 반항아, 손쓸 수 없는 문제아,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어쩌다가 살인 사건과 연루된 건가?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알겠다.
그 모든 것엔 서주아가 관계돼 있었다.
서주아, 강시류의 죄책감의 근원.
지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런 지하를 바라보던 주아가 말했다.
“당신은 왜 여태 그걸 몰랐을까요?”
“…그 사람이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알려고 하지 않았던 건 아니구요? 살인 같은 것, 그런 무섭고 두려운 얘기, 당신 세상과는 관계없는 얘기니까.”
“그것도 맞겠죠.”
서주아의 마음도 알겠다. 절대 흥분하지 않고서 차분하게, 아니, 절절하게 그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사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됐으니 됐어요. 하지만 그것과 내가 그 사람을 놓아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예요.”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을 위해선 누군가를 해쳐야 했지만, 날 위해선 누구도 해치지 않게 할 테니까.”
지하가 야무지게 말했다.
“꼭 보호받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누가 그래요? 내 아버지가 그 사람을 보호했듯이 나도 그 사람을 보호해 줄 거예요. 난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도 날 사랑하니까. 언니는 부정하고 싶겠지만 난 그 말을 믿어요. 지금 와서 그 사람이 나한테 보여 준 진심, 말과 표정들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요.”
“거짓말은 아니겠죠. 당신 옆에 있으면 적어도 과거의 공포에서 헤어날 수 있으니까.”
지하는 잠깐 흔들렸지만 말을 이었다.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예요. 모르겠어요? 내가 은혜로 그 사람을 옭아매고 있다면 당신은 죄책감으로 그 사람을 옭아매고 있어요. 그 남잔 내 거예요!”
이렇게 소유욕을 주장한다는 게 유치하단 건 알았지만.
“그 사람은 앞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언니가 강시류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과거에 잡아 두지 말아요. 후퇴시키지 말아요.”
왜 그렇게 아버지가 그를 과거에서 건져 내려고 했는지, 왜 그렇게 믿어 주고 현재의 능력 있는 강시류를 높이 사고 강조했는지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가 너무 아까워서, 과거의 발목에만 잡혀 있기엔 강시류란 남자가 너무 안타까워서.
자신도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과 똑같았다. 그 남자의 현재와 미래만 강조하고 싶다. 지금 가진 것보다 더 잘될 수 있는 남자라고 북돋워 주고 싶다. 그 끔찍한 과거로 돌려보내기 싫다.
“후퇴… 라고 했어요?”
“그래요. 똑같이 강시류란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하는 말이에요. 언니 마음도 이해하기 때문에, 언니가 진심이란 걸 알기 때문에 여기까지 말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해요. 알아들었죠?”
지하가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주아가 말했다.
“이 반지, 보여요?”
지하가 물끄러미 그 반지를 보았다.
“보여요.”
“어때 보여요?”
“글쎄요. 이미지랑 좀 안 어울린단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당연하죠. 아주 오래된 패물 반지니까.”
“후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난데없이 반지 자랑이에요?”
“이거 시류 오빠 어머니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유품이죠.”
지하가 정지했다.
“오빠도 나처럼 엄마가 없었어요. 오빠가 열 살 때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몰랐다. 그런 건….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친부든 친모든, 그 무엇 하나 자신과는 관계없는 그의 세계라고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얼마나 철없었는지 지금에야 깨달았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것도 모를 수 있었을까?
“오빠 아버진, 오빠가 그 댁에 들어가고 2년 뒤에 당뇨합병증으로 돌아가셨죠. 표정 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네요.”
“…….”
“그래서일까요? 오빠가 그 댁 호적에 안 올라간 건? 그 댁에 들어간 직후까지 친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니까?”
지하의 머릿속이 마구 엉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에 대해 나영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무슨 일이 있어서 끝까지 듣지 못했었고, 자신도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땐 아직 시류와 반목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왜 더 묻지 않았던 걸까?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오빠가 부탁했을 거예요. 돌아가신 친어머니의 아들로 있고 싶다고. 그래서 호적까지 바꾸고 싶진 않다고. 내가 들은 이유는 그거였어요. 오빠가 직접 말해 준 이유.”
“……!”
“그만큼 오빤 자신의 엄말 사랑했어요. 폭력적인 가장에게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아들을 위해 살았던 지고지순한,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의 모습. 그런 분이셨어요. 새벽에 식당 일 끝내고 돌아오시다가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셨죠.”
“아….”
“그 소중한 반지를 나한테 맡겼어요. 현장에서 형사들한테 끌려가기 전에, 내가 걱정돼서…. 아무리 짐승 같은 아버지라도 그 아버지조차 없어지면 내가 살아가지 못할까 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이 반지 갖고 살아 있으라고. 견디라고.”
“그거야….”
“지켜 주겠다고.”
지하의 눈이 커졌다.
“자기가 아빠 역할 해 주겠다고 했어요. 오빠 가슴속에 있는 난, 영원히 그때의 불쌍한 소녀예요.”
지하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주아가 너무도 슬픈 눈으로 지하를 바라보다가 절절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이에요. 오빨 놔줘요, 지하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