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는 경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는 지하의 얼굴을 경희가 룸미러로 몇 번이나 살폈다.
“아직 편찮으세요?”
“아, 아니요. 괜찮은데, 왜요?”
“아뇨, 표정이 좀 힘없어 보이셔서. 그나저나 역시 사랑의 힘이 대단한가 봐요.”
“뭐, 뭐가요? 왜요? 봐, 봤어요?”
“뭘요? 전 상무님 오시니 씻은 듯 나으셔서 한 말인데….”
지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혹시 어젯밤 키스하던 걸 들켰나 싶어 뜨끔했었다.
어쩌면 경희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병이 나은 건 그의 덕이었으니까.
그렇게 바라던 키스는 예상보다 더 뜨거웠다. 숨이 막혀 호흡이 곤란해질 때까지도 떨어지지 않던 입술, 이러다가 산소 부족으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어질 때쯤 그의 입술이 지하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미끄러지듯 목선을 더듬는 젖은 입술이 지하를 짜릿하게 했다. 꼭꼭 숨겨 둔 화산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고 시류의 숨결은 더욱 다급해졌다. 언제부터였는지 환자복 안으로 그의 손이 들어와 맨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숨이 탁 막혔다. 지하는 미치도록 그를 원했다. 뜨거움은 도를 넘어섰다.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아찔한 갈구. 허벅지를 통해 느껴지는 시류의 욕망. 지하는 얼굴을 붉히며 시류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쇄골에 입술이 닿았다. 그의 허벅지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지하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 순간 시류가 한숨과 같은 숨결을 터뜨리며 지하의 입술에 다시 열렬히 키스했다. 손이 멀어지고 빈틈없이 겹쳐져 있던 몸도 약간 떨어졌다.
“하아.”
긴 호흡을 흘리며 그가 자신을 다독이듯 지하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그렇게 유혹하시는 거 아닙니다.”
낮은 음성으로 그가 질책하듯 속삭였다. 귓불에서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겁이 이렇게 없어서야.”
귓바퀴에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간지럽고 또 짜릿했다. 지하는 그의 키스가 금세 그리워져 자신이 그의 입술을 유혹했다. 목에 팔을 걸치고서 그의 입술을 머금듯 빨아들였다.
“키스해 줘요…. 계속.”
창피함 따위 벗어던진 채 그를 선동했다. 도저히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시류는 이런 병원에서 사고를 칠까 봐 한없이 자신을 누르고 있었지만, 그 유혹엔 무릎 꿇고 말았다. 지하의 턱을 붙잡고서, 어디가 입술이고 어디가 얼굴인지 모를 키스의 비를 뿌렸다.
그렇게, 입맞춤은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그 사람, 잠은 좀 자고 출근했어요?”
“글쎄요. 제가 병실에 들어가니 그런 흔적은 없던데요. 엊그제랑 어제랑 연달아 간호하시느라 눈도 못 붙이고 출근하시는 것 같았어요.”
“내가 사고뭉치 아내네요.”
“상무님이 아가씰 정말 아끼시는 것 같았어요. 어제 부리나케 달려오셨을 때도 그렇고, 간호하시는 모습도 그렇고. 전 계속 아주 차가운 분이라고 봤었는데 아가씨한테 하는 것 보면 뭐랄까, 좀 다시 봤어요.”
“…….”
“그나저나 제가 퇴원시켜 드려서 서운하지 않으세요? 상무님이랑 같이 들어가고 싶으셨을 텐데.”
“바쁜 사람이잖아요. 거기까지 투정 부릴 정도로 생각 없진 않아요.”
“그런 의도로 드린 말씀은 아닌데.”
“알아요.”
“아무튼 아까 전에도 전화하셔서 어찌나 꼼꼼하게 당부하시는지. 집에 가시면 꼼짝없이 갇혀 계셔야 할 것 같아요. 아주 끔찍하게 걱정하셨어요.”
“원래 지시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잖아요.”
“에이, 쑥스러우신가 보다.”
지하는 경희에게 놀림받는 것 같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시류가 자신에게 더없이 잘해 주는 사람이란 건 안다.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런 그와 키스했다. 그러니 해피 엔딩.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가 되는 거냐 하면 그것도 아니란 사실.
키스했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전보다 더 서먹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이 깨어나기 전에 출근해 버린 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키스한 이후 첫마디, 그게 둘 다에게 무지 어려울 것 같다.
“이 비서님이라면 어떻겠어요? 내가 뭘 좀 밑지는 장사를 한 것 같거든요.”
“네? 장사라니, 쇼핑하셨어요?”
“네! 쇼핑. 쇼핑했어요.”
“뭘 사셨는데요? 구두? 가방?”
“음, 가방이요.”
강시류가 가방이 됐다. 잠시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
“가방을 사는데 난 그 가방한테 내 마음을 모조리 다 고백했어요. 널 무지 좋아한다고.”
“그런 가방이 있죠. 고백하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맞아요! 근데 도무지 내 수중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막 안달이 났거든요? 꿈에도 막 나오고 쳐다보기만 해도 꽁꽁 앓을 정도로 욕심이 막 나고.”
“저도 그런 경험 있어요. 하아, 정말이지 갖고 싶었는데. 어찌나 도도한지 도통 곁을 안 내 주더라구요. 꿈에서까지 나타났다니까요? 결국 못 가져서 속병 났었죠.”
“그거예요! 나도 그랬어요. 죽어도 그걸 가져야겠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아주 진지하고 열렬하게 내 마음을 전했어요. 근데 자꾸 값을 높게 부르는 거예요.”
“어머, 아가씨가 못 가질 정도로 그렇게 비싸요? 대체 어느 브랜드인데요?”
어느 브랜드냐면, HC 그룹의 강씨 브랜드?
“암튼 그래서 하루 대여가 됐어요. 딱 하루만 내 것이 됐죠. 근데 그 다음 날 소유권이 사라졌어요.”
“세상에. 어쩜 좋아.”
“나만 마음 준 느낌이에요. 대놓고 내 진심 다 보여 줬는데 그쪽은 한 게 전혀 없잖아요?”
키스만 했지, 생각해 보니 정확히 나를 좋아한단 표현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손해 본 장사 같아요. 이쪽만 밑천 다 보여 주고…. 장사를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쪽박 차기 십상이죠. 억울해!”
“흠….”
“그래서 어떻게든 저쪽한테 고백을 들어야겠거든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직접적으로 요구할까요? 아니면 협박할까요?”
지하가 적극적으로 물었다. 그에 경희가 대답했다.
“그런데 그거… 가방 얘기 맞으세요? 사람 얘기 아니고?”
젠장!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
시류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물끄러미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 번호는 계속 한 사람의 것이었다.
무표정하게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그가 곧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나야.
“그래.”
- 바빠서 내 전화 계속 무시했던 거 아니지?
“바빴어. 무시했던 것도 맞고.”
저편에서 그녀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 귀국했다는데 환영 인사가 겨우 그거구나, 오빤.
그녀는 주아였다.
- 결혼했다면서?
시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가 넥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며 대답했다.
“그래.”
- 그래?
“내 선택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 난 인정 못 해.
“서주아.”
- 잊었어? 오빠 맹세. 오빠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절대 용납 못 해. 죽어 버릴 거야.
“네 마음대로 해. 어리광 부리지 마.”
- 오빠… 나 너무 힘들어. 그냥 은혜 갚으려는 거지? 그 결혼 진심 아니지? 대답해 줘.
“서주아, 적당히 해. 나 너한테 남자 아니다.”
- 아니, 나한텐 오빠 이외의 남잔 없어. 한 번도 오빠가 아닌 다른 남자 바라본 적 없어.
시류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널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다.”
- 날 봐, 오빠. 잊었어? 오빠랑 난….
“더 이상 지나간 시간에 얽매이지 말고 네 삶을 살아. 전화하지 마라. 끊는다.”
시류는 전화를 끊었다. 천천히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맹세라….”
문득 가슴이 아파 왔다.
맹세라.
“아니, 사슬이겠지.”
그가 스스로 자신의 몸에 친친 옭아맨 사슬.
가엾은 아이. 자신만큼이나 가엾은 아이, 서주아. 싸늘해지기보단 가슴이 아픈 게 더하다. 그래서 끊어낼 수 없는 사슬.
“또 못된 소리. 못된 눈빛. 헤픈 남자 주제에 감정은 하나도 안 내주고.”
문득 지하의 말이 떠오르자 그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감정은, 어떻게 내주는 겁니까?”
당신과의 입맞춤으로 나는 어떤 희망을 꿈꾸고 있다. 그걸 고스란히 내비치면 되는 건가? 자신은 받아들이기 싫은데 무작정 매달리는 주아처럼, 자신도 똑같이 하면 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당신처럼 그냥 당당하게 요구하면 되는 것인가?
사랑한다고, 그냥 외치면 되는 겁니까?
“당신이, 그립습니다.”
함께 있는데도 더더욱 그리움은 커져 간다. 그녀가 희망을 주면 줄수록 더 아프게 되어 있는 자신. 지하가 그 모든 걸 알게 되면 뭐라고 할까? 뭔가가 터질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
시류가 열네 살, 정웅의 집으로 온 지 1년이 지났을 때였다.
모두가 함께 지방의 리조트로 여행을 갔다. 정웅과 나영의 스케줄이 잘 안 맞아 겨우 시간을 냈기에 멀리 가진 못했다.
사실 여행을 가서도 정웅과 나영은 그곳의 지인들과 비즈니스 겸 골프를 치러 갔기에, 시류와 지하만 남았다. 리조트의 개인 풀장에서 둘이서만 놀아야 했다.
지하는 노란색 귀여운 아이용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서 풀장에서 잘만 놀았다. 시류도 수영복 차림이긴 했지만 얇은 비치용 카디건을 걸치고서 풀장 주변만 서성거렸다. 지하가 혹시 놀다가 사고라도 나지 않는지 감시하는 역을 자처했다.
당시 시류는 정웅의 보호 아래 지난날의 반항기는 깨끗이 벗고서 착실하게 공부를 하는 등 철이 드는 시기였다. 그래서 더 지하가 다치지 않도록 스스로 촉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은인의 딸이란 이유도 있었지만, 시류 자신도 지하가 다치는 게 싫었다. 자신을 보며 생글생글 웃어 주는 아이, 예쁘고 귀여운 그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 아이를 보면 늘 마음이 무겁고 가슴 한편이 꽉 조일 만큼 절망적이었다. 그래서 도와주고 지켜 주고 보호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하는 달랐다.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면서 보고 있으면 벙긋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신에게도 이런 평화로운 감정이, 느긋한 감정이 있었구나, 란 걸 깨닫게 해 준 아이. 그것만으로도 시류는 지하에게 고마웠다. 언제 매질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때 그 일이 터졌다.
꼬르륵.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지하가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나오지 않고 둥둥 떠 있는 지하의 등을 발견한 순간, 시류는 앞뒤 안 가리고 풀장으로 뛰어들었다.
“아가씨!”
그대로 지하를 확 건져 내 풀장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바닥에 눕히고서 다급하게 뺨을 만져 보는데, 지하가 눈을 반짝 떴다. 그리고 씩 웃었다.
“나 그냥 잠수한 건데.”
“…….”
“내가 다친 줄 알았어?”
시류는 미친 듯 안도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그런 장난은 치는 거 아니에요.”
“오빠, 화났어? 난 그냥 장난친 건데… 그래도 안 돼?”
“네. 그런 짓 하는 건 나쁜 겁니다.”
너무 단호하게 얘기했는지 지하가 시무룩해졌다.
“오빠, 나빠! 별일도 아닌데 화내고 말도 이상하게 하고. 꼭 비서 아줌마랑 기사 아저씨처럼 이상한 말만 써. 늙은이 같아.”
그건 바로 시류가 다른 고용인들처럼 깍듯하게 존대하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다.
사실 정웅 부부가 잘해 주긴 했지만, 시류는 아직 이 가족에게 거리감이 있었다. 실은 다른 큰 이유가 하나 있긴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아직은 모두와 가족으로 동화되기엔 무리였다. 그냥 이 정도 거리가 편했다.
어쩌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던, 친아버지에게조차 언제 버려질지 몰랐던 그가 선택한 생존 방식인지도. 너무 기대해서 나중에 상처받고 실망하기 싫었던 불행한 소년의 보호색.
“어제 TV 보는데 누가 그랬단 말이야. 남편이랑 자식이랑 물에 빠지면 누구부터 구할 거냐고. 그래서 지하도 아빠랑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었는데, 엄마도 아빠도 너무 바빠서 물어볼 시간이 없어. 칫! 둘 다 만날 바빠.”
“…….”
“그래서 그거 생각나서 장난쳐 본 건데.”
“설마, 제가 누구부터 구할 건지 궁금해서요?”
“응!”
시류는 기가 찼다.
“나랑 아빠랑 물에 빠지면 누구부터 구할 거야?”
“그거야….”
“피. 알아! 아빠지? 오빤 아빠만 좋아하잖아.”
시류는 당황했다.
“아, 아니에요.”
“그럼?”
“…구할 거예요. 아가씨부터.”
“진짜?”
“네. 아가씬 약하니까요. 저보다 어린 아이니까요.”
“진짜? 진짜지? 맹세하지?”
시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 오빠가 있어서 너무 좋아!”
시류가 멈칫했다. 이상하게 얼굴이 빨개지려고 했다.
“그, 그런 말 막 하지 마세요.”
“왜? 진짜 좋아서 그런 건데? 약속이야. 지하랑 영원히 같이 살아야 돼. 어디에도 가지 말고. 알았지? 왜냐면 우린 가족이니까.”
“…가족이요?”
“응! 아빠가 그랬어. 이제 우린 가족이라고. 그러니까 절대 헤어지면 안 된다고. 아빠 말처럼 지한 오빠랑 쭉 같이 살 거야. 계속. 그래서 나중에 오빠랑 결혼도 할 거야!”
“…네?”
시류가 헛웃음을 흘렸다.
“결혼이 뭔지는 알아요?”
“왜 몰라? 내가 어린애야?”
“어린애가 아니면 뭔데요? 어른이에요?”
“아무튼! 결혼을 해야 쭉 같이 살 거 아냐. 엄마가 그랬어. 쭉 같이 살려면 결혼하는 거라고. 그니까 지하랑 결혼해! 빨리 약속해.”
다짜고짜 새끼손가락이 걸렸다. 강제로.
엄지로 도장까지 꾹 찍으며 지하가 중얼거렸다.
“이제 약속했으니까 영하 오빠처럼 갑자기 사라지고 그러지 않기다? 아빠 엄마 속상하게 하면 안 돼?”
“…….”
“그리고 지하도 속상하게 하면 안 돼. 오빠 없어지면 지하 계속 울 거야. 절대 어디 가지 마.”
“네….”
시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하랑 나중에 결혼도 하기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예요.”
“그니까! 사랑하는 사람, 시류 오빠! 나 오빠 엄청 사랑해! 하늘땅만큼 완전 좋아해!”
지하가 까르르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시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은 아빠 엄마보다 오빠가 더 좋다?”
“……!”
“그니까 우리 계속 같이 있자. 알았지?”
지금 떠올려 보면 일곱 살 아이가 한 말, 그 뜻이 그렇게 깊은 의미가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바쁜 부모를 둔 지하에겐, 얼굴 보기도 힘든 부모님보단 가까이에 있는 시류가 심적으로 더 가까웠을 것이다. 또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죽은 오빠를 대신해 주는 시류에게 애착이 가기도 했겠지.
그런 의미였겠지만, 당시의 시류는 마음이 꽉 차는 따스함을 느꼈다.
받아들여진 기분.
“그니까 오빠도 이제부턴 나처럼 말해. 알았지? 동생한텐 반말하는 거야.”
“…….”
“오빠, 뭐 해? 얼른 나랑 수영하자. 풀에서 놀자.”
지하가 시류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손. 그 손이 이후에도 계속 그의 가슴에서 큰 의미가 될 것 같단 예감.
그는 늘 지하의 곁에 있었고,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면서 점점 여성스러워지고 예뻐지는 지하에게 가슴 뛰는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오빠라고 불렸던 건 단지 고작 몇 년간, 이후 그녀의 태도는 차갑고 냉랭해졌지만 시류에게 지하는 내내 그때의 그 따뜻하고 애교 많은 소녀였다.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준 소녀.
동생한텐 반말하는 거라고, 그녀가 말했었다. 하지만 동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족으로 여겨 준 건 벅차고 고마웠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하는 동생이 아닌, 그냥 한 사람의 예쁜 여자아이였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적이 없었다.
사랑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지하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경희에겐 주차시키고 먼저 들어가라고 일러두었다.
전화의 주인공은 재욱이었다. 난데없이 집 앞에 와 있다기에 지하는 차에서 내려 재욱이 기다리고 있다는 빌라 근처로 갔다.
“오빠? 여긴 무슨 일이야?”
그녀가 다가가 묻자 재욱이 고개를 들었다. 지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초저녁부터 술 마셨어? 뭐야, 연락도 없이 취해서 유부녀한테 막 오고.”
재욱이 피식 웃었다.
“넌 얼굴이 왜 그러냐? 한창 깨가 쏟아져야 할 유부녀 얼굴이 말이 아닌데?”
“뭐야? 시비나 걸고. 말에서 떨어졌었어.”
“뭐?”
“그냥 그랬다구. 근데 무슨 일이냐니까? 커피숍이라도 갈래? 여긴 사람들도 지나다니고.”
“너 나 갖고 논 거냐?”
갈 만한 데가 어디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지하가 멈칫했다. 천천히 재욱을 돌아보았다.
“…오빠, 엄청 황당한 거 알아? 난데없이 웬 시비야?”
“이런 내가 이해도 안 가고, 자존심 상해서 그냥 내 선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따지러 왔다. 너 날 대체 뭘로 본 거야?”
“오빠, 아무래도 주사 같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돌아서는 지하의 손목을 재욱이 확 잡았다.
“지금 해!”
“싫어. 취한 사람이랑은 말 안 할래.”
지하가 그 손을 확 쳐냈다. 재욱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야아, 한지하. 그새 아주 더 못돼졌구나. 그렇게 냉정하게 굴기냐?”
“서재욱 씨, 도대체 왜 그러는데?”
“그때, 네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한 말 기억나?”
“무슨 말?”
“여자 소개해 달란 건 맞아.”
“뭐?”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갸웃하던 지하가 그제야 재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거까지 점수에 넣어라?”
“무슨 점수?”
“그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의심스러워. 또 무슨 부탁 하려고? 설마 또 내 친구 소개해 달란 건 아니지?”
“음… 여자 소개해 달란 건 맞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지하가 물었다.
“기억나. 그런데 그게 뭐?”
“그거 너였다면 어쩔 거냐? 소개해 달란 여자가 바로 너였다고.”
“뭐?”
지하의 눈이 커졌다.
“너랑 오빠 동생 사이, 슬슬 정리할 생각이었어. 알겠어? 난 너랑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네 생일날 술 취해서 한 말도 장난 아니었어. 네가 좋았어. 널 여자로 보고 있었어. 그런데 넌 장난으로만 치부했지. 진지하게 듣지도 않았고.”
“그거야…!”
“내 말부터 들어! 네 생각을 갑자기 바꾸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워낙 오랫동안 편하게 지냈으니까. 그래서 시간을 들여서 하나하나 바꿀 생각 하고 있었는데. 하….”
그가 피식 웃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지.”
“…….”
“그날 마지막 네 태도 뭐였어? 왜 갑자기 내 팔엔 매달리고, 왜 그렇게 웃었어? 인마, 그렇게 갑작스럽게 결혼하고 내가 얼마나 화났었는지 알아?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청첩장에 네 이름이 박혀 있는 기분, 진짜 더럽더라.”
지하가 한숨을 삼켰다.
“미안. 몰랐어, 난.”
“이놈 보게. 미안하단 한마디면 끝날 일이야, 이게?”
“그럼 뭐 어쩌라고? 오빠 마음 난 전혀 몰랐고, 오빠도 그래. 수십 가지 계획을 줄줄이 속에서 세우고 있으면 뭐해? 하나도 말해 주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일찍 결혼할 줄 몰랐잖아!”
“갑자기 결혼한 게 내 잘못이야? 타이밍 계산 못 한 오빠 잘못이지!”
재욱은 어이가 없었다.
“야, 한지하!”
“왜?”
“좋아해.”
지하가 멈칫했다.
이 오빠가 정말, 왜 이러는 거야?
“그게 지금… 갓 결혼한 유부녀한테 신혼집 앞에서 할 말이야?”
“유부녀, 유부녀.”
그가 피식 조소했다.
“결국 때 되면 갈라설 관계면서.”
낮게 덧붙인 말에 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뭐라고….”
“왜 내가 병원 앞까지 갔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왔겠어? 결국 그 결혼의 끝을 알고 있으니까.”
“오빠, 점점 말이 심해진다.”
“들었지? 서주아 돌아온 거.”
지하는 그 말엔 영향을 받고 말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역시 자신에게 가장 큰 무기는 서주아 이름 석 자였나 보다.
“인터뷰에서 공공연하게 자기 연인에 대해 거론하는 거 알아, 몰라? 그거 강시류야.”
“…그만해.”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두 사람은 현재 진행형이야. 넌 그 사이에 낀 수단일 뿐이고. 네 결혼, 눈속임이란 거 모르는 사람 없어. 강시류는 널 사랑하지도 않아. 하지만 난 널 사랑해. 그러니까 성질도 못된 주제에 거기서 멍청하게 이용당하고 있지 말고 나한테 와.”
지하의 머릿속이 울렸다. 너무너무 기분 나빠서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협착이라도 된 듯 아무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반발해야 하는데! 성질내야 하는데! 억울함투성이인 그 말에 왜 반박하지 못하는 거지? 왜 이 시궁창 같은 말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하는 건데?
그때였다. 두 사람의 뒤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무슨 소리를.”
지하의 눈이 커졌다. 고개가 확 돌아갔다. 짐작대로 시류의 목소리였다. 회색 슈트. 시리도록 차갑게 가라앉은 검푸른 눈동자.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재욱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소양도 있으신 분이 지금 남의 여자한테 치근덕거리는 겁니까?”
재욱이 피식 웃었다.
“치근덕거린다?”
자극받았는지 재욱이 팔을 확 뻗어 지하의 손을 잡았다. 조용히 서 있던 지하는 갑자기 재욱에게 손목을 잡히자 얼떨떨한 얼굴로 휙 끌려갔다.
“가자. 너 여기 있어선 안 돼.”
그 순간 시류가 지하의 어깨를 감싸듯 안아 자신의 뒤로 확 숨겼다. 그리고 재욱을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
“유감이지만, 거기론 안 보낼 겁니다.”
“뭐야?”
“혹 기대하고 있었다면 포기하시죠.”
“이 자식이!”
재욱이 주먹을 붕 휘둘렀다. 하지만 시류가 마치 운동선수처럼 유연하게 상체를 빼는 바람에 그건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헛손질한 재욱이 자존심 상했는지 무소처럼 열이 올라 다시 달려들었다. 시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그대로 재욱에게 주먹을 날렸다.
퍽!
취한 재욱이 바로 나가떨어졌다. 시류의 슈트 재킷 자락이 펄럭였다.
화난 얼굴. 시류의 감정이 폭발했다.
지하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
“취한 사람 상대로 그걸 단번에 못 이겨요?”
잠시 후, 지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시류의 눈썹 위에 밴드를 붙여 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강시류와 서재욱이 맞붙었다. 그래 봐야 둘 다 엘리트 모범생들, 한 대 정도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 후에 몇 대 더 오갔다. 결국 재욱이 취한 탓인지, 촘촘하게 근육이 박힌 시류에 비해 허우대만 멀건 말라깽이라 그런지 시류가 이겼다.
바로 그 점을 피력하듯 시류가 이를 갈듯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이겼습니다.”
지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말은 좀 더 화끈하게, 완벽하게 이겼어야 한다는 뜻이죠.”
‘하여튼 서재욱! 자기감정이 어쨌든 남의 집 앞에 찾아와서 동네 창피하게 행패를 부린 건 당해도 싸. 그렇게 내가 좋았으면 미리 말을 하든지!’
“하긴, 몇 대쯤 더 때린 거 같긴 하더라. 중간에 세다가 그만뒀지만.”
시류가 그런 지하를 스윽 째려보았다.
처음엔 혼란스러워 보이던 지하의 얼굴. 하지만 중간부턴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의 주먹다짐을 구경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상식을 거부하는 여자다.
“설마 일부러 안 말리신 겁니까?”
“음, 아마도? 둘이 싸우는 거 보고 싶었거든요.”
시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특히 나 때문에 화내는 당신.”
그 말엔 시류가 멈칫했다.
“제가 지하 씨 의도대로 움직여 주는 게 재미있으신 거군요.”
“그래요. 나 심술궂은 거 몰랐어요? 왜 화난 거처럼 구는지 모르겠네. 날 두고 싸우는 두 남자 모습 보는 거, 두 남자의 질투를 받는 거, 여자의 특권 아니에요? 물론 당신은 질투가 아니었겠지만.”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난 당신을 모르겠어요. 왜 화냈어요? 대체 뭐가 당신을 건드렸는데요? 재욱 오빠가? 아니면 재욱 오빠가 한 말이?”
“서재욱의 마음, 그게 절 건드렸습니다.”
지하의 눈이 커졌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 남자의 마음이요.”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에요.”
시류가 멈칫했다.
“내 탓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라고 한 적도 없어요. 어차피 자기감정이에요. 재욱 오빠 스타일상 오래갈 감정도 아니고. 혹시 그런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한 번쯤 생각은 했었지만, 내가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모른 척했어요.”
지하는 냉정했다. 시류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갖게 될 경우에 대해선 전혀 생각 안 하시는군요.”
“그래요. 난 짝사랑 같은 거 안 해요. 상처받을 정도로 맘 주지도 않아요.”
“알겠습니다.”
차가운 목소리.
“알겠다면서도 그렇게 뻔뻔하게 받아들이는 건 강 상무님 성격이에요?”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어제, 먼저 고백하고 누가 봐도 짝사랑하는 거 다 드러나게 말했는데, 혼자 상처는 다 받고 있었는데, 맘 다 줘 버린 거 들킬 정도로 죄다 싹싹 긁어서 보여 줬는데 내 말의 허점도 모르겠냐구요.”
지하는 화가 났다.
“아, 정말! 대체 언제까지 다 갖다 바쳐야 하는 건데요? 숟가락까지 놔 줬는데 기어코 떠먹여 주기까지 해야 해요? 나 되게 짜증 나지만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말할게요. 강시류란 남자한텐 이상하게 냉정한 상태가 안 돼요. 이거 어떻게 책임질래요? 감히 날 흔든 죄, 어떻게 갚을래요?”
지하가 이를 뽀도독 갈았다.
“내가 왜 재욱 오빠 감정 두고 그렇게 냉정하게 말한 거 같아요? 난 이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오늘 일어난 해프닝에 대해 변명하거나 설명할 이유는 없단 의미였어요. 내가 흘리고 다닌 것도 아니고,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니니까 내 잘못 아니라고! 천재지변처럼 그냥 일어난 일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좀 다르지 않아요?”
“뭐가, 말입니까?”
“서주아요.”
시류가 정지했다.
“나한테 재욱 오빤 그런 정도인데, 당신한테 서주아는 좀 다르죠? 어떤 존재예요? 사랑했어요? 아니면 지금도 사랑해요? 나한테 마음 안 주는 거, 그거 설마 서주아 때문이에요?”
그 말에 시류가 똑바로 지하를 쏘아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처음부터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본 게 벌써 몇 년 전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엔 소문으로 들었어요. 두 사람 끈끈한 사이라고, 누구한테도 보이지 않던 다정한 얼굴로 서주아 보던 거, 머리 만져 주던 거 다 알고 있었어요. 됐죠? 이제 난 다 펼쳐 보였으니까 강 상무님도 설명해요. 서주아가 대체 어떤 존잰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
“적어도 당신이 묻는 의미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내가 묻는 의미 외에는요?”
“그건, 대답할 수 없습니다.”
“치사해! 그렇게 회피하겠단 거예요? 나한테서 보호하겠단 거예요? 아, 정말 화나!”
“그만하세요. 그런 의미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왜 정확하게 말 못 하는데요? 사랑해요? 좋아해요? 아님 사랑하기 직전 단계예요? 미친 듯 사랑했는데 끝난 관계예요? 재욱 오빠 말처럼 아직도 진행 중이에요? 대체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저한텐, 고개 돌릴 수 없는 아이입니다.”
순간 지하가 멈칫했다. 그녀가 온몸에 힘을 꽉 주고서 되물었다.
“왜요?”
“그것만은, 말 안 하고 싶습니다.”
시류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게 회피나 도망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느껴진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다.
저 정도로 보호하려 들면, 완전히 자존심 상하고 서류상이든 뭐든 이 남자의 아내로서 날뛰어야 하는데. 그냥 말하기 너무 괴로운 표정처럼만 보였다. 뭔가 있지만 캐묻기 미안할 정도로 그가 힘겨워 보인단 생각이 들다니.
만약 저 남자가 제비였다면 자신은 아마 저런 상념 짙은 표정에 홀랑 속아 넘어가 사천 정도 단번에 땡겨 줬을 거다. 그런 흐름이었다.
시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오해하게 만들어서.”
“오해는 맞아요?”
“그 애가 아무것도 아닌 걸로 생각되겠지만, 제가 당신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그렇게 돌려 말해 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난 그런 불분명한 말에 실컷 휘둘리고? 변명하느라 너무 애쓰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날 좋아해 보느라 애쓰는 건가요?”
“사랑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지하가 멈칫했다.
“그런 말 따위….”
시류가 지하에게 다가섰다. 지하는 서둘러 피했다.
“오지 말아요!”
소리쳤지만, 시류에게 손목이 잡혔다.
“피하지 마세요.”
“피, 피할 거예요. 피해야 할 거 같아요.”
“왜요?”
“몇 마디 말에 속아 넘어갈 거 같으니까. 내가 나를 못 믿겠으니까.”
“그럼 속으세요. 이런 부족한 인간의 말 따위에 진심으로 흔들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무슨….”
“꿈속에서나 하던 말을 지금 당신에게 하겠습니다.”
지하의 눈이 커졌다.
“사랑합니다.”
지하의 심장이 쿵 했다.
이제 비틀린 짝사랑을 여기서 끝내려 한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시간을 찾기 힘들 정도로.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시류의 손이 거칠게 파고들었다.
“제 마음이 질투가 아닐 거라 했습니까? 미치도록 질투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이 아닙니다. 집 앞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봤을 때, 병원 앞에서, 그리고 오늘…. 당신을 빼앗아 가져가려고 한, 자신만만하게 당신을 채 가겠다고 한 그놈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질투했습니다.”
지하의 눈동자가 터질 듯 커졌다.
1% 부족했던 것, 그건 바로 그의 질투였다. 그리고 고백이었다.
드디어 채웠다!
지하의 얼굴을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하는 피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갈구의 눈으로.
“질투했다고… 했어요?”
“네.”
“날 사랑한다고 했어요?”
“네.”
“그럼, 지금보다 훨씬 더 날 사랑해요. 몇 번이고 고백해요. 절대 날 실망시키지 말아요. 배신하지 말아요.”
“그러죠.”
“자신 있어요?”
“전 끈질긴 남잡니다.”
“그럼, 더 이상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을 거예요. 캐묻지도, 의아해하지도 않을 거예요. 왜냐면… 사랑한단 그 말이 기쁘니까. 그 말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나 아프게 하지 마요.”
결국 지하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시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시류의 입술 바로 앞에서 정지한 그녀의 입술, 짙은 숨결, 내뱉어지는 욕망. 스치듯 그녀의 입술을 더듬으며 시류가 타들어 가듯 뜨거운 눈으로 고백했다.
“사랑합니다.”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그녀를 위해 그 하루를 바치겠다. 시류의 입술이 그대로 지하의 입술을 머금었다. 마치 그가 지금껏 흘린 눈물처럼, 그의 입술이 촉촉하게 지하의 입술을 감쌌다.
지하의 손가락이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파고들었다. 얼마나 이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싶었던지. 얼마나 이 가슴 안을 꿈꿔 왔었는지.
입맞춤은 더욱 깊어지고 몸이 닿는 면적이 늘어 갔다. 시류의 입술은 집요할 정도로 지하의 입술을 머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감미로운 아픔.
숨이 막혔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그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가자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인 것처럼 강렬한 자극이 전신을 지배했다. 지하는 고개를 젖힌 채 그의 뜨거운 입술을 느꼈다.
감각을 자극하는 그의 힘.
가슴을 건드리는 손길.
지하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서 안달 난 것처럼 그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수없이 겹쳐지는 젖은 입술. 키스의 비가 그녀의 얼굴 위로 뿌려졌다. 코끝에 난 점에 그가 살짝 입술을 눌렀다.
너무 뜨겁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과연 이 욕망이 채워지긴 할까? 닿으면 닿을수록 더 원한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갈등이 지하를 휘감았다.
그 순간 시류가 지하를 덜렁 안아 들었다.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이 남자의 모든 걸 갖고 싶다. 심장이 활활 타들어 가 전소가 될 것 같다.
안아 줘요. 내 욕망을 채워 줘요.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의 세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