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2/12)

H 약품을 비롯해 다양한 계열사를 거느린 지주회사 HC 그룹의 회장실. 비서에게 보고를 받고 있는 초로의 HC 그룹 대표, 한정웅 회장.

바로 지하의 부친이었다.

“현재 전체적인 제약주들의 움직임은 국내를 넘어 세계화의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 이번 우리 회사의 괄목할 만한 주가 상승 역시 해외 공세에 성공한 게 큰 원인이라는 분석입니다.”

“이번에 시류가 주도한 수출 계약이 아주 성공적이었지?”

“네. 강 상무가 지난 5월 다국적 제약사와 6억 8천만 달러의 수출 계약을 체결한 만큼 이번 상반기 매출의 절대적인 공신입니다. 또한 꾸준하게 진행, 투자 중인 임상과 연구 개발에도 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 역시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어.”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합니다. 여담이지만,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에도 그 어떤 잡음조차 없었던 것도 실력이 뒷받침되니 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리고….”

“그 정도면 됐어. 강 상무 불러.”

“예.”

잠시 후, 시류가 안으로 들어와 깍듯하게 인사를 하자 정웅은 앉으라고 손짓했다. 시류가 앞자리에 앉았다.

“내가 개인적인 일로 잠깐 회사 일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자네가 잘해 주고 있었더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칭찬은 그냥 받아. 자네가 있어 참 든든해.”

“감사합니다.”

정웅은 눈앞의 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가, 자네가 열세 살 때였던가? 소년원에서 갓 출소한 못 말리는 반항아였지. 세상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 꽉 차 있던….”

그야말로 들개 같은 사내아이였다.

“그럼에도 그 눈빛만은 영특하게 날 똑바로 쏘아봤더랬지.”

정웅이 웃었다. 시류도 낮게 웃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제 주변엔 전혀 없던 값비싼 옷을 입고서 엄청 큰 차에서 내린 남자. 그런 남자가 난데없이 정웅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견제를 했었던가.

그나저나 갑자기 지난 이야기를 하는 정웅이 시류는 왠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정웅은 오늘만은 옛날이야기가 고픈 모양이었다. 지그시 시류를 바라보며 추억을 떠올리듯 말을 이었다.

“너무 똑똑해서 비정한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 버렸던 케이스였지. 지금은 이렇게 눈이 부실 정도의 근사한 청년으로 성장해 주었지만.”

“과찬이십니다.”

“아니. 내 속으로 낳지 않았을 뿐, 자넨 이미 내 분신이고 자식 그 이상이야.”

시류가 고개를 숙였다. 정웅은 그런 그가 애틋했다.

비루한 환경과 맞지 않는, 그 너무도 잘난 머리가 독이 되었던가. 도저히 손쓸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던 아이. 하지만 이제 이 준수한 청년에게선 절대 과거의 비참함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늑대 소년이 문명에 적응한 것에 필적할 정도의 기적.

어찌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들어 낸 내 작품.

“영하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 자네의 좋은 형이 돼 주었을 텐데.”

시류가 멈칫했다.

“요즘 가끔, 자네 얼굴에서 영하의 얼굴이 보여. 물론 자네한테 영하를 겹쳐 본단 건 아니니 오해는 말게.”

“그런 생각 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저로선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시류는 아주 특출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고요한 눈매와 빈틈없는 분위기. 각이 잡힌 탄탄한 체격에서 흘러나오는 자신감, 두뇌 또한 명석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네를 데려와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로 자넨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었지. 소소하게는 수석을 놓친 적 없는 것부터 뉴욕대 MBA, 로스쿨 박사, 지금은 경영에 참여해 날 도와주고 있지. 참 잘해 주었어. 사실 처음부터 환경을 좋게 타고났더라면 그 이상도 해냈을 텐데. 그래서 자네가 늘 아까워.”

“…아닙니다.”

모든 건 다 정웅의 덕이었다. 고작 진창을 굴러다니며 쓰레기 같은 삶을 살던 자신을 이렇게나 키워 주고 애정을 베풀어 준 은인.

하지만 시류는 지금 뭔가 정리의 때가 왔다는 걸 깨달았다. 정웅의 말들이 마치 작별 인사 전의 마지막 칭찬의 말들 같았다. 그렇더라도 자신은 그것으로 되었다. 그가 필요하다면 곁에, 그렇지 않다면 또 그것대로 뜻에 따를 것이다.

정웅을 만나고 처음으로 따뜻함이란 걸 배웠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를 괴롭히던 분노, 열등감, 자기 연민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을 지울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을 시류로 개명해 주었던 때가 떠오르는군. 처음 만났을 때 자네 이름이 시루였었지? 부친이 지어 준 이름이라고 했었나?”

“그렇습니다.”

그저 던져 주듯 지어 주었던 이름. 지독한 주정뱅이에 인간 말종이었던 남자가, 그래도 아들이라고 아무렇게나 툭툭 불렀던 이름. 시루떡에서 대충 따온 이름. 실제로 어린 시절 그의 삶은 이삿날 이집 저집 돌리는 시커먼 시루떡과 다르지 않았었다.

“난 사실 그 이름이 나쁘진 않았어. 못되게 생긴 꼬마 사고뭉치치곤 꽤 귀여운 이름이었거든.”

시루의 ‘루’라는 글자가 눈물 ‘루’로 들리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흐를 ‘류’로 바꾸었다.

베풀 시(施)에 흐를 류(流).

베풀면서 흐르듯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기 바란다는 의미로.

다행히 그때의 어둠을 완전히 벗어 내고, 그야말로 단단한 청년 사업가로 변해 있었다.

“아직도 그때와 닮은 게 하나 남았다면, 그 길게 찢어진 눈매 정도일까? 그때도 아주 소악마처럼 못돼 보였었거든.”

“아….”

시류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그게 더 매력적이래. 우리 안사람이 특히 그래. 자네 눈빛을 참 좋아하지. 그래서 내가 아주 질투가 많이 나.”

“…당황스럽습니다. 그만하십시오.”

“하하!”

정웅이 일부러 시류를 놀리듯 크게 웃었다. 그러다 낮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시류야.”

순간 시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웅은 그가 성인이 된 후로는 단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른 적 없었다. 회사에 들어온 후로는 더더욱 공적으로 깍듯하게 대했다.

그래서일까?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듯했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럴 때면 시류는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다 해낼 것 같았었다.

이 사람을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요즘 내가 자꾸만 영하가 생각나는구나. 내 목숨처럼, 아니, 목숨보다 더 사랑한 자식이었건만.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HC의 후계자가 되었을 테지.”

“네.”

“알고 있지? 내가 시류 널 받아들인 것도, 죽은 우리 영하와 비슷한 나이였기 때문이지. 자꾸만 눈이 갔었어.”

“알고 있습니다.”

망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시류는 영하에게 죄책감과 감사의 마음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다만 시류가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오늘따라 옛이야기를, 특히 영하의 이야기를 하는 정웅이었다.

“우리 지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니?”

시류가 잠깐 멈칫했다.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듯한 화제 전환이었다.

“야무지고 똑똑한 아이입니다.”

“그런 판에 박힌 말 말고, 여동생으로선 어떻게 생각하나?”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로는?”

순간 시류는 숨이 턱 막혔다.

꽁꽁 붙들고 있던 수많은 감정들을 일순 놓쳐 경솔하게 눈동자에 내쏟은 건 아닌가 싶어서.

그런 말랑말랑한 감정, 자신은 몰랐다.

강시류, 그 이름을 받은 순간부터 자신은 이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하기로 맹세했다. 당신이 가장 아끼는 딸, 지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감정과 관계없이 그녀만을 위해서 살 수도 있었다.

“지하가 위험해지거나 슬퍼하면 제 모든 걸 바쳐 지키겠습니다.”

“흠.”

정웅이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그 정도면 됐다.”

한지하.

영하가 아홉 살 때 태어난 늦둥이. 원래 부부가 난임이라 영하도 늦게 가졌는데 지하는 더 늦었다. 그리고 시류와 지하의 첫 만남. 열세 살의 문제아와 여섯 살의 행복한 공주님.

세상을 증오하며 모든 걸 튕겨 내던 어두운 소년과 온통 밝은 세상에서 모든 게 행복하기만 하던 소녀. 그게 둘의 첫 만남이었다.

“그 정도라면 네가 다른 의심 없이 내 말을 들어주리라 믿고, 부탁하마.”

“말씀하십시오.”

“실은 내년에 지하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워낙 늦게 낳은 아이라 내 나이도 있고. 해서 우리 지하를 슬슬 시집보내야 할 것 같다.”

순간 시류의 눈동자가 조용히 흔들렸다.

정웅이 말을 이었다.

“네가 오빠로서, 그 아이의 결혼을 신경 써 줬으면 좋겠구나.”

***

“하아,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꾸며야 해요? 대체 어느 집안 남잔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선보는 거잖아요. 아니, 선 시장에 팔려 나가는 건가?”

“아가씨도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쉿! 다른 사람들 들어요.”

경희가 하루 종일 지하의 시중을 들어 가며, 입이 부우 나와 있는 그녀를 다독였다.

고급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C 브랜드에서 특별 제작한 화이트 컬러에 플라워 패턴이 들어간 청순한 미니 원피스를 입고, 단정한 재킷, 구두와 가방, 액세서리까지 완벽하게 세팅했다.

그렇게 사람을 이곳저곳 끌고 다니며 한껏 치장시키더니 예쁘게 포장한 그대로 어딘가로 보냈다.

“휴우, 또 뭐야?”

최고급 호텔의 객실로 들어선 지하는 한숨이 폭 나왔다.

“이젠 하다 하다못해 호텔?”

물론 호텔이라고는 하나 아빠의 지시가 있었던 만큼 이상한 의도야 없겠지만.

여기 들어오기 전 경희가 지하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주세요.”

“뭘요?”

“휴대폰이요. 회장님의 지시입니다.”

그렇게 휴대폰까지 강탈당한 것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지하는 어깨에 백을 멘 채로 팔짱을 끼고선 또각또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들 이목 엄청 신경 쓰는 거물급 고위층 자제신가? 그래서 이런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비밀스럽게 만나잔 거야? 웃겨.”

개인 수영장까지 갖춘 넓은 실내를 둘러보며 그녀는 삐딱하게 불만을 터뜨렸다.

“근데 무슨 매너가 이래? 사람이 왔으면 적어도 맞이하는 교양은 있어야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탐색했으면 이제 그만 나오죠? 지루하니까.”

어차피 이런 만남은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겠지만 그녀는 아직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뭐야? 없는 거야? 나 참, 어이없어서.”

그때 그녀가 들어왔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이제 오는 거야?”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똑바로 정면만 쏘아보며 서 있자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바로 등 뒤에서 멈춰 선 기척.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돌아본 지하의 눈빛에 그 순간 의아함이 담겼다.

“…강 상무님이 여긴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남자는 바로 시류였다.

늘 그렇듯 단정한 슈트에 표정 없는 얼굴, 방금 전에 얼음물에 담갔다가 건진 듯 찬기가 뚝뚝 떨어지는 분위기.

덕분에 또 재채기가 터지려는 걸 겨우 눌러 참으며 지하가 피식 웃었다.

“아, 뭔지 알겠다. 우리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부하 직원이 오셨구나?”

시류가 그녀를 조용히 쏘아보았다. 순간 그 탓하듯 강렬한 눈빛이 빨아들일 것처럼 집요해서 지하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나저나 이 남자만 보면 이는 이 강렬한 반감의 정체를 도대체 모르겠다.

복잡다단한 감정 상태를 들키기 싫어 지하는 일부러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투덜거렸다.

“나 오늘 아무래도 선봐서 결혼해야 할 거 같은데 상대가 누구예요? 강 상무님이 직접 나와서 체크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

“글쎄요.”

“돌아 버리겠네. 됐고요. 아빠 명령으로 나왔을 테니 대신 좀 전해 줄래요? 딸은 이 결혼 반대라구요. 휴대폰도 빼앗아 가고, 기막혀.”

“일단 앉으시죠.”

“누구예요? 그거부터 말해요.”

“앉으세요.”

“싫다니까요?”

그때 시류의 상의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지하가 흘끗 쳐다보자, 시류가 지하와 시선을 맞춘 채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 상태로 전환하며 그가 난데없이 휴대폰을 지하에게 건넸다.

“뭐 하는 거예요?”

“받아 보세요.”

보니, 뜨는 이름은 ‘회장님’이었다. 지하는 바로 휴대폰을 확 낚아채 귀에 댔다.

“아빠, 지금 이거 뭐예요?”

- 시류는 만났니?

“만났어요.”

지하가 견제하듯 시류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도대체 자기 역할을 못 하네요. 제대로 설명도 안 해 주고. 대체 무슨 상관인데 이 사람이 여기 있는 거예요? 주인공은 언제 와요? 어느 집안의 누군데요? 미리 말 좀 해 주고 등 떠밀면 안 되는 거예요?”

- 시류다.

“뭐가요?”

- 네가 오늘 만날 상대, 강 상무야.

“…네? 자, 잠깐만요. 하, 미쳐. 갑자기 그게 무슨 말….”

- 두 사람 친해져라.

“그러니까 그게 무슨…!”

- 시류와 네 결혼 결정됐다. 그곳에서 하루 동안 친해져 봐.

“아, 아빠!”

지하가 미친 듯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하, 미치겠네. 어이없어.”

지하는 믿을 수 없는 일에 잠시 정신을 못 차리다가 얼른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걸어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 시류가 지하의 손에서 조용히 휴대폰을 가져갔다.

지하가 빽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놔요.”

“어차피 통화 안 될 겁니다.”

“시끄러워요.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참견이에요?”

날카롭게 소리치던 지하가 멈칫했다.

아냐. 이렇게 경솔하게 진상 떨 때가 아냐. 그럼 마치, 그 말을 믿는 것 같잖아. 절대 안 흔들려!

“강 상무님도 알고 있는 일이에요, 이거?”

“뭘 말인가요?”

“우리 결혼이요.”

“알고 있었습니다.”

“됐어요.”

지하는 그대로 시류를 지나쳐 문을 확 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누르고 밀고 철컥거려 보아도 육중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건?”

쾅쾅 문을 두드리던 지하가 결국 시류에게 돌아섰다.

“열어요.”

“번거롭게 하시네요. 여기 계셔야 합니다.”

“빨•리• 열어요! 아빠랑 직접 말해야겠으니까.”

그때 시류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냥 쳐다보는 건데도 그 눈빛에 움찔하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다가 문에 등이 쿵 부딪치자 지하는 눈을 확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시류가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지하의 뺨으로 다가오는 순간, 지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순간 겹쳐진 어떤 기억.

번쩍!

번개가 인다. 그 번개 속에 드러난 어두운 소년의 얼굴. 아니, 그의 얼굴!

부르르 떨며 고개를 확 숙인 순간, 시류의 손이 그대로 그녀의 뺨을 지나쳤다. 그녀의 머리 위로 올라가 문을 탁 짚고서 지하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손을 허리에 얹은 채, 그의 긴 눈매가 지하를 쭉 훑었다.

가늘게 떨며 온몸으로 그를 경계하고 있는 그녀. 시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게 겁낼 거 없습니다. 아가씨를 해칠 짓은 하지 않아요.”

지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말처럼, 그는 머리카락 한 올 건들지 않고서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왠지 암울한 그의 눈.

아니, 자신이 착각한 거겠지. 어디 저 남자가 내 시선 같은 거 의식하는 남자던가?

“나, 난 다 알아요.”

“뭘 말씀이십니까?”

“됐으니까 비켜요.”

“그럴 수 없습니다.”

지하가 파르르 독기가 바짝 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수작이에요?”

“여기 계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겐 지금 당신이 필요하니까요.”

“뭐, 뭐라구요?”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죠.”

“웃긴 소리. 내가 왜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왜 그렇게 화를 내시죠? 제가 그렇게 미우신가요?”

순간 그의 손이 천천히 지하의 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턱을 들어 올린 채 그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두려우신가요?”

지하의 눈이 커다래졌다.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할 말을 놓쳤다.

피식.

순간 그가 웃으며 손을 확 접었다.

‘아, 억울해! 저 손을 먼저 확 쳐냈어야 했는데, 아까워라!’

아찔하게 곡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간 그의 입술. 미묘한 검푸른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강렬한 섬광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사람을 옭아매는 듯한 그의 눈빛이, 정말 싫다.

그 얄미운 태도에 지하의 분노에 화르르 불이 붙었다.

“지금 날 비웃었어요?”

“그런 적 없습니다. 단지 질문했을 뿐이지.”

“아직도 몰랐어요? 난 당신이 밉고, 싫고, 두려워요.”

“왜요? 제가 살인자니까?”

지하가 멈칫했다.

몇 번이나 입 안에서만 맴돌다가 사라졌던 그 말. 그걸 그 남자가 직접 입에 올렸다. 순간 한기와 함께 소름이 쫙 끼쳤다.

그의 말처럼 그녀는 그가 두렵다. 하나는 원초적인 공포 그것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 때문에….

눈동자가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는 이 앞뒤가 안 맞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가씬 그 끔찍한 남자와 결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꾸 자극하지 말아요.”

“글쎄요, 자꾸만 그렇게 반응하니까 계속 건드리고 싶군요.”

“이…!”

지하의 손이 확 치켜 올라갔지만 바로 잡혔다. 하지만 그 어떤 힘도 주지 않은 듯 아프지 않게 그가 지하의 손을 가만히 내려 주었다.

“우린 친해지려고 여기에 있는 겁니다. 불필요한 언쟁은 서로에게 좋지 않아요.”

“불필요한 언쟁이라고 누가 그래요? 나한텐 반드시 필요한 전쟁이에요. 왜냐하면 난 절대 당신과는 결혼하지 않을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무의미한 주장이지만.”

“이거 다, 당신이 꾸몄어요?”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됩니다.”

“말이 안 통하네. 저 문 열어요.”

“똑같은 소리 계속하는 거 지루하지 않으십니까?”

“상무님은 안 통할 얘기 계속하는 거 괜찮아요? 전혀 안 지루하니까 빨리 열라구요!”

“저도 두 번은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얌전히 제 말 들으세요. 아니면, 충성스러운 개에게, 물어뜯겨 보시겠습니까?”

지하가 멈칫했다.

이걸, 유머로 받아들여야 해? 협박으로 받아들여야 해?

시류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가장 싫어하는 그의 표정.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는 저 침착한 태도가 얄밉다.

부들부들 떨던 지하가 결국 시류의 가슴팍을 팡 팡! 쳤다.

“비키란 말….”

하지만 채 말도 못 잊고서 오히려 힘들어진 건 그녀 쪽이었다.

아! 손 아파! 대체 이게 뭐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가슴을 친 손이 더 아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운동 좀 그만해요!”

이 근육 바보!

눈물이 삐질 나올 정도라 글썽거리며 노려보자, 시류의 표정이 점점 변해 갔다. 화가 났다기보다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정말 아픈 건지.

하지만 그녀의 손에 닿으려던 그의 손은 허공에서 멈춘 채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요. 아빠 진짜 뭐야? 당신은 또 뭐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 정말 눈물 나잖아.”

시류는 울고 있는 지하를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게 더 괴로웠다.

“울지… 마세요.”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거죠? 아빠 말이라면 지옥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굴었던 것도, 내가 아무리 되바라지게 굴어도 묵묵히 다 참은 것도 다 회사를 가지려는 목적이었어요. 그게 당신 야망이었어요?”

시류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자신을 아주 싫어하는 이 여자.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파렴치한으로 만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처음 만났을 때 여섯 살의 예쁜 소녀. 인자하고 어진 부모 아래에서 부족한 것 없이 귀하게 자란 아이. 애교 많고, 정 많고, 다른 부잣집 딸들이 그러하듯 꾸며진 미소와 외모만이 아닌 솔직하고 당당한 여자로 성장해 주었다.

찰박찰박, 우산도 없이 맨발로 뛰어왔던 그녀. 물안개처럼 가녀리고 아련한 외모를 가진, 영특하고 모든 사람에게 상냥한 여자. 하지만 자신에게만은 너무도 솔직하고 야박한 여자.

“하지만 절대 당신 의도대론 안 될 거예요.”

“아뇨, 전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시류의 눈빛이 짙어졌다. 지하가 멈칫했다.

“하, 누구 마음대로요?”

“생각 없었는데, 받아들일까 합니다.”

“뭐예요?”

“갖고 싶으니까요.”

지하의 눈이 서서히 벌어졌다.

“지금 뭐라고….”

“내 감정과 관계없이, 당신의 감정과 관계없이,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

잠시 후, 지하는 넓은 창틀에 올라앉아 다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등을 기대고 있었다.

이런 원피스 따위, 치장한 머리 따위.

그녀는 얼른 귀걸이부터 뺐다. 옅게 칠한 립스틱도 지워 버렸다. 창백하게 입술이 드러나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생각 없었는데, 받아들일까 합니다.”

대체 뭐라는 거야?

“갖고 싶으니까요.”

지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벽창호랑 얘기하는 것도 이보단 낫겠다.

“짜증 나….”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혼자가 되고 말았다. 아니, 차라리 무인도가 나았다. 분명히 자신 외에 한 사람이 더 있는데도 없는 것과 다름없는 남자. 그 남자와 말도 안 되는 거래를 해야 한다니.

“내 감정과 관계없이, 당신의 감정과 관계없이,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더 짜증 나는 건, 그 말을 들었을 때 순간적이나마 심장이 조이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단 거였다. 당연했다. 표면적인 의미만 추려서 들으면 꽤 그럴듯한 프러포즈의 말이었으니까. 다만 그 말을 지껄인 게 강시류란 게 문제였지.

‘그딴 말 당신한테 듣고 싶지 않다고. 일 크게 키우는 거 싫으니까 제발 이쯤에서 그만하지?’

이 남자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건 절대적인 두려움. 그 근원은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그를 한없이 경멸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을 저지른 그를 이해하고 싶지 않다. 또한 그것과 똑같은 크기로 그 존재감을 인정하고 겁내고 있다. 단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만으로는 잘라서 단정할 수 없는 그의 능력과 매력.

환멸이 포함된 끌림. 경외가 포함된 증오.

‘뭐가 어쨌든 감정 없는 결합은 불행을 낳을 뿐이야. 그러니 갈 길은 단 한 가지야. 그쪽 마음대론 안 될 거야. 난 댁의 장기 말이 될 생각 따위 절대 없거든.’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장난하는 걸 거야. 아무리 그래도 딸한테 이건 아니잖아? 애초에 아빠란 사람이 어떻게 딸이랑 남자를 한방에 가둘 수 있어? 하여튼 저 무서운 인간, 대체 뭘 대가로 아빠랑 거래한 거지?’

시류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서서 지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뽀얀 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고서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는 그녀.

아무런 경각심도 없이….

인형처럼 곧은 그 다리에 시선이 닿자 시류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한쪽 발을 다른 발 위에 얹은 채 까딱거리고 있다. 그러다 발 위치를 엇갈리게 바꾸자 부드러운 원피스 자락이 팔락이며 허벅지가 살짝 보였다.

‘미치겠군’

시류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호락호락 내보내 주진 않겠지?’

반면 지하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아빠도 쉽게 번복할 성격이 아니고, 저 남자도 근 이십 년 가까이 칼을 갈며 이때를 위해 공을 들였다면 이런 기회를 그냥 흘리진 않겠지.’

한지하와 결혼한다는 건 단지 결혼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덤으로 붙은 게 아주 크고 매력적이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작전을 짜야 해. 지금 이렇게 맹하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냐.’

에취!

그런데 하필이면 이럴 때 그 거추장스러운 생리 현상이 터져 버렸다.

아… 큰일이다. 강시류와 한 공간에서 너무 오래 있어 버렸어. 강시류 항바이러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건가.

“에취! 에취!”

시류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창가에서 떨어져요.”

“됐습니다, 강 상무님.”

“감기가 아니라면, 예의 그 습관이 또 시작되신 것 같군요.”

“그러게요, 강 상무님.”

지하는 작전을 바꿨다. 격렬하게 저항해 봐야 통하지도 않으니 또박또박 예의 바르게 무시하기로 했다.

댁이 무슨 꿍꿍이수작을 부리더라도 난 절대 안 넘어가 줄 거야.

결국 시류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젠장,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이러면 작전의 목적이 불분명해지잖아. 거리를 벌려야 하는데 더 가까워지면 무슨 소용이야?

“거, 거기서 서요. 오지 말아요. 1미터 이상 접근 금지예요.”

하지만 완벽하게 무시하고 다가온 시류가 지하의 팔을 탁 잡았다.

“1미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요. 물어뜯을까요?”

“그러세요. 참는 건 자신 있으니까.”

짜증 나.

“에취!”

“최소한 옮겨 앉으세요.”

“에취! 감기 아니라고… 에취! 몇 번을 말… 에취!”

“한지하!”

“감기 아니라구요. 내 눈앞에 있지 말아요. 이거 다 댁 때문이니까.”

순간 지하와 시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의 눈동자에 일순 깔렸다가 사라진 오싹할 정도로 낮은 기운. 지하는 또다시 이 남자의 본성이 떠올랐다.

일단 여긴 두 사람만 있으니까 너무 까부는 건 자제할까?

“저 때문입니까?”

“그, 그래요.”

댁만 있으면 이런 생리 현상이 터진다고. 하지만 대체 그걸 어떻게 설명하지? 무슨 오해를 받으려고?

“거부반응이에요. 강 상무님이 미치도록 싫어서 나는 두드러기 같은 거.”

“그렇군요.”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전 아가씨의 바로 옆에 있어야겠습니다.”

내가 할 일.

당신이 죽어도 싫다고 해도, 난 당신이 죽지 못하도록 막아가면서도 끝까지 옆에 있어야 한다.

당신과 결혼하겠다.

내 목숨도, 얼굴도, 인격도 모든 게 다 당신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겠다.

영원한 맹세를 그녀에게 바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녀는 아마도 그 이유를 짐작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당신은 몰라야 할 이유.

지하가 시류를 노려보았다.

“강 상무님이 싫은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렇게 더없이 깍듯하고 공손하게 말끝마다 존대하면서 경어 쓰는 거. 사실은 날 그 정도로 깍듯하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방금 전에도 내 이름 불렀죠? 실은 언제라도 날 혼내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렇게 보셨습니까?”

“그래요. 하긴, 아빠가 그렇게 오빠라고 부르랬는데도 끝까지 안 부른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그 이유가 뭐였겠어요?”

시류가 피식 웃었다.

“아마, 제가 싫어서였겠지요.”

“내 앞에서 웃지 말라고 했죠?”

“아니면 울 거 같아서 웃었습니다.”

정말 얄밉다.

“강 상무님만 피해자인 거 같죠? 나도 노력 안 했지만, 당신도 어떻게든 나랑 거리 벌리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이었어요. 극도로 예의 갖추면서 절대 가까워지지 않았죠. 안 그래요?”

“날 싫어하니까.”

지하가 멈칫했다.

“아가씨는 언제나 절 싫어했으니까요. 아닌가요?”

“또 그 호칭. 누구도 그렇게 부르라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강 상무님을 싫어한다구요? 날 싫어하는 건 강 상무님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

“말해 봐요. 당신은 날 좋아해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솔직하게 싫어한다는 이유로, 나만 당신한테 몹쓸 짓 하는 사람처럼 만들어요? 대놓고 싫어하는 나랑 배배 꼬면서 공손하게 싫어하는 티 내는 강 상무님이랑 누가 더 나쁠까요?”

“…….”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그 연극적인 가식부터 먼저 버려요.”

똑바로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 시류는 그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에게 옭아매지는 건 평상시로도 족하다.

그가 지하의 팔을 놓고는 창틀에 걸터앉았다.

지하가 확 쏘아보았다.

‘왜, 왜 옆에 앉는 거야?’

“에취!”

“말씀드렸듯 전 이 결혼 피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하세요. 내가 끝까지 피할 테니까.”

“그 재채기의 원인이 나로 인한 거부반응이라고 한들 상관없습니다.”

“대체 언제쯤 내보내 줄 거예요?”

“아마 아가씨는, 앞으로 계속 재채기를 감수하며 나와 함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그러니까 싫더라도 받아들여요.”

“아뇨. 싫으면 난 안 받아들여요.”

지하는 듣기 싫었다.

뭔가 그의 말들이 각오 같아서.

“그럼 그냥 무시해요. 있는 것처럼, 없는 것처럼, 있어도 신경 쓰지 말자고 자신을 세뇌시켜요.”

“하, 뭐라구요?”

“저는 아가씨 앞에서 돌입니다. 로봇입니다. 무생물입니다.”

지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지, 지금 뭐라는 거예요?”

“나도 노력 안 했지만, 당신도 어떻게든 나랑 거리 벌리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이었어요. 극도로 예의 갖추면서 절대 가까워지지 않았죠.”

그녀의 말처럼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다. 그저 돌처럼, 로봇처럼, 무생물처럼 살았었다. 앞으로도 그건 똑같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게.

미워지지 않게….

아니, 어느 순간 나도 어찌할 수 없이 휘몰아치며 어떤 진심이 튀어나오지 않게.

그 어떤 감정도 없는 인간처럼, 그렇게 살아도 좋다.

“마치 아주 오래 신어 있는지 없는지 신경 쓰이지도 않는 오래된 신발이나 낡은 목걸이, 모자나 가방처럼…. 있어도 없어도 신경 쓰이지 않는 것들처럼 날 대해요. 그럼 좀 편해질 겁니다.”

“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에취!”

따져야 하는데 이 빌어먹을 재채기!

지하는 손수건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그런 지하를 바라보는 시류의 깊은 시선.

감히 내 것으로 하고 싶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았었다. 그건 정웅이 베풀어 준 은혜를 진창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충성심에서 나온 생각.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일었던 욕심. 자신을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어떤 냉랭한 작은 여자를 향한….

넌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네 몸에 습관처럼 둘러진 낡은 물건처럼, 그렇게 살기로 했다.

내가 널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었다는 이유 하나로.

“에취!”

지금까지는 감히 드러낼 수 없었던 욕심.

“에취!”

정신없이 재채기를 터뜨리는 지하의 뒷머리를 잡아 그대로 확 끌어당겼다.

악마의 가호를 받으며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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