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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헤픈 남자 (1/12)

찰박찰박.

“아으, 비가 왜 이렇게 오는 거야? 갑자기 퍼붓기 시작해서 깜짝 놀랐어. 걱정 마. 집 앞이라 거의 안 맞았어.”

빗길을 달려오는 소리.

귀를 간질이는 달콤한 목소리.

“성호 오빠한테 내 번호 가르쳐 준 거 너지? 그럴 줄 알았어. 앞으론 절대 가르쳐 주지 마. 그런 가벼운 남자 딱 질색이야.”

우산도 없이 맨발로 뛰어온 여자. 내리는 비 너머로 하얀 발목이 눈부셨다. 비에 젖은 동그란 복사뼈, 가는 종아리,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가냘픈 발목.

반짝이는 은빛 스트랩 샌들을 손에 들고서, 비에 젖어 구불거리는 어깨 길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 하얀 피부. 코끝에 난 작은 점. 자그마한 입술. 검은 홍채. 깨끗한 흰자위가 또렷하다. 젖은 머리카락 너머로 보이는 뽀얀 뺨이 장미 꽃잎처럼 매끄러웠다.

애도 아니고. 장난꾸러기처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아가씨가 비가 온다고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 들고 빗속을 달리다니.

“음, 알았어. 암튼 끊어. 집 앞이라서 들어가 봐야 해.”

통화를 끝내고 빗방울을 털며 돌아서던 지하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어, 엄마야!”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란 이유는,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건지 한 남자가 제 옆에서 장승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흑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라인의 세련된 블랙 슈트. 비로 인해 가라앉은 대기 때문인지 더욱 차분히 내려앉은 음영 진 눈매. 말랐지만 탄탄한 남성적인 몸.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진한 분위기. 칼 같은 그 남자의 눈빛.

가끔 바위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의 무표정으로, 감정의 굴곡이라곤 없어 보이는 남자. 섹시함과 음울함의 중간쯤 되는 표정, 눈을 확 끄는 서구적인 생김.

빌어먹을. 잘생기면 다야?

지하는 왠지 이 남자만 보면 짜증이 났다.

“있으면 기척이라도 할 것이지. 대체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요?”

“계속 있었습니다.”

“왜요? 차 안 갖고 왔어요?”

그가 굳이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이라는 듯 스스로 반응을 건너뛰었다.

아무튼 저 성격 하곤.

“그건 갖고 왔단 소리죠? 하여튼 답답하게 입 꾹 다물고서, 그게 상대방을 얼마나 짜증 나게 하는지 알아요? 암튼 차 갖고 왔으면 타고 가세요.”

“…많이 젖으셨네요.”

묻는 말에는 대답 않고 그의 시선이 난데없이 어딘가로 향하는 것 같아 지하의 시선이 같이 내려갔다. 순간 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보리 빛 블라우스가 젖어 피부에 찰싹 달라붙은 바람에 가슴 부분이 훤히 비치는 게 아닌가!

“어, 어딜 보는 거예요? 지그….”

하지만 말을 다 끝맺지 못한 채 지하가 멈칫했다. 강시류, 그 남자가 자신의 슈트 재킷을 벗어 지하의 어깨 위로 털썩 떨어뜨린 바람에.

워낙 체격 차이가 커서 약간 무거운 느낌의 재킷이 지하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그러다 감기 걸리십니다.”

쓸데없는 걱정은.

그러니까 쳐다본 곳은 가슴이 아니라 몸을 적신 비였나 보다.

생각해 주는 척하긴.

지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재킷을 확 걷어 시류의 가슴팍에 떠밀듯 다시 건넸다.

“갖고 가세요. 이런 거 전혀 반갑지 않으니까.”

“입고 계세요. 춥습니다.”

“싫어요. 그 잘난 얼굴로 여자의 환심을 사려면 잘 통하는 다른 데서나 하세요. 난 절대 안 넘어가니까.”

“아….”

그가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약 올라!

일부러 못돼 먹은 행동을 해도 무슨 반응이 있어야 재미있지. 너무 정중해서 오히려 오만해 보이는 표정. 뭐라고 해도 침착하기만 한 저 태도가 기분 나쁘다.

‘그 정도로 긁으면 적어도 화난다, 짜증 난다, 그런 최소한의 반응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이 재미없는 남자에겐 그런 인간적인 감정 따위 존재하지도 않는 듯. 매너도 아니고, 참는 것도 아니고. 늘 저만 파르르 신경질 내고. 그래서 이 남자를 볼 때마다 제 성격만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유혹하려는 걸로 보였습니까?”

지하가 째려보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런 거 아니었는데.”

“잘난 척하지 말아요.”

시류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자 그가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금세 여유작작한 표정으로 그녀를 말없이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겉으론 신사 같은 그럴듯한 허울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지만, 난 당신 본질을 알아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난 능력으로 우리 아빠까지 구워삶았는지 몰라도 난 달라요. 난 당신 절대 못 믿어요.”

“그런가요?”

“그래요. 그러니까 나한테까지 환심 사려고 수작 부리지 말아요. 지구가 수백 번 쪼개져도 절대 당신 같은 사람 좋게 볼 일 없으니까.”

시류의 매끈한 입술이 위로 끌려 올라갔다.

“지금 웃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감히 아가씨를 두고 얼렁뚱땅 흑심을 품을 일은 없을 테니까.”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요. 그리고 경고하는데, 내 앞에서 웃지 말아요.”

하지만 그 남자는 무심하게 웃고 있었다. 유혹하는 것도, 호의적인 것도 아닌 그냥 건조한 미소.

“전 아가씨가 절 좋게 봐 주실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지하가 피식 웃었다.

“헤•픈• 남•자•.”

그녀가 낮게 내뱉고서 싸늘하게 돌아섰다.

쾅!

대문이 사정없이 닫혔다.

***

“에취! 에취!”

지하가 사정없이 재채기를 하며 들어서자, 30대의 고용인인 경희가 얼른 달려와 지하의 가방과 구두를 받아 들었다.

“어머나, 세상에! 비 맞으셨어요? 김 기사는 어쩌시고 그 비를 다 맞으셨어요?”

대리석이 깔린 저택의 내부는 광활할 정도로 넓었다.

“그냥 들어가라고 했어요. 어디 들를 데가 있어서. 에취!”

“감기 걸리셨나 봐요. 물 받아 드릴 테니까 얼른 따뜻하게 샤워부터 하세요.”

“됐어요. 내가 하면 돼요.”

“그럼 내려오시면 바로 마실 수 있게 차 준비해 놓을게요. 아유, 정말. 택시를 타시지. 가방도 다 젖었네. 어머! 이거 엄청 비싼… 흠흠, 죄송합니다. 제가 좀 주책맞았죠? 사모님껜 부디 비밀로….”

2층으로 올라가려던 지하가 풋 웃었다.

“걱정 말아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기 아니에요. 그냥 알레르기예요.”

2층으로 올라온 지하는 옷을 다 벗고서 뜨거운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에 들어갔다.

“에취!”

이건 감기가 아니다. 단순히 생리적인 반응일 뿐.

어떤 특정한 한 사람하고만 접촉하면 터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채기.

“신경질 나.”

지하는 물속에 꼬르륵! 잠겼다가 곧 숨을 뱉으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눈앞이 잔뜩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용케 그 남자 앞에선 참았지만, 사실 진작부터 코끝이 간질거렸다.

“잘난 척하긴.”

그 눈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때때로 야수와 같이 위험한 눈빛. 가끔 그 눈빛이 조용히 번뜩이며 저를 응시하면 알 수 없는 긴장으로 소름이 돋곤 했다. 그러면 자신은 그 시선이 몸서리치게 싫어 외면하면서도 은근히 즐기고 있다.

“미쳤어.”

이 무슨 이중적인 감정인지.

어느 조각가의 작품과도 같은 완벽한 얼굴, 우물처럼 깊은 검은 눈동자, 가끔 그 검은빛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처럼 짙은 블루의 색채가 돌기도 했다.

신비로운 푸른 빗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 남자만이 가진 쓸쓸한 분위기. 아무 말 없이 꾹 다문 붉은 입술. 비밀스러운 남자.

“의심스러워. 아빤 뭔데 그렇게 그 남잘 철석같이 믿는 거야?”

아니,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남자를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감시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이렇게 비뚤어진 시선으로 그를 보게 된 걸까?

예전부터 거슬렸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독설을 내쏟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잘해 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증오를 담아 대하지도 않았었는데.

“그때 이후부터였었지, 아마….”

지하는 더 생각하기 싫어 욕조 속으로 풍덩 잠겼다.

***

뚝뚝 떨어지는 피.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붉은색.

번뜩거리는 칼날.

그 칼을 쥐고 있는 소년.

선혈을 온통 뒤집어쓰고 선 소년의 얼굴에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소년이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번쩍!

그 순간 번개가 내리치며 소년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꺄악!”

지하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아하아.”

엉킨 숨을 겨우 골랐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보니 한밤중이었다. 목욕을 하고 나와 잠깐 잠든 것 같았는데 벌써 시간이 열두 시였다.

“뭐야.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그런 꿈을 꾸는 거야?”

번개가 내리꽂힌 순간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 얼굴은 바로 시류였다.

“또 같은 꿈.”

지하는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

그를 만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늘 같은 꿈을 꾼다. 그리고….

“에취! 에취!”

미친 듯이 재채기가 터진다.

“미치겠네, 증말. 에취! 아… 에취!”

티슈를 갖고 와 입을 막아 보아도 소용없었다.

“도대체 왜 남의 집 앞에… 에취! 서 있어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에취!”

재채기를 일으키고,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성격도 나빠지게 만든다.

수많은 여자들이 그 남자를 사랑한다. 사랑해 왔고, 현재도 사랑하고 있다. 철옹성처럼 주변에 철책을 치고 있는데도, 때때로 그 너머로 보이는 분위기가 너무도 외롭고 상념 짙어서 여자라면 누구든 손 뻗고 싶어지게 만드는 남자.

단지 지나가는 자상한 한마디에도 여자들은 툭툭 쓰러진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유난스럽게 자기에게 착착 감기게 하는 남자. 어떤 사람이든 계산 없이 그에게 폭 빠지게 만드는 죄 많은 존재.

마물(魔物).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음에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지만 한지하만은 절대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래서 그는 지하에게 헤픈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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