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101화
40장 숲을 침식하는 검은 그림자(1)
824년 6월 사우스 왕국의 왕국 정보부로 슬프고도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6월의 선선한 바람이 창가로 스며드는 늦은 밤 저택의 집무실에서 고위 기사들과 왕국 정보부 특수 요원들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입수된 정보들을 확인하던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은 움직임이 멈췄다.
“로딘 로펜 남작이 슬퍼하겠군.”
로딘 로펜 남작은 로미오 로펜 경의 동생이었다.
전 로펜 남작은 로미오 로펜 경에게 작위와 영지를 물려주고자 했지만, 고위 기사로서 왕국군에 충성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었던 로미오 로펜 경은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결국 차남인 로딘 로펜이 남작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게 되었다.
왕국군의 고위 기사도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할 경우 영지에 필연적으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로펜 경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엘런데일스 후작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과 함께 놓은 펜이 올려져 있는 종이에는 억제기를 방어하다가 로미오 로펜 경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로딘 로펜 남작과 로미오 로펜 경.
두 형제의 우애는 깊은 것으로 유명했다.
로펜 경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로펜 남작은 많이 슬퍼할 것이다.
“그는 훌륭한 기사였는데, 안타까운 일이군.”
엘런데일스 후작은 커피가 담긴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잔을 기울이자 이윽고 커피의 향이 입 안에 퍼졌다.
로펜 경은 훌륭한 기사였다.
한 가문에 작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왕국의 법이 없었다면 준남작, 어쩌면 남작의 작위까지도 기대해 볼 만한 인재였다.
“남부 하이크 왕국이 결국 항복했군.”
보고서를 넘기며 엘런데일스 후작이 마치 앞에서 누군가 듣고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프랑츠 제국의 속국이라는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검을 뽑았던 남부 하이크 왕국이 결국 프랑츠 제국의 강력한 군대를 격파하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하고 만 것이다.
남부 하이크 왕국의 항복으로 인해 남부 하이크 왕국에 파병했던 그림자 기사단 병력이 치안 관리 등의 전후 처리를 위해 잔류한 소수를 제외한 전원이 프랑츠 제국으로 돌아왔고, 병력에 여유가 생긴 그림자 대공은 그랑키아 숲으로 그림자 기사단을 다수 보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억제기 방어전에서 로펜 경은 제이드 기사단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제이드 기사단의 피해는 생각보다 적군.”
쿠키가 담긴 접시에 손을 가져가며 말하는 엘런데일스 후작.
보고서에 기록된 전투의 규모보다 제이드 기사단의 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재편성 및 보충을 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전투에 투입될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마력 심장인가?”
로펜 경과 억제기 수비대장의 활약으로 수비대와 제이드 기사단의 피해가 생각보다 적은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엘런데일스 후작은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 없었다.
억제기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중요한 마도구인 마력 심장이 손상되어 교체가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억제기 수비대 주둔지에는 억제기가 손상을 입었을 때를 대비해 억제기 보수가 가능한 고위 마법사가 있고 예비 부품도 구비되어 있었다.
지금 손상된 마력 심장 또한 예비품이 하나 있었지만, 예비품 창고에 그림자 기사단의 고위 마법이 떨어지는 바람에 마력 심장은 물론 예비품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국왕 폐하께 보고를 해야겠군.”
엘런데일스 후작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번 일은 왕국군 주력 병력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왕국의 영토에서 움직이는 그림자 기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남부 레인저 여단 등의 특수 부대를 움직일 권한은 가지고 있었지만 왕국군의 주력을 움직일 권한은 없었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왕궁 안에 있는 국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고위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국정을 살피고 있는 유리 사우스 국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옆에는 아이반 사우스 왕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었다.
“국왕 폐하 그리고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이반 사우스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보고서에 집중하고 있던 국왕도 고개를 들어 올려 엘런데일스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래.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 내게 긴급하게 해야 한다는 보고가 뭔가?”
유리 사우스 국왕이 차분하게 말했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림자 기사단의 공격으로 인해 발생한 억제기 방어전에서 억제기를 구성하는 주요 마도구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여분이 있지 않은가?”
유리 사우스 국왕은 당연히 예비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예비품이 존재했지만, 전투 중 소실되었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어떤가?”
“로펜 경을 포함한 고위 기사 3명이 전사했습니다. 다른 전력의 피해는 미비한 수준입니다. 여기 보고서를 작성해 왔습니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국왕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품속에서 보고서를 꺼내 유리 사우스 국왕에게 전달했다.
보고서에 적힌 글귀를 읽은 유리 사우스 국왕은 고개를 저으며 보고서를 아이반 왕자에게 넘겼다.
아이반 왕자가 보고서를 읽고 있을 때, 유리 사우스 국왕이 입을 열었다.
“모두 아까운 인재들이군.”
“그렇습니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여 국왕의 말에 긍정했다.
고위 기사 1명은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갑옷도 능숙하게 자르지 못하는 일반 병사와 달리, 고위 기사는 베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이 구사하는 마력검은 갑옷과 마법의 불꽃마저 가르는 명검이었다.
고위 기사 1명을 잃는 것보다 일반 병사 100명을 잃는 게 더 낫다고 엘런데일스 후작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좋지 않은 소식은 끝인가?”
유리 사우스 왕국이 말했다.
그는 내심 엘런데일스 후작이 가져온 안 좋은 소식이 여기서 끝났으면 했다.
하지만 유리 사우스 국왕의 그런 마음과는 달리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소식이 더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더 전달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국왕 폐하.”
엘런데일스 후작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말하게.”
“남부 하이크 왕국이 결국 프랑츠 제국에 항복했습니다.”
“뭐라고?”
엘런데일스 후작의 말에 반응한 것은 아이반 왕자였다.
국왕도 크게 동요하진 않았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 모두 남부 하이크 왕국의 항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당황한 것이었다.
남부 하이크 왕국은 프랑츠 제국의 속국이지만, 프랑츠 제국에게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 국가였다.
남부 하이크 왕국이 프랑츠 제국을 향해 용감하게 검을 뽑아든 덕분에 프랑츠 제국의 군사력은 분산되었다.
특히 특수 전투 기관인 그림자 기사단의 전력이 남부 하이크 왕국으로 대부분 이동하게 되면서 사우스 왕국은 그림자 기사단과의 전투를 비교적 수월하게 이어갈 수 있었다.
남부 하이크 왕국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져 있지만, 과거 하이크 왕국이 하나였을 땐 상업 강국이었다.
하지만 군사력은 평범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검은 야욕을 빛내는 프랑츠 제국에게 공격을 받았다.
당시 하이크 왕국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수의 용병들을 고용해 저항했지만 막대한 수의 정예병들로 밀어붙이는 프랑츠 제국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흡수되었다.
그 후 프랑츠 제국의 세력이 약한 북부 지역이 독립하여 북부 하이크 왕국과 남부 하이크 왕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이라고? 엘런데일스 후작. 제대로 말해보게.”
아이반 왕자는 당혹감을 제대로 감추지 못한 채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이반 왕자의 질문을 받은 엘런데일스 후작은 쓴맛이 느껴지는 사탕을 입에 물기라도 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입니다. 왕자 전하.”
“이런! 정말 큰 일이군! 남부 하이크 왕국에 투입되었던 그림자 기사단 전력의 대부분이 남쪽을 향하게 되겠군!”
아이반 왕자의 말에 엘런데일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림자 기사단의 대규모 병력의 남하가 관측되었습니다.”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의 왕국 정보부는 이미 그림자 기사단의 대규모 병력의 남하를 관측한 상태였다.
그림자 대공은 남부 하이크 왕국의 항복을 받아낸 것을 발판으로 삼아 도약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국군 투입을 요청드립니다.”
엘런데일스 후작이 침착하게 말했다.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으로는 그림자 기사단의 대규모 남하를 저지할 수 없었다.
“당장 원정대를 구성해야 합니다. 국왕 폐하.”
아이반 왕자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건의했다.
하지만 유리 사우스 국왕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엘런데일스 후작.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왕국군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내 예상이 맞다면 많은 수는 동원할 수 없을 텐데?”
사우스 왕국의 왕국군은 하는 일이 많았다.
그랑키아 숲만큼은 아니지만, 반도의 몬스터들도 포악하기 때문에 곳곳에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주요 지역에 주둔한 병력은 움직일 수 없었다.
억제기가 그랑키아 숲의 몬스터들을 억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경계를 지키고 있는 북부 군단의 병력도 대부분 움직일 수 없었다.
“많아야 500명 정도입니다.”
엘런데일스 후작이 대답했다.
“그런가.”
유리 사우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의 예상대로였다.
사우스 왕국이 동원할 수 있는 왕국군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귀족들의 영지군 뿐이었다.
“귀족 중에서 원정대장을 뽑아, 그의 영지군으로 주력으로 원정대를 편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엘런데일스 후작이 의견을 내놓았다.
“영지군이 너무 많이 섞이면 지휘 계통에 혼란이 올 것이야. 원정대의 주력을 맡을 정도로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영지는 많지 않다네.”
“저는 나일 쉬바스 백작을 추천합니다. 그라면 2천 정도는 쉽게 동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일 쉬바스 백작은 공을 세우는 것에 눈이 멀어 있었다.
아마도 그는 원정대장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일 쉬바스 백작은 왕국에서 부유하기로 유명한 쉬바스 백작령의 영주였다.
쉬바스 백작령에는 많은 광산이 있었고, 광산에서 나온 광물에서 나오는 부를 바탕으로 강력한 영지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런데일스 후작 또한 부유한 영주였지만 왕국 정보부에 투자를 워낙 한 탓에 정작 영지군은 보통의 수준이었고 원정에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수가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나일 쉬바스 백작?”
아이반 왕자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아이반 왕자의 반응을 이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일 쉬바스 백작은 분명 국왕 폐하께 충성을 바치는 충신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충분한 병력과 재산이 있습니다. 원정대에 편성시킬 다른 지휘관들을 왕국과 왕실에 충성하는 자들로 뽑으면 됩니다.”
“추천할 만한 지휘관이라도 있나?”
유리 사우스 국왕이 말했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로딘 로펜 남작과 루시드 필리스터 경 그리고 최근 고위 기사에 서임 된 테일러 경입니다.”
엘런데일스 후작의 입에서 거론된 세 사람은 모두 사우스 왕국과 왕실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충신 중에서도 그 충성심이 깊은 충신들이었다.
“과연 엘런데일스 후작이로군. 적절하다고 생각하네.”
유리 사우스 국왕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즉시, 그들을 호출하겠습니다.”
* * *
알폰스 그레이의 목검이 테일러의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바람을 찢으며 향하는 그 강력한 공격을 테일러는 뒤로 발걸음을 옮기는 가벼운 움직임으로 회피했다.
“고위 기사가 되더니, 움직임이 더욱 좋아진 것 같습니다. 테일러.”
자신의 회심의 일격을 가볍게 피하는 테일러를 보며 알폰스가 말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고위 기사에 서임되고 난 뒤, 테일러의 움직임은 좋아졌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직접 검을 마주하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수련의 결과입니다. 알폰스.”
테일러는 알폰스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치며 알폰스의 가슴을 노리고 목검을 내찔렀다.
알폰스는 방패로 테일러의 찌르기를 가볍게 옆으로 흘리며 테일러에게 파고들었다.
전신 판금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 같지 않게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 움직임에 여유를 가지고 있던 테일러도 조금 당황할 정도였다.
“이번 공격은 쉽지 않을 겁니다.”
알폰스 그레이의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목검이 테일러의 복부를 노리고 찔러졌다.
“쉽진 않지만, 회피는 가능하군요.”
테일러는 흉내 내기 힘든 기괴한 움직임으로 검을 피하며 알폰스의 머리를 노렸다.
목검이 바람을 찢으며 거리를 좁혔다.
알폰스는 테일러의 공격을 알아챘지만 반응하지 못했다.
숙련된 성기사인 알폰스가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목검이 알폰스의 견갑을 강타했다.
원래는 머리를 노렸지만 알폰스가 옆으로 회피를 시도하면서 견갑을 치게 된 것이었다.
“제가 졌습니다. 당신의 검술 실력은 대단하군요.”
알폰스는 패배를 시인했고 테일러는 검을 치웠다.
멀리서 일리아가 빠른 속도로 달려와 수건으로 테일러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일리아.”
테일러가 감사를 표하자 일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알폰스를 향해 달려오던 실비아는 테일러와 일리아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며 볼을 부풀렸다.
“주군! 전령입니다!”
훈련장 시작 부분에서 검을 휘두르며 혼자 수련하고 있던 알버트 후안이 전령의 등장을 알렸다.
이윽고 전령기를 안장에 꽂은 전령이 말을 타고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테일러의 앞에 도착한 전령은 말에서 내린 뒤 테일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테일러 경이십니까?”
전령의 물음에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엘런데일스 후작께서 경을 호출하셨습니다. 즉시 엘런데일스 가문 저택으로 즉시 이동하셔야겠습니다.”
“나만 호출하신 것인가?”
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런데일스 후작은 고위 기사 테일러만 호출했다.
다른 파티원들은 호출하지 않았다.
애초에 엘런데일스 후작이 테일러의 파티원들을 호출한 적은 거의 없었다.
“즉시 이동하겠다고 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