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95화
37장 호기심 많은 여왕(3)
테일러가 차가운 목소리로 로든홀 백작의 최후를 선고했다.
로든홀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고위 기사급 실력자인 것 같은데, 자만하지 마라. 멸망 전 슈발리에의 검 앞에서도 살아남은 나다.”
로든홀 백작은 백작급 뱀파이어 중에서도 상당히 약한 약골이었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멸망 전에 존재했던 슈발리에의 검에서 살아남은 경험도 있었다.
비록 지금은 결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지금도 결계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간단하게 강력한 혈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슈발리에의 검에 살아남았지만, 오늘 고위 기사의 검에 목숨을 잃겠군.”
테일러는 도발하며 거리를 좁혔고 로든홀 백작은 혈마법을 완성했다.
차원을 찢고 나온 붉은 선혈의 사냥개가 테일러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파마의 검 앞에서 허무하게 사냥개의 형상이 무너지고 말았다.
“마병기?”
나름 강력한 혈마법을 사용했지만 혈마법의 사냥개가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자 로든홀 백작은 냉정을 잃고 마구잡이로 혈마법을 난사했다.
하지만 냉정을 잃고 마구잡이로 난사하는 혈마법이 뛰어난 고위 기사인 테일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연이은 공격을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피하거나 파마의 검으로 베며 로든홀 백작의 코앞에 도착한 테일러는 검을 고쳐 잡고 로든홀 백작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었다.
백작은 혈마법으로 선혈의 방패를 소환했다.
첫 번째 찌르기는 선혈의 방패가 막아냈지만 두 번째의 베기에 그 형상이 무너지고 말았다.
파마의 검의 위력이었다.
선혈의 방패가 무너지고 무방비 상태가 된 로든홀 백작을 향해 마력검이 검을 내찌르는 테일러.
로든홀 백작은 그의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평생 혈마법만을 연구하고 수련해 온 그의 몸은 고위 기사급의 실력자인 테일러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없었다.
테일러의 검, 마병기 전쟁의 나팔은 멸망 전부터 살아온 뱀파이어 백작 로든홀의 심장을 관통했다.
“컥! 커억!”
로든홀 백작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는 생존력 강한 뱀파이어 백작이었지만 마력검에 심장을 관통당하고 생존하는 것은 무리였다.
로든홀 백작이 쓰러지자 혈마법 결계도 무너졌다.
“결계가 무너졌다!”
위그드라실 왕실 친위대원 하나가 외쳤다.
굳이 그가 외치지 않아도 모두가 현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조금 밀리고 있던 위그드라실 왕실 친위대가 승기를 잡고 밤의 기사단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밤의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뱀파이어 남작 또한 로이츠와 알버트의 합공으로 허무하게 쓰러지고 살아남은 밤의 기사단원들은 흩어져 도주를 시도했다.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언제나처럼 알림음이 테일러의 귓가를 때렸다.
“왕실 마법사.”
상황이 정리되고 위그드라실의 왕 에이렌은 왕실 마법사를 찾았다.
왕실 마법사가 왕에게 달려갔다.
아군을 원호하기 위해 강력한 마법을 난사해서 그런지 안색이 창백했다.
“찾으셨습니까. 전하.”
“지금 당장 국경수비대에 통신을 넣어서 국경을 봉쇄하도록 하고 레인저를 투입해서 패주한 적을 추적하라.”
“예.”
왕실 마법사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위그드라실의 국경은 평소에는 열려 있었다.
인간에게는 적대적이었지만 숲은 모두에게 개방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적인 뱀파이어를 제외하면 인간과 몬스터에게 숲을 개방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경의 경비는 허술한 편이었고 레인저 중대장과 소수의 엘프 레인저의 배신으로 뱀파이어 전투 집단이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국경 봉쇄가 시작되면, 대기하고 있던 국경수비대가 넓은 국경을 봉쇄하고 인간과 몬스터의 출입을 통제하게 된다.
“로이츠.”
“예. 전하.”
에이렌 왕은 부하로부터 피해 보고를 받고 있던 로이츠를 호출했다.
로이츠는 수건으로 갑옷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고 에이렌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고한 하이 엘프 왕은 적의 맹렬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말 위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는 전투가 끝난 지금에서야 말에서 내려 로이츠를 바라보았다.
“아군의 피해는?”
로이츠는 부하에게 보고 받은 내용을 에이렌 왕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에이렌 왕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작아서 다행이군.”
“사우스 왕국의 사절단에 소속된 성녀 실비아 그레이의 신성 기도문이 많은 엘프들을 살렸습니다. 일격에 목숨을 잃은 이들을 구원할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죽음을 피해간 엘프들이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적장의 목숨을 취한 이도 인간이었던가?”
“그렇습니다.”
로이츠의 대답에 에이렌 왕의 시선이 테일러에게 향했다.
테일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파티의 피해를 파악하고 있었다.
레드가 상처를 입긴 했지만, 실비아의 신성 기도문으로 치료를 받은 덕분에 지금은 거의 회복이 된 상태였다.
“테일러 경은 내 앞으로 오라.”
놀랍게도 에이렌 왕은 처음 테일러 파티가 성문에 도착했을 때 로이츠로부터 보고받았던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에이렌 왕의 부름에 테일러는 파티원들에게서 멀어져 에이렌 왕에게 향했다.
왕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위그드라실 왕실 친위대가 옆으로 비키면서 길을 열어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테일러에게 적대감 어린 시선을 보내고 살기까지 꽃피우던 엘프들이었지만 지금의 전투에서 테일러와 파티가 활약하는 모습을 본 뒤 그 적대감은 상당히 옅어져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테일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청년이었던 테일러는 이제 궁중 예절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경의 활약으로 인해 아군의 피해가 크게 줄었군. 원하는 게 있다면 어디 말해보아라. 가능하면 들어줄 것이니.”
알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쿨한 에이렌 왕은 그 자리에서 즉시 보상을 이야기했고 테일러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 에이렌 왕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의 심장이 필요합니다.”
승전의 보상으로 테일러가 위그드라실의 하이 엘프 왕 에이렌에게 요구한 것은 하이 엘프 왕의 심장이었다.
하이 엘프 왕의 심장은 몸속에 있는 심장이 아니라 심장의 형상을 한 영혼의 조각이었다.
영혼의 조각을 떼어 심장의 형상으로 만든 이것은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 있지만, 영혼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소량이지만 마력이 영구히 감소하게 되는 현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이 엘프 왕의 심장이 타인에게 양도되는 일은 드물었고 특히 인간에게 넘겨지는 경우는 멸망 전의 역사까지 합쳐도 극히 드물었다.
“무례하군!”
“어떻게 감히 왕의 심장을!”
테일러의 목소리는 작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왕실 친위대원 소수가 그것을 듣고 분개했다.
“어째서 그것이 필요하지?”
에이렌 왕이 질문했다.
에이렌 왕의 표정도 얼어붙었다.
하이 엘프 왕의 심장은 훌륭한 마법 재료였기 때문에 많은 인간이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에이렌 왕은 어린 시절부터 하이 엘프 왕의 심장에 대해 교육을 받아왔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요구하는 인간은 욕심이 많은 인간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마력 탈진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전하.”
에이렌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런 것인가?”
“그렇습니다. 제 동료가 마력 탈진의 늪에 빠졌습니다.”
테일러의 설명에 에이렌 왕의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마력 탈진을 치료하기 위해선 하이 엘프 왕의 심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에이렌 왕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료를 위하는 테일러 같은 인간은 에이렌 왕도 싫어하진 않았다.
“딱한 사정이지만, 내 심장을 쉽게 줄 수는 없다네. 귀중한 것이니만큼 나도 받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에이렌 왕의 말에 테일러는 식은땀을 흘렸다.
왕에게 줄 만한 것?
어떤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고, 자신이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단지 나는 흥미로운 물건을 원할 뿐이야.”
왕이 흥미로워할 만 한 물건.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왕은 더 이상 힌트를 주지 않았다.
“서둘러 왕궁으로 돌아가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말에 오를 뿐이었다.
* * *
왕성에 도착한 테일러는 즉시 로이츠와 왕의 흥미를 끌 만한 물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로이츠는 뱀파이어의 공격으로 인한 뒤처리를 하느라 바빴다.
당시 호위 책임자는 로이츠 펠베런이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암살을 저지했다고는 하지만 조금의 피해를 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작은 징계를 받고 막대한 양의 업무를 떠안은 로이츠는 테일러를 쉽게 만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테일러는 스스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왕성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는 도서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왕이 흥미를 가질 만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갑옷은 입지 않고 허리에 전쟁의 나팔만 찼다.
왕의 목숨을 구해준 이후 왕성에서 무기의 휴대를 허가받을 수 있었다.
적대감 가득한 시선을 받고 길까지 잃어가며 도서관을 찾아갔지만, 도서관 사서는 테일러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엘프들에게만 열려 있습니다. 인간은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네.”
테일러는 이를 악물고 물러섰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한 그는 즉시 하이 엘프인 일리아를 찾았다.
자료 조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일리아. 왕성의 도서관에서 하이 엘프 왕께서 흥미를 느끼실 만한 물건에 대해 조사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일리아는 흔쾌히 승낙했다.
테일러의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무엇이든 행복하게 웃으며 도와줄 수 있었다.
일리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숙소 앞 공터에서 알버트와 가볍게 검을 나누며 몸을 풀고 있던 테일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일리아가 힘없이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땀을 대충 닦고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
“일리아!”
“아, 테일러.”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테일러의 모습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느라 힘들었지만, 테일러가 반갑게 맞아주니 피로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떻습니까?”
테일러는 성과를 물었다.
미소가 번지고 있던 일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죄송해요. 전혀 찾지 못했어요.”
성과를 내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일리아는 고개를 숙였지만, 테일러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테일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글썽였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려는 순간, 날카롭게 공터를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잠깐만요!”
앙칼지고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실비아 그레이였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테일러와 일리아에게 다가가 둘 사이의 갈라놓았다.
“저! 알고 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테일러의 반응에 실비아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이 엘프 왕이 흥미를 보일 만한 물건을 알고 있다고요!”
“정말입니까?”
실비아의 말에 테일러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실비아는 조금 당황했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딱히 당신을 위해서 알려주려는 건 아니지만, 알고 싶으세요?”
“실비아. 장난은 재미없습니다. 어서 알려주시겠습니까?”
테일러가 다급하게 말했다.
실비아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저와 하루 시간을 보내주기로 한다면, 알려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는 실비아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일리아는 썩은 과일을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습니다.”
테일러는 흔쾌히 승낙했고 실비아는 애틋한 눈빛으로 테일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과거 뱀파이어들이 사용했지,만 지금은 신성교에서 보관 중인 마병기 슈발리에. 그거라면 하이 엘프 왕도 관심을 가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