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94화
37장 호기심 많은 여왕(2)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테일러를 포함한 남자들이 머물고 있는 방의 문이 열리고 로이츠가 걸어 들어왔지만, 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테일러. 거부되었습니다.”
테일러는 고개를 숙였다.
왕실 친위대장이 말을 한다고 해도 인간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위그드라실의 왕이 쉽게 인간을 만날 리 없었다.
그 인간이 국왕의 깃발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말입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이 고개를 드는 순간, 희망이 빛이 번쩍였다.
로이츠는 다른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테일러를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테일러. 당신과 제가 회귀를 하고 역사의 톱니바퀴에 개입하는 것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고 로이츠는 말을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미래는 변했습니다. 하지만 큰 흐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느낄 것입니다.”
테일러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그 큰 흐름이 변하지 않았다면, 내일 왕께서 주변의 마을을 시찰하실 때 국경을 넘어 몰래 잠입한 뱀파이어 백작과 특수 전투 집단 밤의 기사단이 왕을 공격할 겁니다. 행렬에 넣어 드릴 테니 그때 활약해서 전하의 눈에 띄세요.”
위그드라실 주변에는 작은 엘프 마을이 여러 개 있었고 하이 엘프 왕은 정기적으로 엘프 마을들을 시찰하여 문제가 없는지 살펴 왔다.
824년 2월에도 평소처럼 에이렌 왕은 정기 시찰을 나가게 되는데, 이날 아인홉 마을에서 뱀파이어 백작과 밤의 기사단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게 된다.
테일러의 역사 개입으로 사소한 것은 변했지만 큰 흐름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이것 또한 변하지 않고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로이츠의 말대로 위급한 순간에 활약한다면 하이 엘프 왕의 눈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로이츠. 저희는 지금 무장 해제된 상태입니다.”
바로 왕성에 들어오면서 무장을 해제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로이츠는 입을 열었다.
“내일 행렬에 참가할 때 무장할 수 있도록 제가 손을 써두겠습니다.”
왕성의 경비는 물론이고, 왕의 호위까지 책임지는 게 친위대였다.
행렬에 호위병을 추가하는 것은 로이츠에게 있어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오랜만에 당신의 실력을 감상할 수 있겠군요. 검술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겠죠?”
로이츠의 말에 테일러는 미소를 지었다.
“전혀요.”
* * *
늦은 밤이 되었다.
검은 하늘이 하얀 달을 삼켜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이 숲에 깔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위그드라실의 국경.
수많은 나무 사이에 가려진 망루엔 하나의 횃불에 의지한 채 금발의 엘프 레인저들이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어둠 속을 날카롭게 훑어내고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앞을 가릴 뿐이었지만 엘프들의 눈은 달랐다.
밝게 보이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게 가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어두운 것 같습니다.”
여성 엘프 레인저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망루에 고정된 횃불 주변만 밝을 뿐 주변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달이 보이지 않네요.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남성 엘프 레인저는 그렇게 답하며 횃불에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따뜻한 남부였지만 2월의 날씨는 상당히 추웠다.
남성 엘프 레인저가 잠이 쏟아지는 것인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는 순간, 그의 등 뒤의 공간이 찢어지고 그 속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성 엘프 레인저는 기척을 느끼고 허리에 찬 검을 뽑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날카로운 칼날은 남성 엘프 레인저의 심장을 꿰뚫었다.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티아벨!”
남성 엘프 레인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여성 엘프 레인저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허공을 찢고 모습을 드러낸 검은 갑옷을 입은 붉은 눈의 뱀파이어가 휘두른 검을 막아내는 것에 성공했지만 동시에 날아온 날카로운 단검을 피하지 못했다.
“아흑!”
날카로운 비명이 터지고 검을 쥔 손이 고통에 흔들렸다.
그 순간을 뱀파이어는 놓치지 않았다.
“흡!”
억눌려진 기합성과 함께 뱀파이어의 검이 여성 엘프 레인저의 몸을 잘라냈다.
붉은 선혈이 망루에 튀었다.
여성 엘프 레인저의 하반신이 힘없이 쓰러지고 뱀파이어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뱀파이어가 모습을 감추고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주변을 순찰하던 엘프 레인저 3명이 망루에 들렀다.
그들은 시체와 피로 얼룩진 망루를 보고 경악했다.
“분대장님. 중대장님께 보고를 해야 합니다.”
엘프 레인저 한 명이 말했다.
분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들은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시체와 피로 얼룩진 망루를 목격한 직후라 날카로워져 있던 엘프 레인저들은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인기척이 느껴진 방향으로 활을 조준했다.
“중대장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엘프 레인저 3명이었다.
그중 한 명은 분대장의 상관이자 엘프 레인저 중대의 중대장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분대장.”
“11번 망루가 전멸했습니다.”
분대장의 보고에 중대장은 동행한 엘프 레인저들과 함께 망루를 자세히 살폈다.
“시체가 아직 따뜻합니다. 즉시 위그드라실에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분대장이 최초 발견자입니까?”
“그렇습니다. 속히 위그드라실에 알려야 합니다.”
분대장의 대답에 중대장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그렇다면 분대장만 죽으면 되겠군요.”
“네?”
분대장은 중대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중대장은 동행한 엘프 레인저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중대장의 수신호를 이해한 엘프 레인저들은 분대장과 다른 엘프 레인저들에게 단검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분대장을 제외한 2명의 엘프 레인저가 목숨을 잃었고 분대장 역시 다급하게 몸을 피하긴 했지만, 오른팔에 단검이 꽂히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대, 대체.”
“대답할 이유는 없습니다.”
중대장은 그렇게 대답하며 검을 뽑아 분대장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분대장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시체들은 어떻게 합니까?”
엘프 레인저가 물었다.
시체를 그대로 놔둘 경우 발각될 가능성이 있었다.
“방치합니다. 다음 순찰 경로를 수정하면 들킬 염려는 없습니다. 어차피 내일 일이 끝날 게 분명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대장은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외진 국경의 망루에 방문할 손님은 없었다.
순찰대의 순찰 경로만 수정하면 내일까지 들킬 염려는 없었다.
검은 의도가 고개를 들고 밤은 깊어진다.
* * *
위그드라실을 배신한 중대장의 계획대로 망루의 학살은 은폐되었고 하이 엘프 왕 에이렌의 시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위그드라실 왕실 친위대장 로이츠 펠베런은 테일러와의 약속대로 그가 무장한 채 행렬에 함께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공식적으로 테일러와 파티의 신분은 사우스 왕국의 사절단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정대로 시찰은 아무런 문제 없이 계속 진행되었고, 마침내 아인홉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을의 입구를 행렬이 지나친 순간, 숨어 있던 뱀파이어 백작 로든홀이 준비한 혈마법 결계를 발동시켰다.
밝은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고 붉은 달이 불길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로든홀 백작 휘하의 특수 전투 집단 밤의 기사단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는 마침내 30명을 넘고서야 더 이상 추가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밤의 기사단원은 없었다.
국경을 은밀하게 넘느라 많은 수의 병력을 대동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최정예였기 때문에 로든홀 백작은 패배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 검을 뽑아라.”
위그드라실 왕실 친위대장 로이츠가 명령을 내리자 친위대가 일제히 검을 뽑았다.
아인홉 마을 경비대도 무기를 들었다.
테일러는 주변을 살폈다.
아군의 수는 60을 넘고 있었다.
2배가 넘는 숫자 차이.
전투의 승패는 수가 결정짓는 것은 아니지만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었다.
테일러는 자신이 활약할 순간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곧 틀리고 말았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전투 시작과 함께 밤의 기사단원 한 명에게 아인홉 마을 경비대원 2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인홉 마을 경비대 20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왕실의 고위 마법사가 이로운 버프를 걸어주었지만, 헛수고에 가까웠다.
그들은 방해가 되는 마을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며 검을 휘둘렀다.
친위대는 용맹하게 맞섰으나, 실력 차이가 너무 났다.
“실비아. 로렌시아의 성스러운 빛을 부탁합니다.”
테일러의 요청에 실비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뒤 신성 기도문을 외웠다.
백색의 빛 무리가 하늘로 떠올랐다.
어둠이 어느 정도 걷혔지만 밤의 기사단원들은 결계의 보호를 받고 있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알버트! 레드! 실비아를 부탁합니다.”
테일러는 알버트와 레드에게 실비아의 안전을 부탁한 뒤 로든홀 백작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알폰스의 방패가 백색의 빛을 뿜어냈다.
테일러의 앞을 막기 위해 이동하던 밤의 기사단원 2명이 눈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넓은 지역에 약한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히는 로렌시아의 성스러운 빛과 다르게, 넓지 않은 범위에 강력한 피해를 주는 알폰스 그레이의 기술은 밤의 기사단원들에게 어느 정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알폰스가 엄호했지만, 밤의 기사단원들은 많았다.
2명이 쓰러졌지만 또 다른 2명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들은 테일러의 상대가 되기엔 너무 부족했다.
2명 모두 움직임은 상당히 재빠르고 체격도 컸지만 마력검을 사용하지 못하는 수준의 실력자였다.
그에 비해 테일러는 마력검의 사용도 가능하고 움직임도 재빨랐다.
결계의 강화 효과를 받고 있었지만, 테일러를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한 명은 어리석게도 테일러가 휘두른 마력검을 평범한 검으로 막다가 검과 함께 몸이 잘렸고, 다른 한 명은 이리저리 피하며 버티다가 테일러가 허리에서 뽑아 던진 단검이 이마에 꽂혀 절명했다.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로든홀 백작에게 과감하게 달려드는 테일러 탓에 밤의 기사단은 당황했다.
그로 인해 하이 엘프 왕을 향한 공격이 약화되었고, 덕분에 로이츠는 조금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공격을 이어가는 밤의 기사단원을 제외하면 소수의 기사단원만이 로든홀 백작을 호위하고 있는 상황.
로든홀 백작은 뱀파이어 백작 중에서도 약한 편이었고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저항을 행사하기 힘들었다.
로든홀 백작은 위기를 느껴 결계를 유지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혈마법을 사용했다.
테일러 앞의 땅이 붉게 물들고 그 속에서 붉은 선혈의 기사 다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에 힘을 쏟고 있던 밤의 기사단원들도 합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무리 테일러라도 다수의 공격을 받으면 조금 힘들어서 그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가이우스! 마법 지원을 부탁합니다!”
평소처럼 가이우스에게 마법 지원을 요청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제야 테일러는 가이우스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할 수밖에 없나.”
조금 힘들겠지만, 혼자라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오는 선혈의 기사 다섯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두르려던 순간 빛의 화살이 쏟아졌다.
빛의 화살에 노출된 선혈의 기사들은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가이우스는 없어도 제가 있어요!”
실비아였다.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려던 밤의 기사단원들은 일리아가 소환한 바람의 정령 군주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백작!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밤의 기사단원 하나가 로든홀 백작에게 서둘러 몸을 피할 것을 권했지만 로든홀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위그드라실의 왕을 공격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희생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몸을 피한다면 결계는 무너질 것이고, 결계가 무너지게 된다면 힘들게 훈련시킨 정예 병력인 밤의 기사단은 허무하게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위그드라실의 왕 에이렌의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그드라실과 근접한 로든홀 백작령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크아악!”
로든홀 백작에게 피할 것을 권유했던 밤의 기사단원이 테일러가 휘두른 마력검에 허무하게 찢겼다.
두꺼운 철제 흉갑을 걸치고 있었지만, 강철조차 종이처럼 잘라내는 마력검 앞에서는 종잇조각이나 다름없었다.
“호위는 모두 죽었다. 다음은 네 차례다.”